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4화
3층 - Lv.18 게이머(2)
한번 결정된 이상, 숲 테마는 5층의 보스전을 클리어하기 전까지는 유지된다.
다만 어떤 숲인지가 항상 그때그때 달라지는데, 이게 테마가 같다고 비슷한 게 계속 나오는 게 아니다.
3층은 아열대 밀림이다.
나무는 많고, 짐승도 많고, 벌레도 많다.
좋냐 나쁘냐를 따진다면 숲 테마 중에서는 꽝에 속한다.
밀림의 짐승들은 먹을 것은 별로 없는 주제에 사납고, 땅은 수많은 식생을 부양하느라 농경에는 적합하지 않다.
정착에는 나쁜 땅이다.
물론 서든데스가 걸려있다면 애초에 정착할 수도 없다.
문제는 그걸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
다음 층으로 갈 의지가 없는 난민들은 3층쯤에서 기도하며 살아가는 경우도 많다.
언젠가 서든데스가 걸리지 않은 계층이 3층에 나타나기를.
이미 한 달, 다들 슬슬 희망을 보고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짝수 층에 서든데스가 없는 경우는 아주 희귀하다.
이러다보니 요정의 덫도 아무나 걸리는 게 아니다.
우리 사냥꾼도 보이는 이상으로 베테랑인 셈이다.
24층 요정 마을 이랬던가? 왕국까지 얼마나 많은 계층이 존재하는지도 항상 다르기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조금만 더 가면 왕국의 문이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사냥꾼에게 이 이야기를 한 적은 없다.
덫에 빠진 자들에게 너의 시간은 무가치했다고 면전에 대고 말하는 유배자는 드물다.
이해할 수 있어서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삶이 허황되었다고 말하기에는, 도전하는 자들의 삶이라한들 크게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미궁은 허무한 곳이다.
* * *
소녀와 사냥꾼은 그들의 파티리더를 보내고 캠프에 남았다.
휴식을 취해야했다.
채워왔던 회복의 샘물은 심연에서 모두 식수로 소비하기도 했으나 원래부터 체력을 채워주는 효능은 없다.
배정받은 오두막은 넓은 캠프에서도 아주 멀쩡한 축에 드는 것이었다.
그저 지붕만 있는 다른 곳과 다르게 숲지기의 오두막 같은 게 떠오를 정도로 훌륭하다.
"아저씨 금방 돌아오시겠지?"
소녀가 흥얼거리며 말한다.
햇빛을 보고 얼마나 반가웠던가. 심연의 괴물들은 대체로 꿈에 나올까 두렵게 생겼었다.
소녀는 미궁으로 오기 전, 학교를 다니기 전, 아주 어린 시절을 떠올릴 뻔 했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과거의 그림자를 덮어두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소녀는 생각을 그만두고 고개를 돌렸다.
사냥꾼이 곁에 앉아있다. 나이든 중년의 미국인은 곧잘 우수에 찬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그리워하는 눈빛.
그 아련한 시선 너머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캘리포니아의 집이?
24층의 요정 마을이?
사냥꾼의 고향은 그 둘 중 어디일까?
소녀는 자신이 저렇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지를 상상해보았다.
아저씨와 함께 어디 아늑한 숲에서 우후훗.
앗. 잠깐 너무 행복회로가 돌아 버린다. 이것도 그만두자.
그렇게 모처럼 편안한 시간을 아무렇게나 보내고 있는데.
"아가씨."
사냥꾼이 조용히 소녀를 불렀다.
저 호칭은 사냥꾼이 고심 끝에 결정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냥꾼은 경우 아저씨에게 지시받고 아저씨에게만 묻는다.
소녀 역시 마찬가지다.
아저씨가 없는 상황에서 단둘이 남아있는 상황은 어색했다.
호칭마저 어색하고 낯설다.
그래도 나름대로 정이든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기도 하고.
웃는 얼굴로 대하기로 했다.
한껏 자신 있는 방긋방긋한 미소로 마주본다.
"왜요?"
사냥꾼이 빤히 바라본다.
"솔직하게는 몇 년차십니까?"
소녀는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버렸다.
들켰네.
* * *
탐문할 수 있는 것은 해보자.
어느 세계나 조금 늦게 도착한 3층의 캠프는 난민캠프를 떠올리게 한다.
전쟁에 떠밀린 것은 아니겠으나 이곳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행복하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규모는 삼십 명 정도 되나?
여궁수에게 가자 난색을 표한다.
"차라리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게 낫죠. 이곳의 사람들을 돌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잔인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죽어봐야 또 다른 곳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아직 미궁이 어떤 곳인지조차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다.
