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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25화 (25/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25화

3층 - Lv.18 게이머(3)

그리폰의 막타를 빼먹은 건 정말 잘한 짓이었다.

결과론이지만 거기서 무사히 도망치기만 한 것 보다 훨씬 나은 결과다.

현재 내 레벨은 딱 21이다.

막타만 쳐도 경험치가 온전히 다 들어오면 좋겠지만, 슬프게도 기여도 형식이기 때문에 썩 많이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 트동트가 좀 많이 처먹었을 거다.

그래도 그 와중 보유 액티브가 3개.

아주 쏠쏠한 편인데. 기타 상황조건이 다 맞아떨어졌다 친들 마인드맵의 모양이 좋았던 덕이다.

힘이 많이 섞여 나오지 않은 건 아쉽지만, 민첩 지능 쪽의 클래스를 주력으로 삼는 게 후반 포텐셜은 더 높으니 나쁠 것 없다.

그리고 나는 전사보다는 딜러를 해야 하는 게 맞다.

많은 게임이 그렇다.

힘센 전사는 전열이고, 전열은 어느 정도 고기방패의 역할을 겸한다.

극딜이 몸이 약한 클래스들인 것은 이미 역사와 전통이다.

밸런스 상 어쩔 수 없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힘 클래스들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한 것도 맞지.

게임 시절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직접 몸으로 얻어터지는 입장이니까 도저히 웃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게임 캐릭터는 아파하지 않아도 나는 맞으면 아프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궁의 깊은 곳으로 향할수록 전열의 중요성은 점점 커진다.

어차피 앞뒤가 상관이 없는 거대한 적이라면 모를까, 인간형인 채로 극강한 것들도 수시로 나타난다.

특히 악마들이 아주 악질이다.

그런 것들을 붙들고 늘어지다 못해 두들겨 패 죽여 버리기도 하는 근접 전사들의 역할은 매우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중요도가 올라가는 만큼 근접 전사들의 숫자는 줄어든다.

그들은 쉽게 죽는다.

적의 공격에 노출되기 쉬우니 어쩔 수 없다.

왕국쯤 가면 유능한 고레벨 근접 전사직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다 죽었거나, 이미 소속이 있다. 어떻게 구할 방법이 없다.

반대로, 왕국 이전의 초기 구간에서는 전사들이 넘쳐난다.

초반을 가장 쉽고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 게 힘캐다 보니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가능하면 지금부터 하나 주워다가 키우는 게 좋았다.

* * *

사냥꾼과 함께 길을 나서면서도 끊임없이 난민들을 살폈다.

끝까지 데려갈 자질의 전사를 구할 수 있다면 좋겠으나, 최소한 한동안 써먹을 친구는 필요하다.

소녀와 함께 짝수 층에 들어 갈 때마다 펼쳐질지 모르는 개판을 생각하면 거의 필수다.

고기방패에겐 미안하지만, 내게는 당신이 벌어줄 시간이 필요해.

일대일로 순간 빈틈을 만들어 암습을 노리는 것도 좋지만.

전사를 상대할 때, 뒤에서 기습하는 게 더 효율적이다.

대단한 탱킹이나 딜링 능력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파티에 이미 딜러는 셋이나 있으니 시선을 잘 끌기만 하면 된다.

그럼 전사가 죽기 전에 적을 죽여 줄 수 있다.

캠프를 벗어나기 전까지 계속 내 눈동자가 바빴다.

사냥꾼도 그 사실을 눈치 챘다.

"전사가 필요하기는 하지요."

"오올, 제대로 된 파티에서 뛰어본 사람의 발언인데 그거?"

사냥꾼이 씁쓸하게 웃는다.

"제가 정착했던 층이었죠. 저만 살아남아서 더 이상 나아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건 내가 좀 미안해."

무수하게 실패를 반복하게 되는 미궁이다.

어쩌다 잘되었던 시절의 기억은 그 무엇보다 강렬하게 남는다.

훌륭하게 파티 플레이가 이루어지려면 친분도 필요하다.

생사를 건 사투에서의 동료란 비즈니스가 아니다.

비록 또 다른 곳에서 살아가고 있겠지만, 그것은 아픈 기억의 일부일 것이다.

"그래서 쓸 만한 녀석은 있었습니까?"

