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9화
4층 - Lv.55 낙오 클랜(1)
3층은 빠르게 정리가 끝났다.
애초에 무법자들은 자신들의 패배를 염두에 두지 않고 돌격했다.
거기에 무법자라고 한들, 겨우 3층에서 내려가지 않고 빌빌거리는 놈들은 대다수가 능숙한 유배자는 아니다.
연차가 짧다는 건, 아직 고참들에 대한 두려움을 강하게 품고 있다는 뜻도 된다.
우두머리였을 20년차 중2병 환자와 기타 간부 격이었을 고년차들이 죽어나자 빠졌다.
얼마 남지 않은 녀석들은 모두 항복했다.
나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하나하나 잡아 모아서 대충 묶은 다음에 4층으로 밀어 넣는다.
계단에서 내려가기 싫어 발버둥치는 놈들을 전부 걷어 차줬다.
동시에 입장한다는 개념은 좀 애매하긴 하지만 미궁의 파티 구성자체가 원래 그렇게 이루어진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몰아넣으면 저절로 같은 4층으로 이동하리라.
살아남을지는 내 알바 아니다.
죽이려고 했다면 죽을 각오도 해야지.
5층에서 다시 만난다면 칭찬은 해줄 생각이다.
우리 파티의 대활약 덕분에 난민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여궁수는 아직도 겁에 질려있는 난민들을 한번 보고, 내 얼굴을 한번 보더니 감사를 표했다.
"덕분에 찝찝함 없이 깔끔하게 다음 계층으로 진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 죽이는 건 안 찝찝했고?"
"은원이 아예 남지 않으니 깔끔하지 않습니까."
너무 잘 적응한 기업가로군.
저건 옳은 판단이긴 하다. 어차피 죽어도 다른 세계에서 깨어날 뿐인 유배자 들끼리 관계의 불편함을 남겨둘 이유는 크게 없다.
남긴다면 은혜만 남겨라.
원한의 싹은 미리 다 잘라라.
이것도 언젠가부터 들어온 격언이다.
"난 은혜를 베풀었어. 기억하라고?"
"물론이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직도 의식을 차리지 못한 프로방스를 들쳐 메었다.
상태를 보니 근력에 거의 투자를 하지 않았다.
게임 시절이라면 그렇게 진행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았겠다.
아마 아직도 현실이 되며 달라진 부분을 캐치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럴 수 있어.
세상 사람들이 전부 나만큼 능숙하다고 여기진 않는다.
여궁수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내려갔다.
여신이 투덜거린다.
「그 녀석도 날 주면 안 되나? 만신전에서도 날 고르는 녀석은 도통 없네.」
‘그러고 보니 여신이시여. 도대체 어떻게 신도를 관리했기에 다들 떠난 겁니까?’
「내가 뭘 했겠어? 그냥 혼돈의 신좌가 움직이는 대로 지냈을 뿐이지.」
‘그다지 신명에 저항하지 않는 분이시군요.’
「좋아서 신하고 있는 것도 아니야. 나중에 사탕이나 많이 바쳐라.」
‘무법자들의 시신을 그렇게 많이 제물로 바쳤는데 아직도 배고프십니까?’
「내가 거의 10년은 굶었어.」
세상이 암전한다. 함께 들어갔으니까 같은 파티 취급이다.
5~9인 난이도인건 좀 걸리긴 하지만 어차피 소녀라는 난이도 조절장치가 껴있으니 큰 차이도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지옥이라면 불지옥인지 얼음지옥인지는 중요치 않은 법이다.
[TIP ? 오래되어 푹 썩은 늪지는 아주 위험합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언데드들이 늪 아래에서 산 자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로딩 중의 팁을 보니 욕이 나왔다.
4층에 발을 딛자마자 한숨부터 나온다.
"대체 왜 늪지를 숲으로 퉁쳐 둔걸까."
"숲이 아니라면 넣을 곳도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긴 한데."
모기도 많고 언데드도 많다.
푹 썩은 해골이면 차라리 나은데 어중간하게 살이 붙어있는 녀석들이면 더욱 끔찍하다.
우선 소녀부터가 몸서리친다.
"녹아내린 구울 같은 게 나오나요? 진짜로 그런가요? 제발 아니라고 해줘요."
"나와."
"으으. 으윽."
늪지 언데드들의 가장 큰 문제라면 역시 독이나 병을 잔뜩 달고 있다는 점이다.
근접전투로 싸우다간 몸이 남아나질 않는다.
막내는 눈치 없이 묻는다.
"언데드가 뭡니까?"
소녀는 게임이라도 많이 해본 짬이 느껴지는데. 이 친구는 그럴 기회도 없었나보다.
사냥꾼이 나한테 물어보지 말고 자기한테 물어보라며 귀를 잡아당긴다.
저 아저씨는 아주 잘 받은 거 같아. 훌륭한 일병 포지션이다.
나는 우선 말했다.
"다들 경험치 많이 먹었지? 지금 스탯이랑 스킬 상황 빨리 불러봐."
아무리 그래도 파티원이 아닌 유배자들이 보는 곳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 * *
마인드맵 컨설팅.
