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2화
7층 - Lv. 46 비범한 유배자(1)
대부분의 종족들은 어느 정도 일정한 범위 내의 성능을 가지고 있다.
트롤을 예로 들자면 강력한 근접 전투력과 재생력을 장점으로 가진다.
대신 마법 구사는커녕 논리적 사고에도 애로사항이 생기는 지능 역보정과 거대한 덩치, 빠른 신진대사로 인한 불이익을 가진다.
강점이 유별나면 단점도 유별나다.
밸런스는 그렇게 맞춰 돌아간다.
반면 고위 종족으로 취급되는 일부 종족들은 단점 없이 강력하거나, 약점에 비해 강점이 지나치게 강하다.
천사와 악마는 딱히 단점이 없는 종족이다.
평균 이상의 신체 능력과 마법 적성, 기나길다 못해 불로불사에 더 가까운 수명.
미궁의 신앙 생활에서 보는 이득.
특정 속성에 좀 약해진다는 것은 단점조차 아니다.
천사가 무력화될 정도의 강력한 어둠 속성이라면 인간도 무력화되는 건 마찬가지다.
다른 속성 저항이 높은 거지 어둠 저항이 낮은 게 아닌 그런 느낌.
심지어 외모조차 보정이 들어온다.
원판이 어딜 가는 건 아니지만 피부가 깨끗해지는 등의 외모 보정이 생긴다.
이 둘은 흡사한 종족이지만, 차이점을 들라면 악마는 좀 더 마법적인 능력에 특화되었고 천사는 물리적인 능력에 특화되었음을 들겠다.
미궁의 천사라 함은, 어지간한 마법은 맨몸으로 튕겨내며, 자유 비행을 태생으로 달고 있고, 날개라는 서브 웨폰을 가졌으며.
그딴 보정을 지니고도 완력에 종족 보정이 트롤만큼 들어가고, 덩치로 인한 속도 손해는커녕 속도마저 상향 보정이 붙는다.
그런 주제에 마법 쪽도 그루터기 요정과 잎사귀 요정을 합쳐둔 것만큼의 적성을 가진다.
이 모든 것이 노 패널티.
괜히 왕국 직행권이 아닌 셈이다.
거기에 상대의 연차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 이상의 숙련도는 보장된다고 봐야 한다.
이상의 설명을 들은 소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떻게 이겨요?"
"사실 그렇게 나쁜 상황이기만 한 건 아냐. 우린 이미 치트나 다름없는 사기캐를 하나 제끼고 왔잖아?"
천사는 피해를 입혀도 그것을 재생하지는 않는다.
물리 계열인 이상 압도적인 광역 화력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지도 못한다.
괴이한 권능으로 조그만 상처에서도 지속적인 출혈을 강요하지도 못한다.
인간이 상대인 바르바로이와 비교했을 때는 큰 차이 없이 해볼 만한 상대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이번에는 나이트 크로우도 없습니다."
나를 신의 사도로 믿고 따르는 막내를 빼고 둘이 우려를 표한다.
「그 비유는 적절한 것 같진 않은데. 천사한테는 권능도 잘 안 박히는 거 알지?」
"신께서도 그리 말씀하십니다. 두목."
아니, 여신님이 통수를 치네.
주눅 들고 시작하면 이미 반쯤 진 건데.
어쨌건 실질적으로 이 장소에서 나와 토론이 가능한 존재는 여신님뿐이긴 하다. 나머진 짬이 딸린다.
「아카샤의 눈으로 찌르기도 힘들 거다. 천사라면 민첩 계통 전사일 확률이 높으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저 녀석 천사 숙련도 낮아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고위 종족의 숙련도가 높은 유배자가 대체 얼마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맞는 말이다. 보통은 한 번 얻어 보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니까.
아니, 평생 보지 못하고 100년의 기한이 끝나는 이들이, 정착하지 않은 도전자 중에서도 많을 것이다.
왕국 이후에서도 그러하다.
