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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34화 (34/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34화

4층 - Lv. 325 바르바로이(3)

뱀파이어 로드를 빛으로 밀어 넣기 위한 작업은 내 기대 이상으로 정밀하게 진행되었다.

더스번 경은 완전히 공세를 포기했다.

다만 바르바로이가 좀 더 약한 누군가를 죽여 피를 취하는 것만을 철저하게 견제했다.

열댓 명 정도 되던 나이트 크로우 인원은 마법사를 제외하고는 전원 활을 들었다.

궁수와 검사의 멀티 클래스인 모양이었다.

마물 사냥꾼으로서는 아주 적절한 판단이다.

더스번 경이 상대를 놓치려고 할 때마다 손짓한다.

즉시 신성한 화살이 상대에게 날아들어 한 호흡을 번다.

인간은 대체로 근접전의 약체 종족이다.

마법을 타고나는 것도 아니다.

정령과 대화도 못 한다.

미궁 기준으로도, 대륙을 기준으로도.

장점이 거의 없는 게 인간이다.

저런 식으로 자신을 갈고닦으며, 인원을 활용한 연계를 배우는 것만이 살아남는 법이다.

더스번 경은 전법을 바꾸고 나선 아주 효과적이고 지속적으로 바르바로이를 봉쇄했다.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으나,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다.

결코 선공을 하지 않는다.

폭발이 되기 직전의 마력만 검기로 끊어낸다.

소드 마스터씩이나 되는 검사가 마법 자체를 봉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마법적 폭발이 빛이 들어올 구멍을 내는 소리 외에는 전장이 고요해졌다.

마법사는 꾸준히 마법으로 천장을 철거했다.

빛의 면적이 점점 넓어진다.

시간이 지나며 회복약도 일하기 시작한다.

즉각적인 치유 효과를 제공하는 치유의 샘물이 이상한 것이다.

마물 사냥꾼 단체 내에서 사용되는 회복약이다.

진통과 지혈의 효과라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을 것이다.

출혈이 멎자 흡혈귀의 회복력도 감소한다.

소녀도 팔에서 빨려 나가던 핏빛 안개가 사라졌다.

충분히 안정된 상황으로 보였다.

해가 지려면 한참이나 남았다.

나는 낙관적이지 않았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은 인간이다.

더 정밀해야 하는 게 이쪽이며, 기회를 노리는 것은 뱀파이어 로드다.

그래서 더스번 경이 처음에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젠 이미 상황이 많이 나쁘다.

나는 파티원들이 위험 지역을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고 소리 없이 [은신]으로 녹아들었다.

이런 말 하기는 미안하지만, 내게 더스번 경을 포함한 나이트 크로우의 지휘권이 있었다면 이미 이긴 싸움이었다.

우리 파티원들의 스펙으로는 그게 힘들었을 뿐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대체해야 한다.

잘 훈련되고 복수심에 불타는 마물 사냥꾼들은 훌륭한 잇몸이다.

고요한 신경전 속에서.

모두의 의식 속에서 내 존재가 잊혀지고 있다.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태양 빛만이 관심사다.

이런 순간이야말로.

암살자의 시간이다.

* * *

더스번은 상황의 불리함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언뜻 팽팽한 대치라면.

더 난이도가 높은 쪽이 불리하다.

바르바로이는 그저 폭발을 구현할 뿐이다.

더스번은 그 마법을 타이밍 맞게 베어 내야 한다.

바르바로이는 앞으로 열 번은 더 피해를 입어도 여력이 있다.

이쪽은 애초에 피해를 입었다면 거의 즉사다.

이 상황은 인간에게 줄타기에 불과하다.

파국은 생각보다 조금 더 이르게 닥쳐왔다.

더스번은 평생을 검만 잡아 온 사내다.

그에게도 숙련된 마법사가 구사하는 마법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묘기다.

완벽하게 베어내는 것은 차력이다.

마력이 모이고, 식을 갖춘다.

폭발이 되기 직전 베어내었다고 생각했으나.

속임수였다.

흩어진 마력의 띠는 다른 곳에서 뭉쳤다.

