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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45화 (45/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45화

6층 - Lv. 95 폭풍 울음 여단(2)

나는 그 이후로 계속 혼란 비슷한 상황에 빠져있었다.

낯설다는 감정마저 낯서니 뭐니 지껄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확률상 경험하지 못한 일 정도는 있게 마련이다.

히어로 유닛이 왕국 이전 구간에 등장하는 일은 거의 없다.

얼마나 없냐 하면 드래곤 카드보다 낮은 확률이다.

게이머로서도 손에 꼽힐 정도밖에 겪지 못한 일인 데다가 그때마다 그냥 치여 죽었다.

극복하기엔 너무 대단한 난관이다.

애초에 히어로 유닛의 상당수는 [종족 메인스트림]과 엮여 있으며 그 자체가 왕국 이후 컨텐츠다.

그런데 죽었다고? 심연 같은 특수한 장소가 아닌 이상 왕국 이전은 왕국 이후와의 접점이 없다.

같은 서버를 공유하지 않는 왕국 이후의 유배자들이 끼어들었을 가능성은 없지.

카크리쉬를 죽인 자가 있다면 지금 이 튜토리얼 서버 내부의 인물이다.

블랑쉐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우리와 만난 게 고작해야 3층이다.

아무리 스피드 런을 달려도 히어로 유닛이 나올 수준의 층까지 벌써 도달하진 못했을 거다.

소녀가 없는 정상적인 상황에서, 카크리쉬 같은 게 등장할 확률이 생기려면 왕국 직전쯤 가야 한다.

혹여 다른 가능성이 있다면 소녀의 존재가 내 생각보다 더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

이 경우라면, 여러모로 곤란해질지도 모르겠지만…… 내 손이 닿지 않는 영역이다.

어찌 되었건 그 [히어로 유닛]이 이런 타이밍에 죽는다?

혹시 나랑 비슷한 수준의 고참이 하나 더 이번 튜토리얼 서버에 존재하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그린 스킨 그룹 내부에서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뜻인데.

어떤 것이건 가능성이 없진 않다.

자신을 숨긴 고참 유배자라. 나 같이 뉴비 키우기 상황이 아닌 이상 그럴 메리트가 거의 없다.

어차피 왕국 이전에 히어로 유닛을 잡을 능력이 된다면 그냥 빠르게 왕국으로 넘어가 파밍하는 게 낫다.

왕국 이후의 거대 길드들도 70년 차입네 이러면 아주 환장을 한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3층에서 보았던 얼굴들을 재빨리 되새긴다.

가장 확률이 높은 건 그나마 그중 한 명이다.

하지만 완전히 자신을 숨겼다고? 종족카드까지 포기하면서?

바로 그 순간, 한 가지 더 새로운 가능성이 머리를 스친다.

나이트 크로우의 요정 마법사.

100년을 꽉 채워 미궁의 주민이 되어버린 은퇴 유배자라고 모두가 그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진 않다.

하지만 그 양반은 말하는 것만 봐도 좀 짬에서 우러나오는 바이브라고 해야 할 게 있었다.

이 인간이 혹시 상도의를 어겼나?

왕국도 아니고 튜토리얼 서버에 정착을 했으면 그냥 조용히 좀 지낼 것이지.

내 영혼 깊숙한 곳부터 짜내어 탈모나 오라고 저주를 보냈다.

아, 이런 건 본명을 알아야하는데.

여신께서도 내게 응하셨다.

「정말 상도덕을 모르는 놈이로군. 그 저주 접수하지.」

‘신이시여, 저주 같은 권능 없지 않습니까.’

「같이 기원해 주겠단 말인데.」

‘……요즘 점점 친구 같으십니다. 그려.’

「첫 만남부터 위엄이고 뭐고 있었나. 이젠 다 포기했어. 진짜 친구 할까?」

‘그래도 춘추가 있으신데 제가 어찌…….’

「흐흐, 넌 진짜 나쁜 놈이다.」

* * *

소녀가 마을을 둘러보고 가장 처음 느낀 것은 엄청나게 아기자기하다는 것이었다.

난쟁이들은 종족의 이름처럼 자그마했다.

구체적으로는 외관상 인간의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린아이들은 특출나게 못생기지 않은 이상 귀여운 법이다.

