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40화
5층 - Lv. 200 케찰코아틀(3)
쾅! 쾅!
언뜻 공간이 휘며 일그러져 보인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빠른 충격들이 끊임없이 계속된다.
살아남았고, 공략을 진행할 능력이 되는 유배자들은 각각 열심히 보석들을 설치했다.
불운한 누군가는 빠르게 움직이는 파편에서 미리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추락하기도 했다.
저건 틀린 방법은 아닌데. 꽉 붙잡지 못한 게 문제다. 아마 타고 들이박을 생각은 없었겠지.
일단 나도 같은 일을 할 생각이긴 하다.
보스층에선 반드시 얻어야 할 게 있다.
지금의 상황은 상당히 좋았다.
케찰코아틀은 처음의 브레스 이후 지속되는 그로기로 더 이상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있다.
파편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전에 다음 타격이 날아오기 때문이다.
사전에 계획된 순번대로 이상적인 진행이 이루어지고 있다.
정확히 계획대로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이 게임은 일단은 로그라이트다.
그게 무슨 뜻인가 하면, 상황을 만들어두고 운도 좀 따라준다면 보스고 뭐고 순식간에 산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지.
유저만 순식간에 죽을 수 있고 보스는 아무리 때려도 할 일을 다 한다?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제대로 된 계획이나 기발한 꼼수가 있다면 유배자가 훅 갈 수 있는 만큼이나 보스들도 쉽게 보내줄 수 있다.
방법만 알면 된다.
노인이 감탄했다.
"이토록 깔끔한 케찰코아틀 전은 처음이군요."
"나도 몇 번 없어. 보통은 수십 수백이 몰려서 대충 알아서 하잖아."
"수백까지는 본 적이 없다고밖에 말을 못 하겠군요……."
"위의 홀수 층에서 병목이 엄청나게 일어나면 가끔 그러더라고."
하지만 계획이 언제나 계획대로만 되면 세상에 변수란 없을 터이다.
"다음 타격이 날아가야 하는데."
케찰코아틀의 그로기는 한동안 더 유지 될 듯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2페이즈로 넘어가지도 않았다.
순식간에 1페를 스킵하는 게 좋은데.
마법사가 탐색을 하더니 말했다.
"실패한 탑이 있어요……."
멀쩡한 친구들에겐 사전에 귀띔을 했다.
눈빛에서 욕망이 노골적으로 보이는 녀석들을 골고루 배분하였으니까 조심하라고.
알고 있다면,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건 기습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할 수는 있다.
"흐윽……."
꼬마 마법사가 시무룩해졌다.
"너희 파티 전사 두 명 꽂아둔 탑인가?"
"네……."
확실히 마법사나 여궁수에 비하면 별다른 스펙이 보이지 않는 녀석들이었다.
얼굴조차 기억이 잘 안 날 정도니까.
그렇다 해도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실력으론 보이지 않았는데.
"구라 친 새끼가 있단 말이지."
연차 사기는 흔한 일이다. 나만 해도 줄여서 사기 치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깔끔하게만 공략이 끝나진 않을 것 같다.
저놈들을 처리해야 한다.
블랑쉐가 해주면 좋겠지만, 진짜 내 뜻대로 움직이고 있는 건 아니니까 내가 해야지.
어쩔 수가 없다.
여궁수네 파티의 전사가 죽은 건 아쉽지만 만에 하나라도 여궁수가 죽는 건 손익 계산에서 너무 손해다.
빚을 더 지우는 셈 쳐야겠군.
* * *
소녀는 블랑쉐의 움직임을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그 후에 내린 결론은 그래도 해볼 만은 하다였다.
물론 상대가 정직하게 근접 무기로 싸워 줄 때의 이야기다.
대체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장비 상태를 감안하고, 등과 허리춤의 총기를 생각하면 못 이긴다.
그리고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었다.
"사람이야? 왜 저렇게 예뻐."
「푸헉. 뭐, 뭐라고 했냐?」
여신이 뭔가를 뿜었다. 그게 신언으로 들릴 정도니 어지간히도 당황한 느낌이다.
소녀는 투덜투덜 말했다.
"키도 크고 몸매도 좋고, 얼굴도 인형 같고. 너무 비겁해요. 완전 섹시해. 나도 저렇게 되고 싶어."
