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49화 (49/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49화

6층 - Lv. 95 폭풍 울음 여단(6)

"어차피 전쟁의 신은 이미 우리를 싫어하는 거 아니에요?"

"그게 꼭 그렇지는 않아. 우리 파티가 그린스킨에 심대한 타격을 준 건 아니잖아?"

"어……, 그렇긴 하죠."

소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 피 냄새가 좀 난다. 요정의 옷에 걸린 마법도 갱신해 주지 않으면 사라진다.

"그 정도 선에선 그냥 사죄만 세게 박으면 용서해 줘. 신도 옛날엔 유배자였으니까. 그것도 초고참의 실력 있는 유배자."

강력한 유배자는 신 입장에서도 적으로 돌리기 싫은 존재다. 언제 어디서 나타나 자기 신도들을 귀찮게 굴지 모르니까.

최선은 신도로 만드는 것이다.

은근히 눈치싸움인 셈이다.

나는 그 판을 엎어버리고, 선전포고까지 했다.

"그렇네. 그러고 보니 신들은 어떻게 신이 된 거죠?"

"왕국 이후 차원의 틈을 돌아다니다 보면 신좌라는 게 있어. 그 자리에 앉으면 신이 되는 거지."

"오……. 그럼 그것도 운빨?"

"찾는 게 난관인 건 그렇다 치고 이미 앉아 있는 신이 있다. 싸워서 이겨야지."

"흐음."

"왜?"

소녀가 눈을 빛내며 묻는다.

"사랑의 신 같은 건 없나요?"

"없는데."

"에이."

나는 피식 웃으며 들어오는 공격을 붙잡았다.

소녀가 어이없어했다.

"이걸 어떻게 반응하는 거예요? 우리 아빠도 그냥 당할 거 같은데."

"동작이 좀 크긴 해. 블랑쉐랑 싸우며 느꼈다며? 힘을 크게 실어 치려고 하니까 보이는 거지."

"그래도, 미리 알면 총알도 잡을 수 있을 거 같은 속도인데."

"총알, 네 생각보다 많이 빠르다."

다시 놓아주고 거리를 둔다.

항상 그렇듯이 소녀가 선공.

먼지가 인다.

아니, 먼지만 남은 것 같다.

휙 하고 들어오는 공격은 좀 더 직선적이고, 내 움직임을 닮아 있었다.

하지만 내 움직임을 닮았다는 건 반대로 내가 가장 잘 안다는 뜻이다.

살짝 흘리면서 붙잡고, 관절을 노려 더 이상 힘을 주지 못하게 만든다.

근육이 힘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니 더 이상의 가속은 없다.

근력의 차이도 큰 의미가 없어진다.

그 모든 동작에 약간의 마력이 흐르며 그러한 기술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결과적으로 소녀는 섬광 같은 찌르기 동작의 운동에너지 그대로 한 바퀴 돌아 엎어치기 당했다.

"꾸웨엑."

"한창때의 여자애가 지를 비명이 아닌데."

신체 능력이 좋으니 회복도 빠르다.

눈 위에 팽개쳐진 것이라 조금 타격이 덜하기도 했을 거다.

소녀는 아파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말했다.

"그럼 좀 살살해요."

"살살한 건데. 그러니 의식이 남아 있지."

"너무해."

그런 소리를 하면서도 입가에는 미소가 매달려 있다.

전투광적인 면모가 보인다. 광전사를 해보는 건 어떨까 싶기도 하고.

하지만 단검 광전사라. 아주 등신 같군. 대검이나 도끼가 필요하지 역시.

"여기까지 하자."

"저는 괜찮은데."

"내가 힘들다."

소녀는 또 한 번도 유효타조차 못 먹였다면 툴툴거렸다.

"분명히 완전히 잘 베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베낀 걸론 원본 못 이겨."

"힘은 제가 더 센데요. 더 빠르고."

