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8화
3층 - Lv.18 게이머(6)
요정을 본 적이 있다면. 개중에서도 꽃잎 요정을 본적이 있다면.
종족이 ‘인간’인 이상 자신이 잘생겼다고 자처할 수는 없게 된다.
그것들은 서큐버스보다도 아름답고, 인큐버스보다도 잘났다.
‘요정의 덫’이 괜히 고유명사화 되어있을까.
대뜸 개소리를 지껄인 녀석을 일단 발로 깠다.
죽일 생각이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살려야한다.
짝수 층의 난이도 구간은 한 번에 입장한 파티원의 수에 비례한다.
4명까진 그대로고, 5명부터 한 단계가 올라간다. 인해전술을 방지하는 기믹이다.
그래서 추가 영입은 자제했다.
이 쓸모없는 녀석을 데려갔다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포기할 수 없다.
지난 97년간 한 번도 발견했던 적이 없는 단서였다.
네놈은 NPC냐?
제발 그렇지 않다고 말해줬으면 한다.
바깥의 나를 알고 있는 이 세계의 유일한 존재다.
물론, 그런 게 이딴 녀석인 건 좀 마음에 안 들긴 한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하는 상황이다. 나는 내 지난 97년간의 절망에서 해방될 기회를 잡은 것이다.
혹시 모를 자결을 막기 위해 빠르게 몸을 수색해서 잡다한 무기들을 전부 버렸다.
바닥에 휙휙 던져지는 무기를 보며 녀석이 어리둥절해한다.
"뭔데. 뭐야. 뭐하려는 거야?"
"내가 너한테 물어볼게 엄청나게 많아. 너도 그렇지 않아? 어디보자 그래 너 닉 뭐였니?"
온라인 협동 플레이를 제대로 지원하는 게임은 아니었다.
하지만 랭킹이 기록될 때 남는 닉네임이 있다.
"······프로방스."
"30위 안에 못 들어와서 헤매던 친구구만."
"그걸 외워?"
"내가 밥 먹고 뭐만 한다고 생각했냐?"
"게임······."
말이 30위 안에 못 들어왔다지, 결코 어디 가서 꿇리는 실력은 아니다.
내 플탐을 생각하면 알 수 있듯 게임 자체가 제법 오래되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업데이트를 진행한 게임이다.
매니악한 게임성 덕에 유저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결코 적지도 않다.
그 모든 것을 알고 게임 속으로 끌려왔다면 적응의 속도는 다른 유배자들과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연차를 속일만큼 헤매고 있다면.
"유배 년차 1년 못 채웠구나?"
"······2년쯤 했는데."
내 예상보다 재주가 없는 놈이군.
"······아주 좆같은 생각을 하는 표정인데."
"아, 그냥 너 겜 개 못하는구나 싶어서."
"죽어! 개자식!"
발끈하며 휘두르는 주먹을 가볍게 피한다.
"그래도 그렇지 10배를 속이냐? 20년차라고?"
영화 같은 곳에서 보면 손날로 뒷목을 가격하여 사람을 기절시키곤 한다.
사실 그거 엄청 어렵다. 그냥 어퍼컷이 더 낫다.
20년차라는 말에 녀석이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나는 듣지 않았다. 어디 묶어놨다가 깨어나면 그때 보자.
깔끔하게 의식을 제거한다.
그리고 섬뜩한 위화감.
왼팔을 들어 막았다. 너무 아슬아슬했다.
깊숙이 베였다.
잘려나가지만 않았지 큰 차이 없다.
너무나도 깔끔한 절단면.
암습 판정이 떴다.
다음 공격은 나도 대거로 막아낸다.
팅! 하는 소음과 함께 한 합.
아래로 날아오는 다리 걸기를 살짝 뛰어 피하며 걷어차기.
상대 역시 몸을 낮추며 피해낸다.
그 후, 다시 발동하는 [은신].
예측되는 경로에 허리춤의 단검을 던진다.
그 중 하나에 걸렸지만 상대가 손목의 작은 방패로 막아낸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상대는 검은 후드를 쓴 기분 나쁜 남자였다.
나는 상황을 깨달았다.
"네놈이 20년차구나?"
그러면 그렇지. 저런 지식만 있는 어설픈 녀석의 머릿속에서 계층 점거 같은 계획이 나올 리가 없다.
* * *
더 이상 소녀의 주변에 살아있는 무법자가 없다.
마침내 소녀는 달리기를 멈추었다.
어쩐지 조금은 집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난민촌이나 다름없는 캠프의 사람들은 꽤나 비루한 행색이었고, 그것은 낯선장면이 아니었다.