가끔은 방해가 된다고, 경험치가 된다고 학살 해버리는 녀석들마저 있다.
그저 우연에 떠밀려 이곳에 발을 들인 대가라기엔 가혹하다.
"그런데 너희 파티와 다른 몇몇 짬되는 녀석들로 다 먹여 살리고 있다고?"
"생각보다 식생 자체는 풍부한 밀림입니다. 한 달이나 지나니 한계가 오고 있지만요."
9년차 치고는 너무 착하다.
그럼에도 능력이 있음 또한 확실하다. 적지 않은 규모의 캠프를 어수선한 분위기 없이 확실히 통제하고 있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10년을 채 채우지 못한 유배자들은 의외로 저런 사람들이 많다.
남다른 적응력으로 미궁이 자신에게 부여한 힘을 이타적으로 사용하고자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그런 모습이 전부는 아니다.
나는 후배들의 기특한 모습에 기꺼이 도움을 내밀기보다는.
"뭐 숨기는 거 있지?"
질문을 했다.
"아, 과연. 이게 15년차입니까."
여궁수가 쓰게 웃는다.
"아니 보통은 알지. 오자마자 실력부터 다짜고짜 확인하고. 은근슬쩍 곤란한건 다 말해주고. 너무 노골적으로 도움을 청하는 거잖아."
"티가 너무 났군요. 반성하겠습니다."
넉살이 좋군. 지금은 정의의 편을 하고 있지만 마음만 조금 바꿔먹으면 쉽게 전진할 타입이다.
변명 아닌 변명이 시작된다.
"어쌔신 클래스시라기에 어떻게 잘 슥삭 하실 줄······."
"전투가 벌어지면 사이에 어떻게든 끼어들어서 다 잡아 잡수려고 했겠지."
경험치, 그리고 장비. 내가 2층에서 엄청나게 시간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 파티의 2층에는 엄청난 게 있었단 뜻이고, 지금 엄청난 것을 가지고 있을 거란 추측도 쉽다.
고래 싸움을 노리는 새우다.
충고나 해주자.
"다음부터는 좀 더 경계를 해. 그래야 속아. 그런데 그 뒤에 저 난민들은 다 잡을 생각이었어?"
"아니오, 그건 아직 좀······."
가만, 이거 미친놈인데?
‘아직은 좀?’
위선을 떠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마음을 바꿔먹을 필요도 없는 준비된 유배자로군.
난민들이 알게 되면 난리가 날 발언이지만 내가 더 고참이니 하는 말이겠지.
나는 여궁수의 생각대로 그냥 피식 웃고 넘어갔다.
"그래, 뭐 원하는 대로 계단 점거한 녀석들을 치워 줄게. 끼어들지는 마."
대답은 약간의 고민 끝에 돌아왔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도움이 없어도 되나요?"
"뭐 얻어도, 나눠주지도 않을 거니까. 우리가 완전히 지나가고 나면 움직이도록."
난 이런 면에서는 공평하다.
여궁수는 완전히 체념했다.
더 이상 어떤 수작을 부리려는 느낌은 아니다.
나는 미소지어주고 사냥꾼에게서 가져온 화살을 한 발 건넸다.
"이건······?"
"선물이야. [전격 유도 화살]이라고 하면 알지?"
"놀라운데요. 어떻게 이게 2층에서 나온 겁니까?"
사실 심연에서 주워온 거긴 하다. 2층에선 얻을 수 있는 건 많았겠지만, 결국 건져온 건 없다.
이게 다 트동트 때문이다. 왜 거기서 나오냐고.
"개고생을 했으면 말이야."
거기서 끊어도 자연스럽게 이어받는다.
"그만한 보상이 있는 게 미궁이긴 하죠. 하하."
떠나면서 일부러 등에 맨 활을 보여줬다. 심연에서 발견한 몇 안 되는 멀쩡한 장비다.
그리고 화살통에 꽂혀있는 다양한 색상의 화살들.
알아보면 알아보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야망이 잦아들 거다.
아무렇지도 않게 듀얼클래스 각을 잡고 있으니까.
무력시위는 아까 했다. 이제는 장비로 시위한다.
적당히 해라. 까불면 아프게 죽는다.
「그냥 다 죽이면 안 되나?」
혼돈의 여신이 말을 걸어온다.
‘그렇게 해본 적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나중에 사람이 너무 부족할 수도 있겠더라고요.’
「하기야, 의외로 사람 죽여 얻는 경험치는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니지.」
유배자가 주는 경험치는 상대가 고레벨이 된다고 해서 딱히 늘어나진 않는다.
초반에야 한두 명 죽이는 건 일도 아니고 크게 짭짤하지만, 가면 갈수록 사람을 많이 죽여야 한다.
