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38화
5층 - Lv. 96 블랑쉐(3)
보스층은 테마에서 벗어난 지형이 생성되는 경우도 있다.
이번엔 아니었다.
지형은 여전히 숲 테마에 속한 밀림이었고, 구체적으로는 남미의 아마존 같은 환경이었다.
맵 중앙의 피라미드도 마야나 아즈텍 하면 연상되는 양식의 구조물이다.
그 주변에는 탑이 다섯이 세워져 있다.
그곳에 최소 다섯 명씩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 피라미드가 열릴 것이다. 계단은 그 안에 있다.
안에서 뭐가 나올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탑이 있는걸 보면 얌전한 실내 전투일 확률은 없다.
인원을 배분한다.
도끼 전사가 불만을 표했다.
"왜 파티원을 갈라두는 겁니까?"
"너는 여기 있는 다른 유배자들을 확실히 믿을 수 있나?"
"무슨 말입니까?"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건 파티원.
5층까지 함께 왔다면 배신을 하기엔 좀 멀리 왔다.
효율의 문제다.
통수를 까버리고 챙길 걸 챙기려면 진작에 해야 한다.
죽어도 잃을 게 없는 극초반에.
아니면 아예 왕국 직전이다.
그러니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다.
하지만 남의 파티는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러니까 상호 인질 같은 거다. 수작 부리지 말고 다음 층으로 넘어가자고. 탑별로 전력을 균등하게 맞추는 의미도 있고."
도끼 전사의 이마 주름이 미간으로 모였다가, 다시 위로 모인다.
미심쩍은데 그럴싸하기도 해서 의심하는 얼굴이다.
나는 가만히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표정 연기는 익숙하다.
남이 본다면 아마 ‘싫으면 말고’를 얼굴에 써둔 걸로 보일 거다.
지금 여기엔 총 여섯 파티가 있다.
짝수 층의 5인 난이도를 체험하고 싶진 않다 보니 전원 4인 파티다.
블랑쉐를 포함하여 딱 스물다섯이었다.
보통 제때 홀수 보스층에 도착한다면 최소 인원 이상의 숫자가 모이게 된다.
도끼 전사는 아마 이렇게 딱 맞는 인원으로 보스전을 하는 게 처음인 모양이다.
사실 대부분은 그런 경험이 없을 것이다.
25인은 최소 조건이지 정원이 아니다.
저층에서 대단한 트러블이 벌어지는 일은 드물다. 사람이 없어 며칠씩 대기하는 일까지 간 것 역시 그래서다.
아무리 홀수 층마다 여러 채널이 있다 한들 대부분은 통과했을 테니까.
일단 저 친구는 파티원도 전부 전사더라. 알만하다. 4전사 파티는 로망이 넘치기도 한데다 초반엔 정말 강력하다.
차마 반박을 하지 못한 도끼 전사의 시선이 불만을 담고 허공을 헤매다가 마침내 굴복했다.
"일단 따르겠습니다."
군중 심리는 무섭다. 다른 파티의 리더들은 전부 조용하니 더는 버티지 못한 모양이다.
그리고 사실 도끼 전사는 똑똑한 게 맞다.
공략을 피곤하게 만들 사고를 칠 거 같으면 바로 제거하려고 분리해 둔 거다.
아, 꼬우면 발언력 있는 고참 하라고.
한 번이라도 고참에게 데여 봤다면 다들 사리는 법이지.
그 후로는 조용히 각자의 파티끼리 정비하는 시간이었다.
리더들을 모아 의견을 들어본 결과 날이 밝는 대로 시작하기로 했다.
"얼마나 기다렸어?"
"저희는 하루였습니다."
여궁수야 뭐 그렇겠고.
가장 오래 대기했다던 파티의 노인이 다가와서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보름이 지났다고 말했다.
나보다 초기 스탯이 더 낮으실 비주얼이다.
"아이고. 어르신, 고생이 많으십니다."
"허허, 선배님 말씀 낮추시지요. 저는 7년 차밖에 안 되었습니다."
"제 평생을 더해도 어르신만 못한데 어찌 그러겠습니까."
