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7화
3층 - Lv.18 게이머(5)
여궁수를 비롯하여 캠프에 거주하던 ‘유배자’들이 모두 전투를 준비했다.
유배자라 할 수 없는 ‘난민’들에겐 습격을 알리지도 않았다.
언젠가는 있을 공격이었다.
이런 층을 점거하고 있는 녀석들의 목적은 대부분 뻔하다.
서든데스가 있는지 없는지 기다려 본 다음에, 없다면 계층 자체를 그대로 자신들이 지배할 생각인거다.
난민들은 노예 같은 것으로 쓰이겠지.
초회차는 자살 같은 것도 함부로 못한다.
경험해본 재시작과 경험하지 못한 재시작은 전혀 다르다.
몇 회차 안되더라도 비슷하다.
죽음에 익숙한 것이 더 정신병에 가까운 상태다.
아직 정상인 사람들은 부당한 대우도 감내하며 삶을 이어나가려 할 것이다.
"이거 이거, 저쪽이 성질이 급해 의뢰를 완수하지 못했군."
"괜찮습니다. 선배님 파티 홀로 해결하는 것보다야 역시 다 같이 싸우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여궁수는 그렇게 말하며 번갯불이 튀는 화살을 살살 흔들었다.
이런 걸 주신 분이 무슨 소리십니까 하는 느낌이다.
"그런 비즈니스적인 마인드 좋군."
"밖에선 기업가였거든요."
"바깥 얘기는 말하고 다니면 좀 그런데."
"제가 선배님께 바치는 신뢰입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안 듣고 싶어."
"앞으로는 자제하죠."
말귀를 잘 알아듣는다.
거리 유지에 신경을 쓸 것이다.
저런 녀석이 밑에 있으면 편리하긴 하다. 바로 이전 회차에서 수백 명 단위의 길드를 이끌며 느꼈다.
그때와 같은 설계를 하고 있다면 즉시 영입해야할 인재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번 회차의 컨셉은 소수정예에 더 가깝다.
내가 보는 것은 순수한 전투력의 포텐셜이다.
전직 CEO는 내 계획에 포함되기엔 너무 별거 없는 경력이다.
이전 회차가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거대 길드의 허상이랄까.
저마다 꿍꿍이가 가득한 고참급 유배자들을 모두 통제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배울 수 있었다.
인해전술로 하면 뭐가 될 거 같아서 해봤고 실제로 뭐가 되긴 했다.
그래도 가장 클리어에 근접하긴 했었으니 해볼 만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뒤지게 힘들었지만.
"특수화살 지금은 안 쓸거지?"
"네. 선배님을 믿겠습니다."
"좋은 판단이야."
뻔뻔하게 내가 어떻게 할 거라고 믿는 모습이지만, 고참이 호의를 베풀면 받아들여야 하는 곳이다.
여궁수를 뒤로하고 나는 우리 파티의 방침을 결정했다.
우선 소녀.
"넌 그냥 밖으로 나가서 다 죽여 버려."
소녀는 아직도 홍조가 별로 가시지 않은 얼굴로 딴청을 피운다.
"아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연약한 여고생한테."
"얼씨구. 넌 아닌 척하면서 칼 만지작거리는 버릇부터 고치고 그런 소리를 해."
"아아앗."
우리 소녀의 능력치와 전투력은 이미 네임드 NPC에 필적한다.
초반에 그런 걸 만나 치이면 나도 교통사고 당한 셈 치고 넘어간다. 멘탈도안 상할 정도의 자연재해다.
하지만 네임드 고정 NPC가 한달이나 3층에 남아있을 리가 없다.
저건 지금 어디에 풀어놔도 문제없을 미친개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말은 해두자.
"[대시] 절대 앞으로 쓰지 마라. 위험하면 그걸로 빠져야 해. 너 죽으면 나 울거다."
"뭐 뭐래는 거래. 절대 안 죽거든요. 흥."
당연히 울지. 저 꼬마의 존재가 아니라면 이번 회차는 진작에 조져버린 망한 회차다.
개발자들이 넣어둔 이스터 에그적 존재일 것 같은 이 소녀에 내 남은 3년을 걸고 있는 것이다.
반드시 지켜야한다.
100년이 끝나갈 때쯤 나타나는 이레귤러.
그렇다면 추측컨대 겜은 지지리도 못하면서 근성만은 넘쳐나는 이들을 위한 구제책이다.
