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46화
6층 - Lv. 95 폭풍 울음 여단(3)
사실 게임 시절의 스탯은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적용되지 않았다.
그 시절의 스탯은 그저 단순히 표기 그대로였다.
종족 보정이야 공공연한 히든 스탯으로 존재했지만, 기초 스탯이 높으면 더 많은 보정을 받는 일은 없었다.
게임이 현실화된다면 그것을 그대로 적용하기엔 많은 어긋남이 발생한다.
현실은 게임처럼 단순하지 않다.
혹은 게임이 단순화된 현실이다.
가끔 생각하곤 한다.
게임이 먼저일까? 미궁이 먼저일까?
내가 알던 개발자 놈들이 신과도 같은 초월적 존재였던 것일까?
그래서 그 녀석들이 만든 게임이 하나의 현실로 자리를 잡은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단지 이미 존재하던 미궁이라는 세계를 그 녀석들이 어떤 계시를 받아 게임으로 재창조한 것일까?
정말 어려운 문제다.
미궁은 게임인가 하면 현실이고, 현실인가 하면 게임 같다.
끊임없이 그 사이 어딘가에서 사람의 마음을 고무줄처럼 튕기고 있다.
어찌 되었건, 게임과 미궁은 다르다.
나는 그 괴리에 적응하기 위에 수없이 실험했고, 분석했고, 때로는 죽었다.
기나긴 최적화 끝에 나는 내 기초 스탯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기초 스탯이 비루하다고 여러 번 불평했으나 그건 반쯤은 거짓말이긴 했다.
인간 유배자로서, 지능 15 책정의 스탯.
이건 정말로 대마법사의 재목이다.
현재 도핑에 의하여 폭증한 스탯 덕에 실제 마법적 능력치는 엄청나게 높다.
왕국에 막 입성한 마법사의 수준과 비교해도 더 나으리라.
케찰코아틀을 잡고 얻은 경험치는 적지 않아 거의 20레벨 정도 폭업을 했다.
스탯 포인트는 아껴두고 있다.
현재 내 레벨은 66.
급소에 제대로 맞으면 레벨 무관하게 다음 회차로 사출되는 세계이긴 하다.
하지만 레벨이 가장 직관적인 전투력의 척도임은 변함없다.
1레벨 기본 3포인트 포함하여 내가 보유한 포인트의 총합은 68이다.
그중 이미 투자된 포인트는 20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2층이야 상황이 잘 맞아떨어져서 포인트 투자로 살아남았다.
4층부터 이미 당장의 스탯이나 스킬로 비벼볼 적이 아니었고, 주력은 나이트 크로우였다.
그래서 4층부턴 거의 찍지도 않았다. 이거 찍는다고 달라질 상황이 아니기도 했고.
그걸 지금 다 꼬라박자.
본격적인 마법사의 길을 걸을 생각은 없지만 마법은 편리하다.
‘마법사(임시)’ 정도로 해두자고.
꼬마 마법사를 영입하건, 꼬마 흡혈귀를 영입하건 즉시 전력은 못되니 어쩔 수 없다.
소녀와 막내도 슬슬 전위로서 익숙해지고 있다.
나는 강력한 화력을 담당해야 한다.
일단 대량의 포인트를 한 번에 소비하려면 계산이 좀 필요하다.
여신님의 권능까지 생각하면 어디 보자.
나는 요정들의 안내에 따라 오크 주둔지가 보이는 곳에 도착할 때까지 마인드맵을 설계했다.
* * *
스펙 이상의 전투력을 낼 자신이야 충분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다.
맞상대는 언제나 큰 리스크를 동반한다.
날로 먹을 길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날로 먹어야 한다.
이번 층은 그런 의미에서 좋았다.
정탐 결과 특별히 네임드의 조짐이 없다.
그저 아주 잘 훈련되고 편성된 군대였다.
"트롤에 오우거에. 그린 스킨 종합 선물세트로군."
"으, 트롤까진 참겠는데 오우거들은 마법사도 있어서 너무 싫어."
오우거가 멍청한 것은 사실이지만, 의외로 마법에는 재능이 있는 종족이다.
사실 제대로 된 마법사는 아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마법은 주술과 마법 사이의 어딘가에 가깝다.
기술이라기보단 타고난 초능력의 범주일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커다란 바보가 우렁찬 기합성만으로 번개나 불을 흩뿌리는 건 위협적이다.