문제는 지금 여기의 난민들을 보듯이 그게 쉽기는 쉽다는 거다.
그런 방식으로 살인에 익숙하다 못해 선을 넘어가는 일은 흔하다.
피를 안 묻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어디까지만 피를 묻히느냐도 꽤 중요하다.
‘여신님도 사람 많이 잡으셨습니까?’
「그때는 몰랐지. 인간을 버린 지금도 몇 명은 꿈에 나오는군. 이름은커녕 누군지도 모르겠는데 말이야.」
‘저도 그렇습니다.’
나도 정의 같은 건 아니다.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다.
그냥 좀 오래 발버둥친 사람일 뿐이다.
거창하게 신이라 해봐야 그런 사람 중 하나고.
공교롭게도 미궁에는 정의의 신도, 신에게 붙는 ‘정의’라는 접미도 없더라.
* * *
돌아오니 소녀와 사냥꾼의 분위기가 묘하다.
원래도 둘이 좀 어색하긴 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
"대충 얘기는 해놨어. 어때 좀 더 쉴까? 하루 정도는 있어도 될 것 같은데."
홀몸이면 스피드런을 해도 진작에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키우기로 한 뉴비가 있으니 느긋하게 가야한다.
2층에선 멀쩡했으나, 심연부터는 티가 확실히 났다.
바로 3층으로 가야했는데.
존재자체가 뭔가 이상한 걸 끌어다 모으니 4층이 또 난리가 날 수도 있다.
쉰다면 홀수 층에서 쉬어야한다.
소녀는 조금 기운 없게 대답했다.
"조금만 더 쉴게요."
"하긴, 햇빛도 오랜만에 봤으니까. 그럼 계속 여기 있어."
사냥꾼을 슬쩍 보자 이쪽은 고개를 끄덕인다.
또 둘인가.
"회복의 샘부터 정찰 한번 해보자고. 거길 확보 못했다간 순식간에 다음 세계니까."
이쪽 파티들이 섣불리 공략을 못하는 것도 그곳을 점거당해서가 클 것이다.
힐링 포션이 너무 사기다.
바깥으로 나와, 소녀에게 들리지 않을 거리가 되고 나서 슬쩍 물어보았다.
"눈치 챘어?"
"예, 모르기가 더 힘들지 않습니까."
사냥꾼이 햇빛이 눈부시다는 듯 손으로 가린다.
"혹시······, 고정 NPC입니까?"
아마도 혼자 물어봤던 모양이군. 소녀는 그냥 사실대로 말했고.
초회차, 괴이할 정도의 스탯 깡패.
그런 생각을 할 법도 하다.
내 생각엔 아마 아닌데.
나도 확신은 못하겠다.
내가 모르던 거니까.
토착 NPC나 다른 유배자끼리만 보고 지내면 그래도 나 자신은 ‘사람’이라고 굳게 믿게 되기 마련이다.
그럼, 어떻게 그 사실을 의심하게 될까?
자기가 NPC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삶을 살아가는 건 유배자 모두에게 공통되는 사항이다.
나같이 게임이라 여기는 게 아니라면 그것을 처음 의심하게 되는 계기는 보통 ‘네임드 고정 NPC’를 알게 되었을 때다.
언제 어느 세계에서 만나도 같은 회차 같은 기억을 가진 채로 나타난다.
진짜 사람이라기에는 그들의 시간은 고정되어있다.
예를 들어, 아서왕은 어느 세계에서 만나도 같은 외모,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33년차의 유배자다.
거기에 더럽게 세다.
옆에서 본다면 누가보아도 유배자라는 설정을 가지고 나오는 NPC다.
결코 사람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런 고정 NPC들의 존재만으로도 이미 마음 한구석에 위화감이 생긴다.
그러다보면 결국 의심이 피어나는 것이다. 누가 사람인가. 나는 과연 사람인가?
사냥꾼은 소녀가 그런 것이냐고 물어봤다.
나는 일단은.
"아니. 그건 아니야."
라고 대답했다.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다.
소녀를 다른 회차에 다시 만나고, 똑같은 얼굴과 성격으로 나를 따라오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굉장히 기분이 나쁠 것 같다.
벌써 정을 줘버린 모양이다.
그래도 당장 확인할 방법은 있다.
‘혼돈이시여. 혹시 그 소녀를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
‘백년이 끝나갈 때, 뭔가 이상한 일이 있었던 경험은?’
「모르겠군. 뭘 묻고 싶은 거냐?」
이럴 때는 적잖이 안심이 된다.
역시 이 새끼들 다 NPC라고.
내가 주인공이라고.
나만이 특별하다고.
그렇게 믿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