제한 시간을 어떤 식으로 인게임에 업데이트할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지금 거기에 해당해버렸다.
치욕스러운 건 그렇다 치고, 일단 클리어 해야 한다.
"사냥꾼은 그 녀석 데리고 적당한 위치에서 방어해. 맡긴다."
"알겠습니다."
이건 사실상의 교육 훈련을 시키란 말이다.
12년차 노련한 유배자답게 사냥꾼은 쉬이 알아듣고 막내를 끌고 갔다.
적당한 위치를 잡으면 적어도 사냥꾼은 죽지 않을 거다.
저 막내는 어떨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사냥꾼이 살리고자 하면 그 정도는 해내겠지.
2층이 하도 이상해서 그렇게 안 보이긴 한다.
12년차 레인저 전문 유배자 정도면 한 달이나 지난 3층의 낙오자들 선에서는 대적할 자가 없다.
맵도 숲이다.
"그럼 나는, 그 ‘게이머’라는 녀석 얼굴 좀 볼까?"
20년차랬던가? 그럼 좀 치는 녀석이겠지.
내가 직접 제압하지 않으면 큰 문제가 생길 거다.
* * *
사냥꾼은 늘 그렇듯이 피곤한 얼굴로 활을 들었다.
요정의 활이다.
리더는 더 괜찮은 활을 찾았기에 요정의 활은 온전히 그의 몫이 되었다.
석궁은 이미 내구가 다해 사라졌다.
1층에서 노획한 무기를 그만큼 격렬하게 썼으니 알뜰하게 잘 쓴 셈 친다.
물론 만족스러웠다. 요정의 물건이, 비록 그의 파티원이 살해한 요정의 유품일지언정 손에 들어와 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사냥꾼은 안심감을 느꼈다.
제발 앞으로 적대적인 요정이 나타나지 않기를.
"선배님!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막내가 무기 대신 방패로 쓸 오두막의 문짝을 떼어왔다.
솜씨 좋은 목수 출신이라도 있는지 견고하고도 묵직하다. 그냥 저걸로 때려도 충분할 듯 하다.
"그래. 앞만 막아."
산만한 덩치가 헤헤 하는 얼굴로 옆에 와서 선다.
얼굴만 보면 곰도 맨손으로 때려죽일 것 같이 흉악한 녀석이지만 하는 짓을 보면 귀여울 지경이다.
폭력으로만 길들인 것은 아니다.
저 초회차의 애송이도 고참 유배자란게 어떤 존재인지 그동안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가 1층에서 리더에게 그랬듯이, 상황 파악을 하고나서는 완전히 충성스러운 부하가 되어버렸다.
대관절 그놈의 ‘왕국’이 뭔지.
그곳만 갈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것처럼 구는 신참들이 많다.
소문이 그렇게 나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는 소문은 점점 더 그 형태를 부풀려가기 마련.
리더는 마치 낙원과도 같은 소문의 내용에 어이없어했다.
[왕국이 그렇게 좋기만 한곳이었다면 죽어서 재시작하는 고참이 있겠어?]
실로 타당한 말이다.
가본 적 없는 사냥꾼도 막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사실이다.
확인되니 씁쓸한 건 마찬가지고.
"하아."
"어, 어.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아니다. 가자."
사냥꾼은 오랜만에 사냥을 시작하기로 했다.
* * *
사람은 총에 맞으면 죽는다.
화살에 맞아도 죽는다.
칼에 맞아도 죽는다.
정말로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미궁에서 고레벨이 된 다음,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으면 그 사실을 잊을 수도 있다.
겨우 3층에서는 어지간한 행운이 따르지 않고서야, 그런 비현실적인 내구도를 지닐 수 없다.
그래서 사냥꾼은 쐈다.
한발에 확실히 한 놈씩.
초당 한 발씩 끊임없이 날아가는 화살은 엄청난 속도로 적을 줄여나간다.
막내가 감탄했다.
"세상에. 정말 놀라운 속사······? 이게 맞나. 아무튼 굉장합니다."
"앞을 봐라."
"어이쿠, 그러겠습니다."
지금 자리 잡은 위치는 난민촌이나 다름 없는 캠프에서도 비교적 오두막다운 오두막이 위치한 곳이다.
망루 같은 것도 어떻게 세워져있었으나 사냥꾼은 그 자리를 여궁수에게 양보했다.
