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48화
6층 - Lv. 95 폭풍 울음 여단(5)
잔당의 정리를 마친 파티원들이 사냥꾼의 인도에 따라 요정 야영지까지 도달했다.
전리품은 있었다. 대주술사 하나가 포로로 잡혀 있다.
예상된 결과다.
트롤처럼 잘 맞으면 몸으로 버티고도 문제가 없는 녀석들이 아니니 마력을 소모한다.
마력을 한계까지 짜낸다면 버틸 수는 있다. 하지만 뒤는 없다.
야성 주술사니 빈 깡통이 되어도 어느 정도 전투력이 있지만 나는 우리 파티원들을 믿었다.
그 정도는 능히 제압하리라.
묶이고, 지팡이도 뺏기고, 많이 두들겨도 맞은 듯 눈에 멍이 든 주술사가 질질 끌려온다.
줄을 붙잡은 것은 소녀다. 파티원들은 지쳐 보였지만 동시에 표정이 밝아 보였다.
이런 게 필요하다.
언제나 내가 똥을 닦아줄 수는 없다.
스스로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실 이미 능력은 충분했다.
누가 키웠는데 암.
하지만 내가 항상 같이 있고, 그래서 대부분의 문제는 내 선에서 끝나니 스스로를 의심하게 될 뿐.
"시체는 전부 여신님께 바쳤지?"
신앙을 가진다고 하여 자유롭게 신의 권능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의 총애를 받는다면 임의로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있겠으나, 신의 입장에서도 아무렇게나 힘을 휘두를 수는 없다.
신좌에 앉은 미궁의 죄수들 역시 법칙 하에 놓인 이들이다.
악신 계통인 혼돈신은 권능을 사용하는 코스트로 제물이나 공물을 쓴다.
현장에서 즉시 바치는 신선한 제물이 가장 좋지만 어찌 되었건 바쳐두기만 하면 된다.
인신 공양 같은 개념인데 몬스터의 시체도 괜찮고 유배자의 시체도 괜찮다.
어차피 신선도보단 양과 질이다.
악신은 그런 면에선 까다로운 게 없어서 좋다.
대신 다른 쪽으로 더럽게 귀찮게 구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사냥꾼은 대답하는 대신 내 상황을 보고 어이없어했다.
"어, 음, 요정들과 아주 친해지셨습니다. 리더."
"그러엄."
능청스레 대답하자 사냥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적당한 곳으로 가 걸터앉았다.
막내도 사냥꾼을 따라가 앉는다.
소녀는 묶여 있는 대주술사를 버려두고 내게 다가왔다.
그리곤 대뜸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뭐예요!"
"뭐가?"
"아이 씨 걱정해서 손해 봤어. 엄청 멀쩡하네."
그러곤 내 옆자리로 다가온다.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잎사귀 요정 하나가 기세에 밀려 옆으로 비켰다.
소녀는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피는 좀 닦지 그러냐."
"아, 그렇네."
소녀가 두리번거리자 고양이 귀가 눈치 좋게 어디론가 데려갔다.
불의 정령으로 눈을 녹여 물이라도 만들어줄 셈이겠지.
나는 내 주변을 둘러싼 어린 요정들에게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세계에선 요정 제국이 다시 부활을 해서 어?"
아이들은 옛날이야기를 좋아한다.
몇 회차인지는 기억도 잘 안 나지만, 꽃잎 요정 카드를 얻는 바람에 그대로 요정 제국을 재건했던 플레이였다.
꽤나 기억에 남는 삶이긴 했지.
꽃잎 요정은 얼굴을 빼도 희귀한 만큼이나 개사기 종족이라서.
* * *
다른 파티원들에게는 요정들과 친분을 다지라고 해두었다.
혹시 파티에서 이탈하더라도 주요 팩션 중 하나인 요정과의 친분은 큰 도움이 된다.
사냥꾼이 싱글벙글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루터기 요정이건 잎사귀 요정이건 관계가 없이 다 좋은 모양이다.
잡혀 온 녀석은 주름이 적은 것을 보면 비교적 젊은 나이였다.
대주술사로서 인정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인 게 분명하다.
몸이라도 건강하니 죽지 않고 잡혀 왔겠지.
듣자 하니 지휘관으로 보이는 더 노련한 대주술사가 있었는데 저항이 너무 격해 생포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한국군 편제로 따지자면 대대급 정도의 규모였으니 그 지휘관 정도면 상당하긴 하리라.
그래 봐야 네임드도 뭣도 아니니 충분히 잡을 만했을 거고.
게임 시절의 네임드는 그냥 능력치 좀 좋고 스킬셋 좀 괜찮은 친구들에 불과했다.
현실의 미궁에선 더해서 전투에 능숙한 경우가 많다.
훨씬 잘 싸우니, 훨씬 빡세다.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눈을 뜨기도 힘들어 보인다. 죽일 수가 없으니 소녀가 열심히 두들겨 팬 모양이다.
전에 맞아봤는데 손이 아주 맵다.
