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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35화 (35/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35화

4층 - Lv. 325 바르바로이(4)

박쥐를 모아 놓고 꿰뚫는다.

나는 왜 박쥐 상태로 흩어진 뱀파이어의 일부가 함께 추방되지 않는지 잘 모르겠다.

게임 시절 박쥐화는 그냥 이동기 겸 회피기였다.

지금처럼 다양한 응용이 가능하진 않았다.

죽은 박쥐들은 혈액이 되어 흐르며 주인을 찾아 꿈틀거리다가.

이내 힘을 잃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마치 날개처럼 갈라진 붉은 망토.

사람이 쓰기엔 퍽 괴이한 형상이고, 실제로도 쓸 수 없다.

종족 제한이 걸린 장비다.

등급으로 치면 레전더리쯤 되려나.

본래는 아이템 형태로는 획득할 수 없는 장비라 나도 잘 모르겠다.

뱀파이어가 되고 나면 이 망토를 보이며 클랜 마스터 행세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말 고맙다는 것 말고는 내 뭐라 할 말이 없군."

물론 나이트 크로우가 보는 앞에서 그런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다.

당장 이번 층에서 뱀파이어가 될 수는 없지.

더스번 경은 간신히 상체를 일으켜 기대고 있었다.

사라진 양팔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른다.

입가에도 피가 흐른다.

"유언을 남길 시간 정도는 있어서 다행이야."

이 아저씨는 왜 이렇게 침통하게 최후를 준비 중인 거지?

주변 다른 대원들 역시 마찬가지의 분위기다.

오직 마법사만이 나와 그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거참 왜 이래. 말 꺼내기 힘들게.

"두목니임!"

커다란 덩치가 사냥꾼과 함께 달려온다.

다행스럽게 딱 맞춰 도착했군.

더스번 경의 시선이 소리치는 우리 막내를 향했고, 그 손에 들려 있는 병을 향했다.

2층에서의 내 눈빛과 비슷한 것 같다.

더스번 경의 얼굴에 실소가 피어난다.

"아, 내가 이 생각은 또 못했군."

"경께서 어제 저쪽 방면의 괴물들을 다 청소해 두셨지 않습니까. 전력으로 달려가서 한 병 받아오라고 했습니다."

"이거 참, 신세만 지는군."

"어제 구해주신 것으로 퉁치겠습니다."

여기서 죽게 둘 수는 없다.

다른 층에서 든든한 우군이 될 테니.

소드 마스터는 다시 팔이 재생하는 장면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왜 늙은 귀족들이 흡혈귀에게 물리려 하는지 알 것도 같군그래."

소드 마스터는 품속을 뒤적이더니 까마귀가 양각된 펜던트를 하나 꺼냈다.

"다음에 다른 곳에서 우리를 만날 일이 있다면 보여주게."

"귀한 물건이군요."

안 주나 했다.

나이트 크로우 1회 자유 이용권.

속마음은 아주 해피하지만 티 내지 않고 근엄한 척 받아들었다.

치유의 샘물은 게임적인 힐링 포션 그 자체지만 체력을 회복시켜주지는 않는다.

더스번 경은 바닥에 쏟아진 자신의 피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자리를 옮겨 드러누웠다.

"좀 쉬어야겠군."

참 태평한 사람이다.

아무렇지 않게 눕더니 코를 골기 시작한다.

마법사가 다가왔다.

"장난 아니었소."

여전히 앳되어 보이는 얼굴과는 한없이 괴리가 큰 말투다.

나는 주변에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선배님?"

"이런, 들켰나."

"인간도 아니시군요."

"인간 카드를 찾지를 못해서 요정인 채로 100년이 끝나버렸지. 귀만 마법으로 가리면 구분하기도 힘드니까."

짝수 층에 정착한 유배자는 그곳에서 100년이 끝난다면 ‘미궁의 주민’이 된다.

계층이라는 공간의 제약도 사라진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 공간, 그 시간대의 주민이 되는 것이다.

"그 말투는 컨셉 플레이십니까?"

"아니, 이건 내가 원래 칠십 먹은 할아범이라 그렇소."

"오우……."

카드로 인한 종족 변경은 연령대를 조정할 수는 있긴 하다만 이건 좀.

뭐 그래도 사람이 회춘하고 싶을 수도 있지.

이건 따지지 말자.

대신 다른 권유를 했다.

"한 번 더 미궁에 뛰어드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유능한 마법사다. 한동안 파티원이 되어준다면 아주 좋을 것이다.

"난 이곳이 마음에 든다오."

그럴 것 같긴 했다. 아니라면 농사라도 짓지, 이런 집단에 속해 있진 않을 거다.

"저분께 신세 진 것도 있고."

코를 고는 더스번 경에게 다른 대원이 망토를 덮어 놓았다.

확실히, 아닌 척은 다 하지만 엄청나게 좋은 사람이다.

"나는 도전자는 아니었지. 그저 떠돌다 보니 100년이 지나갔을 뿐이오. 하지만 자네는 제대로 된 도전자로군."

그 얼굴에는 약간의 회한이 서려 있을까.