"아니. 모르겠어. 슬슬 독기가 차오르는 눈빛은 제법 있는데 체격 좋은 친구가 없네."

소녀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초기 스탯은 체격에서 티가 난다.

나 같은 말라깽이는 적어도 힘은 높지 않다.

아무리 힘 찍고 운동한다 치더라도 타고난 골격이 강건하고, 덩치가 있는 친구들이 전사에 어울린다.

초기 스탯은 일종의 계수다. 각 개인별로 새로이 찍히는 스탯은 신체능력에 배율이 붙을 뿐이다.

정확히 미궁에 납치되어 유배자가 되는 순간 결정되어버리는 것이기에 어쩔 방도가 없다.

"천천히 생각해보자고."

"알겠습니다."

이전과 달리 이동 중 내가 지쳐 쉬어가는 일은 없었다.

힘을 많이 확보해서도 있고 체력이 어느 정도 붙어서도 있다.

밀림 속을 빠르게 움직인다.

첫 번째 홀수 층이라고 할 수 있는 3층은 계층의 역할보다는 파티원을 모으는 광장 같은 역할이다.

짐승들이 있을지언정 제대로 된 몬스터는 없다.

정글도로 쓸 만한 묵직한 칼을 휘두르며 전진. 또 전진.

밀림 속이라 길을 잃기 쉽지만 사냥꾼의 경험이 발휘된다.

나는 약간 긴가민가해도 사냥꾼이 어떻게 방향을 판단해낸다.

가다가 내가 사냥꾼을 향해 손짓했다. 멈추라는 수신호다.

사냥꾼은 영문을 모른 채 일단 멈춘다.

나뭇가지 사이로 슬쩍 비치는 먼 곳의 옷자락을 가리킨다.

사냥꾼도 상황을 파악했다.

3층의 샘은 밀림의 한 가운데에 있는 공터에 있다고 했다.

지금 위치는 대강 그 공터의 한쪽 모서리 방향. 나무 위에 통나무와 덩굴을 엮어서 그럴싸한 초소를 만들어뒀다.

위에 있는 녀석이 제대로 주변을 살필 수 있다기엔 나무가 빽빽하다.

반면 엄폐물이 제대로 설치되어있다.

감시용이라기 보단 뭔가 고지대에서 투사무기를 사용하기 위한 벙커 같은 거다.

뭔가 활이나, 혹시 총이라도 있나?

총은 좀 곤란한데.

사람은 총에 맞으면 죽는다.

내 더블 배럴 샷건은 안타깝게도 더 이상 탄이 없어 심연에 내버리고 왔다.

뭔가 고급화살이나 폭탄 열매 따위를 안 소모하기엔 불안하다. 하지만 쓰기에도 좀 아쉬운데.

뭐 일단 정찰이나 하러 온 거니까 신경 쓰지 말도록 하자.

소녀와 같이 왔을 경우, 총기가 있더라도 전면전으로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총이 있다면 엽총이려나?"

"샷건이 아니라면 초반엔 그거밖에 나오지 않으니까 그럴 것 같습니다."

"혹시 자동 소총 같은 게. 흠. 아니야, 2층에서 그런 지옥을 본 건 우리뿐이겠지."

총기는 미궁의 보정을 가장 적게 받는 무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련 패시브도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다.

대신 그냥 장비 자체의 성능이 좋다고 봐야할까.

그래서 총기 레인저는 전형적인 템빨 클래스다.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더 살펴보았다.

난민들이 있는 쪽으론 경계가 나름대로는 삼엄하다.

하지만 반대편으로는 거의 없다.

무언가 온다면 우루루 몰려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여궁수는 아직 자기네 그룹에서는 직접적인 충돌을 하진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캠프에 머무르지 않는 다른 유배자 몇몇과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긴 했다는 모양이다.

전해들은 것보다 샘을 장악한 녀석들의 규모가 크다.

열 댓명 정도나 되어버리니 작은 산적 집단 정도는 되는 느낌일까.

정보에 오차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여궁수가 거짓을 고했다는 뜻은 아니다.

파악 자체를 마법사가 마법으로 했다고 하니 제대로 보이지 않은 탓도 있었을 것이며, 그 이후에 굴복하고 합류해버린 녀석도 몇 명인가 있겠지.

일단, 샘을 점거한 집단은 생각보다 오합지졸이 아니다.