"마력 쓰는 건 미숙하고."

"마법이라니 비겁해."

"약자의 투정은 듣기 좋군."

"으아아이 씨."

그렇다 해도 굉장한 발전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인간형의 적들은 기본적으로 관절의 가동한계가 있다.

체격에 압도적 차이가 있는 게 아니라면 대인전에서 큰 이점으로 다가온다.

전부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이 말이야.

"다음엔 안 질 거예요."

"뭐 나?"

"아니요. 블랑쉐요."

"언니라고 하지그래?"

"으으, 싫어요. 그럼 아저씨가 아빠가 되는 거잖아요."

"아 미친, 무슨 소리야."

여신이 신언으로 대놓고 낄낄대었다.

나는 고개를 흔든다.

뭔 거지 같은 설정이 붙어가지고.

"7층엔 없겠지?"

"블랑쉐요?"

"맞아. 금방 다시 만나면 좀 힘들 거 같아서."

"이길 방법은 있고요? 아저씨 죽이려고 들 거 같은데."

"그럼. 내가 누구니."

"잘났어. 정말."

이러니저러니 해도 소녀는 나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기쁜 듯했다.

마냥 독점욕이라기엔 좀 다르다.

어딘가 애정이 결핍된 그런 느낌이 있다고 할지.

미궁에서 태어난, 그러니까 유배자들끼리 눈이 맞아 태어난 아이들은 그런 경우가 꽤 자주 있었다.

힘든 환경은 순간의 흔들림을 사랑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나고 버려지던가.

그 아이들은 심지어 유배자도 아니다.

완전히 정착하지 않을 것이라면 사랑이 금기인 이유다.

처음에는 발랄한 태도에 가려 몰랐으나, 애정을 갈구함이 느껴진다.

누군가에게 더 사랑받고 싶고, 필요해지고 싶고.

나름대로의 유서 깊은 가문이었던 것 같은 이번 세계의 정씨 집안은 자상하고 따뜻한 곳은 아닌 모양이다.

나도 사람 새끼라 그런 마음의 빈 곳을 나로 채우려고 드는 꼬마를 내칠 수는 없지만.

"손잡아줘요."

"왜?"

"그냥요."

이런 것도 좋다고 헤실거리는 걸 보면 어디까지 받아 줘야 할지 참.

잎사귀 요정 카드를 쓰면 어떤 동물의 특징이 나타날지는 랜덤이다.

처음에는 고양이가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요즘 보고 있으면 강아지다.

잎사귀 요정이 된다면 내 곁에서는 꼬리가 쉬지 않고 흔들리고 있을 것 같다.

* * *

사랑과 결혼 하니 생각난 것이 있었다.

사냥꾼은 이제 요정들과 어울리기를 그만두고 자신의 무기를 손질하는 중이었다.

나는 이번 층에서 아무런 근접전을 하지 않았기에, 하다못해 투검조차 한 적이 없어 손질할 무기가 없다.

내 몸을 손질하면 했지.

"좀 도와줄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봅니다."

"들켰나?"

평소에야 사냥꾼은 알아서 하겠거니 하며 아무런 터치도 하지 않았다.

"마력 쓰는 법 좀 배워 보지 않을래?"

"……그러죠."

의외로 선선한 승낙이 나왔다. 순수 레인저를 고집하는 것에 무언가 있지 않을까 했는데 꼭 그렇진 않나.

그리고 그 이유는 곧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이런 말 잘 안 하는데 말이야."

"재능이 없다는 말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게."

활 레인저로서는 치명적인 단점 중 하나다.

그냥 장비빨로 강해지는 총 레인저와 달리 순수한 활 레인저는 한계가 있다.

그것을 보충하는 것이 마법이다.

특수 화살은 나중에 가면 따로 그런 걸 구비하지 않아도 평타처럼 갈기게 된다.

총알은 너무 작아 마법을 실어 쏘기 힘들다.

