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6화
5층 - Lv. 96 블랑쉐(1)
유배자 설정으로 등장하는 네임드 고정 NPC들은 겪어본 이라면 잊지 못할 임팩트를 준다.
일단 더럽게 세다.
초반에는 진짜 답이 안 나올 정도로 강하다.
일단 연차 설정과는 무관하게 초인적인 보정을 주렁주렁 달고 나오기에 기초 스탯부터가 깡패다.
거기에 대다수는 현대 지구보다 훨씬 험난한 세계관에서 온다.
전투나 살인을 생업으로 삼고 있던 자도 흔하다.
미궁에서 비로소 첫 살인부터 하여 여러 가지를 숙달해 가야 하는 게 평범한 유배자다.
그런데 고정 네임드는 그런 방면으로는 숙련도 자체가 다르다.
그리고 그런 배경 설정이다 보니 미궁으로 들어온 순간도 남다르다.
고정 네임드 절대다수가 제대로 무장을 한 채로 유배자가 된다.
내 경우에는 게임하려고 컴퓨터 켜다가 끌려 들어왔다.
복장은 청바지에 티셔츠.
소녀도 하교 중에 끌려왔다.
교복 한 벌. 가방은 어쨌냐니까 교과서는 사물함에 다 넣어놓는다더라.
학용품이라도 있으면 편해지는 게 있는데.
사냥꾼은 그래도 아웃도어 스타일이긴 했다.
총기의 나라 미국 출신이다.
총이나 한 정 들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본인도 그런 생각을 해봤다고 한다.
그리고 블랑쉐는 그렇게 흉악한 고정 네임드 중에서도 최강급의 초반 장비를 가지고 나온다.
슈퍼 스파이라고 아는가?
007로 대표되는 온갖 초과학적인 장비로 무장한 초인 스파이가 주인공인 장르다.
난 그런 영화를 좋아했다. 하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다.
적어도 내 세계에서는 슈퍼 스파이라는 건 창작물 속의 존재지 실존하는 이들은 아니었다.
첩보원은 첩보가 주 업무지 전투원이 아니다.
그런데 블랑쉐의 세계에서는 실존했다.
그리고 그녀는 임무 중에 유배자가 되었다.
심지어 우주 정거장이 있고 스페이스 셔틀이 날아다니는 근미래에서 왔다.
미궁에서도 기술력은 깡패다.
짝수 층에서 접하게 되는 대륙은 처음에는 대개, 어딘가 중세 느낌이 나는 시대다.
진행하다 보면 시간대가 본격적으로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우주로 진출한 오크 같은 게 그래서 나온다.
레일건은 어지간한 마법보다 훨씬 강력하다.
블랑쉐는 그 정도로 미래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초반에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수준의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
기본 장비인 수트부터가 광학미채 수트다.
그거 [투명화] 마법보다 고성능이다.
이걸 어떻게 초반에 잡느냐고.
장비빨이 워낙 좋다 보니 암살자 클래스 네임드로서는 이례적일 정도로 정면 싸움에서도 강하다.
같은 고정 네임드끼리의 싸움이 벌어져도 아서왕 같은 전사 클래스 최강급 네임드가 아니라면 다 털어버린다.
물론 그저 강력하다는 것만으로 초반에 마주치지 말아야 할 네임드인 것은 아니다.
파탄 난 인성도 문제다.
여궁수네 파티는 아까부터 우리 파티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다.
나는 5층의 지형지물을 살피는 와중 물었다.
"어떤 맵인지 알아?"
여궁수는 나름대로의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열정도 살아 있을 시기의 유배자다.
안다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정보를 수집하려는 욕구가 많이 보인다.
다행스럽게도 그다지 특이한 기믹은 아니었다.
유배자라면 누구나 겪어보았을 평범한 보스전이다.
"맵 중앙에 피라미드가 있는 것을 보면 거대 보스라고 생각합니다. 직접 제압하기보다는 기믹을 활용해 싸워야 하는 종류겠죠."
그리폰과도 같은 ‘몬스터’다.
레벨과 별개로 능력치만 따지면 이길 방도가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하지만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준비되어 있는 케이스다.
정말로 게임 같은 부분이다. 항거할 수 없는 강력한 적.
주어진 환경을 이용하여 극적인 클리어.
뭐, 원래 게임이었으니까. 그런가 싶기도 하고.
그런 부분이 적응과 성취에 도움을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비현실적인 기묘함.
운좆을 당하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다.