아저씨가 온 곳과는 다른, 소녀의 지구, 소녀의 한국에서는 종종 보곤 하던 장면이었다.
총과 포가 통하지 않는다함은 현대병기가 무력하다는 뜻이다.
그곳에서 일부 초인들은 아주 중요한 군사력이었으며, 동시에 전략 병기였다.
그 숫자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소녀의 대우도 그랬다.
기쁜 일은 아니었다.
보람이라면 그래도 구해준 사람들이 감사할 때.
지금 그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상대가 괴물은 아니긴 하다.
그러나 소녀의 감각에 무법자들은, 악한 인간들은 딱히 인간이라 여겨지지 않았다.
부모님께는 자주 혼나곤 했다.
사람은 모두 사람이라고.
그 자체로 존엄하다고.
그런가?
언젠가 부터는 그 질문을 입 밖으로 내지 않게 되었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살아갔다.
물론 약함이 선함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약하면서도 악한 이들은 흔하다.
아니, 오히려 더 많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악을 취하는 것은······.
그것을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소녀는 선을 그었다.
딱 눈앞에서, 약함으로 인해 부당함을 당하는 사람들은 구하자고.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선이라고 간주하자고.
그 이후까지 책임질 수 없는 것은 안다.
그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
지금 같은 상황이 그랬다.
약한 이들이 핍박당하고.
소녀는 그들을 구한다.
소녀의 삶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순간들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세계에서는 온전히 공감받기 힘든 생각이었다.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은 인자하시고, 형제자매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그럼에도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있다면 그녀 자신이 체포한 범죄자들 중에 있었을 것이다.
유배자가 된 후의 삶은, 그렇기에 썩 맘에 들었다.
아저씨의 사고방식은 그녀가 생각하던 이상적인 영웅이다.
모두를 구할 수 없다면, 눈앞의 사람만 구한다.
합리적이며 감정적이다.
어라? 잠깐만.
소녀의 생각은 거기서 멈추었다.
2층에서 아저씨는 요정과 오크를 아무렇지도 않게 다 죽이겠다고 했었지.
NPC인 그것들은 사람인가?
NPC가 아니라 쳐도 ‘인간’은 아닌 그것들은 사람인가?
으으으음.
사람이란 게 뭐지?
좋아. 포기하자.
소녀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대신 그녀의 믿음직한 첫사랑이 있는 방향을 본다.
때마침 피가 튀었다.
"저거 뭐야!"
소녀는 비명을 질렀다.
아저씨의 팔이 거의 날아갈 뻔했다.
아직 손도 제대로 못 잡아봤는데!
까지 생각하고 분노하려고 했으나, 가만 생각하니 힐링 포션이란게 있다.
미궁 정말 최고야!
아저씨는 침착하게 반격을 가한다. 상대는 그에 버티지 못하고 물러났다.
두 명의 유배자가 마주본다.
소녀는 걱정하지 않았다.
처음 한 번의 일격으로 어떻게 하지 못했다면 이제 상대에게 승산은 없다.
이 신뢰는 절대적이다.
건너편을 보니 사냥꾼도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파티 리더가 큰 부상을 입었음이 분명한데도 동요는 없다.
눈이 마주쳤다.
사냥꾼이 피식하고 웃어 보인다.
소녀도 마주 웃었다.
끼어들 필요는 없다.
그러고 보면 아저씨가 싸우는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몇 번의 사소한 전투를 목도한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진심을 다하는 모습을 눈에 담은 적이 없다.
과연 어떨까?
걱정이나 놀람보다.
호기심이 소녀의 마음을 가득 채워나간다.
그러면서도 겨우 팔 하나 따위로는 진심을 다하게 만들지 못할 거라는 생각도 했다.
* * *
출혈은 크지만 시간 내에 끝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저 녀석은 찰랑찰랑한 포션을 들고 있을 테니 죽여서 내가 쓰면 문제없다.
그때 상대가 병을 꺼내 들었다.
보란 듯이 흔들기까지 한다.
"이게 필요하겠지? 여기 둘게."
그러며 자신의 앞에 내려놓는다.
한 발짝 물러난다.
손을 까딱까딱.
이야 싸이코 새끼구만 이거.
무법자는 그런 녀석들이 제법 있다. 사실 20년차나 되어서 이런 계층을 점거하려는 놈들은 대개 정상이 아니다.
여기서 정상은 유배자치고도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저 퍼포먼스는 뭐 최선을 다해서 덤벼봐라. 이런 뜻이려나.
멋있지도 않은 게, 이미 기습으로 부상을 입혀서 자신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저런다.
