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6화
3층 - Lv.18 게이머(4)
3층이면 아직 초반 중의 초반이다.
이런 곳에서 심연의 시간흐름에 휘말려 한 달여를 지체한 것은 타격이 컸다.
내가 고년차 고참 유배자라서 잘 안다.
왕국 이후에서도 정착해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유배자들은 당연하게도 심심찮게 죽는다.
그래서 그들은 왕국까지 도달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한다.
서로간의 정보 공유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노하우도 공유된다.
1층 미로를 빠르게 루팅하고 2층의 테마를 확인한 후, 별로라면 자살.
이게 일종의 정석으로 여겨질 정도다.
첫 번째 테마부터 좆같은 게 나오면 깰 것도 못 깰뿐더러 조심하다보면 왕국까지의 여정이 한없이 늘어져버린다.
왕국 이전의 구간에서 흔히 고참이라 부르는 30년차 이상의 유배자를 보기 힘든 가장 큰 이유다.
짬이 되는 녀석들은 이미 자결하고 다른 회차로 넘어갔거나, 저 아래쪽에서 질주중이다.
스킵할건 스킵하고 챙길 거는 챙기고.
스피드런이란게 그런 거니까.
그렇기에 지금 내가 입장한 3층도 이미 지나간 녀석들은 많다.
어중간한 속도의 녀석들이나 꿈지럭거리며 몸 사리고, 아낄 거 아끼고, 버릴걸 버리지 못하는 법이다.
한 달이나 지났으면 여기 남은 녀석들은 둘 중 하나다.
덜 떨어졌거나. 신중하거나.
게임 시절에도 스피드런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맵 구석구석까지 이 잡듯이 뒤져서 파밍 하고, 한 도트라도 어둠을 밝혀내지 않았다면 찝찝해서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사람들.
그건 현실이 된 미궁이라고 크게 달라지지 않더라.
여궁수가 그런 타입이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준비는 철저해야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러다가 몇 번 훅 가보면 살기 싫어질 건데."
"아직은 신중함에 배신당한 적이 없군요."
"그럴 수 있지."
왕국 이후를 가본다면 시간이 부족해서라도 달리게 될 것이지만 뭐 어쩌겠는가.
나는 충고는 했다.
능력이 되니 좀 더 빨리 달리라고.
앞서나간 고인물들이 남기고 간 찌꺼기만 주워 먹지 말라고.
하지만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 또한 그 나름의 장점이 있다.
애초에 유배자란 건 ‘멀쩡한 인간’이라는 스타일을 버린 자들이다.
"그래서 또 어쩐 일이십니까?"
"너희 마법사 좀 빌려줘."
"마법사요?"
"그 작고 귀여운 친구."
여궁수는 의아한 듯 눈가를 찡그리고.
"도움은 필요 없으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쪽이 준 정보가 틀려먹어서 말이야. 의뢰주한테 항의하러 왔지."
"의뢰주라니 저희는 딱히······."
"솔직히 뚫을 자신이 없어서 난민들 먹여 살리며 눈치보고 있는 건 맞잖아?"
"그렇긴 하죠."
빙글빙글 웃는 게 아주 능글맞다.
나는 화살을 한 발 더 꺼내서 내밀었다.
"빌려줘."
"대여가 아니라 아예 영입하셔 됩니다."
"아니, 그건 너무하지 않냐?"
"저 아이도 선배님께 배우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이 새끼 이거 눈치 봐라. 역시 크게 될 놈이다. 지금 내가 15년차라고 자칭한 거 절대로 믿지 않고 있다. 그보다 위라 생각한다.
이 정도로 머리가 돌아간다면, 앞으로의 홀수 층에서 꾸준히 만나게 될 느낌이다.
애초에 본인도 그런 생각을 했으니 마법사를 맡겨두려는 셈이겠지.
어느 정도 계층이 깊어지기 전까진 마법 클래스는 도움이 된 다기보단 방해가 된다.