「그건 정말 새롭고도 흥미로운 관점이네. 아니지 생각해 보면 나도 처음 봤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나?」
소녀는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그리고 저보다 세요. 서로 단검 들고 싸워도 이길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그 점은 너도 참 말 같지도 않은 수준이라 생각한다만. 뭐 그렇긴 하지.」
여신은 냉정하게 평가를 내렸다.
힘살자라는 스타일은 분명 스탯 깡패인 소녀의 케이스에서나 가능한 유니크한 클래스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블랑쉐 또한 어느 쪽이냐면 암살자다.
그것도 고정 네임드끼리 비교해도 일대일 정정당당한 맞대결이 수위에 드는 수준의 암살자.
확실하게 말해 소녀의 상위호환이다.
"얼굴도 상위호환인 거 같아요……."
「아니, 그 점은 내가 보증하지. 서로 다른 타입일 뿐이다. 모든 남자들이 섹시 다이너마이트를 원하는 건 아니야.」
"섹시 다이너마이트라니. 여신님 어휘 선택이 노땅 같아."
「예끼, 이놈. 내 꼰대가 뭔지 보여주리?」
"헤헤."
그래도 소녀는 당차게 일어섰다.
"하지만, 언젠간 먼저 반하게 만들고 말 거예요."
「먼저? 이미 진 거 같은데.」
"고백받으면 이긴 거죠."
「좋아. 마음대로 해.」
여신의 생각에는 상당히 미묘한 이야기였다.
저쪽이라고 전혀 마음이 없는 건 아닌 거 같지만 그렇다고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100년을 꽉 채워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귀엽긴 한데 연애 대상이냐면 애매하다.
자신만 해도 잘생긴 신도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드냐 하면.
「딱, 관상용이지.」
"여신님도 노려요?"
「아니, 네 거엔 관심 없다는 말이다.」
"제 거요? 히히히. 고맙기도 해라."
혼돈의 여신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 아이도 보고 있으면 재밌긴 한데. 어딘가 피곤하다.
* * *
여궁수네 전사를 죽인 녀석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지금쯤 깨달았을 것이다.
살아남은 다른 자들은 적이다.
보스전이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판단을 내렸을 거다.
한 군데 말고는 계획대로 진행이 되었기에 보스 공략의 진척은 괜찮은 편이다.
놈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악한다.
가능한 다른 유배자를 제거하고, 블랑쉐의 눈에서만 벗어나려고 할 것이다.
가장 먼저 타겟이 되는 건 외곽에 흩어져 있는 실력이 부족한 유배자들.
그리고 어떻게든 나나 여궁수의 파티를 공격하려고 할 것이다.
따라오는 노인에게 물었다.
"그 탑이면 한 명은 당신 파티 아닌가?"
"맞습니다. 궁수인데 막상 활을 썩 잘 다루진 않았습니다. 3년 차라고 했는데……."
노인은 체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대로 내 손에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태도였다.
의심을 샀으니 어쩔 수 없다.
만약 연기라면 백 점짜리다.
나는 일단 믿기로 했다. 어차피 이것조차 연기라면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리거나 그냥 없었던 일인 셈 치고 넘어가려고 할 것이다.
탐색을 돌려보자. 전용 레이더, 아니 꼬마 마법사가 감지해냈다.
브레스의 여파로 대기 중의 마나가 꽤 날뛰고 있을 텐데도 훌륭한 집중력이다.
"걔 좀 돌보고 있어."
노인의 대답은 듣지 않고 달려갔다.
홈이 있는 파편 두 개가 나란히 설 상황을 계산해 두고 있었다.
우선 뒤에 있는 것에 푸른 보석을 끼우고.
[대시]를 활용하여 늦지 않게 앞엣것으로 자리를 옮긴다.
각도가 딱 맞을 때, 납작하게 엎드려 붙었다.
푸른 보석을 하나 더 끼운다.
같은 색의 보석이 둘이다.
다른 색일 경우의 인력과는 반대인 맹렬한 척력이 두 파편을 서로 밀어냈다.
G가 걸린 정도로 강한 압박이 느껴진다. 손을 떼는 게 조금이라도 늦으면 맵에서 이탈한다.
대포알을 타고 날아가는 것과도 비슷하다.
물론, 한두 번 해본 짓거리는 아니다.
손을 놓는 타이밍은 잘 알고 있다.
하늘에서 거의 투하되듯이 떨어진다.
몇 번의 역방향 [대시].
