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0화
4층 - Lv.55 낙오 클랜(2)
당연하지만 토착 ‘인간’ NPC들이라고 유배자를 좋게 보란 법은 없다.
종족만큼은 인간이니 다른 종족에 비하면 훨씬 쉽게 우호관계를 수립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들 역시 살아가며 유배자에게 데여본 적은 있을 터다.
유배자 입장에서 토착 NPC들은 스쳐지나갈 뿐인 자들이다.
층별로 조각조각 나있는 세계의 파편에서 잠깐 잠깐씩 마주할 뿐인 허상 같은것.
하지만 토착 NPC들에게 유배자는 그들의 삶의 일부에 갑작스레 나타나 민폐를 끼치는 불청객들인 것이다.
접근할 때는 조심해야할 필요가 있다.
심지어 정상적인 4층의 인카운터가 아니다. 저들이 우리보다 고레벨임 또한 확실하다.
척 봐도 산 사람이 있을 것 같은 모닥불의 연기를 보았을 때.
나는 모두를 멈춰 세우고 그 사실을 설명했다.
"두목님. 그게 무슨 뜻입니까?"
가장 노련한 축인 사냥꾼은 이미 아는 듯 했으나 막내가 말썽이다.
결국 막내는 또 사냥꾼에게 귀를 잡혀 끌려간 뒤 따로 교육 당했다.
그런데 두목님은 또 뭐야. 호칭이 좀 거시기하군.
소녀는 이해가 빨랐다.
"경우에 따라서는 저들도 적이라는 거군요?"
"2층의 오크나 요정보단 훨씬 셀 거라고 봐야지. 여기까지 원정으로 토벌을 온 친구들이니까."
"최악은 어느 정도죠?"
"토벌 대상이 우리로 바뀌는 정도?"
나는 매 층에서 주어진 상황을 큰 틀에서는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내부의 디테일, 예를 들어 개개인의 성격은 언제나 만날 때마다 다르다.
이건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저 야영지에 유배자에 큰 원한이 있고, 성깔도 더러운 쫌생이가 있다면.
심지어 그 놈이 대장이라면.
아주 큰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대비는 언제나 철저해야한다.
일단 포션 우선 사용 순위를 정한다.
가장 먼저 소비되는 것은 사냥꾼의 것이다.
사냥꾼은 포지션 상 가장 위기에 처하지 않는다.
가장 우선 사용 대상은 막내다.
내가 세팅한 마인드맵은 대체로 시선을 끌고 맞으며 버티는 방향이었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죽도록 두들겨 맞을 운명이다.
방패는 마땅한 물건을 구하지 못해 3층의 문짝을 그대로 들고 왔다.
거기다가 내가 좀 가공해서 멀쩡한 손잡이를 달아줬다.
투박해 다루기가 힘들 뿐, 그야말로 두툼한 원목이라 방어력은 아쉬울 게 없다.
타고난 힘이 좋아 어렵지 않게 다루니 다행이다.
스킬 셋을 손봐주고 간단히 몸을 막는 법을 가르칠 때는 기분도 좋아보였다.
"두목님! 힘이 넘칩니다. 그냥 이걸로 사람 때려도 될 것 같습니다. 와하하!"
미궁에서 가장 중요한 스택 패시브인 마스터리의 효과다.
[방패 마스터리]가 빨리 뜬 건 운이 좋긴 했다. 소녀만큼이 아닐 뿐 기초 스탯 힘이 깡패긴 해서 보정이 많이 붙은 덕이다.
정말 놀라운 사실은 저 친구보다도 우리 여고생의 기초 힘스탯이 더 높단 거지만.
지금도 팔씨름으로 붙으면 저 가느다란 팔뚝에 전부 탈탈 털릴 거다.
민캐가 힘 찍는 캐릭을 어떻게 힘으로 이기냐고.
이동하던 파티 대열의 포지션도 바뀐다.
언데드가 상대라면 [독성 저항]을 보유한 사냥꾼이 앞장서는 것이 맞으나.
사람이 상대라면 막내가 앞서야한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겠습니까! 와하하하!"
본디 거친 일을 하던 녀석답게 흔쾌히 따른다.
뭐, 다들 여러 번 죽는 곳이긴 한데 아직 실감은 안 나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저렇게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건 좀 대단하다.
아니, 그냥 생각이 없는 건가?
어쨌든 그렇게 야영지로 조금씩 전진하던 중.
"리더, 저것은."
"필드 보스겠지?"
언데드 늪지의 가장 큰 특징은 대부분의 몬스터가 늪 아래에 잠들어있다는 것이다.
소란이라도 나면 아주 난리가 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저 잠들어 있을 뿐이다.
저 불투명한 물속의 진흙에 얼마나 많은 괴물들이 묻혀있을까?
그 중엔 대놓고 드러나 있는 녀석들도 있다.
"악어인가?"
"공룡이 따로 없군요."
살아있는 악어는 아니다.
무슨 에이션트 악어라도 되나 싶을 정도로 거대한 뼈의 일부였다.
갈비뼈 사이즈로 추정컨대, 2층의 그리폰과 싸워도 지지 않을 것 같은 대괴수다.