붙어서 근접전으로 몰 수만 있다면 활로가 열리는 일반적인 마법사와 다르다. 그랬다간 사람 몸통만 한 빠따로 몽둥이찜질이 날아온다.
까다롭기로는 수위에 꼽히는 괴물이다.
거기에 트롤은 어떤가.
플레이어블 종족 중, 거인을 제외하고 가장 근접 난투에서 강력한 종족을 꼽으라면 그것이 바로 트롤이다.
종족 보정으로 지능이 폭락해 버리는 단점은 있긴 하다.
마법이 불가능해지는 건 그렇다 치고 진짜로 사고력이 떨어진다.
그러나 피 대신 힐링 포션이 흐르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회복력과 정신이 아득해지는 근력으로 모든 단점을 커버한다.
전사의 한계를 보고 싶다면 그 종족은 틀림없이 트롤이다.
물론 그럼에도 대부분은 트롤이 되고 싶어 하진 않는다.
사서 멍청해지고 싶은 사람은 드물다.
어쨌건 오우거나 트롤이나 거대 괴수, 그러니까 몬스터라고 분류되지 않는 종족 중에서는 최강급의 근접 전투력을 자랑한다.
"그래서 그래서. 저것들을 어떻게 하려는 거야?"
"맞아. 맞아. 우리보고 싸우라고 하면 너 버리고 도망갈 거다?"
"빨리 보여줘. 무슨 생각하는 거야?"
아 진짜 시끄럽네.
사냥꾼이야 그냥 요정만 봐도 흐뭇한 모양이지만.
이 양반도 참 변태다.
나는 힘차게 외쳤다.
"국토연성진이다!"
"……?"
마치 머리 위에 커다란 물음표를 띄워둔 것 마냥 어리둥절해 하며 침묵하는 셋.
자기네들 텐션에 맞춰 아무 말이나 해주니까 또 썰렁해지는군.
그래도 거짓말은 아니다.
"주둔지 주변을 돌며 마법진을 그려둘 거야."
"마법진? 마법진!"
"대마법을 준비하는 거야? 그 정도 마력은 없어 보이는데!"
"우리가 뭘 도와줄까?"
그루터기 요정이 숙련된 궁수, 마법사로서 대표된다면, 잎사귀 요정은 정령사와 민첩 전사로서 대표된다.
정령사는 마법 클래스긴 하지만 다른 마법직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그 자신이 술식을 짜 올리지 않는다. 그들은 마력이라는 에너지를 정령에게 제공할 뿐이다.
그 존재 자체가 체내에 아주 많은 마나를 받아들여, 그것을 마력으로 변환하는 변압기 같은 것이다.
게임적으로 말하자면 최대 MP와 MP 회복력이 가장 중요하다.
마법 공격력은 계약한 정령의 질이나 숫자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말하자면 살아 있는 마력 배터리가 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셈이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세 요정이 눈을 동글동글하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나는 피식 웃으며 눈 위에 간단한 마법진을 그렸다.
꼭 세 명이 들어가 앉을 만한 크기다.
정령사라도 기본적인 마법 소양은 익힌다. 거기에 마법진이란 것 자체가 마력의 융통을 위해 발전한 기술이다.
단숨에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닫는다.
"너, 그거 아주 큰 실례라는 거 알아?"
"알겠지. 알겠지. 분명히 알고 그러는 거야."
"무례를 범했어 인간. 정령사를 무시해?"
당연하지만 정령사들은 그런 대우를 질색한다.
학문적 소양을 배제한 유사 마법사라고까지 까이기도 하니 그럴 법도 하다.
뭐 사실이긴 하지. 직접 하는 건 없으니까.
"자. 이거 하나씩 받아."
과일의 단맛은 한계가 있다.
품종개량을 거치지 않은 짝수 층 대륙의 과일은 더욱더 그렇다.
시간대가 크게 요동치지 않고서야 이곳은 중세 정도의 문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음이니.
좀 더 미래에나 발전하는 기술을 미리 당겨다 쓴다면.
"이게 뭐야? 인간?"
"나 이거 알 거 같아! 사탕이지? 간식이야!"
"먹는 거야? 맛있어?"
물론 이 시대에 달달한 음식이 없었다고 하면 그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모두 겪어본 여신님마저 훌륭한 공물이라며 극찬한 수준의 사탕이라면?