소녀는 마음의 속의 어떤 욕구가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들 너무 귀여워.

요 며칠 모두들 자신을 귀여워하기만 한다는 느낌을 받은 반동이었다.

소녀는 어른스러움을 동경했고, 자신보다 작고 귀여운 것에 열광할 자신이 있었다.

돌이켜보니 여궁수 파티의 꼬마 마법사만이 자신의 연하였다.

다음에 만나면 잘해주자. 꼭 안아주고 쓰담쓰담 해주자.

언니라고 한 번 더 불러보라고 해야지.

소녀는 동생이 있어 본 적이 없었다.

아저씨는 촌장과 교섭을 하러 가 있었다.

유배자인 것은 들키지 않았다.

이끼 난쟁이 행상인은 바위 난쟁이 마을에 유배자의 존재를 굳이 경고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 상태에서 완벽하게 현지인의 차림을 하고 나타난 인간 일행은 그저 여행자거나 모험가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다들 수군수군하며 낯선 손님을 경계하는 가운데 아저씨가 돌아왔다.

"헛간 정도는 내준다는군. 어차피 객실이어도 우리한텐 작겠지."

거기까지 말한 아저씨가 소녀를 물끄러미 본다.

"넌 괜찮을 거 같은데. 안에서 잘래?"

"지금 작다고 무시하는 거죠?"

"어허, 무슨 소리야. 난쟁이가 그 키면 거인증이다."

당연하게도 소녀는 객실을 거부했다.

아담하고 아기자기한 침대를 보았을 때는 조금 혹했으나 그보다는 다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컸다.

정이라는 것은 깨닫고 보니 들어 있는 것이다.

아저씨가 아니라 다른 두 명에게도 말이다.

물론 날씨는 계속해서 추웠다. 해가 떨어지자 온도가 영하까지 내려갔다.

물도 얼지만 건초 더미나 쌓아둔 작은 창고에서 자기엔 엄청나게 춥다.

침낭이라는 문명의 이기가 없었다면 정말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나이트 크로우에게 감사하자.

그 늪이 이미 제법 북부였으니 대충 더 위로 가게 될지도 하고 생각했던 거겠지.

여러모로 유배자에 대해 빠삭한 NPC다.

"설원 테마가 무서운 게 이거야. 진짜 그냥 얼어 죽는다. 몬스터가 차라리 낫지."

"마을도 없는 경우가 있나요?"

"있지. 꽤 자주 있어."

"서바이벌이네요……."

"나중 가면 추위 정도는 생존이랑 큰 상관 없어지긴 해. 많이 춥냐?"

아저씨가 마인드맵을 열라기에 시키는 대로 하였다.

자능 쪽을 좀 찍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면서 특정 줄기를 고른다.

패시브 스킬이 나왔다.

[추위 내성]

"[냉기 내성]이 아니라서 그냥 추위 덜 타는 게 끝이긴 한데. 훨씬 낫지?"

"그러네요. 제일 체감되는 패시브인 것 같아요."

"능력치적으론 구려서 안 찍는데. 사람 사는 게 꼭 효율로만 굴러가는 건 아니지. 그거 나중에 [냉기 내성]에 통합될 거야."

"하지만, 아직도 추워요."

소녀는 꿈틀꿈틀 아저씨의 옆으로 가서 붙었다.

아저씨가 한숨을 내쉬더니 침낭을 열었다.

소녀의 침낭도 열어 이어붙이니 커다란 2인용 침낭처럼 된다.

소녀가 배시시 웃었다.

생존의 문제니까 합법이다.

막내도 사냥꾼을 흘깃 보았다. 추위에 익숙했던 자신과 달리 낯빛이 좋지는 않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으나 대단한 결심 끝에 물었다.

"형님. 저희도 저럴까요?"

"징그럽다. 저리 가라."

사냥꾼은 토하는 시늉을 하며 거절했다.

막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어깨만 으쓱했다.

* * *

이런 땅은 해가 일찍 지고 늦게 뜬다.

하지만 낮이 짧다고 해서 해야 할 일이 줄어들진 않는다.

오히려 척박한 환경 탓에 더 부지런해야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니 아침은 오히려 이르다.