탄자가 큰 총기여도 이번에는 탄속이 문제다.

화살은 그런 의미에서 적절한 크기와 탄속을 가진 투사 무기다.

마궁수, 더 간지 나게 말하면 [아케인 아처].

활잽이라면 중반부터는 당연히 채용하는 클래스다.

그걸 못한다는 것은.

"제가 왕국에 결국 도달하지 못한 이유 아니겠습니까."

"흠, 꼭 그렇진 않아. 총 들어볼 생각 없어?"

사냥꾼은 조금 의외라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쓸모가 없지 않습니까. 총기 구경하기도 힘든데. 탄 수급은 어쩌고요?"

총기 레인저는 그 나름대로 전설의 클래스다.

왕국 이후에야 발에 채는 게 총이지만 그 이전에는 구경하기도 힘들다 보니 대다수에게는 그런 인식으로만 남아 있다.

혹시 구하더라도 탄 수급도 문제고.

초기에는 총탄을 제작하는 정도의 시간대에 떨어지기도 힘들다 보니.

"안 그래도 [모루]를 찾으러 갈 생각인데. 초반용 총기는 제작이 가능해."

"……금시초문입니다만."

"이건 아무래도 잘 안 알려주니까. 이 시대의 난쟁이들은 총이 뭔지 모르기도 하고."

사냥꾼은 총이라고 중얼거리며 자신의 손을 보았다.

어쩐지 낯설다는 듯이.

"다시 총을 잡아볼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아니, 의심 안 해?"

"리더를 이제 와서 의심하는 게 시간 낭비 아닙니까?"

그러며 나를 쳐다보는 눈이 아주 그냥 순진해 보일 정도다.

막내랑 같이 어울리더니 닮아가나.

사냥꾼이 한숨을 내쉬더니 물었다.

"그래서 그거 말고 진짜 하실 말씀은 무엇입니까?"

"아, 그래. 내가 참. 뭔가 사생활을 캐려는 건 아니고. 파티원이니 좀 알아두고 싶어서 그런데."

사냥꾼이 쓰게 웃는다.

무엇을 묻는지, 그리고 무엇을 짐작하고 왔는지 알겠다는 표정.

"아내가 있었습니다."

"요정이었어?"

"그루터기 요정이었습니다."

"자식도 있었고?"

"예. 딸이 둘이었습니다."

오, 맙소사. 덫이 아니라 요정의 지뢰를 밟았군. 이거 발목은 날아갔다.

나는 개인사는 깊이 관여하지는 않는 주의다.

정확하게 배려할 수 있을 정도로만 기억해 두는 편이고.

그것이 미궁의 표준이기도 하다.

"좋아, 사정은 알았으니.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보도록. 더 이상은 캐지 않도록 하지."

사냥꾼이 어깨를 으쓱했다.

"다 물어보셔도 됩니다. 제가 먼저 털어놓기는 구차하니 아무 말도 안 했을 뿐이죠."

"그건 별로 내 스타일이 아냐. 한 명 한 명 개인사를 알게 되다 보면……. 좋은 일이 없었거든."

꼭 사랑이 아니더라도 다시 보지 못할 사람에게 정을 주는 것은 금기다.

바깥 같으면 죽음으로서 무로 돌아가야 하지만.

미궁에서는 100년의 세월이 다하고도 다시 그리워하며 죽음을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100년을 채우기도 전에 차라리 죽을 수 있으면 하고 바라는 유배자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나도, 뭐 결혼은 아니지만. 연애는 해봤지."

"달콤하면서도 끔찍한 독입니다. 잊을 수 없지요."

"맞아."

자 생각을 해보자. 요정의 지뢰에 발목이 날아간 사람이 왕국까지는 꼭 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시간의 신전?"

"예."

"그거 뜬소문인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미궁은 많은 소문이 돈다.

