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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23화 (23/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23화

3층 - Lv.18 게이머(1)

게임 시절의 왕국 이전 구간은 철저하게 튜토리얼의 기능을 수행하는 곳이었다.

뉴비에게는 특별히 굉장한 운좆을 당하지 않는 한 조작법과 게임의 시스템을 배울 수 있는 저난이도 구간으로 기능했으며.

고인물이라면 눈치껏 히든 보스를 잡거나, 경험치를 긁어모으며 왕국 이후를 대비하는 구간이었다.

아직 메인 던전이라고 할 수 있는 ‘왕국’에 도달하지 못했기에 별달리 복잡한 상호작용도 존재하지 않으며.

중요한 NPC도 그다지 나오지 않는다.

그저 이번 판의 운이 어떨까를 가늠하며 호로록 지나가는 느낌이 강했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만지던 시절에 약간 꼬인다 쳐도 30분이면 끝나는 구간이라 하면 적당할까.

그 시절의 NPC들은 자아가 없는 코드 덩어리였다.

"뭐야? 이제 내려오는 녀석이 있어? 몇 년차야?"

붉은 머리카락이 시원해 보이는 여궁수 하나가 다가온다.

활은 직접 깎아 만든 느낌이고 걸린 시위는 몬스터의 힘줄이다.

복장은 면적이 적은 가죽옷. 탄탄한 근육질의 몸매와 쓸데없이 잘 어울린다.

아마조네스 같은 느낌이라면 꼭 맞다.

3층에 도달하자마자 몸에 습기가 훅 끼쳐왔다.

기후는 아열대 정도 되는 느낌이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질문으로 받았다.

"캠프 세운지 얼마나 된 거야?"

여궁수는 익숙한지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

"한 달쯤 된 거 같네."

"그럼 왜 이렇게 많이 정착해있지? 설마 다음 계단을 못 쓰나?"

"그래."

허어.

나는 자기도 모르게 소녀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순진무구한 눈동자가 나를 빤히 마주본다.

가만히 보고 있자 얼굴을 살짝 붉어지더니 눈을 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회차에서 내가 잘 모르겠는 건 이 녀석 뿐이다.

짝수 층에만 영향을 미치는 걸까 했는데 홀수 층도 건들고 있는 걸까?

한숨을 내쉬며 처음의 질문에 대답했다.

"15년차 어쌔신 클래스 전문."

"뭐? 아니, 15년차십니까? 이거, 귀하신 분이었군요."

여궁수의 말이 즉시 존대로 변한다.

유배자는 연차가 나이며 계급이다.

하나하나 몸으로 겪으며 배울 수밖에 없는 미궁에서 죽음의 횟수와 종류는 무엇보다 귀중하다.

그 경험은 저층일지라도 큰 차이를 낳는다.

따라서 연차가 더 높은 유배자는 무조건적으로 존중받는다.

물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만 그 존중을 유지할 수 있다.

* * *

「십오녀어어어어어언?」

‘아니, 신이시여. 그럼 97년이라고 곧이곧대로 말합니까?’

[혼돈의 여신이 그랬다간 이곳의 유배자들이 당신을 신으로 모실 것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안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문제다.

30년차 유배자만 나타나도 벌벌 떠는 이 동네에 97년차라.

믿을지는 차치하고 믿어도 너무 큰 문제지.

당장 공물부터 바치러 오고 나를 중심으로 새로운 종교가 만들어질 거다.

미궁에 실존하는 ‘신앙’말고 사이비 종교 같은 무언가가.

그거 70년차쯤에 이용할 수 있을 거 같아서 해봤는데 엄청 피곤하다.

거대 길드의 마스터와 사이비 교주는 생각보다 많이 다르더라고.

‘그런데 혼돈이시여. 메시지를 쓰거나 육성을 쓰거나 둘 중 하나만 하시면 안됩니까?’

좀 성가시다.

[혼돈의 여신이 신도가 당신 밖에 없어 심심하다고 말합니다.]

‘어휴.’

「뭐? 그럼 저기 두 명 내놔.」

‘필요할 땐, 한 번씩 넣어드릴 겁니다.’

「넣어드려······? 너 이 새끼 지금 잠깐만. 신도로 넣었다 뺐다 하려는 거야? 이런 개······.」

뭐라고 화내는 거 같긴 한데 그냥 한 귀로 흘리기 시작했다.

이 여신은 어차피 나를 포기할 수 없다.

신쯤 되면 97년차, 2975회차의 의미를 모를 수가 없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 꽤나 신날 거다.

그보다는 눈앞의 적에게 집중하자.

아니, 정확히는 적은 아니다.