"굉장히 멀리, 멀리 돌아가자고."
잡고 내려갈 생각은 있다만, 저걸 지금 건드려 깨우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생물이라 내장을 노려 제압했던 그리폰과는 다르다.
그냥 뼈다귀니 폭발 열매와 심연에서 확보한 특수 화살을 다 털어 넣어도 힘들지 모른다.
"힐링 포션을 다 처넣으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말고 나중에 꼼수로 좀 조져야겠어."
악어를 피해 크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엉금엉금~ 기어서가자~♬"
썩은 구울 같은게 보이지 않아 기분이 좋은지 소녀가 혼자 이상한 노래를 부른다.
듣기는 좋으니 내버려두자.
가뜩이나 늪지라 선회도 힘들었다. 흥이라도 내면 좋지.
직진하여 물가를 가로지르면 아래에서 해골 손들이 올라와 발목을 붙잡을 것이다.
늪이 아닌 단단한 땅을 골라 야영지까지 가는 일은 슬슬 미로 찾기나 다름없었다.
"저 사람들은 왜 이런데서 야영을 하는 거예요?"
"늪지의 섬 같은 거겠지."
"그거 말구, 왜 이런 칙칙한 곳까지 와있는 걸까요?"
"오, 그건 좀 좋은 지적이야."
생각 외로 고참이 아닌 유배자들은 토착 NPC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도 사정이, 삶이 있음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면 기다리는 것은 파국뿐이다.
사실 게임 시절에도 우호도를 좆까는 플레이어들은 생각 외로 많았다. 그 시절엔 솔로로 무쌍난무도 불가능한건 아니기도 했고.
"어, 뭔데요. 왜 그러는데요."
"잘했다고 칭찬하는 거야.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해야해."
머리 만지는 걸 딱히 싫어하지 않으니 부담 없이 문질문질 해준다.
"우리한테는 층마다 하나하나 독립된 세계로 여겨질 수 있지만, 저 사람들한테는 이 맵 바깥이 있단 말이야."
대강의 스토리는 언제나 그런 식이다.
고성에 사는 무언가가 인간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고, 근처에는 마을······ 보다야 도시규모일 확률이 높겠지.
마을 정도는 전멸해도 그러려니 하고 내버려두기 마련이다.
"아마 여긴 출입 금지된 위험지대겠지. 그래서 방치되다 보니까 뭔가가 저 고성에 똬리를 튼 거고."
"그때 그 주술사도 그럼 이 층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나요?"
"그루터기 요정들은 이런 늪지 근처에 안 살아. 기후적으로도 차이가 크니 공간적으로도 거리가 멀다고 봐야지. 물론, 시간이 많이 어긋나있다면 여기서 만날 수도 있긴 해."
"복잡하네요. 그래도 알 것 같아요. 유배자와는 또 다르게 이곳의 NPC들도 자신들의 세계의 주민인거군요."
소녀가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이 아이 지능 스탯이 몇이었더라? 참 알려줄 때마다 똑바로 잘 알아들어서 기특하기 그지없다.
사냥꾼도 소녀의 그 모습을 보면 흐뭇하게 웃었다.
저 자신이 생각났을 거다.
요정이 좋아 그 마을에서 함께 살기까지 했던 사람이다.
동료를 잃어 그리되긴 했다지만 싫었다면 곧바로 죽어 다시 시작했으리라. 그만한 애착이 군데군데 보인다.
아니 집착이라 해야 할까.
지금도 요정의 활을 만지작거린다. 벌써 손때가 탄 것 같다.
* * *
음침한 늪지지만 나름대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그 바람에 누군가 방심하기 딱 좋았을지도 모른다.
"저 저 저, 두목님. 이거 뭐 뭡니까?"
막내의 발목이 무언가에 붙잡혔다.
늪에 빠져든 것은 아니다. 사냥꾼이 제대로 인도하고 있었다.
막내로선 이건 운이 나빴다. 하지만 이걸 체크하지 못한건 나나 사냥꾼의 방심이다.
진흙 속에서 뼈다귀 하나가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한다.
"으히이익!"
"쉿! 조용히 해! 쉬잇!"
덩치가 크니 목소리도 우렁차다. 사냥꾼이 조용히 시키려다 아예 쥐어박았다.
막내는 그럼에도 기겁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언데드라는 단어조차 모르던 남자다. 움직이는 해골이라고 설명을 들었지만 그래도 패닉에 빠질 법은 했다.
사냥꾼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죽여서 조용히 시킬 셈이다.
나는 사냥꾼을 말렸다.
더 좋은 생각이 났다.
발목을 붙잡은 해골 손을 밟아서 부서뜨렸다.
사방에서 산 자를 찾아낸 언데드들이 부글거리며 일어나기 시작한다.
나는 소리쳤다.
"달려! 야영지로 달려!"
조심스레 가서 상황을 지켜본 다음, 교섭을 하거나 해볼 생각이었는데.
이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아예 심연에서 수집한 폭탄 화살을 한발 장전하고 갈겼다. 에이션트 악어의 갈비뼈 하나가 쾅 하고 폭발한다.