수명이 아주 긴 요정이다.

100년이 지났다 한들 그 이후에 다시 세월이 흐른 게 얼마인지는 모른다.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는 노인 같은 눈이다.

군대가 그렇듯, 유배자로서의 삶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된다.

"그런데 그건 설마……."

내 손에 들린 망토를 보고 하는 소리다.

심연의 성물이라며 아카샤의 눈을 한눈에 알아보았을 정도다.

겸양과는 다르게 도전을 꽤 오래 했던 베테랑일 거다.

"바르바로이의 권능이죠."

"흠, 그걸 훔쳐낼 방법이 존재했었소?"

눈빛이 굉장히 아련해진다.

"하하, 예전에 많이 데이셨나 봅니다."

"말도 마시오. 10인 파티로 철저하게 준비했는데도 전멸한 적도 있었지. 인간이 상대이면 얼마나 강력해지는 건지."

"마투사라 다행이긴 했습니다."

"팔이 짧은 클래스는 영 별로지."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그걸 얻었으니 뱀파이어가 되거나 파티에 하나 꼬셔서 키울 생각이겠소."

"나중에 좀 잘 부탁드립니다."

"다른 대원들이 뱀파이어를 증오하는 거야 어찌 못 하오. 그래도 나는 만나도 못 본 척해주도록 하겠소."

그러면서 눈을 찡긋한다. 속에 든 사람을 생각하면 주책이긴 한데.

십 대 소년 같이 어린 외모로 하니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

"이미 연이 닿았으니 다른 계층에서 다시 만나겠군. 아참, 내가 유배자였던 건 아무도 모르니까 비밀로 해주시오. 그럼 건투를 빌지."

마법사는 손을 흔들며 뒤로 돌아서 걸어갔다.

어르신, 괜히 폼 잡으시네. 난 밥 한 번 더 얻어먹고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오래된 유배자들은 저렇게 되는 경향이 좀 있긴 하다.

* * *

휴식은 중요하다.

그날 저녁까지 야영지에서 소소하게 잔치를 벌였다.

공기야 습하고, 냄새도 나쁘지만 야영지 주변에 더 이상 위험한 건 없었다.

더스번 경은 기꺼이 고급 사슴 털 침낭을 제공해 주었다.

다른 대원의 것이었지만 분대장인 자신의 것을 내놓는데 토를 달 대원은 없었다.

실제로도 아쉬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각종 물자도 지원받았다.

"저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무엇이 있을지 전혀 알 수 없다고 들었네. 더위라면 좀 낫지만, 저 북부 설원이라도 가버리면 위험하겠지."

"어이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경."

"나 말고도 이 주변 도시 사람들 모두의 생명의 은인 아니겠나. 사양 마시게."

어제는 그다지 술을 입에 대지 않은 사냥꾼도 오늘은 벌컥벌컥 집어넣었다.

막내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데 주변 사람들도 다들 취해 있어서 아무도 말리질 않았다.

더스번 경이 그 사이에 끼어들어 팔을 흔들기 시작했을 때는 차마 보질 못하겠어서 눈을 돌렸다.

뒤늦게 기절해 있다 깨어난 여신도 마구 졸라대었다.

양해를 구한 후, 음식을 공물로 바쳐 올려드렸다.

일단은 악신 계열인 혼돈의 신이라 눈치가 보이긴 했으나 다들 크게 신경 쓰진 않는 눈치다.

그러나 술은 괜히 올린 것 같다. 꽐라가 된 신이란 건 좀 보기 그랬다.

「야! 이 씨! 내가 어! 왕년에 잡은 클랜 마스터가아아」

‘혼돈이시여. 다시는 술은 안 올릴 겁니다.’

「X새끼야아아!」

‘미성년자 아니셨습니까?’

「너 진짜 치사해……. 나 울 거다! 울 거야!」

‘하아, 많이는 안 됩니다.’

「이히히히히.」

[혼돈의 여신이 기운차게 만세합니다.]

얼마나 취했는지 메시지도 여과 없이 그대로 뜬다.

문제가 하나 더 있기도 했다.

"우히히히 으히히힣. 아저씨이. 이히히."

마법사를 째려보자 오히려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며 윙크한다.

"애한테 술을 먹이면 어떡합니까."

"애라니. 내가 살던 곳에선 혼인 적령기오."

"지구 계열이 아니신가 봅니다?"

"과학이 뭔지 모르는 세계였었소. 끌끌."

문화를 부정할 수는 없지.

그렇다 하더라도 둘 다 현대 지구 계열의 세계 출신이라 윤리적으로 굉장히 뭐하다.

유배자는 언제 헤어질지 모르니 빨리 기정사실을 만들라는 헛소리를 시작한다.

이래서 늙은이들은…….

마법사에게 우리 문화를 존중해달라고 오랫동안 설득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소녀는 다음날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부끄러워할 테니 묻어두자.

* * *

2층에서는 비교군이 없었다.

3층은 원래 토착 NPC가 등장하지 않는다. 홀수 층은 유배자들만의 장소다.

4층에 도달하고서야 드디어 비교군이 생겼다.