옆구리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어거지로 전개된 마법이기에 미약하지만 부상은 부상이다.

통증으로 감각이 무뎌지고.

반응이 약간 느려지고.

그 부상은 피를 흘리며 상대를 회복시킨다.

살얼음판 위에서 펼쳐진 고착 상태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검을 세워 타격을 막는다.

검기가 씌워진 검은 아쉬운 대로 치명상을 막는다.

폭음과 함께 더스번이 날아갔다.

이런 일을 대비해 캐스팅 중이던 마법사의 마법이 들어간다.

뱀파이어는 박쥐가 되어 흩어졌다.

오랫동안 캐스팅하며 마력을 꾹꾹 눌러 담은 속박의 주문이 박쥐를 일부 묶는다.

‘기적의 샘물을 한 병은 받아둘 걸 그랬나.’

지금 생각하면 오만이었다.

유배자들에게 너무 기대를 안 했다.

봐온 것들이 그래서였다.

날아간 끝에 누군가 그를 받아낸다.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

"필요한 순간, 이걸 적에게."

무늬 없고 장식 없는 특징 없는 단검 하나.

뭔지 안다.

일부 암살자들이 타고나서 활용하곤 하는 이적이다.

"이런, 마지막도 자네에게 맡기게 생겼군."

혼잣말처럼 했으나 들렸겠지.

방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믿는다.

버림 패로 여긴 이가 이미 기대 이상의 일을 해주었다.

이젠 더스번이 믿어줄 차례다.

* * *

한 명이 죽었다.

더스번 경은 현재 일대일로 뱀파이어 로드를 억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존재다.

아주 잠깐 이탈한 순간 일어난 일이었다.

흡혈귀가 사라졌다.

활을 내던지고 검을 뽑아 들어 응전하려고 했으나 한순간에 머리를 붙잡혔다.

그리고 폭발했다.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인간의 몸속에 마력을 흘려 넣어 폭파시켰다.

살상력만큼은 최고봉에 도달한 지근 거리 마법사답다.

성인 남성의 혈액 5리터.

폭발로 일부는 소실되었을 것을 감안해야 한다.

그럼에도 엄청난 양의 피가 바르바로이의 몸에 빨려 들어간다.

놈의 몸에 생기가 돌아온다.

나는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놈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가까운 위치다.

내 은신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생각대로 마력 감지는 그만둔 지 오래다.

교활하고 늙은 뱀파이어 로드로서도 생사가 달린 싸움이다.

여력이 충분치 않다.

우리 파티가 빠져나가는 것도 보았다.

타이밍은 더스번 경이 지정할 것이다.

소드 마스터가 다시 뛰어들었다.

죽은 부하에 대한 분노가 드러나진 않았다.

약간의 애도가 느껴질 뿐.

나이트 크로우는 본디 그런 조직이다.

* * *

더스번은 과감하고도 유능한 유배자들의 리더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전혀 몰랐다.

하지만 그가 은신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 이상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는 안다.

암살자들에게 최고의 타이밍은 상대가 생각지도 못한 순간이다.

소드 마스터는 다시 공세를 시작했다.

불상사가 있었으나 햇빛이 닿는 영역이 확실히 늘었다.

박쥐로 흩어져도 운신의 폭이 확연히 좁다.

견제로 날아오는 화살도 일부 박히기 시작한다.

훨씬 회복되었으나, 마냥 불리해진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더스번은 이대로는 패배를 지연시킬 뿐이란 사실을 안다.

그의 마법사는 유능하다.

이해할 수 없는 지시도 따른다.

몇 가지 사인만으로 특정 마법을 캐스팅시킨다.

조금 기다린 후, 발사를 명했다.

* * *

과감하다.

생각 이상으로 과감하다.

더스번 경은 마법사에게 인력을 일으키는 주문 [그래비티]를 캐스팅 시켰다.

지형지물을 활용할 생각이 아니라면 거의 의미 없는 마법이다.

지금 사용하게 하는 이유는.

직감할 수 있다.

더스번 경이 돌격한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목숨을 도외시한 직선적인 공격이다.

바르바로이는 한순간 당황했고, 반격 없이 즉시 박쥐가 되어 흩어졌다.