하나 그것으로도 다 상쇄하긴 힘들다.
최선을 다한 낙법으로 파편 위를 구른다.
몸 여기저기가 부러지거나 금이 가지만 힐링 포션은 위대하다.
구르면서 홈을 발견하고 붉은 보석을 잽싸게 끼워 넣었다.
이러면 내가 사냥으로 확보한 물량은 거의 소진하게 되지만 다른 사람들을 믿자.
한바탕 구른 후 튕기듯 일어나자 나를 노리고 불꽃이 날아오고 있었다.
힐링 포션의 효과가 남은 상태니 살짝만 마력을 운용하여 베어버린다.
[파이어 볼트]가 힘을 잃고 흩어진다.
상대가 조금 놀란 듯 미간을 찌푸렸다.
복장과 장비는 궁수지만 숙련도는 마법사다.
다시 상대의 손아귀에 마력이 모여든다.
꽤 오랫동안 마법을 주물러온 숙련도가 느껴진다.
그리고 빼 드는 검.
꼬마 마법사와는 다르다. 무식하게 지능만 몰빵한 마법사는 사용 횟수가 좀 많은 레이더에 불과하지만.
전투 마법사란 저런 것이다.
나는 비웃으며 [은신]으로 사라졌다.
내가 있던 자리에 날카로운 검격이 지나간다.
마법사 말고도 암살자가 있다.
서로 다른 파티였는데 잘도 의기투합한 모양이다.
암살자 역시 초중반에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암습은 매우 강력하고, [은신] 또한 마법이 귀한 초반에는 사기나 다름없다.
궁수인 척한 마법사와 제대로 된 암살자면 전사 둘이서 감당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이건 내가 여궁수에게 따로 사과를 해야겠군.
눈치채는 게 이상했다곤 하지만 내가 짠 판이니 내 탓이다.
늘 그렇지만 다른 편한 방법이 있는데도 맞서 싸우며 피지컬 배틀을 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다.
세상엔 변수가 너무 많다.
마법사도 파편 위로 달려 올라왔다. 뭔가 생각이 있어 보이는데, 내 알 바 아니다.
여신님께 신호했다.
반대편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사냥꾼과 여궁수가 푸른 보석을 끼워 넣을 것이다.
"준비해라."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마법사의 시선이 홈에 끼워진 보석에 가서 닿는다.
이젠 깨달을 수밖에 없다.
눈이 경악으로 커진다.
"꽉 잡으라고?"
사실 그냥 꽉 잡는 정도로는 안 된다. 안전하게 몸을 끼워 넣을 만한 공간이 있는 파편이어야 한다.
그러고도 충돌의 순간 요령껏 해내지 못하면 죽는다.
힐링 포션을 아낌없이 들이킨다.
빈 병은 던져 버렸다.
몸이 길게 잡아 늘여지는 느낌과 함께 파편이 케찰코아틀을 향해 발사된다.
챙길 게 있어서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하긴 하는데, 나도 별로 하고 싶진 않은 일이다.
보스층에 숨겨져 있는 보상은 이 게임답지 않게 고정적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보통 자살 행위에 준하는 짓거리를 해야 만져볼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은 그 존재조차 모른다.
여기선 저 거대한 뱀의 뱃속이다.
사실 이 충돌로부터 살아남는 것도 너무 힘든 일이다. 자주 하는데도 하기 싫어으아아아아.
엄청난 속도감에 세상이 흐릿해진다. 응그오아앗.
* * *
파편들은 상당히 산발적으로 떠다니지만 어느 정도의 규칙성을 가지고 움직인다.
그리고 고도의 차이도 어느 정도 존재한다.
허허벌판마냥 공중에 뜬 발판들 사이에서도 엄폐는 충분히 가능하다.
날아드는 작은 뱀들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대체로 블랑쉐가 가리지 않고 썰어버린 덕이다.
총기를 사용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바깥에서 가지고 온 무기도 미궁에선 소모품이야. 총기쯤 되면 쓰고 싶지 않은 것이지.」
여신의 말에 소녀는 납득했다.
샷건을 보며 싱글벙글하던 모습을 보면 저런 SF틱 한 총기는 아마 미궁을 한참은 더 내려가야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이 사라진 블랑쉐는 한가해 보였다.
소녀도 한가해졌다.
더 이상 열심히 쫓아다니며 감시할 필요가 없다.
그냥 이 자리에 숨어 지켜보면 될 뿐이다.