주변의 지형을 좀 더 봐두고 물러나기로 했다.

무장을 확실히 체크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총기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만전으로 다시 오자.

그렇게 물러나려는데.

"아, 급똥이니까 좀 봐줘!"

맨 처음 발견한 초소에서 커다란 덩어리 하나가 버르적거리며 내려오고 있다.

아까는 가려져서 몰랐는데 몹시도 훌륭한 떡대다.

목소리의 반대편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똥내를 맡고 싶진 않으니 멀리 떨어져서 싸라는 말.

샘과 멀리라면 결국 우리 방향이다.

사냥꾼이 비릿하게 웃으며 메이스를 들었다.

2층에서 고블린의 뚝배기를 박살낼 때부터 애용하는 무기다.

검은 생각보다 다루기 힘들다. 능숙하지 않다면 역시 둔기. 순수 레인저다운 선택이다.

풀숲을 헤치고 상대가 다가온다.

번들번들한 대머리가 눈에 띈다.

팔에는 문신이 잔뜩 있고 온통 근육질의 히스패닉······.

뭔가 낯익은데?

우리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거한이 지근거리까지 와서 뭉툭한 칼로 대충 땅을 판다.

사냥꾼이 나를 슬쩍 본다.

눈빛으로 대화를 하는 건 서로의 인식이 일치한다면 의외로 가능한 일이다.

‘지금 줘 팹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바지 내리고 싸면 후려쳐.’

사냥꾼이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그렇군요. 잡아가는 동안 지리면 곤란하니.’

웃음 짓는 게 묘하게 가학적이다.

이 사람 혹시 요즘 스트레스 쌓여있었나?

심연이 참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곳이긴 하지.

거한이 주저앉고 불쾌한 소음과 함께 무더기가 쏟아진다.

사냥꾼이 메이스를 휘둘렀다.

역시 유격전의 전문가 레인저.

근육질의 히스패닉이 단말마조차 없이 의식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진다.

나는 곧바로 그 몸을 받쳐 들었다. 사냥꾼도 메이스를 허리에 차고 나를 돕는다.

그 상태로 소리 없이 질질 끌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충분히 떨어진 후, 약간의 공간을 만들고 뺨을 때려 깨운다.

험악한 대머리가 인상을 썼다.

몸뚱이가 얼마나 튼튼한지 쇳덩이가 머리통을 가격했는데 별다른 후유증도 없어 보인다.

하기야 이런 체격도 일종의 스탯 깡패다.

소녀 같은 초자연적인 스탯은 아니겠지만.

"으윽, 머리야. 뭐야 이거. 잠깐만. 당신들 누구지?"

이야, 이거 참. 남미 마약 카르텔이라도 되나본······.

우리는 동시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너! 이 자식! 꾸웩!"

턱에 빗겨 치는 훅. 뇌를 흔들면 아무리 맷집이 좋아도 의식이 나간다.

커다란 덩치가 다시 앞으로 엎어진다.

사냥꾼이 당황했다.

"정보를 캐고 죽이는 것 아니었습니까?"

"아니지. 이 녀석 덩치를 봐봐. 힘 초기 스탯이 되게 높을 것 같지 않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뭐하는 인간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나는 안다.

1층에서 산 사람으로 함정을 체크하려고 하기에 팔을 뽑아놨던 놈이다.

생긴 것도 하는 짓도 깡패인데 그런 거치고는 좀 맞으니까 너무 고분고분해서 웃겼던 놈.

"이야, 맷집도 엄청 좋을 거 같다 그치?"

사냥꾼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선언했다.

"기뻐하라. 아무래도 우리 파티의 근접 전사를 구한 거 같다."

이런 타입은 자주 봐서 알고 있다.

약자에게나 주먹이 나가지 강자에게는 철저하게 고분고분하다.

내가 절대적 강자임을 인식만 시킬 수 있다면 말을 아주 잘 들을 놈이다.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혼돈의 여신이 말했다.

「야! 쟨 나줘!」

‘혼돈탱이라니 세상에. 하지만 드리겠습니다.’

「아싸! 신도 늘었다!」

나는 파티 밸런스 좋아져서 좋고.

사냥꾼은 부하 생겨서 좋고.

여신님은 신도 늘어서 좋고.

정말 완벽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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