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7화
5층 - Lv. 96 블랑쉐(2)
늘씬하고 아름다운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수트는 블랑쉐의 상징과도 같다.
표정이 옅고 무감각하다.
눈으로 가면 무기질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럼에도 아름답다.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조형한 예술품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꽃잎 요정에 비견할 정도는 아니지만 인간이라는 종족에서 요정에 비견될 몇 안 되는 미모다.
저런 아름다움과 무시무시한 초반 전복 요소로서 뉴비에게 블랑쉐의 존재를 각인한다.
일단 나는 손을 들었다.
양손을 전부 바짝 들어 올렸다.
벌서는 학생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 그랬으면 하고 의도했다.
블랑쉐의 시선이 내 허리춤의 아카샤의 눈을 향하고 있다.
큰일 났나?
보라색 아우라가 감도는 척 봐도 쩌는 무기다.
이 정도면 뭔지 몰라도 물욕을 자극할 만하다.
다행스럽게도 블랑쉐는 살짝 들어 올렸던 팔을 내려놓았다.
나는 티 내지 않은 채 안도했다.
지금 쇼크웨이브를 쏘려고 했다. 맞으면 죽었다.
우선은 대화가 성립할지도…….
스윽하고 녀석이 사라진다.
다시 갈등에 빠진다.
어떡하지?
반항을 해야 하나? 이걸 피하다니 제법이군 같은 걸 노려야 하나?
아니면 그냥 안 죽일 거라고 믿고 버텨야 하나?
찰나의 순간 오십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결국 택한 것은 얌전히 정자세를 유지하기다.
목에 서늘한 칼날이 닿고서야 도박에 성공했음을 알았다.
그래 이 녀석도 여길 지나가긴 해야겠지.
"목적이 뭐지?"
귓가에 스치듯 흐르는 나른한 목소리.
단순작업에 피곤함을 느끼는 권태가 묻어난다.
17년 차 유배자인 동시에 극강의 초기 전투력을 보유한 이 녀석에게 왕국 이전은 지루한 곳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 목소리에는 암사자의 낮은 으르렁거림 같은 무언가가 있었다.
지겹도록 들은 목소리건만 이리도 낯설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랜덤 NPC와 달리 고정 네임드는 이런 향수를 준다.
나는 준비한 대사를 말했다.
"화성 HS-2701 구역, 표적 암살 실패."
"……."
"그래서 달까지 따라갔었다지."
"……조직의 사람이냐?"
걸렸다.
나는 목에 겨눠진 나이프를 손으로 밀어냈다.
순순히 멀어지는 팔.
뒤돌아서서 블랑쉐와 눈을 마주친다.
최대한 무언가를 숨기는 흑막처럼 미소 지어 보였다.
"코드네임, 오르골이다."
내 게임 닉네임과 블랑쉐의 상사의 네임이 일치했던 것은 지극히 우연이다.
이전 회차에서 이 파괴적인 NPC를 길드원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덕이다.
지난 97년간 수십, 수백 번을 마주쳤음에도 단 한 번 있었던 우연.
왕국 이후, 불가피하게 마주쳐 제압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후환이 두려우니 죽여 없애려고 했을 때, 임무 실패를 중얼거리며 흘러나온 말.
그게 내 닉네임이었다.
서로가 잠깐 오해를 했었다.
금세 동명이인이라 알게 되긴 했지만.
"……그걸 믿으라고?"
"그건 자네 마음이지. 블랑쉐. 나도 여기서 다시 볼 줄은 몰랐다네."
내가 미궁에서 가장 단련한 기술은 의외로 전투력이 아니다.
그보다는 사기와 기만이다.
소녀에게도 말했다시피, 인간 따위는 한 손으로 눌러 죽일 수 있는 괴물들이 널려 있는 곳이 미궁이다.
나는 초기 스탯마저 비루하다.
저년차일 때는 언제나 스펙에서 열세여서 무법자에게 살해당한 적도 많다.
그걸 극복할 만큼의 숙련도가 쌓이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까지 내가 취할 노선은 결국 심리전이다.
강한 척, 뭔가 있는 척, 뭔가 아는 척.
아니지, 아는 건 사실이었다.
프로방스의 무기력한 모습도 결국 내 과거 중 하나다.
"조금 선택을 도와줄까? 가족은 자네의 실종 후, 해방되었지."
"……미친 소리."
"설치된 폭발물은 정상 작동했네."
"……."
물론, 난 이게 사실인지 모른다.
그저 이전 회차의 블랑쉐가 마음의 평화를 위해 도달한 결론을 들었을 뿐이다.