「조금 더 떨어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저 기척 숨기는 건 자신 있어요! 여신님!’
「저 녀석도 사람 찾는 건 자신 있을 거다.」
소녀는 배시시 웃고 말았다.
그때, 더 이상 사냥할 것을 찾지 못한 블랑쉐가 고글 같은 것을 꺼내어 쓰는 것을 보았다.
섬뜩했다.
「도망쳐! 빨리! 도망치라고!」
여신이 답지 않게 당황해 소리쳤다.
소녀는 왜 그렇게까지 말하는지 의아했으나 발을 놀리기로 했다.
아저씨도 절대 마주 싸우지는 말라고 했다.
몸을 돌리려는 순간 블랑쉐와 눈이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상대가 픽 하고 사라졌다.
푸르스름한 입자로 분해되는 듯한 효과였다.
어디선가 본적이 있다.
아 그래, 바로 이전 층의 바르바로이.
심연으로 추방되는 효과가 저거랑 비슷했다.
몸을 돌려 달린다.
푸른 입자가 눈앞에 다시 모였다.
"어?"
늘씬한 암사자와도 같은 자태로 요원이 말했다.
"오르골은 너를 죽이지 말라고 했지만. 아까부터 자꾸 나를 기웃거리는 게 참 거슬려. 꼬마야. 넌 어떻게 생각하니?"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손을 쥐자 스르륵하며 대거 정도의 단검이 홀로그램처럼 생성된다. 마법 같은 광경이었다.
소녀도 무기를 그러쥐었다.
여신이 이번에는 정말로 탄식했다.
「내가 좀 더 안전거리를 유지 시켜야 했는데…….」
* * *
척력이 인력보다는 탄속이 좀 느리다.
딱 2페이즈로 넘어갈 정도의 대미지만 구겨 넣고, 얼른 뱃속으로 들어갈 생각이라 척력을 타고 갈 예정이었다.
계획에 없이 케찰코아틀의 몸통에 직격하는 공격을 타고 왔더니 의식이 잠깐 날아갔다.
다행스럽게도 몸은 제대로 구겨 넣어져 있다.
여기저기 부러졌던 거 같지만 죽지는 않았고, 그렇다면 복구된다.
얼른 뱀파이어가 되는 게 나을 것 같다.
음식소모도 줄어들고 생존 부담도 줄어든다.
뱀파이어로서의 레벨을 어느 정도 올리면 박쥐화 같은 자유 비행 기능도 생기니 금상첨화다.
역시 인간이 제일 구려.
하, 더스번 경 눈앞만 아니었어도 거기서 바로 그냥 뱀파이어 하나 잡아다 물라고 대주는 건데.
그래서 항상 보스층의 위험지대까지 기를 쓰고 들어오는 것이긴 하다.
종족 변경은 쉬운 게 아니다.
라이칸스로프나 뱀파이어 같이 전염되는 케이스의 종족이라면 그걸 받아들이면 된다.
단순 언데드의 경우에는 그냥 죽었다가 다음 세상으로 가버리기 전에 강령술사를 통해 소생하면 된다.
실제로도 언데드화는 어떻게 죽은 동료를 살려보기 위해 후반부엔 자주 쓰이는 꼼수다.
다시 종족 카드만 구하면 다시 돌아올 수 있거든. 언데드도 죽은 판정은 아닌 덕분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런 종족 카드는 쉽게 구해지지 않는다.
왕국 이후에도 자주 보기 힘든 물건이다.
그러나, 왕국 이전에 반드시 고정적으로 등장하는 곳이 있다.
그게 보스층이다.
구체적으로는 지금부터 내가 헤집고 다닐 이 녀석의 뱃속이다.
이번에는 어떤 종족의 카드가 있을까?
뽑기만큼 두근거리는 일은 드물다.
요정이나 난쟁이만 되어도 훌륭하고.
켄타우로스나 미노타우르스도 내 클래스에 안 어울릴 뿐 충분히 장점이 많다.
천사나 악마 같은 고위 종족은 솔직히 기대하지 않는다.
무수한 파편들에 압착당해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케찰코아틀의 몸통을 타고 오른다.
입으로 들어가는 게 정석이지만 이 정도로 짓이겨졌으면 어딘가 구멍이 나 있다.
내가 들어갈 만한 상처를 발견했다.
룰루랄라 신나는 뽑기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