어찌나 매운지 죽을 뻔했지 뭐야.
근처의 눈 덩어리를 주워와 주술사의 옷 속으로 밀어 넣었다.
괴로워하더니 눈을 뜬다.
의식을 차림과 동시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전쟁의 신이 당신에게 격노합니다.]
신도는 신에게 중계기와도 같은 것이다.
이번 추격전에 나선 부대가 전멸을 한 것은 전쟁의 신 입장에서는 예기치 못한 일이리라.
신도를 통해 나를 볼 수 있게 되기까지 초조하게 기다렸음이 분명하다.
혼돈의 여신은 내가 무엇을 하려 하는지 짐작하고 있었는지 넌지시 말했다.
「전쟁을 아예 적으로 돌리는 건 좀 쉽지 않을 일일 것 같은데.」
‘제겐 여신님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뭐 잘못 먹었니?」
‘전 언제나 당신께 진심입니다만.’
「미친놈. 뭐 어쨌건 대신관부터 다 해 먹고 있는 신도에게 고하는데, 신을 얕보는 건 좋지 않아. 네놈이 아무리 오래 묶고 뭔가를 많이 알고 있는 유배자라 한들 하나의 신에게 본격적으로 찍히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다.」
이 신언은 틀림없이 전쟁과 야성의 신에게 들리고 있다.
여신은 나름대로 자신이 직접 신언까지 내리며 말렸다는 상황을 만들고 싶은 것이리라.
그렇게 하면 내가 그 말을 듣고 기꺼이 전쟁의 신에게 사죄할 그림이 나오니까.
나는 짧게 대답했다.
‘혼돈이시여, 배려 감사합니다.’
「이런 젠장. 그래 그냥 니 맘대로 해. 나 따위는 어차피 신도한테 저당 잡힌 처량한 목숨인데.」
‘아니, 정말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신이시여.’
말은 안 했지만 여신도 느끼고는 있으리라. 내가 멍청해서 이런 짓을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전쟁의 신이 듣고 있는 가운데 떠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껌뻑이는 오크를 향해 물었다.
"카크리쉬가 죽었다고 들었는데 트동트는 멀쩡하나?"
[전쟁의 신이 당신에게 격노합니다.]
오크는 더듬더듬 말했다. 이도 나갔는지 말이 어눌하다.
"뭐, 무슨 소리냐. 인간."
짬이 안 되는 놈들은 눈치가 빠르지 못하다.
대주술사를 잡아 오라고 하지 말고 늙은 일반 주술사를 잡아 오라고 할 걸 그랬나?
그래도 젊은 대주술사는 지금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으며 신께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깨달았다.
전쟁의 신에게 주술사는 신관과도 같은 존재다.
나는 이미 전쟁신의 신관을 몇몇 죽였다.
대주술사도 우리 파티의 손에 하나가 죽었다.
더 잃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오크의 잘 보이지도 않는 눈에 희망이 깃든다.
설마 신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그 앞에서 자신을 죽일 거라곤 상상도 못 하는 모양이었다.
"빨리 말해봐. 카크리쉬가 깨어난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죽었다고? 정말? 누구에게?"
아마도 이 주술사가 그 현장에 있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지위가 이 정도인 이상 모를 수는 없다.
오크는 잠깐 뜸을 들였다. 신과 대화라도 나누는 모양이다. 그래 봐야 신언이 아니라 메시지겠지만.
전쟁신은 허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말 죽었다면 기밀이랄 것도 아닐 테니.
"죽었다."
나는 한숨을 흘렸다.
"누구에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인간 마법사였다고 들었다."
"그 외의 특징은 없나?"
"몸이 날래고 노련한 워 메이지였다고……."
"복장 같은 건?"
"기록이 없었다."
이거 참. 기록이 없다는 건 또 무슨 소리인지.
"목격자가 없다고?"
"그렇다."
"그게 가능해?"
"위대한 전쟁께서 보고 계셨기에 알려졌을 뿐이다."
"전멸?"
"그렇다……."
전쟁신을 섬기는 그린스킨들에게 도주와 보고는 일반적으론 미덕이 아니다.
하지만 고블린은 다르다. 야성의 신을 섬기는 그린스킨의 고블린은 제대로 된 소속원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것들은 단지 부속품. 그러니 전쟁바보들 사이에서 살아남아 소식을 전하는 역할이다.
그것을 알고 고블린들까지 모조리 잡아 죽였다니.
짬에서 우러나는 바이브가 느껴진다.
이러면 역시 그 양반뿐이군.
대체 왜지?
고참이 왕국도 아니고 대륙에 굳이 정착할 이유는 많지 않다.
절묘하게 왕국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100년의 시간이 다하거나.
정말로 대륙의 토착 NPC에게 큰 정을 느꼈거나.
더스번 경에게 무언가 있다는 듯한 말을 하긴 했었는데.
유배자 특유의 서로 깊이 캐지 않는 문화가 말썽이었군.
어차피 이제 유배자도 아닌 늙은이 그냥 아무 말이나 서로 다 할 걸 그랬다.