자기합리화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지금 중요한 건 그거다.
이전 회차의 블랑쉐가 만들어낸 대답이다.
그렇다면 그건, 현재의 블랑쉐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라는 뜻.
아주 잠깐이지만 시선이 흔들렸다.
무감정한 요원이 의외로 가족을 위해 일하고 있다.
이건 꽤 흔한 설정이다.
난 본인 입으로 직접 들었지만.
"오르골……. 정말 오르골이라고?"
블랑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내 닉네임.
비밀이 많아 블랑쉐로서도 누군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고 들었다.
나는 대체 왜 저런 설정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혹여 이 미궁이라는 세상이 스토리 작가 놈의 망상이 구현돼 이루어진 것이라면.
나름대로 나를 예우하겠다고 그런 설정을 넣었을 수는 있다.
블랑쉐는 비교적 나중에 추가된 네임드니까 가능성은 있었다.
나는 베타 때부터 어마어마한 버그 리포트를 쏘아대었다.
그 덕에 사내에서도 대단한 유명인이었다고 들었다.
하도 인디한 감성의 게임사라 사장 몰래 이스터 에그를 처넣는 놈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뭐.
블랑쉐가 입맛을 다셨다.
뭔가 아쉽다는 듯, 내 허리춤의 단검에 다시 시선이 머문다.
"일단은 믿어보겠어."
"좋은 판단이야. 써먹을 수 있는 건 모두……."
"써먹으라고 했지."
무미건조한 입에서 약간의 흔들림조차 없는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나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속으로만 만세를 불렀다.
신언이 내려왔다.
「아니,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저게 저렇게 얌전해진다고? 저 인간 도살자가? 살육머신이? 살인이 형상화된 거 같은 미친년이?」
기절초풍할 듯한 목소리였다.
고참 유배자 중에 블랑쉐에게 한두 번만 죽어본 사람은 잘 없을 거다.
아무래도 이런 꼴은 처음 보신 모양이군.
사실 나도 그렇다. 내 유배 생활에 처음 있는 일이다.
‘혼돈이시여. 영업 비밀입니다.’
「그래 맞아. 너도 미친놈이었네. 물어본 내가 등신이지.」
* * *
블랑쉐가 일단 믿어보겠다고 말한 의미는 적어도 나를 죽이진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걸 이 층에서는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까지 만들어야 했다.
쉬운 일은 아니다.
간신히 거기까지 해내고 소녀가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구토하고 있는 소녀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등을 열심히 문질러주고 있는 여궁수네 마법사도.
"뭔 일이야 이건 또?"
마법사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본다.
"저, 선배님. 이분 혹시 마법이 있는 세계 출신인가요?"
"아닌데."
이젠 꼬마 마법사의 눈이 약간 죽어버렸다.
잠시만. 설마? 아니 진짜로 설마?
소녀의 지능 스탯이 몇인지는 기억하고 있다.
초기는 12였다. 그걸 레벨업하며 마인드맵을 확장하다 보니 17 정도까지는 올랐다.
여전히 마법을 원활하게 구사하기에는 반동이 큰 스탯이다.
그러니까.
설마.
"얘 마법 썼어? 진짜로?"
"네……."
인생, 야발. 뭣같네 이거.
재능이란 게 실존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좀 화가 난다.
당연히 마력을 제대로 통제한 것도 아니고 흐름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걸 억지로 구사한 데다가 보정을 줄 스탯도 빈약했으니 반동은 나 이상으로 컸을 것이다.
지금만큼은 내가 직접 진단 해봐야 한다.
미리 힐링 포션을 입에 머금고 구토하는 소녀의 몸에 마력을 흘려본다.
이런 식으로 마력을 굴리는 거보단 차라리 기초적인 마법을 구현하는 게 낫다.
본격적인 마력 운용이 시작되자 몸을 태우는 듯한 고통이 따라온다.
실제로도 대미지가 들어오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치유된다.
냉탕 열탕에 번갈아 담금질 당하는 기분이다.
소녀는 내장이 여러모로 상해 있다.
이제 보니 구토물에 피도 섞여 있다.
일단 포션을 먹인다.
마법이 없는 세계 출신은 마력에 노출될 일도 없다.
당연히 저항력도 거의 없다.
방사능과도 비슷한 거다.
미궁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애초에 방사능 자체가 마력의 일종이기도 하더라.
어찌 되었건 충분한 저항력 없이는 속에서부터 몸을 헤집어 상하게 만드는 힘이다.
마법이 없던 세계 출신이 지능 스탯을 확보한 후에야 마법을 원활하게 구사할 수 있는 이유다.