마법사로서의 내가 만들어내는 정제당류는 이미 장인의 영역에 올라 있다.
열대과일이라는 재료도 최적이다.
"……!!!"
입에 사탕을 집어넣은 세 명의 눈이 동시에 커진다.
눈 녹듯이 사라지는 불만의 기색. 잎사귀 요정들은 야생아 같은 녀석들이라 그런지 단 것을 유난히 좋아한다.
「야! 내 거는!」
‘이따가 오크, 트롤 같은 거 배부르게 드십쇼.’
「안 바치고 숨겨둔 게 있었다니!」
‘언제나 실력의 삼 할은 숨기는 법.’
「미친 소리야!」
* * *
"으아, 정말 춥구만."
"뭐라 해야 할지. 정말 해괴한 일을 많이 하십니다."
"필요한 일이니까."
사냥꾼이 적당히 걱정을 한다. 크게 진심은 담겨 있지 않다.
전투 중도 아니고 내가 하는 기행에는 대강 익숙해진 모양이다.
그나저나 정말 춥군.
내가 갑자기 추위를 많이 타게 된 것은 아니다.
피로 마법진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죽지 않기 위해 꾸준히 힐링 포션으로 보충하고 있지만 피가 끊임없이, 그것도 상당히 대량으로 새어나간다는 건 아주 으슬으슬한 일이다.
빠져나가는 체온과 함께 조금씩 몸이 죽어간다는 섬뜩한 감각이 스멀스멀 몸을 잠식한다.
실혈이라는 것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익숙해지기 힘든 끔찍함 중 하나다.
차라리 화끈하게 사지에 손실이 오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회복된다는 점에서는 같으니까.
그리고 그만큼 대량의 피가 눈밭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앗, 조금 각도가 어긋났네."
그럼 지우고 다시 그려야지. 도핑 덕에 간단한 마법은 아무런 반동 없이 사용할 수 있다.
불길이 번지고 잘못 흐른 피만을 태워 지운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마력적인 불은 마력이 충만한 곳에서 폭발적으로 타오른다.
현재 내 피로 그려진 마법진에는 막대한 마력이 흐르고 있다.
아직 원이 완성되지 않았기에 갈 곳을 잃고 요동치고 있으니 잘못 옮겨붙으면 그대로 불길이 내달릴 것이다.
그러면 마력을 공급하고 있는 세 요정도 불에 휩싸인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사냥꾼은 그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본다.
눈은 녹지 않는데 피만이 지워지는 건 신기해 보일 만은 하다.
소녀도 데리고 올 걸 그랬나? 이런 거 보면 되게 좋아할 것 같은데.
뭐, 그래도 진짜 장관을 위한 밑 작업일 뿐이니까.
주둔지를 중심으로 최대한 크게 돌고 있기 때문에 들킬 일은 없었다.
지금 요정들을 쫓아 올라온 폭풍 울음 여단의 병력은 규모만 보면 압도적일 정도는 아니었다.
트동트가 이끌던 병력과 큰 차이가 없다.
단지 그 질이 다르다.
오우거나 트롤의 비중이 높고 고블린들도 더 상위직인 듯하다.
주술사도 더 많고, 대주술사도 확인 된 것만 둘이나 있다.
전쟁을 염두에 둔 만큼, 전력도 본격적이다.
까놓고 말해 정면으로 상대해서는 안 된다.
최소한의 장치로서 우군이 될 요정과 난쟁이가 배치되기는 했으나 그들 대부분은 군대가 아니었다.
진짜 전쟁을 위한, 전쟁의 신을 섬기는 그린 스킨의 군대와 부딪히는 것은 적절한 판단이 아니다.
트동트가 이끌던 병력은 애초에 목적부터가 그 숲의 정복이 아니었다.
유적을 발굴해내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으니 탐사단에 더 가깝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점은 내가 어느 정도 굴려둔 스노우 볼이 있냐 없냐다.
쌓아둔 게 많아질수록 할 수 있는 것이 늘어난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확실히 알고 있다면 해결할 방법은 정말 무궁무진하다.
나는 언제나 가장 안전한 방법을 고르려한다.
카크리쉬가 죽었다는 것은 무슨 말인지는 요정들도 확실히는 몰랐다.
다만 그 소문 자체는 알고 있었는지 이끼 난쟁이 상인이 했던 말을 긍정했다.
자세한 것은 일단 저 주둔지를 쓸어버리고 살아남는 녀석을 심문해보자.
