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0화
7층 - Lv. 32 평범한 유배자들(1)
프로레슬링의 로얄럼블처럼 지속적으로 새로운 유배자가 투입되는 식이라면 층계를 내려가자마자 기습을 받을 수 있다.
마력을 휘감고 즉각 반응할 준비를 했다.
사냥꾼도 나와 비슷하게 일단 몸을 굴리며 주변을 파악하고,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겨누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서로 소리를 내었고, 서로를 겨누고 있게 되었다.
"뭐 해요?"
소녀가 어리둥절하게 묻는다.
머쓱해져 괜히 머리를 긁으며 일어선다.
"팁이라면서 메시지 뜨는 거 봤지? 여기 PVP 걸려 있는 층이야. 매복을 대비한 거지."
"네에? 그렇게 중요한 걸 왜 안 알려줬어요!"
"알려줬는데."
"언제요?"
"내가 틈만 나면 이건 어떻고 저건 이렇고 말해주잖아."
"좋아요. 인정할게요. 저 학교 성적은 뒤에서 세는 게 더 빨랐어요."
특히 암기 과목에 약했니 뭐니 중얼거린다. 대신 체육은 만점이었겠지.
"체육대회는 출전금지였어요. 맨날 구경만……."
"음, 그래. 7층 체육대회는 너도 참가할 수 있어."
"그런가요?"
웃긴 일이지만 미궁의 PVP층은 정말로 체육대회 비슷하게 진행되는 느낌이 있다.
PVP 같은게 뜬 7층이래 봐야 엄청나게 긴 시간을 쏟은 것은 아니다.
나 같이 시간에 쫓기는 유배자는 드물다. 왕국에 도전하는 대부분의 유배자들에게 아직까지는 버릴 수 있는 시간이다.
특출나게 운이 좋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렇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들 생각한다.
짝수 층의 크기는 제한되어 있다.
유배자가 한 층에서 얻을 수 있는 자원은 한정적이다.
온라인 RPG 게임처럼 계속 젠 되는 몬스터를 무한히 잡을 수는 없다.
설사 맵 밖에서 증원군이 도착할만한 상황이라 해도 그런 맵은 예외 없이 서든데스가 빠르다.
애초에 소녀가 없는 다른 파티는 아직 그런 규모의 서사에 얽히지도 못하는 게 보통이다.
정상 상태의 내 왕국 진입 타임어택 기록은 일주일이 채 안 된다. 그런 정도밖에 안 되는 난이도다.
이 게임은, 그러니까 미궁은 스노우볼이 중요하다.
이득은 눈덩이처럼 굴리면 점점 커진다.
남들보다 빨리, 많이 굴려야 한다.
초반에 강하면 성장에 가속이 붙는다. 그걸 점점 굴려서 키워 나가는 게 핵심이다.
왕국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튜토리얼 구간인 왕국 이전이 끝나고 신입으로서 왕국에 진입했을 때의 전력 또한 아주 중요하다.
왕국에서도 그 이득의 스노우볼을 계속 굴려 나가야 하기 때문에.
이제 문제가 생긴다.
홀수 층에서 사냥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난민들은 이곳까지 오지 못한다.
자원은 한정적이다.
그렇다.
유배자에겐 유배자 또한 귀중한 사냥감이다.
경험치만이 아니다.
그들이 나와 다른 짝수 층에서 겪었을지 모르는 어떠한 행운.
귀중한 장비.
고성능의 소모품.
어쩌면, 아직 사용하지 않고 아껴둔 종족카드까지.
겨우 7층. 자신만 있다면 도박을 걸지 않을 이유가 없다.
2번째 테마부터 홀수 층은, 그 어느 짝수 층보다 중요한 사냥터가 될 수 있다.
* * *
짝수 층이 아니라고 설원이라는 테마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7층은 좀 악질적이긴 했다.
끊임없이 흐르는 빙하의 위다.