여명이 밤의 그림자를 꿰뚫기도 전에 다들 잠자리에서 일어나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소녀는 자게 내버려 두었다. 아마 추워서 금방 깨어나겠지만 한창 클 때니 조금이라도 많이 자게 둬야 한다.

사냥꾼과 막내도 나와 비슷하게 일어났다.

자주 있었던 상황이다.

아니, 거의 매 층마다 있었던 일이다.

척후는 사냥꾼과 둘이서.

막내에겐 다른 사람들의 침낭까지 소녀에게 덮어주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다.

"어디 보자, 난쟁이에 대해서는 얼마나 아나?"

"이끼 난쟁이들은 종종 보았지만 바위 난쟁이들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루터기 요정만큼이나 폐쇄적인 종족이긴 하지."

미궁의 난쟁이는 흔히 생각들 하는 수염 난 대장장이 이미지와는 조금 다르다.

정확히는 그게 좀 분리되어 있다.

어제 본 상인은 수염 덥수룩하고 다부진 체격의 이끼 난쟁이였다.

이들은 돈을 밝히며 방랑벽이 있어 흔히 행상인으로 보게 되는 종족이다.

이 마을의 난쟁이들은 바위 난쟁이다. 수염도 나지 않고 체격이 다부지지도 않다.

그냥 겉보기에는 인간의 십 대 초반 정도다.

저게 성인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들 바위 난쟁이는 또 과묵한 장인의 성향의 종족이다. 아마 이딴 곳에 마을을 만든 이유도 광산 때문이겠지.

같은 난쟁이라고 불리지만 요정들 이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수전노 방랑 수염쟁이인 이끼 난쟁이.

대장장이 초등학생 바위 난쟁이.

이걸 참, 개성이 강렬해서 좋다고 해야 할지.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며 사냥꾼에게 툭 던진다.

"이번 층 조건 알겠어?"

"세력전은 아닌 것 같고. 방어전 아닙니까?"

세력전은 출현한 두 종족이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공존할 수 없는 성향일 때나 발생한다.

요정과 난쟁이가 친하다고는 빈말로라도 말할 수 없으나 원수냐면 또 다른 이야기다.

역사적으로도 원수인 요정과 오크 같은 경우가 아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폭풍 울음 여단이 올라오겠지. 잎사귀 요정을 추적해 올 모양이야."

"요정 야영지를 찾아가 봐야겠군요."

"뭔가 인카운터가 없을 법도 한데 말이야. 꼭 뭐가 있군."

"이 파티가 지옥 파티인 건 이미 알고 있는 바입니다."

소녀 덕에 실컷 고생 중이다.

정상적인 6층이면 아직도 제대로 된 팩션과는 접점조차 없을 수도 있다.

여궁수의 파티도 아마 북부 설원지대 어딘가에서 야생 몬스터나 잡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설원 테마가 떠버린 것 자체는 소녀 때문인가?

같은 튜토리얼 서버인 이상 테마까지는 공유한다.

다른 유배자들에게는 못 할 짓을 한 것 같다.

테마 문제 때문에라도 이 튜토리얼 서버는 생존률이 개판이겠군.

뭐 어쩌겠어. 민폐 파티 나가신다!

* * *

촌장은 그래도 나이가 든 편이라 초등학생은 아니고 간신히 중학생 정도로는 보이는 바위 난쟁이였다.

그 관록만큼이나 아는 것 또한 많았다.

나이트 크로우의 팬던트가 무엇인지, 그리고 진품인지도 아는 지혜로운 노인이다.

태도가 아주 극진하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만 해주시지요."

십 대 중반이나 겨우 될까 하는 소년이 고개를 꾸벅 숙인다.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늙수그레한 말투가 참으로 거시기하지만 익숙한 일이다.

"우리야 늘 하던 일의 연장선을 좀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난쟁이 또한 인간의 친우 아니겠습니까?"

이건 사실이다. 난쟁이와 가장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종족은 언제나 인간이다.

더스번 경의 팬던트도 있으니 뱀파이어를 추적하다 놓친 나이트 크로우라는 거짓말도 쉽게 믿어준다.

"그저 나중에 술이나 한 통 사게 해주시죠."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달리는 더 필요하신 게 없으신지?"

"기르는 눈표범이 있다면 네 마리만 빌리지요."

"오, 눈표범을 탈 줄 아십니까?"