근거가 있건 없건, 보통의 희망찬 이야기들이다.

나는 진실을 알지만.

* * *

바위 난쟁이 마을의 촌장은 나이트 크로우의 대마법사가 나타났음을 알게 되었다.

최근의 근심·걱정이던 그린스킨 군대를 몰아낸 것이 그 마법사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좀 더 극진한 대접을……."

"아니, 괜찮소. 대신 눈표범을 좀 더 빌려줄 수 있겠소?"

함께 온 잎사귀 요정들이 눈을 번쩍번쩍 빛낸다.

뭐야 무서워, 저거 마법인가?

촌장은 조금 탐탁지 않게 요정들을 쳐다보더니 마지못해 눈표범을 내주었다.

제발 무사히 돌려달라는 간청과 함께였다.

그야 뭐, 이런 지역에 있는 마을이라면 외부와 교류할 수단이 한정적이다.

저걸 다 잃기라도 한다면 꽤 오랫동안 고립되는 셈이다.

이끼 난쟁이들 정도나 이런 곳을 짐 마차를 끌고 드나들겠지.

"귀여워!"

"복슬복슬해!"

"최고야!"

여전히 시끄러운 잎사귀 요정들이 맵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완전히 요정의 우군이 되었다 보니 정령들까지 동원해 맵을 싹 털어준다.

안 그래도 눈표범을 타보고 싶어 안달이던 녀석들이라 신나게 수색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동안 쫓기던지라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했던 반동도 있는 모양이었다.

이상하게 성인 남성 요정이 적은 것은…….

죽어서겠지.

쾌활함이 천성인 잎사귀 요정들은 결코 슬픔에 오래 잠겨 있지 않다.

감정이 휘발성이 높다는 점에서는 오크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말을 하면 굉장히 화낼 거다.

소녀는 그 와중 고양이 귀 요정과 상당히 친해진 모양이었다.

타는 법을 배우겠다며 같이 다니는데 내 곁이 아니라도 밝은 모습이 보기 좋다.

나는 [모루]를 찾기를 원했고, 곧 발견되었다.

그 자리는 야생 예티들이 지키고 있었으나 처리는 어렵지 않았다.

[모루]라는 것의 생김새는 그야말로 모루지만, 좀 많이 크고 마력을 띄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언제나 다음 층으로 내려가면 존재하는 회복의 샘처럼 유배자를 위한 오브젝트다.

"이건 바위 난쟁이 마을이 스폰되었다면 반드시 맵 어딘가에 존재하거든."

"정말 미궁의 규칙은 누군가에게 배우지 않으면 알 도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난쟁이에게서 빌려온 망치를 들고 막내를 불렀다.

지고 있던 케찰코아틀의 비늘을 내려놓는다. 그 외에도 여기저기 온갖 부위들이 있다.

제일 중요한 건 비늘이긴 하지만 만들려고 하는 물건에 따라 디테일한 재료 역시 달라진다.

소재들을 늘 가지고 다닐 수 있다면 좋겠으나 공간계 마법은 아직 요원하기에, 요정과 난쟁이들이 가진 것을 좀 받았다.

그린스킨 군대에서 뭔가 좀 있었을 것 같은데 너무 화끈하게 날려버려서 남은 게 없다.

여신께서 헛기침을 하더니 고하셨다.

「제물 좀 돌려줄까?」

‘왜 그딴 짓을……, 아니, 그러시려고 하십니까.’

「트롤 시체 하나만 있어도 그럴싸한 방어구가 나오잖아. 우리 막내 좀 주자고.」

‘막내가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빼먹지 않는다. 식사 전에도 꼬박꼬박 기도를 올리니 어찌 안 기쁠까. 이게 신도지. 좀 보고 배울 생각 없어?」

그동안의 정보로 미루어보아 여신님은 지구계열 출신은 아니다.

막내가 본래 믿던 종교가 어떤 건지 잘 모르는 게지.