대주술사급이라면 전술급 대마법에 휩쓸리더라도 죽지 않을 확률이 높다.
"치유의 샘물이 부족합니다."
"그러게. 생각보다 크게 그려야 하겠네. 지형이 마냥 평탄하진 않아."
약간의 오산.
그래도 아주 일찍부터 나선 덕에 시간은 넉넉하다.
그린 스킨의 군대는 그들의 승리를 의심치 않고 있다.
단지 따분한 추격이라 여길 뿐이다.
이미 요정들이 도망갈 구석이라곤 없으니 방심이라 부르기도 어렵다.
유배자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주민은 거의 없다.
그것은 그들 인생의 불청객일 뿐이니.
그 불청객에 뺨을 맞는 경험은 많지 않을 게 분명하다.
살아남을 녀석은 없을 것이다.
마지막 가는 길에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주자.
지금에야 간신히 태양이 지평선 너머에서 고개를 내민다.
* * *
소녀는 깨어나자마자 아저씨에게 붙잡혀왔다.
하늘은 아직 어스름 새벽이다.
이제야 조금씩 빛이 들이치며 밤을 걷어내는 광경이었다.
전투가 기다린다는 말에 두근두근했는지 아저씨의 앞에 올라타 안겨서 두근두근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눈표범이라는 짐승들은 눈 위를 미끄러지듯 주행한다. 굉장한 속도감에 추위도 잊고 짜릿함이 느껴진다.
아저씨가 신나 하는 모습을 보더니 익스트림 스포츠 체질이군 하며 중얼거렸다.
도착해 보니 동물 귀와 꼬리가 있는, 처음 보는 종류의 요정 셋이 뻗어 있다.
모두 바들바들 떨면서도 입에 뭔가를 물고 있다.
대체 저게 뭔가 했더니 사탕이다.
그렇게 맛있나?
여신님께 바치는 공물이라기에 달라고 해본 적이 없는데.
흐음.
"아저씨, 저 여자애들은 왜 저러고 있어요?"
"마력 탈진 현상이야. 조심해. 엄청 무기력해지고 몸에 힘이 안 들어가."
"오, 저 이전 층에서 겪어본 것 같아요."
"뭐? 언제 그렇게 무리했어. 몸조심해."
"이히히."
그런데 아저씨의 얼굴 또한 창백하다.
"저 자는 동안 뭘 한 거예요?"
"네가 할 수고를 줄여줬지."
"이제 저기 저것들이랑 싸우는 거 아니에요?"
"그건 맞지. 그래도 생존자만 정리하면 될 거야."
뭘 하려는 거지?
여신인 신언을 내렸다.
「물러나라. 위험하다. 구릉을 찾아 몸을 최대한 숨기고 다치지 않게 주의해라. 저 요정들도 좀 챙기고.」
‘여신님은 아저씨가 뭐 하려는지 알아요?’
여신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깃든다. 신언임에도 소곤소곤 알려준다.
‘엑?’
* * *
요정들은 잘 해주었다.
피에 깃든 생명력과 마력이 흩어지지 않도록 제대로 붙잡아 주었다.
물이 마르냐 안 마르냐와 비슷한 것이다.
마법진이 작동하려면 마력이 메마르지 않아야 한다.
피는 마력 전도율이 아주 좋은 물질이지만 그리려는 마법진의 크기가 워낙 거대했어야지.
끊임없이 순환하는 마력은 마법진을 구성하는 혈액이 그 성질을 잃지 않도록 유지시켰다.
내가 마법진의 회로를 손보고, 디테일한 부분을 만지작거리는데 시간이 적잖게 걸렸음에도 해냈다.
정령사라는 클래스의 마력 용량은 과연 남다르다.
‘이 정도면 임시 땜빵치고는 훌륭하지 않습니까?’
「나라면 애초에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마법을 구사하려는 생각조차 안 했을 거다.」
‘저런, 여신님께선 마법과 친하진 않으셨나 보군요.’
「난 창잡이였어. 그것 말고는 거의 손대지 않았는데. 재주도 없었고.」
극후반을 겪은 유배자더라도 듀얼 클래스의 소양 정도나 갖추지 한 가지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신좌에 다다른 이라도 대개는 그렇다.
마법사로 그런 경지에 도달하는 이들은 특히나 적다.
어려워서, 혹은 불안정해서.