뭐, 목적은 대강 알 것 같다.
왕국에 남아봐야 많고 많은 고참 중 하나일 바에야.
대륙의 지배자라도 되어볼 생각인 거겠지.
수명과 마법 적성을 생각해 요정을 골랐을 거고.
나이트 크로우의 인지도가 묘하게 높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부터는 적으로 규정해야겠군.
드물게 이런 경우가 있다.
상도덕을 모르는 꼰대들이다. 서버 하나가 어떻게 되건 자기는 그냥 거기서 깽판을 치겠다는 마인드.
좀 맞아야 하는 부류의 인간이다.
짬은 먹을 대로 먹고 무법자 짓이라니.
나는 다른 질문을 더 했다.
4층에서 더스번 경에게 들었기에 이 대륙에 있는 그린스킨 팩션이 오크 제국임은 확인했다.
폭풍 울음 여단 외에도 어떤 전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대강은 들었다.
하지만 다른 부대를 만날 확률은 썩 높지 않다.
아마 한 번 연이 이어진 폭풍 울음 여단과 지속적으로 마주치리라.
[전쟁의 신이 당신에게 격노합니다.]
당연하지만 신이 막아선다.
카크리쉬야 어차피 제 손에 있던 녀석도 아니고 심연신의 밑에 있던 놈이니 좀 알려 준다 쳐도, 속사정을 낱낱이 파헤쳐지는 건 원치 않을 거다.
더 이상 뭔가 캐낼 수가 없음을 깨달았다.
단검을 거꾸로 쥔다.
내려찍는 동작은 아주 가벼웠다.
혼돈의 여신이 신언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의 신이 당신에게 격…….]
빠른 죽음에 메시지가 중간에 끊어진다.
이제 나를 인식하고 있는 전쟁신의 신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자연의 신이 당신을 기꺼이 요정의 동포로 인정합니다.]
그러면 그렇지.
뒤를 돌아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가 있다.
그러니까 신이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
내가 물끄러미 한 곳을 바라보고 있자 정령으로 몸을 숨기고 있던 사제가 나타났다.
"시험하여 죄송합니다. 위대한 마법사시여."
내가 다시 예법을 취하려 하자 사제가 나서서 말린다.
"그런 낡은 관습에 연연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걸 허가했다고?
자연과 순결의 신치고는 꽤나 진보적인 편이군. 신좌에 휘둘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는 종류다.
그저 신좌가 휘두르는 대로 흘러만 가는 우리 여신님 같은 순진한 신이 아니로구먼.
「야야야, 너 지금 엄청 무례한 생각 했지?」
‘목소리가 아주 귀여우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한 번씩 너 진짜 싫은 거 알아?」
사제가 오른손을 내민다.
"지금은 아직 인간이시니, 인간의 관습대로 하겠습니다."
"그러지요."
악수라. 요정과 이걸 하게 될 줄이야.
신도끼리 신체가 닿고 있으면 다른 신의 신언도 들을 수 있다.
「요정으로 돌아온다면 이쪽으로 오게. 자네 파티의 미국인도 말이야.」
신을 할 정도로 오래 묵은 유배자라면 지구 계열 출신이 아니어도 미국 정도는 안다.
출신을 특정한 단서라기엔 좀 아쉽군.
여신이 성을 냈다.
「야! 내 거거든?」
「흠, 혼돈이여. 넌 아직도 살아 있나? 그 구차한 삶을 끝낼 때도 되지 않았나.」
「이 씨! 말이면 다냐!」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여신님이 말빨로는 탈탈 털릴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잽싸게 손을 놓았다.
사제도 신들의 언쟁이 조금 당황스러운지 애매한 미소를 짓는다.
"조금 머물다 내려갈 생각입니다. 혹시 계단을 보셨는지?"
"그 부분이 저희도 조금 의문이긴 합니다. 유배자가 나타난다면 응당 그들의 출구가 있을 것인데."
조건이 걸려 있어도 계단 자체는 잠긴 채로 스폰되어 있다.
난쟁이 마을에도 없었는데, 요정 야영지에도 없다니.
그린스킨의 주둔지는 완전 지형을 갈아엎었으니 부자연스럽게 공중에 뜬 계단을 파티원들이 봤을 거다.
제길, 어째 그린스킨에 딱히 보스급이 없더라니.
조건과는 별개로 계단 위치가 개지랄인 모양인데.
나는 고개를 흔들며 야영지를 향해 걸었다.
이번 층에서 거둘 성과는 다 거두었다.
지금부터 만나는 모든 그린스킨은 적이다.
대신 만나는 모든 요정이 아군일 것이다.
어차피 2층에서 결정되었을 것이 조금 늦어졌을 뿐이다.
야영지에선 사냥꾼이 행복하게 여우 귀가 달린 꼬마 하나를 쓰다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저 양반은 그냥 요정 마을이 한 번 더 나타나면 거기 살려고 할 거 같은데 말이야.
당신 굳이 왕국까지 가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