나만 입 다물면 두 명이 행복해지니 가만히 있도록 하자.

‘그거 교리로 삼지는 마십쇼.’

「자유의 신에게 무슨 제약이 있다고 그래. 난 아무것도 강제하진 않아. 크흠. 그냥 저래주면 좋겠다는 거야.」

‘그러고 보니 그러셨지.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죽어가고 있었잖아.」

여신님은 정말로 막내를 아끼시는지 비교적 멀쩡한 트롤 시체 하나를 다시 돌려주셨다.

이것도 신좌에 반하는 행위다 보니 끙하고 앓는 소리를 낸다.

저래 봬도 언데드인 상태로 치유의 샘물을 맞는 것만큼 아프다.

막내가 감격하여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내가 망치질을 시작하자 사냥꾼이 어이없어했다.

"왜 난쟁이 장인을 안 데리고 오시나 했더니, 역시 직접 하시는군요."

"어지간한 장인보다 내가 더 잘해."

주요 팩션으로 여겨지는 그룹들은 저마다 친해졌을 때의 장점이 있다.

그린스킨 그룹은 일단 전투를 피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선 강력한 전투력의 아군을 기대할 수 있다.

요정 그룹은 다양한 마도구와 활용도 높은 지원군을 기대할 수 있다.

난쟁이 그룹은 당연히 장비다.

이끼 난쟁이들은 상인이라 가진 게 많고, 바위 난쟁이들은 장인들이라 만들 게 많다.

이 [모루]라는 건 사실 바위 난쟁이들에게는 애증과도 같은 것이다.

신들의 협약을 통해 미궁의 일부로서 대륙에 놓이곤 하는 물건인데, 대충 전설 속에 나오는 마법의 모루 같은 거다.

똑같이 만들어도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

장인의 자존심은 상하지만 결과물은 더 휘황찬란하니 애증이다.

그들에게 복잡한 감정을 선사하는 대신 직접 하자.

트롤 가죽 갑옷을 만들어 막내에게 입힌다. 왜 모루에서 이런 게 만들어지냐고 하면 나도 모른다.

그냥 하는 법을 알 뿐이지. 모루에 올려두고 작업하면 된다.

그러니 신들의 협약에 의한 권능 아니겠나.

저 가죽 갑옷은 트롤의 재생력 일부를 얻는 대신 아주 빠르게 배가 고파진다는 단점이 있다.

문짝 대신 제대로 된 방패도 하나 만든다. 제 몸만 한 크기지만 철저하게 방패에 특화된지라 어떻게 다루어 낸다.

비늘 하나를 통째로 썼는데 이게 사실 그리 무거운 소재는 아니다.

막내보다는 오히려 여신님이 만족하셨다.

그리고 활, 케찰코아틀의 송곳니 일부와 힘줄은 아주 훌륭한 활의 소재다.

"총 만든다고 하신 것 아닙니까?"

"주 무기를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재료를 모아보니 권총밖에 안 나오겠더라고. 이거라도 보조 무기로 써."

결과물은 플린트 락 권총.

사냥꾼이 받아들고는 의아하게 나를 쳐다본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탄을 몇 개 만든 후 쥐여줬다.

사냥꾼이 시험 사격을 했다.

평범하게 발사된 총탄이 약간의 뜸을 들인 후, 폭발했다.

"이게…… 대체 뭡니까?"

"보스 무기지. 보이는 것과는 다른 위력을 낸다고?"

"허어."

신화적인 마물은 쓸모가 참 많다.

태양신 전승에 따라 무기엔 마법이 걸린다.

특히 마법 부여가 거의 불가능한 총기에서 속성을 띠고 있는 물건은 귀하다.

왕국에서도 팔면 팔리는 물건이다.

초반에 총기가 귀한 건 별 이유가 아니다.

아직 짝수 층 시간대의 진폭이 크지 않기에 총이 발명될 만한 시점으로 떨어질 일이 없어서다.