하나 그럼에도 헤쳐 나갈 실마리는 주어진다.
모두가 거치는 과정이다.
3층의 난민으로 지내는 대다수의 저년차들도 언젠가는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미궁은 이겨낼 가능성이 있는 시련만을 부여한다고.
물론, 이겨낼 수 있다는 거지 그게 쉽다고는 하지 않겠다.
그래도 10년 차 정도는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유배자들이 상당수인 이유다.
"블랑쉐의 위치 알아?"
이건 마법사에게 물어봤다.
우리 소녀보다도 작고 아담한 여궁수 파티의 마법사다.
그런데도 각이 딱 잡힌 자세로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모릅니다! 죄송합니다!"
이게 그렇게 우렁차게 말할 내용인가.
여궁수가 쓴웃음 짓는다.
"마법 스승은 귀하니까, 잘 보이고 싶은 거라 생각합니다."
"왕국에 가면 널려 있긴 한데."
"저희는 가본 적이 없어서. 하하하."
발전 욕구는 중대 사항이지.
마법사 클래스를 일찌감치 선택하는 사람들 자체가 대부분 그렇다.
스킬만을 활용하는 얼치기 마법사더라도 다른 클래스보다 훨씬 많은 응용과 숙련이 필요하다.
"그럼 손 좀 봐줄 테니까, 블랑쉐 위치 좀 파악해 보자. 이리 따라와."
마법사가 신이 나서 지팡이를 휘둘렀다.
소녀가 끼어든다.
"잠깐만요!"
"왜?"
"저도! 저도 마법 배울래요!"
그러고 보면 소녀는 처음부터 마법에 흥미를 꽤 많이 보이긴 했다.
* * *
마법의 가장 큰 문제는 대부분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부 마법이 있는 세계에서 유배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지구 계열 세계는 대부분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유배자의 대다수는 지구 계열 세계에서 끌려온다.
소녀는 넘쳤던 학구열에 비하면 빠르게 시무룩해졌다.
"어려워요!"
그야 뭐. 안 어려웠으면 다들 마법사나 하고 있겠지.
일단 그놈의 마나, 입자인지 파동인지 알 수 없는 근본적인 존재.
그것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그리고 그게 흐르면 마력이 된다.
흐르는 원동력은 자아를 가진 생명체……, 아니지 자아를 가지지 못했어도 의지가 있다면 마력을 만들어 낼 수는 있다.
이론은 쉽다.
저걸 실천하기가 너무 힘들다.
처음엔 차라리 마법에 두들겨 맞으며 느끼는 게 나을 정도다.
반면 6년 차 유배자라 밝힌 마법사는 훨씬 나았다.
스킬에만 의지하는 마법사가 아니다.
"누구한테 배웠어?"
"예전에 짝수 층에서 만난 요정한테 배웠습니다!"
기초는 제대로 가르쳐놓았다. 응용이 부족한 건 요정에게 배웠다면 그럴 수 있다.
오래 살아가는 종족이라 클래식한 면이 크다.
인간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방식이다.
여러모로 나쁜 버릇이나 활용 방안을 고쳐 주었다.
뱀파이어 꼬마를 줍는 게 최선이긴 한데 정 안되면 진짜 스카웃해 보자.
마법사를 밥벌레라고 생각하기엔 우리의 짝수 층이 너무 험난하다.
"[라이트닝 볼트]는 차라리 그냥 스킬로 쓰는 게 나아. 번개는 직접 다루는 게 엄청 힘든 종류의 원소라."
"네, 알겠습니다!"
훈련소 교관이라도 된 기분이로군.
그런 모습을 보며 소녀가 조금 뾰로통해졌다.
"저기, 저기. 아저씨 저는요! 저는요!"
"마력은 느꼈니?"
"모르겠어요!"
"그럼 명상을 더 해야지."
"으으윽."
저럴 때는 그냥 타인이 마력을 계속 순환시켜주며 그걸 몸으로 느끼게 해줘야 한다.
나는 무리다.
힘 민첩 위주로 스탯 분배를 하고 있기 때문에 무리 없이 마법을 구사할 능력치가 못 된다.
순간적인 무리나 가능한 정도.
소녀도 그 점은 마찬가지긴 하다.
하지만 마력이 뭔지 안다는 것만으로도 전투의 양상이 달라지니까 배울 필요는 있다.
울상인 소녀 말고 기합이 바짝 든 여궁수네 마법사를 본다.
이 친구를 이용해봐야겠군.
기브 앤 테이크.