당연히 없는 거 보다야 낫지만 파티 리더라면 마법사가 먹고 자고 입는 비용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괜찮아. 우린 마법사 필요 없어."
"아쉬운 일이군요. 그럼 저는 어떠신가요?"
"네가 리더인데, 너희 파티는?"
여궁수는 웃는 얼굴을 조금도 흩트리지 않은 채 대답한다.
"그렇다면 저희 파티 전부는 어떠신지요?"
"너무 뻔뻔해서 오히려 마음에 드네. 자 이거도 가져가."
화살을 몇 발 더 주었다. 이 정도면 ‘소녀 에디션’ 짝수 층이 나오지 않는 한에서는 거의 날로 먹을 거다.
여궁수 역시 내가 건네는 소모품들을 5층에서 보자는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테마가 바뀌는 5층 단위로 보스전이 존재한다.
홀수 층 보스전은 유배자들의 협력 플레이를 강요하기 때문에, 이런 호감도 작업은 중요하다.
물론 썩은 물들은 그냥 어떻게 스킵하고 지나가버리겠지만, 그걸 못하면 싸워서 이겨야지 어쩌겠어.
"감사합니다. 후배에게 베푸는 선배님들이 참 드문데. 어찌 이리 고마우신지."
"아 알았으니까. 그만 간 보고 빨리 마법사 데려와. 잠깐만 쓰고 돌려줄게."
뻔뻔하다 못해 질척대는구먼.
여궁수는 여전히 붙임성 있는 미소를 지으며 물러났다.
* * *
여궁수네 파티의 마법사는 작고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다.
고교생도 아니고 더 어린가? 기구한 운명이지. 어쩌다 이 나이에 미궁으로 끌려와서.
하지만 그럼에도 시작부터 마법 클래스 트리를 탈 정도로 강단 있는 성격 같지는 않아보였다.
유약한 인상에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
그냥 겁이 아주 많아서 최후열인 마법사인가?
하지만 이 녀석도 6년차랬다. 이래봬도 6년이나 미궁에 도전해온 용사다.
외유내강이라고 보아야겠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마법사는 내 지시에 따라 더 정밀한 탐색에 들어갔다.
요령은 처음부터 다시 가르친다.
이 아이의 마법 스승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썩 제대로 가르쳤다고는 못하겠다.
마법사는 기겁한 눈으로 물었다.
"선배님은······ 마법사신가요?"
"암살자라니까. 마법사도 해본 적은 있는 거야."
한 우물만 파도 어디까지 닿을지 모르는데 해본 적이 있다니.
마법사의 눈빛이 대강 그런 아연함으로 물든다.
나는 닥치고 시키는 대로 탐색이나 하랬다.
마법은 그저 스킬에 의존해서만 사용하는 것과, 진짜로 마법이 뭔지 알고 쓰는 것의 격차가 크다.
그렇게 혼자서도 잘 하는지 지켜본 후, 사냥꾼에게 갔다.
"잘 되어가나?"
"예. 뭐."
"끄으으윽."
분위기를 보니 까불다가 사냥꾼한테 엄청 얻어터진 모양이다.
안 봐도 비디오다.
넌 뭐야부터 시작해서 무기는 비겁하다, 그 다음엔 맨손 격투로도 털렸겠지.
레벨격차만이 문제가 아니다. 다년차 유배자가 점점 강해지는 이유는 몸에 남는 경험 덕이다.
힘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써야할지를 알게 된달까.
스탯을 포함한 미궁의 시스템 자체에 적응하게 된다.
같은 능력치라면 후배가 선배를 이기는 건 쉽지 않다.
하물며 딱 분위기만 봐도 초회차인 녀석이다.
죽도록 두들겨 맞은 모양이다.
하지만 밑바닥 근성은 어디 가질 않는 건지.
내가 얼굴을 비추자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이미 있지도 않은 가오를 잡으려는 게 천생 깡패다.