왕국 이전에는 연차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같은 신을 믿는 사이라면 신이 확인해줄 수는 있는데, 그런 신이 있을까?

왕국 이후의 신자들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빠진다.

우리 한가한 여신님 정도나 그러겠지.

아차차, 나 말고 신도가 없으시던가? 하하하하하.

"그냥 한 번에 다 덤벼."

내 손에는 대거 하나.

상대측은 붉은 머리 여궁수를 포함한 4인 1조의 파티다.

"어, 아무리 그래도 그게 되나요?"

리더인 듯 한 여궁수가 의아함을 표한다.

나는 그냥 최대한 거만한 표정으로 팔을 앞으로 내밀고 손을 까딱까딱했다.

"[은신]은 안 쓸게."

다들 입을 다문다. 저 친구들도 나름대로는 정예다.

궁수가 9년차. 다른 동료도 전부 5년차 이상.

저층에선 아주 이상적인 파티다. 왕국의 문을 두드리는 미래가 머릿속에 한참 아른거릴 좋은 시절이지.

그러니까 분노를 숨기지 못한다.

얼마나 노력하고, 얼마나 갈고 닦았을까.

미궁의 삶은 바깥과는 밀도 자체가 다르다. 저들의 세월 또한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귀중한 고련이었을 터.

그러니 저들의 분노는 정당하다.

나는 진짜로 [은신]은 사용하지 않았다.

달려드는 전사 둘 사이로 파고든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는 것은 유배자의 소양이다.

그들은 내 과감함에 놀라지 않고 대응했다.

하지만 느리다.

한 박자씩 빠르게 손목을 가격해 첫 번째 공격을 무산 시킨다.

동시에 한 명의 다리를 걸어 균형을 잃게 만들고.

[대시]

주먹을 내민 그대로 이동하며 주먹으로 복부를 타격.

몸을 급하게 숙이면 화살이 지나간다.

아주 미약하지만 마력의 격류가 슬쩍 느껴지고.

3층 따리에서 마법이라면 [염동]인가?

나 역시 마력을 살짝 불러일으킨다.

내 대거는 심연 산 잡동사니라 자체적으로 마법을 베진 못한다.

마력을 머금은 날이 이어지던 흐름을 베어낸다.

마법사는 당황하여 추가 주문을 발동하려 했다.

"이런, 꼬마야. 마법은 그렇게 쓰면 위험하단다."

내 [점멸 단검]이 언제 날아갔는지도 보지 못했을 거다.

마법사는 자신의 목에 빛나는 날붙이를 보며 손을 떨구었다.

"와."

여궁수가 짧게 감탄했다.

들고 있는 활은 시위가 끊어져있다.

그녀도 유배자인만큼 허리에 보조 무기는 충분히 차고 있지만 주무기를 잃은 시점에서 의미 없음을 알 것이다.

"끝났지?"

모두가 납득했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 나무에 박힌 단검을 회수했다.

"언제 날린 거죠? 동작도 못 봤는데."

궁수가 내가 단검을 던져 자신의 활시위를 끊어먹은 타이밍을 묻는다.

"점멸하자마자."

여궁수는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 * *

혼돈의 신좌는 사색에 잠기기 좋은 곳이다.

신도가 하나뿐이니 여러 가지를 살필 일도 없다.

그녀에게 보이는 것은 만신전의 풍경과 단 하나뿐인 신도다.

고독한 좌에 홀로 앉아 혼돈의 여신은 생각했다.

‘이거 진짜 뭐하는 새끼지?’

97년.

그럴 수 있다.

그녀 역시 100년의 세월을 꽉 채우고도 미궁을 벗어나지 못한 망령이다.

많다고는 할 수 없으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도전하는 유배자는 제법 있다.

하지만 그녀가 결정적으로 기가 막혔던 것은 다른 부분이다.

‘내가 몇 회차를 겪었더라?’

유배자로서의 삶은 치열하며 밀도 있었다.

신으로서 보낸 세월에 비하면 훨씬 강렬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풍화된 기억은 그녀가 겪은 회차의 수를 그려내지 못했다.

‘1만이 넘었던가? 그 근방까지 가긴 했었지.’

100여년의 생활동안 바깥세상의 도덕 같은걸 남겨두었을 리가 없다.

바깥세상의 상식을 남겨두었을 리도 없다.

죽음을 종막이 아닌 수단으로 여길 수 있던 시절이었다.

대체 몇 번이나 죽었을까? 필요에 따라 죽었으며, 성질을 못 이겨 죽었고, 때로는 그냥 아무 이유 없이도 죽었다.

정신력 같은 문제는 아니었다.

고참 유배자란 본디 그런 존재다.

언제 건 집어치우고 죽음으로 도피할 수 있기에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족속이다.