저년차들이 혹여 고참을 만나면 껌뻑 죽는 이유 중 하나가 이거다.
모두가 나나 저기 아직 기절해있는 녀석처럼 게임으로서 미궁을 알고 시작하는 게 아니다.
평범한 유배자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갑자기 이 미궁으로 끌려 들어온다.
그들이 스킬의 상호작용과 구조 및 활용을 깨달을 방법은 직접 익혀보는 수밖에 없다.
몇 번이나 죽어야 터득할 수 있을까?
유배자라고 죽음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건 아주 끔찍하고도 끈적한 경험이다.
마음의 한구석에 달라붙어 조금씩 속을 좀먹어가는 그런 것.
광기는 유배자의 가장 오랜 친구다.
어쨌든 그래서 저년차들은 고참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며, 따르려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랭킹 1위 출신의 97년차!
그 어느 미궁에서도 나보다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마인드맵 설계를 하는 녀석이 없었다고 자부한다.
그렇게 싹 만져준 결과.
어느덧 평균 레벨은 30에 근접한 파티는 아름답게 정리된 마인드맵을 보유하게 되었다.
사냥꾼이 평했다.
"제 평생 이렇게 효율적으로 활 레인저에 특화한 마인드맵은 처음이군요."
"원래 극한의 특화에서 파티 플레이의 의의가 드러나는 법이지."
"리더는 듀얼 클래스지 않습니까?"
"아, 나는 트리플이야. 마법직도 겸할 거라."
사냥꾼은 이제 놀라지조차 않는다. 그냥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뿐이다.
그 와중 막내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어리둥절했다.
소녀는 새로 얻은 스킬을 몸에 익숙하게 하려는지 허공에 대거를 휘두른다.
[강격]은 심플하게 강력한 스킬이지만 원래부터 공격력이 부족하진 않은 소녀다.
그래서 사실 크게 부각되지 않는 스킬이었다.
하지만 마인드맵의 기본기들은 죄다 파생기를 가진다.
[궤적 재생]
한번 휘두르고 지나간 자리에 잔상처럼 다시 한 번 더 참격이 지나간다.
정상적으로라면 스탯 제한 덕에 30레벨에 뜰 스킬은 아니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기초 스탯이 조건을 만족해준 덕분에 무리 없이 띄울 수 있었다.
저건 보이는 그대로 두 번 치는 효과를 주어 언뜻 보면 [강격]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약간의 딜레이가 또 다른 성능을 만든다.
아무리 레벨이 높아도 딱히 재생기나 부활기가 없다면 목을 베어 죽일 수 있다.
현실이 된 미궁은 그런 곳이다.
치명타를 입힌다는 점에서 저 미묘한 딜레이 후에 날아드는 참격은 아주 위협적이다.
암습이라면 더더욱.
그럼 이제 프로뭐시기 저놈을 심문해볼까.
터벅터벅 걸어가지만 아직도 묶여있는 채로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는 말했다.
"기절한 척 그만해."
"······역시 알고 있네."
안경에 체크무늬 남방, 그리고 청바지.
머리모양도 바가지다.
이걸 뭐라고 하더라.
그래. 그.
"너드새끼?"
"왜 또 시비냐. 개새끼야."
이게 아닌 거 같군. 늙어서 기억이 잘 안나.
"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대화를 좀 해보자고. 넌 몇 년도에서 왔냐?"
"2021년이다."
"나는 2020년인데."
그렇게 진행한 심문은 솔직히 별 소득은 없었다.
그럴 거라 생각하긴 했다. 흥분이 지나가고 나면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한 법이다.
나 역시 이 미궁에 뭔가 이유를 알고 끌려오진 않았다.
프로방스 또한 어떤 경위로 게임 속으로 들어왔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냥 자고 일어나니 1층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죽고 구르고 고생하고. 간신히 자신의 게임 지식을 활용할 방법을 찾아낸 게 허세라도 부리는 거였다.
"죽는 거 무서워······."
아직은 정상 상태다.
이번 회차에 운이 너무 좋았기에 과감히 도박을 걸었다고 한다.
"너만 아니었으면 성공하는 건데······."
일단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게 있었다.
"너 NPC냐?"
"무슨 소리야. NPC는 저것들이 NPC지."
"아니. 임마. 생각해봐 이스터 에그 본적 있지? 겜 하다가 게임에 끌려온 설정 유배자."
어리둥절한 표정의 안경이 고개를 천천히 기울인다.
의심스러운 표정.
"뭐야, 너 혹시 자기 자신이 NPC일지도 모른다고 믿어?"
"넌 확신할 수 있냐?"
"아니."
"그럼?"
"애초에 그런 걸 왜 의심하는거야?"
역으로 돌아온 질문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의심스러우니까 의심하는거지.
"너랑 난 인간이야. 멍청아. 저것들은 다 NPC고."
한 점의 의심도 없는 순수한 의견이 그곳에 있었다.
"내가 무엇인지는 내가 결정해."
나는 침묵했고. 잠시 후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사과하지. 넌 현명해."