제대로 된 땅은 한 줌도 없다.
빙하의 규모가 커서 대지와 큰 차이는 없긴 하지만 존재하는 기믹에 따라서는 충분히 무너지고 갈라진다.
그 아래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바다뿐이다.
소위 말하는 훅 가기에 가장 좋은 종류의 지형이다.
나는 일단 거점으로 삼을 만한 으슥한 곳을 찾기로 했다.
빙하가 전부 평평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지형 자체는 상당히 복잡하고 얼음 동굴이라고 해야 할 만한 것들도 많이 뚫려있다.
거대한 유빙과 빙산이 엉겨 붙어 만들어진 덩어리에 구축된 개미굴 같은 미로에 가깝다.
제법 움직였음에도 사람은 없다. 단지 발자국 따위의 흔적만이 있을 뿐이다.
"이번 층은 별일 없이 조용히 넘어만 가자고."
"그래요? 어째서요?"
소녀가 약간 애매한 태도로 질문한다.
"다른 녀석들이 짝수 층에서 뭘 얻어 봐야 우리가 거쳐온 층에 비하면 별거 없을 거야."
"저는 처음이라 잘 몰라요."
"우리가 겪은 4층의 그 뱀파이어 로드 기억나?"
소녀가 몸서리쳤다.
"어우, 어제 꿈에 나왔어요."
"어쩐지 몸부림을 치더라. 나 맞아서 잠 깬 거 알아? 하여간 그 녀석, 정상적이라면 20층 이후에 나올 수준이야."
"에, 여기가 지금……."
"7층."
"그러네? 왜 그래요? 우리만 이상한데요."
이걸 너 때문인 거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미리 생각해 둔 대로 대답했다.
"뭔가 트리거를 건드린 거 같아. 정상적인 진행이 아니야. 하지만 이득이니까 나쁠 거 없지."
"이득? 왜요? 너무 힘든 거 같은데요."
"경험치가 다르지. 다른 유배자들은 기껏해야 50이 될락 말락 하고 있을걸? 너 레벨 몇이야?"
소녀가 눈을 약간 길게 깜빡하더니 대답했다.
마인드맵을 여는 것도 상당히 익숙해졌다.
길게가 아니라 진짜 가볍게 깜빡하면서 열 수 있도록 연습시키고, 종래에는 그냥 아무 때나 자유자재로 열 수 있어야 한다.
"72인데요."
"난 89야."
"저번 층에서 혼자 다 처먹어서……."
"어허, 씁. 이쁜 말 써야지. 떽."
"혼자 다 드셔서……."
엄밀히 따지면 7층에서 50레벨만 되어도 유배자를 죽이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한계치에 가까운 레벨이다.
난이도가 이상하게 튀지 않고 평균적이었다는 가정하에서, 5층 보스전을 나처럼 거의 독식해야 한다.
"거기에 장비 생각해 봐."
지금도 불길한 아우라를 내뿜고 있는 보라색 단검.
이젠 죽은 카크리쉬의 유품인데, 왕국에서 이걸 가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목숨을 걱정해야 한다.
[히어로 유닛]의 장비이니 오죽할까.
"그거 말고는 없잖아요!"
"아니지, 그냥 우리가 걸친 장비 자체가 다 다른 유배자들에 비해 몇 단계는 높은 거야."
케찰코아틀의 비늘 같은 것들이야 모든 파티가 떼어갔지만, 6층에서 바로 난쟁이를 만나 그걸 장비로 만들어낸 파티는 드물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심연에서 노획해 쓰던 갑옷도 그리 급이 낮은 물건이 아니고.
소녀는 지금까지 보아온 다른 유배자들의 모습을 회상하려는 듯 미간을 찌푸린다.
"음, 확실히. 허름하기도 하고. 그냥 청바지 같은 거 입은 사람도 있었고……."
복장이 한눈에도 중세 판타지의 주민 같아 보인다면 이미 운이 좋은 축이다.