"살다 보면 별일이 다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촌장은 곧바로 사람을 보내 네 마리를 끌고 왔다.

사냥꾼은 빌려온 눈표범을 보고 인상을 한껏 찌푸렸다.

"이걸 타는 겁니까? 커다란 바다표범 같이 생겼습니다."

"약간 마법 생물 같은 건데, 눈을 헤치고 달리는 생체 스노모빌이라고 생각하면 비슷할걸?"

물어볼 것이 많다. 요정에게도, 오크에게도.

사냥꾼은 눈표범을 몰 줄 모르기에 뒤에 태웠다.

체구 문제로 약간 안장이 작은 감은 있지만 큰 무리 없다.

나는 다른 셋의 고삐까지 쥐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사냥꾼이 오랜만에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리더, 솔직하게는 몇 년 차십니까?"

"그쪽 비밀도 털어놓으면 알려주지."

"……."

사냥꾼은 요정 야영지에 도달할 때까지 침묵했다.

나도 굳이 다그치지는 않았다. 파티원에게도 비밀 스무 개는 있는 게 유배자다.

어찌 그 많은 회차를 보내며 사연이 없을까.

나도 보이는 대로 다 죽이는 플레이를 해본 적이 많다.

소녀에게는 결코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인 셈이지.

대강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해서 병을 비웠다.

‘케찰코아틀의 피’가 다시 몸을 휘감는다.

불상사를 대비해서라도, 그리고 이후에 할 작업을 위해서라도 미리 도핑.

야영지 앞에 멈춰 서자 화살이 날아왔다.

퍼포먼스를 위해 피하지 않고 쳐냈다. 정확하게는 날을 갖다 대어 쓸데없이 멋지게 반을 갈랐다.

기초 스탯 작업을 한 보람이 있다. 단순 근력 외에도 전체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감각이 날카롭다.

도핑을 감안해도 몸이 이전 회차에 근접한 느낌으로 움직여진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하? 난쟁이가 아니네? 인간? 어쩐 일이래."

고양이 같은 삼각형의 귀가 달린 여자 요정 하나가 총총이 달려왔다. 경계심은 그다지 없는 태도다.

방랑벽이 있는 종족 대부분은 인간의 영역을 드나든다. 인간 역시 그들에게 우호적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경계심이 지나치게 없지만 그루터기 요정과는 다른 발로다.

이들은 뭐라고 해야 할까. 딱 우리 파티의 소녀 같은 발랄함이 종족적 특성이다.

"쫓아오는 오크들 있지? 좀 도와줄까?"

"뭐어?"

요정들은 오래 산다. 잎사귀 요정은 곳곳을 떠돌기에 경험도 많다.

내 옷차림을 살핀다. 뒤편의 사냥꾼과 인종이 다른 점도 확인했다.

결론에 도달한다.

"유배자구나?"

"내가 왜 너희들을 도우려는지 알겠지?"

"내려갈 계단이 필요한가 보네. 좋아 믿어볼게. 사제님께 같이 가자구."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쿨하다.

하지만 고생한 흔적이 보인다. 그린스킨들은 2차 전쟁을 결의하고 나면 아주 호전적으로 요정의 개체 수를 줄이려고 든다.

본디 요정이 살지 않는 대륙 북단까지나 몰아냈으면 내버려 둘 법도 한데, 그럴 생각이 없다.

눈밭에서 정령의 힘으로 몸을 숨기고 있던 다른 요정들이 나타났다.

사냥꾼이 조금 움찔했다. 이 양반한테도 마력 다루는 법을 좀 가르치긴 해야겠군.

"눈표범이잖아?"

"와 눈표범!"

"난쟁이들은 한 마리도 빌려주지 않았는데!"

시끄럽구먼. 그렇다 해도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것은 대체로 어린 축에 속하는 요정이다.

각각 어떠한 짐승들의 귀를 달고 있다.

잎사귀 요정의 다른 별명은 야수요정, 야수정령이다.

그루터기 요정이 동물이라기보단 식물 같은 녀석들이라면 그야말로 짐승들이지.

눈표범을 다루는 법을 알려주지 않아도 곧잘 다룬다.

본인들이 이미 반쯤 짐승이나 다름없는 족속이라 그런다.

이러저리 눈만 굴리는 눈표범을 요정들에게 맡기고 이동했다.