진심이었다. 누군가의 진지한 고민이란 건, 남에겐 우스울 수도 있는 것이다.
97년간 닳아버린 것은 단순히 마음이라고만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정신력이란 것은 지능을 찍으면 올라가는 것이지만, 죽음의 순간마다 과거로 돌아가는 내 정신에 그것이 얼마나 관여할까.
익숙하다고, 무한하다고 생각하는 재시작이 어떤 의미로는 무한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만 더 물어보자.
"너 패치노트 기억하냐?"
"패치노트?"
"내가 사라지고 나서 나온 패치노트에 혹시 100년 제한 설정에 관한 업데이트있었어?"
미간을 찌푸리는 안경.
"아니, 없었다고 생각하는데."
"생각하는데는 뭐야. 확실하게 답이 나와야지."
"그걸 어떻게 다 외워. 1년 치인데."
"그걸······ 못 외운다고?"
이제 노골적으로 인상이 와락 찌푸려진다.
"미친 새끼. 넌 그럼 혼돈의 신 업데이트 언제인지 기억 나냐?"
"14년 7월 23일. 베타 1.27버전."
"제정신이 아냐. 다 집어치워. 씨발."
감정제어가 서툴군. 역시 겜좆밥은 쯧쯔.
"좋아, 물어보고 싶은 건 다 물어봤어."
이제 선택을 강요할 시간이다.
"그래서, 제대로 파티원이 되어볼래? 아니면 여기서 죽여줄까."
어쩐지 대답을 알 것 같았다.
"죽여. 안 아프게 해줘."
"내려갈 자신이 없구나."
"······놀릴 생각이야?"
"아니, 나는 너를 존중해. 만나서 반가웠다."
"하, 나도. 우리 같은 녀석이 더 있을지 모르겠네."
내가 대거를 들자 녀석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맞아, 3층에 블랑쉐가 있었어."
"······고정 NPC 블랑쉐?"
"먼저 내려갔었지. 5층을 못 지나가 묶여있을지도."
5층은 홀수 보스층이다. 대규모 협동 보스전. 그럼 정말로 그럴 수도 있다.
블랑쉐는 게임 시절부터 초기 사망 원인 1위에 빛나는 악명 높은 NPC.
저층에서 만나면 재수 더럽게 없네 소리부터 나온다.
"고마워."
"별 말씀을."
그걸로 끝이었다.
스윽.
목이 떨어진다.
눈치 채지 못했으니 암습이리라.
프로방스는 그렇게 떠났다.
여신이 말했다.
「나는 차라리 이 미궁이 게임이었으면 좋겠군.」
‘저 같은 유배자를 본적이 있으신가 보군요.’
「그래, 이제야 네가 2974번 밖에 안 죽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를 알겠다. 」
* * *
늪지는 어둡고 칙칙하다. 어떤 의미로는 [심연]과도 다를 바 없다.
나는 당연하게도 소녀의 존재를 의식했고, 이곳이 그저 습지라고만 여기진 않았다.
뭔가 랜덤 인카운터가 한두 개는 중첩되어있을 법도 하고, 언데드들의 레벨도 30은 가뿐히 넘으리라.
그럼에도 소녀의 존재는 내게 긍정적이었다.
작동 방식이 뭔지 꼭 알 수 없는 존재는 아니다.
난이도를 올린다.
일견 손해 같지만 실제로는 조금 다르다.
미궁의 몬스터, 즉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대상은 계층에 무한히 존재하지 않는다.
파밍도 무한히 가능한 것이 아니다.
하물며 서든데스가 걸린 층은 구석구석 털어먹는걸 막기까지 한다.
그런 유한한 자원 환경에서 동일 계층 대비 난이도가 떡상한다?
엄청난 이득이다.
더 강한 적.
더 많은 경험치.
더 많은 양질의 장비.
트동트와 성녀만 해도 그렇다.
주요 NPC의 존재를 빠르게 확신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굴릴 수 있는 스노우볼이 달라진다.
원래 같으면 왕국에 도달한 후, 어쩌다가 만나야하는 상대다.
미리 [종족 메인스트림]을 진행 시킬 수 있다면······.
"리더, 저기 무너져가는 성이 보이는데요?"
척후로 앞서나가던 사냥꾼이 신음하며 나를 부른다.
조금 앞으로 나가자 나에게도 보였다.
낡아빠진 첨탑.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성벽.
가정을 바꾸자. 여길 4층이라고 여기면 안 된다.
꽤나 튜토리얼의 후반부라고 생각하고 경우의 수를 따진다면.
"리치나 뱀파이어. 재수 없으면 데미 리치나 뱀파이어 로드. 아주 재수 없으면 천사나 악마."
"언데드가 사방에 깔린걸 보면 천사는 아닐 것 같습니다."
나는 약간 고민한 후 말했다.
"성으로 들어가지 말고 주변부터 탐색하자. 뱀파이어 헌터들이나 성기사단이 있을지도 모르지."
언데드 늪지의 고성은 우호적인 NPC 토벌단도 근처에 있을 확률이 높다.
인간 토착 NPC되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