기묘한 기백에 위협을 느낀 모양이다.

외눈의 검사는 전력을 다해 마력을 방출했다.

로켓과도 같은 추진력이 몸에 실린다. 그 기세를 그대로 담아 한 번 더 가속된 검기까지 날아간다.

나는 보았다. 화려한 반월형의 마력 바로 뒤편, 아주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단검을 던졌다.

깔끔한 투척은 아니다. 궤도도 불안정하다.

그래도 어차피 이동 수단이다.

둘의 한가운데에 [그래비티]가 발동한다.

흩어지던 박쥐들이 모여든다.

위치를 옮길 수 없게 되자 제자리에서 재형성된다.

심장만 피한다면 괴물의 승리다.

의문 가득한 얼굴로 뱀파이어 로드가 양손에 마력을 피워 올린다.

불꽃이 휘감기고. 검기를 일그러뜨린다.

인간과 괴물의 마력이 뒤틀리며 서로 얽혔다.

방어를 모르는 두 클래스가 오늘 유일하게 벌이는 정면 승부였다.

이 싸움은 인간이 반드시 진다.

더스번 경의 팔이 날아갔다.

신체에서 떨어지자 검기도 벗겨진다.

낡은 검이 마법을 이기지 못하고 휘어지고, 결국 부러졌다.

최소한의 방어도 불가능해졌다.

다음번의 마법이 외눈의 검사를 덮친다.

여기서 끝.

바르바로이는 그렇게 생각한 게 분명하다.

나는 점멸했다.

그리고 병의 물을 끼얹었다.

* * *

늙은 클랜 마스터로서도 기겁할 만한 일이었다.

성수가 차라리 낫다.

저 유배자들이 들고 다니는 기적의 샘물은 위력이 문제가 아니라 지나치게 고통스럽다.

오늘 이미 몇 번을 죽었던가. [피의 샘]도 바닥이 보인다.

고통에 몸을 떠는 동안 몇 번이나 죽을지, 혹은 심장이 갈라질지 알 수 없다.

인간 소드 마스터를 향해 흐르던 마력의 방향을 바꾼다.

끼얹어지는 액체를 향해 불길이 터진다.

한 방울도 닿게 하지 않겠다.

몸을 흩뜨린다.

안개화를 할 힘이 남지 않아 일일이 박쥐로 만들어야 한다.

몸의 한 점 한 점이 살아 움직이는 흡혈박쥐로 변해 떨어진다.

저것들은 육신이자 분신이다.

한 마리, 한 마리가 신체의 특정 부위를 의미한다.

몸에 새겨진,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권능 또한 박쥐의 형태로 변하여 날아간다.

단 세 마리.

* * *

내가 권능에 가까운 고유 장비를 벗겨내는 게 버그성이라 판단하긴 했다.

그 이유가 꼭 그게 게임 시절 불가능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심연은 미궁의 시스템이다.

토착 NPC들은 미궁의 존재를 잘 이해하지도 못한다.

단지 그 영향을 어느 정도 받으며 살아갈 뿐이다.

그들에겐 마인드맵조차도 없다.

카크리쉬가 심연을 섬기는 것은 [히어로 유닛]이라서다.

[히어로 유닛]이란 건 미궁의 흐름에 속한 자들.

그 외의 NPC들은 그런 것을 알지 못한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살아갈 뿐이다.

그런 존재가 갑자기 심연으로 추방당하면 어떻게 될까?

심연은 무너져 내려 붕괴한 계층이 쌓이는 쓰레기장.

나는 이 세계의 설계자가 아니다.

그러나 상황은 충분히 의미심장한 일을 암시한다.

바르바로이는 반사적으로 도망쳤다.

호되게 당하고 어쩌면 죽을 뻔까지 했었는데.

액체를 끼얹는 것에 놀라서 반응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내가 보인 순간, 내 손에 들린 것을 본 순간.

이미 등에서 날개들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사실 그냥 아무 병에나 대충 떠온 물인데.

나를 향해 일으킨 폭발은 급격하게 각도를 꺾는 [대시]의 연속 사용으로 회피하고.