멀지 않은 곳에 눈이 녹은 땅이 있었다. 건조하기까지 하다.

모닥불 대신 불의 정령 샐러맨더들이 곳곳에서 똬리를 틀고 있다.

야영지라는 말이 꼭 어울린다. 알록달록한 천들이 집시들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모티브도 그게 맞을 거다.

자연과 순결의 신을 섬기는 사제는 신앙 때문인지 몸을 꽁꽁 싸매고, 눈밭에는 어울리지 않는 베일까지 쓴 여성 요정이었다.

"유배자라……. 그래서 너희가 무엇을 돕겠다는 거지?"

미심쩍은 눈빛. 그루터기 녀석들과는 달리 의심이라는 단어가 사전에 있는 요정이다.

그러나 적의랄 것까지는 없다. 유배자를 대하는 특유의 불편함 정도다.

좋아, 사제급도 이 정도 반응만 하는 걸 보면 2층에서 죽인 요정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식의 은밀한 살해도 시스템 보정에 의하여 언젠가는 발각된다.

뒤늦게 유해가 발견된다거나 목격자가 있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벌써 들킬 확률은 높지 않으나 소녀 때문에 혹시나 했다.

"폭풍 울음 여단에게 쫓기고 있다고 들었는데."

"난쟁이들이 입이 싸군."

"직접 전투를 할 필요도 없어. 그냥 날 조금만 도와주면. 그린스킨들을 모조리 쓸어주지."

사제는 침묵했다. 허무맹랑한 소리라 여기는 것 같기에 더스번 경의 팬던트를 보여주었다.

의심이 약간 옅어진다. 어제부터 생각했지만 이번 대륙의 나이트 크로우는 꽤 유명한 집단인 듯하다.

"그린스킨의 몰살이라. 그게 계단을 여는 조건인가?"

"그래. 안 그래도 그쪽이랑은 이미 큰 원한도 있어서."

사제는 잠깐 눈을 감고 침묵했다. 자기네 신과 대화를 나눈 중인가?

생각보다 고위 사제일지도 모르겠군.

자연의 신이 2층에서 죽인 요정에 대해 알고 있다면…….

"좋아. 도움을 받도록 하지."

안 보고 있었나 보다. 그래 혼돈의 여신님도 아니고 바쁘시겠지.

* * *

"와아! 이거 신나는데?"

"표범이나 호랑이를 타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인걸?"

"맞바람이 너무 추워!"

아이고 시끄러워라. 사냥꾼은 여전히 뚱하게 내 뒤에 붙어 있는 가운데 네 마리의 눈표범이 야영지에서 출발을 한다.

"그런데 뭐 하러 가는 거야 우리?"

처음에 대표로 나를 맞았던 고양이귀가 질문한다.

"싸우지 않고 이기러 가는 거지."

도핑이 빠지기 전에 오크 주둔지를 찾아내고 모든 밑 작업을 해두자. 그리고 소녀와 막내도 불러서 구경시켜야겠다.

그동안은 짝수 층에서 고생밖에 하지 않았고 생각보다 챙긴 것도 많지 않으나.

챙긴 것의 질은 한없이 높다.

조금씩이나마 삶의 질이 올라가는 게 당연하다.

인간 평균 기초 스탯 수치 10.

거기서 내가 기초 스탯 지능 15를 배정받았단 것은 인류 탑티어의 마법 클래스 계수를 가졌단 뜻이다.

마법이 없는 세계에서는 쓸모없는 재능이었을 뿐.

「너, 이 자식 뭐하려는지 알겠다. 제대로 캐스팅할 자신은 있냐?」

‘혼돈이시여, 역시 눈치채셨군요. 있다가 권능 한 번 쓰겠습니다. 저번에 바친 제물 아직 남았죠?’

「대신 살아남은 오크는 다 바쳐라.」

‘물론입죠.’

지능을 별로 찍어두진 않았지만 신화급 괴물의 ‘피 도핑’부터 해서 여신님의 권능 한 방이면 필살기를 만들 수 있다.

내 이전 회차는 거의 순수한 마법사 클래스였다.

마법사는 초반에나 약하다.

일시적이나마 최소한의 능력치만 어떻게 끌어다 쓸 수 있다면.

이제 마법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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