‘마법사란 건 원래 무모한 자들입니다. 하물며 유배자에게 목숨은 그리 값 비싼게 아니지 않습니까?’
「넌 마법사였나? 의외인데. 그런 마법사 정신이 충만해 보이진 않았어.」
‘아, 전 그냥 다 잘해서 그렇고요.’
「내가 신도는 참 잘 골랐네.」
‘말은 바로 합시다. 제가 여신님을 고른 거죠.’
「맞긴 하지. 뽀뽀라도 해줄까?」
‘볼이라면 괜찮죠.’
「얼씨구.」
‘그건 저한테 배운 말툽니까?’
「절씨구.」
농담 따먹기는 그만하자.
오랜만에, 그것도 상당히 무리해서 구사하는 대마법이다.
감은 죽지 않았겠지만 신중해야 한다.
혹여 실수한다면 그걸 무마할 만큼의 마법적 스탯이나 스킬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
포인트를 다 때려 박아 최대한 마법 관련 패시브를 긁어모으긴 했다.
공격력 관련 말고 안정성을 올려주는 쪽으로만.
제대로 된 마법사는 스킬에 의존하지 않는다곤 하는데.
장인이 도구를 가린다는 건 뻥이다.
장인일수록 더 좋은 도구를 쓴다고.
할 줄 아는 거랑 할 거냐는 다른 문제지.
나는 지금 이가 없으니 굉장히 잇몸을 쓰려는 중이다.
다른 마법사가 보면 미쳤다고 할지도 모르지.
혹여 실패하면 반동이 구현할 마법 자체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건 마력 재해라고 불러야 할 수준일 것이다.
긴장으로 약간 손이 떨리는군.
그때 뒤편에서 무언가 따뜻한 것이 내 손에 닿았다.
소녀였다.
"뭔데?"
"그냥. 전에 본 적 있는 표정이어서."
"그러냐?"
신기하게도 좀 나아지긴 했다. 이 녀석이 이번 회차의 희망이어서 그럴까.
"알았으니까, 이제 저리 가라. 위험하다 훠이 훠이."
"말을 해도 참."
소녀가 투덜거리면서 멀어진다.
누구나 가끔 초조해지곤 한다.
훨씬 나아진 기분이다.
‘혼돈이시여. 두 번째입니다.’
「그래.」
세상이 멈춘다.
조금씩 흩날리던 눈발도.
살을 에이는 칼바람도.
나를 보고 있는 파티원들과 요정들의 움직임도.
주사위가 구른다.
단순히 스탯을 랜덤으로 재분배하는 주사위다. 지속시간도 존재한다. 별로 쓸 만한 권능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결과를 알고 있다.
주사위가 멈춘다.
세상의 시간이 돌아왔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감이 느껴졌다.
힘 스탯 1.
세상을 느끼던 감각과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던 신경이 무뎌지는 게 느껴졌다.
민첩 스탯 1.
대신.
온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충만한 마나가 눈에 보일 듯 선명하다.
손을 뻗어 쥔다면 움켜쥘 수 있을 정도로 마력의 요동침이 선명하다.
숨쉬기가 힘들 만큼 밀도 높은 마법이 내 곁에 머문다.
도핑으로 올라간 스탯마저 모두 주사위로 몰아넣었다.
지능 스탯 471.
내 지난 97년간의 모든 마법적 노하우를 담아.
이전 회차에 주력으로 사용하던 마법 중 하나를 짜내었다.
* * *
하늘이 열렸다.
꿉꿉하게 눈을 뿌릴 준비 중이던 먹구름은 한여름의 눈송이마냥 스르르 흩어졌다.
오크 주둔지를 휘감고 있던 피의 마법진이 빛을 발했다.
그 선명하면서도 압도적인 마력의 요동침에 주술사들이 가장 먼저 반응한다.
그다음은 오우거였다.
타고난 재능만으로 마법을 감지한 괴물들은 약속한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갑자기 발생한 거대한 마력의 흐름은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경험 많은 대주술사들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날지 깨달았다.
맑아진 하늘에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아니, 셀 수 없이 많다.
먼 곳에서 보았다면, 크기가 좀 더 작았다면.
아름다운 유성군이었을 것이다.
눈을 부릅뜬 주술사들과 오우거들이 날뛰기 시작할 무렵.
저 아득한 상공에서 도래한 재앙이.
지상을 강타했다.
그리고 대지가 파괴에 신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