여궁수의 파티가 그랬다. 마법사는 로브, 궁수는 가죽 갑옷.
예쁜 원피스나 잘빠진 정장은 전투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그래도 우리는 구색만 보면 아쉬울 게 하나도 없잖아?"
오히려 충분히 과할 정도다. 6층 난쟁이 마을에서 그냥 더스번 경의 펜던트 하나만으로 의심을 모두 지운 이유가 있다.
인종의 혼란 정도를 제외하면 어딜 보아도 대륙의 주민과 다를 바 없다.
"지금 네가 걸친 잎사귀 요정의 사제복 정도면 그걸 본 사람의 눈이 돌아가도 이상하지 않아."
소녀는 마법이 다해가는 그루터기 요정의 옷 대신 잎사귀 요정의 옷을 한 벌 받았다.
그것도 사제의 옷 여분이었는데, 무려 자연의 신이 가호를 내린 물건이다.
신의 가호를 받은 다른 장비로는 카크리쉬의 단검인 아카샤의 눈이 있다.
이 둘이 동급이라 보긴 힘들지만 그럼에도 가호 장비는 왕국 이전 이후를 막론하고 귀중한 것이다.
게임 시절에는 마우스를 올리면 유니크를 뜻하는 주황색 아이콘이 달려있을 터였다.
"그렇네요. 그럼 우리가 다 이길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정정당당하게 토너먼트라도 하면 그렇겠지만."
3층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5층에서 보스전의 와중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라.
"지금 우린 황금 고블린이야."
"……아. 우릴 죽이고 털면 완전 개이득이네요?"
"그래. 어차피 싸울 거라면 더 좋은 장비를 가진 유배자를 죽여 취해야 하니까. 여러 파티가 연합하여 공격해 오기도 한다."
죽음이 가벼워지는 미궁이어서 생기는 문제?
나는 딱히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원래 극한 상황에서는 다양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생물이다.
단지, 완전한 살인이 아니라는 특수성이 그 결정을 더 쉽게 만들어줄 뿐이다.
3층의 무법자들은 애초에 왕국에 도달하고, 나아가 이 미궁의 클리어를 노리는 녀석들이 아니었다.
7층의 유배자들은 무법자는 아니되, 무법자 따위와는 기본기부터가 다른 노련함으로 미궁을 헤쳐 나가는 이들이다.
선량할지라도 합법적인 사냥이 가능한 곳이라면 참지 않는 이들도 많을 수밖에 없다.
"이거 슬슬 시작되려나 이제?"
"그런 것 같습니다."
사냥꾼이 바닥에 찍힌 발자국을 보며 대답했다.
다행스럽게도 대단한 룰이 있는 층은 아니다.
파티 배틀로얄에 가까운 구조다.
사람이 어느 정도 줄어들 때까지만 별일 없이 지낸다면 계단이 열리리라.
유배자들이 우스운 게, 계단이 열리는 순간 거짓말처럼 싸움을 멈춘다.
일단은 원한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대부분이 알기 때문이다.
필요에 따라 죽일 뿐이지 무법자가 아니라는 제스처다.
PVP는 유배자끼리 인간 사냥을 해도 된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는 층이다.
다만 그 이상을 한다면, 무법자로 규정되어 공격받는다고도 정해져 있다.
정말로 무슨 체육대회 같다.
소녀가 끼어들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작되는 거예요?"
"카운트다운이 시작될 거야. 그게 끝나면 모든 파티가 서로를 볼 수 있게 될 거야."
당연히 소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사냥꾼이 부연한다.
"아까부터 발자국 같은 흔적들은 보이지만 사람의 모습은 없습니다. 모두 여기에 존재하지만 서로 간섭할 수 없는 상태지요."
"카운트다운이 끝나면 서로 볼 수 있고, 공격할 수도 있게 되지. 그럼 싸움 시작이지."