일단 블랑쉐 위치를 찾은 다음에 맡겨보자.
마법사의 탐색 능력은 3층에서 가르친 걸 바탕으로 많이 발전해 있었다.
초반부 유배자 마법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이것밖에 없다.
직접적인 공격력을 기대하기엔 한두 발 쏘고 골골거리며 쓰러진다.
그래도 지금 은신 중인 블랑쉐를 찾을 정도로 가르칠 시간은 없으니 직접 하자.
손을 잡고.
"마력만 좀 보내라. 내가 직접 구사할 테니까."
"네 넵."
소녀가 부럽게 쳐다보는 건 그렇다 치고 흘러드는 마력으로 마법을 짜 올린다.
후반부로 다가갈수록 약간의 마법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기에 아주 익숙한 일이다.
남의 마력으로 마법을 구현하는 것도 익숙하고.
어디 보자. 그렇게 멀진 않은 곳이군.
"방금 느낌 알겠어?"
마법사가 약간 멍해져 있다.
자신의 마력이 어떤 식으로 마법이 되어 가는지 느꼈을 거다.
숙련된 운용방식을 이렇게 체험하는 것만으로도 큰 발전이 생긴다.
나는 말했다.
"그럼 쟤한테 가서 마력 느끼는 거 좀 도와줘라."
스탯이 딸려서 남의 마력으로 한 건데도 손이 후들후들하네. 어휴.
* * *
소녀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마법을 배울 줄 알았는데 나무 그늘에 앉아서 눈 감고 아무튼 느껴라만 당해버렸다.
거기에 쪼끄만 녀석이 마법 좀 할 줄 안다고 자꾸 아저씨한테 달라붙는다.
손, 내가 손을 잡아봤던가?
그런 적이 없진 않은 거 같긴 한데. 먼저 손잡아준 적은…….
어어, 없는 거 같다.
침통.
그런데 아저씨는 심지어 볼일이 있다며 터덜터덜 가버렸다.
마법사와 단둘이 남겨두고.
이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가뜩이나 소심하고 내성적인 타입 같은데. 그러면 소녀가 먼저 다가가야 한다.
학교에서 겪어보았다.
그게 지금은 내키지가 않아서 그렇지.
그래서 소녀는 뚱한 표정으로 마법사를 보고만 있었다.
마법사는 마법사대로 쭈뼛대고 있다.
큰 가르침을 베풀어준 선배님의 지시를 수행해야 하지만 어색한 건 어찌할 방도가 없다.
교착 상태를 깬 것은 마법사의 용기였다.
"저, 저기. 언니라고 부르면 될까요?"
생각지도 못한 호칭에 소녀의 눈이 커졌다.
* * *
상대가 고정 네임드라는 것은 나 같은 경험 많은 유배자이며 동시에 게이머인 케이스에게 큰 어드밴티지다.
겜창 시절의 나는 딱히 게임 설정을 열심히 파고드는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래 한 가지 게임만 주구장창 파다 보면 알기 싫어도 그냥 달달 외워지는 법이지.
이번 회차의 블랑쉐는 정공법으로 어떻게 처리하는 게 불가능하다.
원래도 싸워서 이기는 건 아주 어려운 녀석이다.
의도치 않은 심연행 덕에 30일의 격차가 나니 그냥 불가능해졌다.
더 다루기 쉬운 성격의 고정 네임드가 있다면 지원하며 싸움이라도 붙여보는데 그것도 형편이 좋을 때 이야기고.
불행 중 다행은, 내가 경험이 있고 방안이 있다는 거다.
잘못되면 목숨이 심하게 왔다 갔다하는 방안이긴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보자.
어차피 아무 손도 쓰지 않는다면 여기서 전원 게임 오버일 확률이 높다.
블랑쉐는 언제나 사람을 경험치로 본다.
이번 회차의 나는 블랑쉐에 대하여 꽤 많이 알고 있다.
게임 시절의 얄딱구리한 설정으로만 알고 있는 게 아니다.
바로 이전 회차. 가장 클리어에 가까웠던 그 회차에서.
블랑쉐는 내 길드원이었다.
아주 친했다고는 못하겠지만, 신뢰받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회차에선 결코 알 수 없는 정보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주로 저 근미래 첩보원의 개인사에 관해서 말이다.
이전 회차의 블랑쉐에게 미리 사과하자.
나는 지금부터 너를 이용해 먹을 거다.
아니지. 이거랑 다른가?
제발 살려주십쇼. 내가 이전 회차에서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