"미궁에선 연차가 곧 나이인 법이죠."
여기까지 했으면 되었다.
동양 유교문화권에서 온 노인들은 장유유서를 따지려고 들 때가 있다.
티는 안내도 그 느낌이란 게 말이지.
미리 못 박아두는 편이 지휘할 때 편하다.
이후 나는 마법사를 붙잡고 블랑쉐의 위치를 파악해 보려고 했으나 알 수 없었다.
17년을 저런 스펙으로 지내다 보면 마법에 대한 대응법 정도는 알고 있는 법이다.
여궁수네 꼬마 마법사 수준의 마력으론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긴 할 거다.
친절도 적당히 해야 한다.
블랑쉐가 알고 있는 코드 네임 오르골은 좀 더 잔혹하고 냉정하며 계산적인 인물이었다.
의심을 조금이라도 지우기 위해서 그런 티를 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아카샤의 눈으로 찔러버리자.
심연에 처박아두고 생각하는 게 편하다.
영원히 속을 거라고는 생각도 않는다.
2층에서 기를 쓰고 카크리쉬의 봉인을 들여다본 게 그래서다.
세 번뿐이지만 암습만 박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처리 가능하다.
일단 심연에 처박으면 혹시 돌아와도 서든데스로 사라진 층만큼만 스킵이다.
그렇다면 어지간해서는 내가 충분히 앞서 나가 있으리라.
역시 히어로 유닛은 장비도 그에 걸맞은 걸 들고나온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 * *
힐링 포션의 치유를 받고도 소녀는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마력은 정신에도 타격을 주기 때문에 치유의 샘물로도 즉시 회복할 수 없다.
한잠 늘어지게 잔 것처럼 기지개 켜며 눈을 떴을 때는 곧 날이 밝을 타이밍이었다.
"일어났냐?"
"어라? 아저씨 어떻게 된 거예요?"
"스탯도 안 되는데 마법 쓰다가 뻗었어."
마법에 관해서는 제대로 설명해 준 적이 없긴 하다.
힘 민첩 계통의 재능만 기대했고, 확인했었기에 가르친 바가 없다.
의외의 능력을 알았으니 이제 이것도 가르치자.
마법의 기초는 꽤 지루했을 텐데도 소녀는 방실방실 웃으며 경청했다.
"그럼 저 마법사 해도 돼요?"
"미쳤냐."
"아, 마법 완전 멋있는데."
"나중에 레벨 더 오르면 서브 클래스로 굴리는 거지."
"음, 좋아. 노력할게요."
"그래. 그래."
암살자가 마법을 활용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대표적으로는 4층에서 써먹었듯이 [투명화]가 있겠고, 단순히 무기에 마력을 씌워 마법에 대응할 수도 있다.
나나 더스번 경이 보여준 거처럼 마법 자체를 미리 차단하는 묘기는 힘들 거다.
그러나 마법에 물리적 간섭이 가능해지는 것만으로도 다양한 경우의 수를 만들 수 있다.
소녀가 마력의 운용을, 그러니까 발현까지 가지 않고 그 흐름을 느끼는데 집중하는 동안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먼동이 터온다.
각자 어디선가에서 밤을 보낸 유배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아무도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함께 해가 떠오르는 것을 지켜본다.
이런 일은 의외로 드물다.
10년 차 이상이 셋 있는 우리 파티와, 그다음으로 전력이 강한 여궁수의 파티가 노골적으로 연대하고 있기에 가능한 장면이다.
왕국이라는 낙원에 홀려 있는 수많은 유배자들은 조금이라도 이득을 보기 위해 서로를 노린다.
홀수 층은 원래 그렇다.
미궁이 경쟁을 강요하지 않더라도 서로를 죽이게 된다.
그것을 아는 사냥꾼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평화롭군요."
나는 대답했다.
"아직은 말이지."
때맞춰 블랑쉐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광학미채 수트가 투명화를 해제하는 모습은 마법보다도 마법 같다.
여궁수네 마법사가 살짝 몸을 떨었다.
* * *
인원 배치는 파티 별로 골고루 나눴다.