봐두고 있던 박쥐 세 마리만 잽싸게 움켜쥔다.

죽여서는 안 된다.

그러면 피로 되돌아가 다시 저놈의 육신을 이루리라.

날개에 한방씩 칼침을 놓는다.

쿠라레 독은 혈액을 타고 흐른다.

본체가 뱀파이어 로드여도 조각난 박쥐의 상태로는 힘 좀 센 짐승일 뿐이다.

저릿한 증상이 곧바로 퍼진다.

버둥거리던 박쥐들이 움직임을 멈춘다.

고개를 들었다.

뱀파이어 로드는 한눈에 봐도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태도였다.

살아남아야 할 박쥐는 심장인 부분 한 마리뿐이다.

나머지 박쥐들은 죽더라도 재생할 수 있는 피해에 그친다.

하지만 왜 굳이 마비까지 시키며 방해를 하는가?

꼭 그런 표정이다.

나는 움직이지 못하는 박쥐 셋을 보란 듯이 흔들어 보였다.

눈치채라.

눈치채야만 한다.

이게 어느 부위인지.

직관이란 순간적이다.

바르바로이의 눈이 빠져나올 듯이 커졌다.

지금까지의 침착하던 모습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허겁지겁 손을 뻗는다.

생각이 미쳤다.

그럴 리가 없음에도.

내가 이 권능을 자신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모든 의식이.

시각이.

마력 탐지가.

오로지 나에게.

그리고 내가 붙잡은 세 마리의 박쥐를 향해 집중된다.

그것이 패인이다.

살이 꿰뚫리는 섬뜩한 소리가 났다.

[투명화]가 풀리며 바르바로이의 바로 뒤편에 선 소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모든 신경이 이쪽에 집중된 순간이었다. 더없이 완벽한 ‘암습’이다.

아카샤의 눈이 웅웅 울어댄다.

짙푸른 어둠이 발생했다.

뱀파이어로드는 한순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 못하고 가슴을 더듬었다.

고풍스럽고도 장식적인 날이 가슴을 관통한 채 삐져나와 있다.

보랏빛 날.

아카샤의 눈.

뱀파이어는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

소리치려고 했는지 단순한 신음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카크리쉬가 사용했던 추방의 권능과는 다르다.

그것은 저항 가능한 힘이며, 마법으로도 구현할 수 있는 원리를 가진다.

아카샤의 눈에 암습을 당했을 때, 발생하는 [추방]은 이펙트부터가 다르다.

찔린 중심으로부터 몸이 한 도트, 한 도트 분해된다.

눈으로부터 발생한 어둠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과도 다르다.

그 사이로 녹아들 듯.

일체화되듯 스며든다.

입자로 흩어진 몸이 완전히 사라졌다.

고성에 둥지를 틀고 있던 괴물을 집어삼킨 어둠은 그제야 포식했다는 듯 크게 진동하고는 사라졌다.

나는 나이트 크로우의 마법사를 향해 미소 지으며 엄지를 들어주었다.

그쪽도 쓴웃음 지으며 마주 든다.

[투명화]를 소리소문없이 캐스팅하는 건 쉽지 않았겠지만 잘도 해줬다.

우리 파티가 완전히 이탈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나만 남은 것처럼 연출했다.

최초의 공방에서 이미 충분한 경계심을 샀으나, 소모도 컸던 파티.

바르바로이 입장에선 우리가 나이트 크로우와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공격당할 거라곤 상상하기도 힘들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으리라.

소녀가 달려왔다.

손에 들린 단검은 여전히 보랏빛 광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빛나던 세 개의 검은 진주 중 하나의 빛이 사라졌다.

"아저씨! 경험치 안 들어왔어요!"

달려온 소녀가 불평을 했다.

그건 좀 안 좋은 소식이긴 하군.

심장을 맞은 것 같았는데. 위치를 애초에 옮겨두고 있었나?

의외로 흔한 수작질이긴 하다.

뭐, 그래도 난생처음 심연 구경을 간 녀석이 살아남을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거긴 흡혈할 인간도 없다.

진짜 엄청 힘들었다.

바르 뭐시기 놈아. 제발 그대로 뒈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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