내가 사냥꾼을 슬쩍 보자 사냥꾼이 엄포를 놓는다.
"야. 어딜 눈을 부라려. 안 깔아?"
까무잡잡한 거한이 얼른 눈을 내리깐다. 벌써 길들이기가 끝난 것 같다.
아마 이런 식으로 저쪽에 합류했겠지 싶은데, 생긴 건 무슨 조직의 보스같이 생겨가지고 하는 짓이 똘마니가 따로 없네.
나는 엄숙하게 면접을 시작했다.
"어이, 우리 파티의 전사가 되어라."
놈이 눈을 껌뻑인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듯 하다.
옆에서 사냥꾼이 거들었다.
"이 분이 우리 사장님이시다."
"하겠습니다! 이 몸 바쳐 해내겠습니다!"
나는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패기가 좋군. 있다가 누님도 만나게 해주마. 막내야."
"네 넵!"
그리고 그 전에 개종부터 하자.
혼돈의 여신은 행복해하며 새 신도를 받아들였다.
* * *
심문 아닌 심문의 시간이 있었다.
우리 덩치 큰 막내는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면 안 되는 종류의 인간이다.
사냥꾼이 고개를 모로 기울인다.
"미궁이 어떤 세계의 게임이라고 주장하는 녀석이 저쪽의 리더라고? 그게 20년차고?"
사냥꾼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마치 그런 소리는 듣도 보도 못했다는 표정이다.
그로서는 드물게 나에게 동의를 구한다.
"리더, 저도 12년을 지냈지만 그런 소리는 처음 듣습니다. 뭐. 미궁이 좀 게 임같이 돌아가는 면이 있긴 하지만. 엄연한 현실 아닙니까."
막내는 못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은 그렇게 들었다며 재차 주장한다.
사냥꾼이 일축했다.
"이 빌어먹을 땅에서 오래 살다보면 다양한 방식으로 미쳐버리곤 하지. 그렇게 구체적으로 미칠 수 있다고 이상한 일은 아닐 거야."
약간은 씹어 뱉는 듯 한 그 말에 사냥꾼의 분노가 묻어난다.
이곳을 게임으로 여긴다니 참을 수 없다는 듯한 감정의 표출이다.
살기 위해 아득바득한 유배자의 삶이 우습게 보이냐는 거겠지.
나는 괜히 멋쩍어져서 뺨을 긁었다. 우리 파티의 레인저는 지금 눈앞에 정확히 그 사례가 있다는 걸 모르고 있군.
내가 이래서 어디 가서 말을 안 해.
이스터 에그 같은 건데. 아주 가끔 저런 설정을 들고 나타나는 NPC가있다.
게임으로서 즐기다가 빨려 들어온 설정을 가진 유배자.
이건 게임 시절에도 있었다.
솔직히 말해볼까?
내가 처음으로 미쳐버렸던 게 24년차던가 쯤에 그런 설정의 NPC와 만나서였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날려 먹었는지 기억조차 안 난다.
멘탈이 완전히 바스라 졌다.
나도 저런 케이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저 1층에서 멍하니 누워있다 추락하고.
또 추락하고.
그런 행태의 반복이었다.
급기야 어둠 속의 게임 시작 버튼조차 누르지 못해 강제로 미궁으로 추방되기도 했다.
간신히 다시 일어섰을 때도 끝없이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고 있던 트라우마였다.
그것을 만나기 전에도 그 사실을 의심은 하고 있었던 만큼.
재기할 수 없을지도 모를 위기였다.
정말 가장 큰 위기였다.
지금은 뭐. 크게 개의치 않는다.
절망 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딱히 그 사람의 정신력이 대단해서만은 아니다.
나는 평범했다고 생각한다.
그저, 시간이 치유했을 뿐이다.
어차피 확인할 수 없다면 그냥 모른 체 하는 게 최선이다.
나는 사람이다.