히어로 유닛은 인카운터에 딸려 나오는 덤이었으니 무시하자.

그건 난이도가 관여했다기보다는 시나리오의 일부다.

요정의 마을에 나온 세계수 묘목과 대주수술사급이 이끄는 그린 스킨 부대.

2층은 레벨로 칠 경우 20~30가량이 평균, 히든 보스급인 그리폰이 70 정도로 예상된다.

세력전의 보정이 겹쳐 오크쪽 지휘관이 대주술사. 레벨은 100가량.

그건 아마 요정 마을도 비슷했을 것이다.

정상적인 짝수 층이라면 빨라도 15층 정도에서나 나올 상황이다.

4층은 어떤가?

티어 대비 레벨이 떨어지는 편인 언데드들은 30가량, 스테이지 메인 몬스터라고 할 수 있는 뱀파이어들이 50을 좀 넘는 정도라 느껴진다.

대충 감이지만 스킬셋이나 싸움 방식을 보면 아마 맞을 거다.

보스는 로드급 뱀파이어.

클랜 마스터 보정이 없다면 300은 안 되는 것이 평균이다.

네임드인 바르바로이는 300이 넘었을 것이고.

4층에 혹시 그리폰처럼 히든 보스가 있다면 레벨로는 200이 조금 안될 정도.

하지만 히든 보스는 보통 인간형은 아니다.

히든 보스로 등장하는 몬스터는 NPC라기보단 그야말로 몬스터다.

머리를 쓸 줄 모르는 짐승인 대신, 태생 자체가 스펙인 피지컬 괴물들.

액면 레벨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에 히든이다.

그런 의미에선 소녀도 몬스터라고 봐야 할까.

그렇다면 테마까지 바뀌는 다음 짝수 층인 6층.

그곳에서 등장하는 게 무엇일지 어느 정도 추론이 가능해진다.

평균 레벨대는 100 가까이 올라갈 것이며, 보스급은 400 이상이다.

왕국 이전 구간은 난이도가 하드 해질수록 짧아지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그래도 레벨 1,000 이상이 대놓고 메인 보스로 나오기 전에는 왕국에 도달하겠지.

만약 튜토리얼 구간이 그보다 더 길어진다면 왕국 이후가 더 편안할지도 모르겠다.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아지는 회차였다.

5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로딩이 길었다.

[TIP ? 5의 배수인 층은 테마가 바뀌기 직전입니다. 지금까지보다 더 큰 시련과 보상이 함께합니다. 강력한 보스전을 준비하세요!]

말은 저렇게 하지만 솔직하게 생각해서는 4층보다 쉬울 것 같다.

소녀의 영향력이 홀수 층에는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정말 두려운 것은 짝수 보스 층인 10층이다.

거긴 머리 아프니까 나중에 생각하자.

그거보다는 프로방스가 알려줬던 말이 걸린다.

블랑쉐가 있다고 했었지?

보스 층은 다양한 기믹을 가지고 나온다.

홀수 보스 층이라면 유배자의 층이기에 솔로 플레이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블랑쉐가 어딘가의 파티에 속해 있을 리는 없다.

아래층으로 제법 늦게 내려갔다고 했었다.

그리고 3층에서 점거하려는 녀석들에게 틀어 막히는 바람에 그 후의 유배자 유입은 적었으리라.

다른 채널을 염두에 둔다 하더라도 점거 시도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5층까지 내려오는 인원은 적다.

만약, 충분한 인원이 모이지 않은 채 대기 중이라면…….

"오오! 드디어 사람이군!"

"선배님, 늦으셨습니다."

유배자들 여럿이 기다리고 있다가 환호했다.

한 파티는 아는 녀석들이다.

"화살은 쓸 만했나?"

"아주 편안했습니다."

여궁수가 몇 발 쓰지도 않았음을 어필한다.

뭐 정상적인 4층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 파티는 아무리 속도를 내려고 해도 스피드런은 불가능할 것 같다.

그나저나 실제로 인원이 부족해 교착 상태가 맞긴 했나 보다.

사람 수를 세어보자.

파티들은 그렇다 치고. 솔로가 몇 명이지?

"우리가 온 걸로 사람은 다 모인 건가?"

"네, 선배님이 오실 거라 생각해 기다리고 있던 참입니다."

그럼 한 명이 부족하군.

"혹시 혼자 다니는 수트 차림의 삭막한 여자 있었어?"

"우리 마법사가 알아보더군요. 블랑쉐라는 고정 NPC 말이라면 있습니다."

"아이, X펄."

여궁수가 잘 모르겠다는 듯 애매하게 미소 지었다.

못 만나봤으면 모를 수도 있다.

진짜 개 같은 년이다.

여신조차 탄식한다.

「블랑쉐랑 아하하핳. 크크크큭. 5층 보스전을 한다고. 아하하하. 너무 행복하겠어 우리 대신관. 나라면 자살했다. 크크크큭.」

아니 그냥 즐거워하시는 모양이다.

‘혼돈이시여, 제가 자살하면 당신께서도.’

「아, 우리 신도 믿지. 믿어. 파이팅이다! 신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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