부서질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살짝 금이나 갔나 모르겠다.
거대한 뼈다귀가 뒤편에서 진흙을 갈아엎으며 일어서기 시작한다.
지진이라도 난 듯한 무시무시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성과는 거리가 좀 있어서 다행이다. 거기서 여기까지 온다 쳐도 시간은 많이 걸리겠지.
뒤를 생각하지 않고 달리니 야영지는 빠르게 가까워진다.
그만큼 깨어나는 언데드들의 숫자도 늘어났다.
나는 일부러 최후미에 빠져 파티원이 낙오되지 않게 신경 썼다.
소녀가 눈치를 살짝 보더니 내 곁으로 와 나를 도우며 상호 보완한다.
사냥꾼은 막내를 챙기느라 바빴다.
야영지가 소란스러워진다. 이 난리가 났으니 무기를 들고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힘껏 소리쳤다.
"나으리들! 살려주십쇼!"
뭐가 되었건 인간으로서 인간의 적을 말살하러온 토벌대일 테니 외면할 수는 없을 거다.
"몇 명이지? 모두 무사한가?"
기대했던 대답이 돌아온다.
검은 망토를 두른 일단의 무리들이 야영지가 있는 섬에서 달려 나왔다.
열 댓 명 정도, 움직임만 보아도 전문가의 느낌이 난다.
복장을 보아 성기사단은 아니다.
그렇다면 뱀파이어 헌터인데, 검은 망토에 검은 후드라니. 이거 그거잖아.
[나이트 크로우]
등장할지가 확실하지 않을 뿐, 등장한다면 반드시 검은 복식에 후드를 쓰고 다니는 네임드 단체.
존재 이유는 뱀파이어나 악마 따위, 인간의 적인 것들의 구제다.
그야말로 인류의 수호자 같은 무언가인데, 저들을 확인한 순간 내 판단이 옳았다고 여겨졌다.
여기서 이들과 싸우면 절대 못 이겼다. 피해자 행세가 맞다.
홀로 후드를 눌러쓰지 않은 이가 가장 앞장서서 달려왔다. 속도가 아주 빠르다. 상당히 고레벨의 전사인 모양이다.
오른쪽 눈은 안대로 덮여있다.
토벌대의 대장인 것 같은데 특징을 대조 해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으니 고정 NPC는 아니고 랜덤으로 생성된 타입이다.
우리 파티와 나이트 크로우의 대장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달리기를 멈추고 몸을 돌려세웠다.
필드의 악어 정도는 어떻게 제압해주겠거니 싶지만 원호하는 편이 낫다.
저 악어는 그다지 약한 녀석이 아니다.
경험치도 좀 먹을 겸······.
내가 잘못 봤나?
스쳐지나가는 외눈의 검사는 중력이 고장난 것 마냥 붕 하고 뛰어 올랐다.
치켜든 검은 일렁이는 도깨비불 같은 것이 덮여있다.
소드 마스터라고?
그럼 성에는 못해도 뱀파이어 로드가 있겠군. 아무리 그래도 클랜 마스터급은 아니겠지?
그럼 아카샤의 눈으로 찔러야 한다. 그러고 싶지는 않다.
* * *
악어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썰렸다.
소드 마스터는 마인드맵적으로 굉장한 상위직이다.
최소한 지능과 힘 듀얼을 타야 오러 블레이드의 조건을 채울 수 있다.
성능적으로는 마력을 사용하는 극딜 마검사에 가까운데, 공격력은 게임 상 정점에 가까울 정도지만 그거 말곤 다 별로인 변태 클래스다.
유배자가 하기에는 썩 좋다곤 못하는 로망만 있는 클래스지만 토착 NPC 중에서는 은근히 보인다.
왜 그거 있지 않나. 내가 하면 구린데 적이 하면 너무 강력한 직업.
"나는 더스번이라고 하네. 거기 자네들은."
소드 마스터가 우리 파티의 행색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살핀다.
인종부터가 제각각이니 무조건 들킨다.
"유배자로군?"
나는 넙죽 엎드렸다.
"아이고, 나으리. 저희가 비록 온 세상을 표류하는 유배자이긴 하나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하지 않겠습니까."
"음, 그래. 유배자도 결국 인간이지. 하하하!"
"하하하!"
좋아. 이 존나 센 소드 마스터는 유배자를 특별히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기적의 샘물도 좀 바치고 어떻게 잘 구슬려서 날로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발! 이번 층 날로 먹게 해주세요!
----- 작가의말 -----
물론 날로 먹진 못할겁니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를 조금만 해보지요.
바로 전 챕터에 등장한 ‘프로방스’는 사실 저라면 이럴 것 같다.
이 생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캐릭터입니다.
아무리 게임적인 지식을 모두 알고 있다고 해도 칼들고 싸우는거랑은 다른 문제니까요.
가장 빠른 정착 루트인 ‘서든데스 없는 3층’이 나올때까지 계속해서 죽을 거지만 자살할 용기도 없어서 죽여달라고 하는... 그런 느낌일것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