언제나 그렇게 믿고 행동한다.
"리더,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으십니까?"
사냥꾼이 이상하게 나를 바라본다.
"아니. 아니야."
이런, 표정에서 티가 날 정도였나.
「뭔지 알 것 같군. 신도여 그럴 땐 사탕이다. 단 것이 마음을 달래주지.」
‘여신이시여. 여긴 왕국 이전이라 사탕이 없습니다.’
「그거 애석하군.」
슬슬 만날 때가 되기도 했구나 싶다. 마지막으로 본지 20년 쯤 된 게 맞는 것 같다.
한 20년에 한번 만날까 말까해서 괜찮긴 한데.
괜찮긴 한데······.
아무래도 안 괜찮은 것 같다.
"미안한데. 나 좀 쉬다 올게."
사냥꾼이 의아해하면서도 수긍한다.
빌려온 마법사에게 무엇을 시켜놓았는지 설명하고 조금 대신 신경써달라고 했다.
소녀가 쉬고 있는 집으로 들어가니 바로 걱정부터 받았다.
"아저씨? 왜 그렇게 울상이에요?"
울상소리까지 나오나?
거울이 없는 곳이라 정말 다행이다.
보았다면 나는 스스로 무슨 생각을 하게 되었을지 모르겠다.
소녀의 표정에 놀람이 번진다.
사후에 승낙을 받는다.
"너 좀 안아 봐도 되니?"
"어 어엇? 아니 왜? 하지만 좋아요. 완전 오케이에요."
"그래. 그래."
포근한 여자아이는 안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조금은 나아지는 거 같다.
꼭 끌어안고 있자 조그만 소녀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게 느껴질 것 같다.
"아저씨 지금 되게 이상한 거 알아요?"
"응, 그래.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그래 안다.
내가 나를 사람이라고 믿을 근거는 하나도 없다.
그냥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한 변명이다.
이런 변명하나 없이 살아가는 다른 유배자들은 어떻게 버티는 걸까.
아니지, 어쩌면 평소에는 쉽게 외면할 변명이 있다가, 가끔 당하는 일이라 더 힘든 걸지도 모른다.
내성이 잘 안 생기니까.
나는 소리 없이. 눈물 없이 울었다.
소녀는 말없이 나를 마주 안아주었다.
10분 정도 그러고 있자, 조금 마음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 겪는 일은 아니다.
마음이 나락까지 떨어지는 일.
유배자라면 누구나 한번씩, 그리고 그 이후로도 간혹 겪게 될 일이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마음을 재조립했다.
"좋아, 이제 괜찮은 거 같아."
"우으, 이젠 제가 안 괜찮은데요."
소녀가 즉시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그래봐야 뻔히 다 보인다. 귀까지 빨개져있다. 달아오른 얼굴이 오늘따라 몹시도 귀엽다.
평소에도 귀염성 있는 몸짓에 애교 있는 얼굴이다 보니 아주 내 심장이 멎을 것처럼 귀엽다.
감정을 조절하자. 이거 흔들다리 효과다.
미궁에서 사랑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나는 3년 밖에 안 남았어!
그렇게 마음의 셔터를 내린다.
"후우."
이제 좀 덜 귀여워 보이는군. 다행이야.
그때 바깥에서 사냥꾼이 들어왔다.
빌려온 마법사도 함께다.
"리더! 큰일 났습니다!"
"뭐, 왜 또?"
대답은 마법사가 했다.
"선배님! 저쪽에서 우리 캠프를 공격하려고 해요!"
"그럴 만도 하지."
생각해보면 그렇긴 하다. 그 녀석들이라고 그냥 길만 막고 있으려고 거길 점거한건 아닐 테니까.
나가서 보이는 우리 막내의 멍청한 표정을 보자 이 녀석도 습격할거라는 건 몰랐던 모양이다.
마침 잘 되었다. 좆같은 기분을 날려버리는데는 싸움만한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