게임에선 딱히 이런 제약이 없었다.
실재하게 되어 생긴 문제 중 하나다.
"이 정도로 속이 망가졌으면 진짜 제대로 구현했나 보네. 뭐였냐?"
"언니가 보고 싶다고 해서 불을 일으켜봤는데 보고 따라 했어요."
"허어."
내 표정이 상당히 김빠져 보였나 보다.
꼬마 마법사가 쭈뼛댄다.
"그런데 언니라고?"
"어, 저보다 연차도 높고. 저는 열넷이었어요."
그렇군, 10년 차라고 뻥을 쳤었지.
실제로는 이 마법사 쪽이 연상일 텐데.
어린 나이에 미궁에 잡혀 와서 고생이 많다.
열넷이라. 중학교 1학년 같지는 않고. 만 나이인데 동양인이면.
"일본인?"
"네, 네에."
더 깊게는 알려고 하지 말자. 미궁 바깥의 삶은 유배자의 터부다.
그나저나 소녀가 마법을 너무 쉽게 배운다.
재능충이란 건 어디를 가나 있다.
지구 계열 출신인데도 금방 훌륭한 마법사로 거듭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렇지만 소녀의 경우엔 초기 스탯 배분이 마법사를 시키기에는 아주 아깝다.
나중에 마법 계통 서브 클래스를 뭘 쥐여줄지 생각해 봐야겠다.
할 줄 아는 건 많을수록 좋다.
다재다능이 다재무능이 되는 건 능력이 부족할 때나 그런 거다.
소수 정예가 원래 이렇다.
정말 초기 장비만 빼면 고정 네임드급 성능이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자 꼬마 마법사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좋아, 파티로 돌아가 봐. 그리고 궁금한 거 있으면 말해. 잠깐씩 봐줄 수는 있으니까."
3층에선 관심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 꼬마 마법사도 의외로 키울 만한 스펙이다.
목표인 꼬마 흡혈귀는 내가 발견하기 전에 이미 숨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낭패를 대비하여 미리 작업을 쳐두자.
어차피 그쪽 파티 리더도 바라는 바였다.
"감사합니다!"
또 우렁차게 인사하며 허리를 90도로 숙인다.
그러며 총총 달려가는데 어찌 되었건 신나 보였다.
하여간 마법사란 어느 세계 출신이건 배움에 목마른 학구파 녀석들이나 하는 클래스다.
* * *
여궁수에게는 블랑쉐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녀석인지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그러고 있으니 다른 파티들이 은근슬쩍 와서 듣고 있다.
나는 굳이 쫓아내지 않았다.
이 미궁에 정보보다 중요한 건 없다.
블랑쉐가 방관하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을 인지시킨 후, 피라미드의 보스를 공략할 여러 가지 계획을 제공한다.
하지만 블랑쉐를 겪어본 것이 지금 5층의 인원들 중에 나와 꼬마 마법사뿐인 건 상당히 의외다.
그래서 불협화음이 발생했다.
"그 고정 네임드라는 거 그렇게 대단합니까?"
신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내 하나가 내게 대놓고 묻는다.
루팅 운은 상당히 좋아 보였다.
판금 갑옷을 걸친 전사.
무기는 꽤 봐줄 만한 도끼.
운이 좋은 편이다.
나는 잠깐 고민을 했다.
이런 타입의 사람들이 있다. 아마 연차가 5년도 되지 않은 경우다.
일찌감치 적응해 2~3년 구르다 보면 운이 좋은 판도 있다.
그러면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딱 맞는 말이지.
슬쩍 옆을 보니 여궁수도 약간 웃음을 참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쪽은 제법 유능하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축이다.
꼭 이번이 아니더라도 머지않아 왕국의 문은 두드리겠지.
유배자라는 인간 군상들은 참으로 다양하기도 하다.
"좋아, 그럼 너는 작전에서 빼줄게.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냥 구경만 하다가 6층으로 내려가도 되고."
도끼 전사의 인상이 구겨진다.
무시당했다고 느낀 모양이다.
근데 뭐 어쩔 거야. 모르면 무시당해야지.
오히려 저런 놈은 티를 내주는 게 더 좋다.
중요한 순간에 초를 치면 큰일이다.
터덜터덜 자기네 파티로 돌아가는데 발걸음에 묘하게 힘이 실린다.
낌새가 어딘가 수상했다.
저건 분명히 사고를 치겠군.
블랑쉐에게 말해두자. 피라미드를 발동시키고, 인원제한 체크가 끝나고 나면 그냥 죽여 버려도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