‘2975회차?’

97년이나 되는 세월을 미궁에서 보내고 1만은커녕 3천도 채우지 못했다.

이게 말이 되기나 하는 건가?

도대체 어떤 갈망이, 혹은 광기가 이 평범해 보이는 남자를 이끌고 있는가.

어딘가 처박혀 허송세월을 보냈을 뿐이라면 알 수 있다.

신의 눈에는 신도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대강 보인다.

이번 신도의 영혼에 긴 세월 동안 새겨진 도전과 실패의 반복은 감탄스러운 수준이다.

딱 거기까지 생각하고 혼돈의 여신은 눈을 비볐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주 평범하진 않다.

저 정도면 꽤 생겼지.

거기에 저 남자가 미친놈이건 뭐건 신에 비견되는 노련함을 보여주고 있다.

당분간 소멸할 걱정은 덜었으니 행복하다.

심연이 조금 고비였다. 2층에서 심연에 오는 경우의 수가 몇이나 되더라.

대체 뭘 한 건가 싶다.

아무튼 소멸의 위기를 거의 회피했다.

이런 날은 자신에게 상을 주자.

신좌에서 일어나 아껴둔 마지막 막대사탕을 꺼내왔다.

공물이 끊어진지 참 오래도 되었다.

* * *

「쭙쭙쭙.」

‘아니, 혼돈이시여.’

「왜. 뭐.」

‘조용히 좀 드시죠. 그걸 왜 신언으로 저한테 보내십니까.’

「심심해.」

"이 계층에 혹시 만신전은 없나?"

"초기에 나타난 적은 있었다고 해요. 신앙을 고르는 일은 중요하죠."

[혼돈의 여신이 조용히 합니다.]

여궁수는 아주 깍듯해져있었다.

4대1을 한 순간에 제압하는 모습을 보여준 이상 나를 의심할 수는 없다.

사냥꾼은 사실 그대로 12년차, 소녀는 10년차인 걸로 해두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사실이 되었다.

우선 쉴 곳을 요구했다.

심연은 아무리 안전하다해도 심적으로 편안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다.

특히 소녀는 자꾸 뭔가에 기겁을 해대서 확연하게 컨디션이 영 별로였다.

사냥꾼 역시 겪어본 적 없는 극한환경에 피로가 꾸준히 쌓여왔음이 보인다.

이곳 캠프는 상당히 괜찮은 솜씨로 만들어져있었다. 목수였던 유배자라도 있는 걸까.

두 사람을 쉬게 내버려두고 여궁수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제 한번 들어보자. 왜 4층으로 못 내려가고 다들 이러고 있지?"

이게 만약 무슨 미션이 걸려있는 거라면 재수가 아주 더러운 거다.

또 뭔, 저층부터 말이야. 어?

그럼 아마 소녀가 문제다.

그게 아니라면······.

"고참 몇 명이 모여 만들어진 파티가 계단을 점거하고 있습니다. 회복의 샘도장악 당했죠."

진짜 존나게 다행이다.

2층 같은 똥꼬쇼를 할 일은 없다는 거 아닌가.

아무래도 소녀의 존재가 설정을 갈아엎어버리는 건 짝수 층뿐인 모양이다.

본래 짝수 층은 인스턴트 던전 개념이다. 파티를 구성하여 돌입한 후, 인카운터를 클리어 한다.

어차피 왕국 이전엔 중대한 인카운터가 결코 나오지 않는다.

마주친 고블린 부락을 섬멸하라 같은 정도만 되어도 2층이면 그럭저럭 난이도 있는 편이다.

반면, 홀수 층은 유배자들의 계층이다.

이곳은 중요한 역할을 맡은 토착 NPC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기 보다는 그냥 토착 NPC자체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곤 스폰 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유배자끼리의 이야기와 토착 주민들과의 이야기를 명확하게 분리해둔 느낌이다.

물론 그래서 홀수 층이 더 평화롭다는 건 또 아니다.

배틀로얄 같은 식의 구성인 계층이 나오기도 할뿐더러, 자신보다 약한 자들을 벗겨먹으려는 이들은 어디를 가도 있다.

지금이 아마 후자일 것이다.

"몇 렙에 몇 년차인지 알아?"

"레벨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연차는 20년인 사람이 하나 있다고······."

여궁수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15년과 20년의 격차 역시 크니까 그리 생각할만도 하다.

3층은 그래도 좀 편안하겠군.

2층의 고생이 거짓말 같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20년차?

조팝쉐키가. 감히 누구 앞길을 막으려고.

2층에서 더럽게 꼬이고, 심연에서 한 달을 뒤쳐져야했다. 나도 화풀이 좀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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