어디서 주울 수도 없고, 난쟁이에게 부탁을 할 수는 없으니 유배자가 직접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말이 쉽지.

나니까 하는 거다.

소녀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본다.

대거 두 개를 만들어주었다.

보스 무기인 만큼 급이 좀 된다.

죄다 불속성이다.

제일 무난하게 강력한 속성이다 보니 아주 쏠쏠하다. 테마도 설원이니 발열 효과도 있다. 아주 좋다.

나는 롱소드를 하나 만들었다.

그 전까지 쓰던 주 무기들도 슬슬 내구가 다해가거나 이미 다했다.

투척용 단검도 만들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재료를 모두 소진했다.

작업이 모두 끝날 무렵 요정들이 열매가 달린 나무를 발견했다.

보라색이 폭발 열매였으니 붉은색 열매는 무엇일까 했는데 투명화 열매였다.

역시 고성능이지만 개수가 셋밖에 되지 않는다.

"와! 열매 오랜만이네요. 이거 4층에는 없었어요?"

"있었을 건데, 거긴 너무 흉흉했어. 넌 탐색하고 싶었니?"

"윽, 그건 아닌데."

"거기에 나이트 크로우 앞에서 그걸 들쑤시고 다니긴 좀 그랬지. 기껏 양식 있는 유배자 이미지를 만들어뒀는데."

그걸 떠나 그 애늙은이 요정 마법사와 더 오래 같이 있지 않았던 건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내가 쓸데없이 정체도 간파해 버려서 일이 이상하게 돌아갔을지도.

사실 이 나무도 좀 이상하긴 했다. 열매 나무를 지키는 소규모 몬스터가 있어야 하는데 여기엔 없다.

주변을 탐색해 보니 얼어 죽은 흡혈귀 셋이 발견되었다.

아, 설마. 하면서 입맛을 다셨다.

다행스럽게도 바르바로이 클랜은 맞으나, 꼬마 흡혈귀는 아니다.

꺼내서 햇빛에 닿게 하자 재가 되어 흩어진다.

불쌍하긴 하다. 어쩌다 여기까지 와서.

저녁 무렵 계단도 발견되었다.

요정들이 아니었으면 6층에 서든 데스가 있는지 확인할 정도로 오래 머물 뻔했다.

더 북부의 빙하 사이 크레바스 아래에 있다.

심지어 그런 곳인데도 지키고 있는 야생 몬스터도 있었다.

서리 용인이라.

팩션은 아니고 단일개체라 상대가 어렵진 않았다.

빙하 속에 갇혀 있다가 크레바스가 갈라지며 소생한 모양이다.

일단 계단을 확보한 후, 파티원들에게 물었다.

"어때? 좀 쉴까? 바로 갈까?"

다들 괜찮다는 의견이기에 속행하기로 했다.

눈표범들이 제대로 난쟁이들에게 돌아갔음을 확인하고 다시 계단으로 돌아왔다.

요정들은 꽤나 아쉬워해 주었다.

소녀가 고양이 귀와 포옹하는 장면은 나름대로 애틋했다.

가장 아쉬워할 줄 알았던 사냥꾼이 의외로 무덤덤했다.

"제가 사랑했던 가족은 그루터기 요정입니다."

그런 거 치고는 너무 좋아하던데.

모두가 상당히 경험치를 챙겼다.

포인트는 늘 그렇듯이 다음 층의 상태를 보고 분배하자.

계단을 내려가면 지겨운 부유감이 몸을 감싼다.

[TIP : 미궁은 유배자에게 다양한 시련을 부여합니다. 때로는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는 상황에 몰리기도 합니다.]

이야, 이거 배틀로얄인가? 팀전일 수도 있겠군.

유배자를 플레이어인 셈 친다면 PVP, 혹은 PK층이다.

미궁이 말한다.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