파티 별로 둘, 하나, 하나. 이런 식의 분배다.
파티 별로 전투 밸런스를 맞추는 의미도 있고, 인원 간의 균형을 맞추는 의미도 있었다.
대놓고 연대 중인 여궁수와 내 파티를 경계하는 움직임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래서 밉보이면 누가 손해인지는 명백했기에 별 탈은 없었다.
다만, 우리 파티는 4개의 탑에 하나씩 나눴다.
소녀와 사냥꾼은 걱정하지 않지만 막내는 약간 걱정이다.
그래도 여궁수와 같은 쪽으로 넣어뒀으니 알아서 챙겨 주리라.
내게 잘 보이고 싶어 안달 난 파티 리더가 있단 사실은 홀수 층이 진행될수록 점점 더 큰 이점으로 다가온다.
한 번 채널이 겹쳤다면 이후에도 같은 곳에서 만나기 쉽다.
시기만 비슷하다면야.
남은 한 자리의 블랑쉐를 어디로 보낼지가 마지막까지 문제였는데 도끼 전사는 무려 당당하게 함께하겠다고 했다.
경악과 공포의 시선이 쏠리자 오히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뿌듯해하는 느낌이다.
나는 그냥 치하해 주기로 했다.
그래서 편성을 바꾸어 주었다.
4전사를 옹기종기 블랑쉐와 같은 탑으로 몰아넣어줬다.
끼리끼리 모였는지 하이파이브를 하고 주먹을 불끈 쥐며 행복해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자신감 넘치는 뉴비들이다.
응, 죽을 거면 니네 파티끼리만 죽어라.
지금이야 내 말에 따라 살인을 자제하고 있지만 누가 성질을 건드리고도 그럴지는 모른다.
역시 남자의 수명이 짧은 건…….
흠, 뭐. 좋아. 올해의 다윈상 수상자는 너희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고정 네임드씩이나 되는 블랑쉐의 존재에.
그리고 블랑쉐가 걸친 한눈에 봐도 저층에서 구할 수 있을 리 없는 수준의 장비에.
그리고 가련해 보일 정도의 미모에 감탄했다.
그런 녀석이 내 말을 따라 도끼 전사와 같은 탑에 오른다는 것에는 훨씬 더 놀라워하긴 했지만 말이다.
꼬마 마법사가 딸꾹질을 하며 나와 블랑쉐를 번갈아 바라보는 장면은 좀 우스웠다.
아니, 그런데 쟤는 대체 이전에 뭘 당했던 거지?
* * *
각 파티들이 내가 지정한 대로 탑에 오른다.
아직은 어둑어둑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에 크게 구애받을 정도의 초심자는 이곳에 없다.
탑은 높았다.
올라서면 밀림의 전역이 내려다보일 정도였다.
피라미드 또한 내려다볼 수 있다.
지구에서 생각하던 그런 크기보다 몇 배로 거대한데도 그렇다.
이런 탑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은 거대한 무언가가 저 안에 잠들어 있다는 뜻이다.
적정 수준의 유배자가 가하는 공격은 대부분 먹히지 않는다.
어떠한 기믹이 나타날 것이고, 그것을 이용하여 유효한 타격을 입히는 게 주된 목표다.
물론, 그렇다 해도 전투력은 필요하다.
보스를 공격하는 기믹에 접근을 방해하는 자잘한 몬스터들, 소위 말하는 쫄들이 나타날 것이다.
지형과 건축물의 양식은 어떠한 종류의 몬스터들이 등장할지에 대한 힌트를 준다.
이번엔 높은 확률로 케찰코아틀이다.
5층에서는 그보다 위계가 높은 녀석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원전에선 태양신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지만 미궁의 신은 인간이다.
여기선 그저 한낱 강력한 괴물일 따름이다.
탑 꼭대기까지는 내부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이어져 있었다.
꼬마 마법사가 헉헉대며 간신히 꼭대기에 도착하자 모든 인원이 모였다.
얘는 혹시 스탯을 힘에 하나도 투자 안 한 건가?
탑이 은은하게 빛나며 인원을 인식한다.