선배로서의 배려다.
뒤로 돌아온 적이 나타난다.
사냥꾼은 메이스를 뽑아들었다.
픽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 몽둥이를 치켜들고 있던 사내가 쓰러진다.
머리에 화살이 박혔다.
슬쩍 망루를 보자 여궁수가 눈을 찡긋해 보인다.
붙임성이 참 좋은 사람이다.
사냥꾼은 저럴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뒤로 돌아온 적은 더 있었다.
심연에서 채워온 화살통만 열 개쯤 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져가고 싶었기에 한데 묶어 끌어안고 3층까지 왔다.
그게 벌써 절반이 줄었다.
그 숫자만큼의 시체가 사냥꾼의 앞에, 그리고 문짝을 집어든 막내의 앞에 쌓여있다.
제정신이라면 정면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한 번 배신한 막내는, 어느 편을 들지 정한 후에는 가차가 없었다.
쓰러져 머리가 깨진 자들 중 몇몇은 저 타고난 힘에 으스러졌다.
휘두르는 칼을 메이스로 막아낸다.
조잡하지만 자루까지 쇳덩이인 메이스는 베이지 않았다.
그리고 박치기.
쓰러지는 녀석에게 한 번 더 발차기.
메이스를 잠깐 위로 던지고.
활로 바꿔든다.
화살을 매기는 동작은 물 흐르듯 유려하다.
모퉁이를 돌아 나타난 상대가 입을 벌리고.
그 입속에 화살이 꽂혔다.
허공에 떠올랐다 떨어지는 메이스를 받아든다.
그대로 먼저 쓰러뜨려 놓은 녀석의 머리를 깨부쉈다.
막내는 그때서야 도움을 주기 위해 방패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말 멋있으십니다. 형님. 영화 같았습니다."
"리더는 더 굉장하니까 비행기 태우지 마라."
말은 그렇게 해도 조금은 기쁘다.
솔직히 2층에서의 자신은 너무 무가치해보였다.
그냥 식량을 채집하는 기계가 있어도 별 차이 없지 않았을까.
고참 유배자가 받아주는 것은 정말로 호의에 불과하다.
그가 필요한지는 아직도 의문이니까.
그냥 잠깐 쓰기 좋은 부하 이상의 느낌은 아니겠지.
뭐 어떤가. 사냥꾼도 결국 왕국이 목표일뿐이다.
끊임없이 레벨 업을 알리는 묘한 느낌이 몸속에 짜르르 울린다.
2층에서 고블린 부락을 쓸어 담은 후에 거의 쌓지 못했던 경험치가 여기서 다 모이고 있다.
사람을 죽이는데 죄책감 따위는 없지만 조금은 씁쓸해졌다.
다시 활을 겨눈다.
노도처럼 몰려오는 무법자들의 기세도 한풀 꺾였다.
사냥꾼이 속한 파티가 없었다면 저들의 야망은 실현되었을 지도 모른다.
약간 오른쪽을 보면, 그쪽은 그야말로 자연재해가 있다.
그루터기 요정 특유의 나풀거리는, 가련하고 천진한 옷을 입은 소녀는 그 모습과는 전혀 다른 전과를 내고 있었다.
조금 거리가 있는데도 동작이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흐릿하게 무언가 지나간 후 반드시 두셋이 움직임을 멈춘다.
시신이 바닥에 몸을 누이기 전에, 또 다른 시체가 생겨난다.
"인간 믹서기······."
너무한 호칭이 아닌가 싶지만 실로 그러했다.
사냥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다음 한 발을 더 갈겼다.
팅!
눈을 크게 떴다.
명백하게 이질적인 소음과 함께 화살이 튕겨나간다.
주변에 펼쳐진 투명한 막.
처음 보는 것은 아니지만 자주 보는 것도 아니다. [오토 실드]라니. 저게 어떻게 3층에?
다음 순간 깨달았다.
이 미궁은 확률이 지배한다.
그 확률만 뚫을 수 있다면.
대체로 무엇이건 가능하다.
하지만 사냥꾼은 걱정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은신]의 검은 그림자를 흩날리며.
그의 리더가 적의 옆에 나타났다.
* * *
이 자식 이상한데?
20년차로 추정되는 녀석이 도통 보이지 않아 높은 곳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마침내 뭔가 좀 이상한 녀석을 찾아서 그 옆으로 다가오긴 했는데.