위치 선정은 중요하다. 상대의 장비 상태 등도 모르고 갑작스럽게 싸움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위로 올라가는 건 좋은 생각이 아냐. 다들 같은 생각을 하니까."
"발자국이 없는 방향입니다."
"좋아, 어디 잘 짱박혀 있자고. 우린 여기서 사람 안 죽여도 아쉬울 게 하나도 없어."
층마다 어찌나 힘든지. 그래도 바로 이전 층은 육체적으로는 편안했다.
계획이 어긋난 점도 일절 없었다.
6층은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평온함이었다.
권능까지 발라가며 억지로 [미티어 스웜]을 구현한 층에서 편안함을 느껴야 하다는 게 문제일 뿐이다.
그때 실패했다면 대륙의 역사에 남을 마력재해가 생겨났을 건데 말이지.
마침내 적당한 위치가 보였다. 카운트다운을 시작하기 전에 찾아내서 다행이다.
눈에 띄지 않고, 전략적 요충지로 기능할 여지도 없고, 적당히 으슥하며 퇴로도 존재한다.
자그마한 게 이글루에라도 들어온 것 같다.
"예쁘다."
소녀가 동굴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빛이 참 잘 통과하네. 깨끗한 얼음이야."
커다란 빙하의 깊은 곳까지도 빛이 통한다.
남들의 위치를 파악할 정도는 아니지만 파르스름한 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광경은 몽환적이다.
지구의 빙하는 이렇지 않다.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에는 지구에서 보지 못하는 자연이 많다.
[10]
아무 맥락 없이 눈앞에 숫자가 떠오른다.
"이거 초가 아니네요?"
"초에 익숙하지 않은 유배자도 있으니까 그 배려려나?"
카운트다운의 숫자는 일정하게 줄어들지만 5초 정도의 느낌일까.
숫자가 0이 된다.
이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야…….
눈앞에 다섯 명의 사람이 나타났다. 그다지 크지 않은 공간에 갑작스레 아홉 명의 사람이 있게 되었다.
막내가 재빠르게 방패를 들어 세운다.
무언가 공격이 날아오는 상황을 대비하는 모습이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곧잘 저런 대응을 보여준다. 험하게 산 것이라면 누구 못지않은 증거다.
"이런 젠장 안 갔잖아?"
"발자국을 지웠더니 오히려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 버린 것 같은데."
상대 파티원들 사이에 그런 대화가 재빠르게 오간다.
이들도 존버팟인 모양인데?
나는 무슨 일이 발생하기 전에 일단 막내의 뒤에서 나와 양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잠깐만. 거기 당신들. 어차피 여기 숨어 있을 생각이었지?"
잠깐 침묵이 흐르더니 상대의 파티 리더로 보이는 이가 긍정했다.
"이야, 우리도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여기 숨어 있다가 계단이 열리면 헤어지자고? 어때?"
우리 파티의 장비는 한눈에도 위협적이다.
저들이 싸움을 일으키고 싶을 리가 없다.
큰 불만 없이 내 의견을 수용했다.
평화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울림의 단어인가.
"몇 명이 남아야 계단이 열리는지가 문제겠군."
상대 리더의 말에 나는 무해함을 연기하며 웃어 보였다.
"보통은 100명 정원에 50명 정도야. 넉넉하지."
"오 그래? 그런 걸 알다니, 상당히 고참인가 봐."
슬쩍 아카샤의 눈에 상대의 시선이 향한다. 하지만 이내 떨어진다. 전의는 없다.
이제 곧 인원 제한도 떠오를 건데, 인원이 100명 정도라고 가정한다면 50명 근처에서 클리어 조건이 결정된다.
말하는 순간 떠오른다.
[4]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정말로 잘못 본 줄 알았다.
"네…… 명?"
누군가의 멍한 중얼거림과 함께 깊은 침묵이 찾아왔다.
일단 눈앞의 다섯부터 죽여야겠군.
평화란 얼마나 덧없는가. 젠장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