피라미드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사전에 알려준 대로 모두가 납작 엎드린다.
쾅 하는 폭음과 함께 피라미드가 터져 나왔다.
정확히는 분해되었다.
잔해들은 허공에 부유하는 무수한 발판들이 되어 맴돌기 시작한다.
위성의 공전과도 같은 피라미드의 잔해 사이에서 거대한 괴수가 고개를 들었다.
비늘 대신 곳곳에 깃털이 나 있는 벰.
케찰코아틀이다.
피라미드가 분해되며 터져 나온 커다란 충격파에 몇 명이 탑에서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다.
거 바닥에 들러붙듯이 엎드리라니깐.
나는 입맛을 다셨다.
무슨 보스가 되었건 ‘모르면 죽어야지’부터 한 대 박고 시작하는 게 미궁인데.
알려 줘도 아슬아슬하군.
늦게 기어 내려와 발 묶인 녀석들이라 그런지 하는 짓들이 영 불안해.
블랑쉐가 있는 게 차라리 다행인 것 아닐까?
* * *
대륙 남부 출신의 농민이었던 도끼 전사는 자신의 힘에 자신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타고난 육신의 우월함을 깨달았다.
성인이 되고 나서 어렵지 않게 도적질을 시작했고,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신분만 아니었어도 기사를 해보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미궁으로 끌려 들어왔다.
유배자가 된 후의 삶은 썩 괜찮았다.
혹시 모를 죽음에 대한 걱정도 없다. 거기에 힘이 곧 정의다.
약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있었다.
좀 미궁에 오래 머무른 것일 뿐인 다년차에게 굽신거리는 멍청이들.
어차피 초반에 죽여 버리면 상관없지 않나?
데여 본 적은 있지만 그네들이 뭔가 하기 전까진 자신이 더 강하다.
자신감은 있었다.
그렇게 50번쯤 죽었다. 죄다 재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 회차는 운이 좋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동료들을 셋이나 만났다.
진정한 사나이는 결코 쫄지 않는다.
의기투합하여 지금까지 기록 중 최고인 5층까지 기어 올라왔다.
고정 네임드 NPC?
말은 들어봤다.
더럽게 세다던데.
그래 봐야 여자 아닌가?
몸에 걸친 옷이 이상한 건 알겠다.
어딘가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은 이상한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도 알겠다.
마법같이 스르륵 투명한 상태로 나타났을 때는 진짜로 조금 놀랐다.
바깥에서 도적질하며 살던 시절에도 마법사는 본 적이 없었는데.
약간 나이 든 사람이 마법사는 건들지 말라고 했던 게 언뜻 기억난다.
뭐 아무렴 어때. 잘난 마법사 나으리도 머리와 몸통을 분리해 두면 죽는다.
증명하자. 다들 두려워하는 저 예쁘장한 계집을 죽여 우리의 힘을 증명하자.
그렇게 서열을 다시 정리하고 나면 모두가 우리를 우러러보겠지.
계획은 완벽했다.
밀림의 중앙에 있는 커다란 건물이 작동하기를 기다렸다.
인원 체크가 끝나고 나면 사람이 죽어도 문제없다고 들었다.
그럼 지금부터다.
파티원 중 가장 오래 미궁에 머무른, 무려 2년 차 양손검 전사가 앞으로 나섰다.
가장 입담이 좋은 친구다.
"야! 고정 NPC 녀석! 빨리 인간님들께 무릎 꿇어라. 그렇게 한다면 목숨은 살려주지!"
여자는 좋지. 저렇게 예쁘고 쓸만한 여자는 이 미궁에도 흔치 않다.
모두가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을 깨달은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후우, 이번 회차는 영문 모를 개소리를 지껄이는 NPC들이 참 많군. 오르골은 너희들을 죽여도 된다고 했다."
여인의 무표정하던 입매에 미소가 걸린다.
고혹적인 미소였다.
아름답다.
하지만 같이 웃을 수가 없었다.
고양감이 순식간에 사그라진다. 일이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섬뜩함만이 남았다.
나른한 목소리가 말한다.
"죽어."
번개가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