"너 뭐냐?"
"히 히이익!"
맥 빠진 소리를 내며 상대가 엉덩방아를 찍는다.
내가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단검을 하나 던져본다.
팅 하고 투명한 막이 생겨나며 튕겨나갔다.
상대의 얼굴에 놀라움 대신 자신감이 채워졌다.
"하! 하하. 어차피 못 뚫지! 버러지 같은 NPC녀석!"
하아, 이 새낀 또 뭐지.
딱 그 생각이 들며 머리가 아파온다.
이런 병신 때문에 내가 트라우마까지 켜져야 했나.
그 바람에······.
고개를 저었다.
그 포근한 감촉을 다시 떠올리는 건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
사랑은 정신병의 일종이다. 홀려선 안 된다.
게다가 상대는 미성년자잖아.
내 나이가 몇이더라? 25+97세던가.
"좋아, 잘 참았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나아지겠지."
한번 흔들린 마음은 자고 일어나야 제대로 낫는다.
자주 느끼는 바다. 사람도 재부팅은 필요한 법이라고.
녀석의 주변을 단검으로 콕콕 찔러본다.
그때마다 막이 생성되어 막힌다.
"너 그거 믿고 까부는 거냐?"
일단 확실한 사실 하나.
이 새끼 절대 20년차는 아니다.
‘게이머’ 설정을 가진 녀석이니 아는 게 많아서 어떻게 속여 넘겼으리라.
[오토 가드]는 그냥 도박으로 빌드업해서 운 좋게 띄운 다음에 고참 행세를 한거겠지.
이젠 습격 계획 자체가 이 녀석의 머릿속에서 나온 게 맞는지도 의심스럽다.
"뭘 봐 십새끼야! 어차피 뚫을 방법도 없잖아."
자신감이 충전된 상대가 몸을 일으킨다.
어디서 주워왔는지 그럴싸한 매직 아이템 아밍 소드 하나를 들고 나를 겨눈다.
난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받아라."
촉에 흠집을 내놓은 화살을 던진다.
놈은 엉겁결에 그걸 받아들고는 화살촉에서 튀는 번개를 보았다.
"으 으아아아악!"
집어던지려고 했지만 늦었다.
나는 귀를 막고 고개를 돌렸고, 콰르릉하는 소리와 온몸의 털이 쭈뼛하는 느낌을 받았다.
트동트의 번개에는 비할 바가 아니지만 뇌격은 뇌격이다.
다시 단검을 들고 콕콕 찔러보았다.
까맣게 타버린 바닥에서 벌벌 떨고 있는 ‘게이머’의 주변에 더 이상 실드는 발생하지 않는다.
"야, 그거 원래 기습 방어 원툴인거 알잖아."
"하 하지만 어떻게 3층에서 이 화살이······."
2층에서 심연을 갔다 오면 너도 주워올 수 있을걸?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혹시 모르니 떨어트린 아밍 소드를 발로 차서 날려버린 다음에 다가갔다.
표정이 절망적이다.
쪼그리고 앉아서 얼굴을 마주했다.
다른 무법자들은 감히 내 근처에 오지 못했다.
아주 여유롭다.
"너 플탐은 몇 시간이냐?"
음습한 자존감을 채워보자.
표정이 다채롭게 변한다.
당황, 놀람, 이해. 공포.
"3000시간······."
귓가에 속삭여준다.
"난 35000시간하다가 잡혀왔어. 알아?"
이제 보내주자. 어차피 이런 녀석은 쓸모가 없다. 이놈이 아는 건 나도 다 안다.
하지만 놈이 경험치가 되기 직전에 나는 손을 멈췄다.
"그 그럼? 갑자기 사라진 랭킹 1위 오르골?"
"뭐라고? 너 다시 한 번 말해봐. 뭐라고 했어 방금! 이 새끼야!"
미궁에 오기 전에 쓰던 내 게임 닉네임을 안다.
충격으로 멱살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지금 이 녀석 뭐라고 말했지? 내가 잘못 들었나?
너무 틀어쥐어 숨도 쉬지 못하는 와중인 걸 이제야 깨달았다.
겨우 내려놓자 켁켁거리던 녀석은 한탄을 시작했다.
"이 씨발 세상 좆같네. 랭킹 1위는 얼굴도 잘생겼네. 씨발. 난 게임도 못 이겼는데······."
뭐래는 거야 씨발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