20년이나 굴렀으면 어련히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을 텐데도 저렇게 안전할 때만 과시하는 게 악질이다.
나는 반응하는 대신 [은신]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상대도 사라진다.
은신 상태의 시야는 약간의 장애가 있다.
아주 좁고 어두워진다.
암살자 미러전이라면 감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감이라면.
뭐. 눈감고도 보이지.
저쪽도 비슷할 것이다.
나처럼 명확하게 공격의 순간을 느끼지야 못하겠지만.
슬쩍 공격 의사를 드러내며 은신을 흩트리고.
녀석이 노릴 위치에 베기.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서로의 무기가 튕겨나간다.
사실 나는 출혈중이라 위치가 노출되긴 할 거다.
아주 잠깐이지만 놈의 입가에 미소 걸리는 게 보였다.
상대의 실력을 인정하는 나 멋있어! 이런 건가.
나는 코웃음 치며 점멸했다.
20년이나 구른 녀석답게 상황을 거의 즉시 파악한다.
내 위치를 찾았겠지만. 나는 이미 게이머 녀석이 떨어트린 아밍 소드를 집어들었다.
"과연, 이 나를 보며 벽을 느꼈나. 암살자로서의 싸움을 포기하다니. 칭찬해 주지."
미친 새끼.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들고 다트처럼 던졌다.
놈이 당황한다.
"뭐야! 잠깐만! 화살은 좀 아니지! 단검으로 해라!"
"뭔 개소리야."
이익 하면서 녀석이 은신으로 사라진다. 그런데 던진 게 번개 화살이다.
꽈르릉!
"으기야아악!"
무조건 이길 방법이 있는데 지거나 피해를 입을 확률이 조금이라도 있는 불안정한 수단을 택할 필요가 있나.
혹시 화살을 잘 피하고 달려들 수도 있다.
그럼 리치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는 아밍 소드로 상대할 생각이었다.
애초에 암살자가 암살자를 암살할 상황이 어디 있냐고.
미러전이 나오는 것 자체가 웃기다. 어디서 이상한거만 배워가지고 이놈 시키.
전기 충격으로 경련하는 녀석의 앞으로 다가가서 비웃어준다.
경련하는 와중에도 놈의 얼굴이 치욕으로 떨린다.
"이, 비겁, 한······."
"응, 뭐라고? 패배한 개가 짖는 소리라서 잘 안 들리는데?"
"개 같은, 내가 너 같은 좆밥, 에게."
후, 이건 또 음습한 자존감을 채울 타이밍이군.
마음을 유지하는데 자존감이란 게 어찌나 중요한지.
일부러 귓가에 속삭여준다.
"야, 나 97년차야. 누가 좆밥이라고?"
"흥, 지랄,도 정도껏."
역시 안 믿는군. 잠깐 여신님을 불렀다.
「하, 아무리 그래도 그런 장난질에 신을 써먹나?」
‘하지만 이런 녀석들 놀려 먹는 건 재밌지 않습니까?’
「그건 맞지.」
유일한 신도였던 나는 당연하게도 대전사이며, 대신관이다.
개종을 시킬 권한이 있다.
손을 딱 모아서 기도하는 모습으로 만들어준다.
그렇게 홀라당 혼돈의 신도가 되어버린 놈은 굉장히 어이없어하며 눈을 굴리고.
[혼돈의 여신이 눈앞에 있는 유배자가 97년차가 맞음을 신좌에 걸고 증거 합니다.]
같은 메시지를 보았을 것이다.
"이, 이, 미친······ 새끼."
97이라는 숫자는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나는 대충 안다.
20년차도 30년차도, 이미 과거에 해봤거든.
30년쯤 말년병장을 하고 있는 군인 같은 느낌이다.
정말 굉장하고 대단한데 도대체 뭔가 싶은 그런 느낌.
그리고 뭔가 절대 못이길 거 같은 무시무시한 포스.
처음에는 어이없던 눈이 점차 공포로 물드는 것을 보는 이 감각.
그리고 푹 찔러 죽인다.
아 정말 좋아.
게임은 원래 상대 엿 먹이려고 하는 거다.
「넌 정말로 성격이 나쁘네.」
‘하지만 우리 여신님에게는 따뜻하죠.’
「입에 침은 좀 발라라. 개새끼야······.」
그런데 잠깐.
피가 모자 란가. 어지러운걸.
휘청휘청하고 있다가 달려온 소녀에게 혼났다.
힐링 포션을 뿌리는 걸로 싸대기를 맞아본 건 처음이다.
어쨌건 3층은 평화를 되찾았고, 나는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것에 대한 새로운 단서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