고위 종족 카드가 나타나면 아주 시끌벅적해진다.
정착 생활을 위해서라도 누구나 손에 넣고 싶어 하는 물건이다.
그 기나긴 수명 때문에 말이지.
하지만 그 희귀성에는 예외가 있다.
게임 시절, 어떤 경우에 고위 종족 카드가 등장할 확률이 높아지는지 알며.
어떠한 인카운터의 보상이 고위 종족 카드를 확정적으로 제공하는지 알고.
자신의 뜻대로 그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설계할 수 있다면 달라진다.
게임 클라를 뜯어 정보를 파악할 수 없는 절대다수의 유배자들은 모르는 정보.
「확실히……, 이게 게임이라고 친다면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겠네……. 천사를 몇 번 해본 거야?」
"천사는 아주 무난한 물리계 종족이라 자주 해봤죠. 100번 정도는 해본 거 같은데."
「너는 언제나 신의 상상조차 뛰어넘는 재주가 있구나.」
"그러는 여신님도 지금 종족이 인간은 아니시지 않습니까?"
「악마긴 하다만, 알다시피 창잽이라 별로 좋진 않았어.」
‘데빌이시겠군요.’
「아무리 그래도 데몬은 너무 순수 마법사니까 말이지.」
애석하게도 악마는 종류에 따라 차등이 있다 한들 기본적으로는 마법의 종족이다.
여신님은 거의 전사 원툴이시니 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종족을 바꿀 만큼 고위 종족 뽕이 좋다는 뜻이다.
여신님은 친절하게도 나와 단둘이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신도 넷 모두에게 들리도록 신언을 보내셨다.
생각 외로 세심하신 분이다. 어쩌다 혼돈의 신이 되셔서는.
나는 선언했다.
"천사 전문가인 내가 말하건대, 저 녀석은 천사 처음이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깐츄롤이 미숙해. 맵인 빙하 자체를 전복시키려고 하는 것도 그렇고, 단순히 전투여도 그렇고, 물리력을 불필요할 정도로 과하게 행사 중이야. 그래서 트롤인 줄 알았다니까."
천사는 아주 세련된 종족이다. 힘 전사보단 민첩 전사에 더 가까운 종족이기도 하다.
지금도 들려오는 저런 무식한 파괴음을 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낼 이유도 없다.
말 그대로 트롤처럼 운용하고 있다. 압도적인 능력치로 단지 찍어 누를 뿐.
다른 부분의 숙련도는 몰라도 천사 플레이에 적응하지 못한 어설픔이 묻어난다.
"저렇게 쓰는 게 아니란 건, 바보가 아니면 천사인 채로 한 달만 지내봐도 알 수 있거든?"
"안 해봐서 모르겠는데요……."
"아, 그냥 저놈이 천사짓은 처음 한다고 알아만 둬. 그런갑다 해."
대화를 따라가지 못해 조용하던 사냥꾼이 신음을 흘린다.
"그럼 승산이 있습니까?"
"없으면 어쩔 거야 해내야지."
사냥꾼의 눈이 순간적으로 막내에게 향했다.
나는 그 눈빛의 의미를 알았으나 지적하지 않았다.
사냥꾼 역시 스스로의 생각에 불편함을 느낀 듯 시선을 재빨리 거둔다.
일련의 상황을 애초부터 따라갈 생각이 없었던 막내는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싱글벙글 웃고만 있다.
경건하게 사도님의 말씀을 경청 중인 모양이다.
여신이 나에게만 신언을 보냈다.
「으음, 사실 나도 추천할 수밖에 없는데? 지금 여기서 버려야 할 것은 막내다. 천사의 파티원이 얼마나 강할지는 몰라도…….」
‘물론 상황 파악만 시키면 저한테 붙으려 하겠지요.’
「파티에 고위 종족이 하나라도 있으면 앞으로의 진행이 얼마나 편해지는지 나보다 잘 알 텐데.」
물론,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 종족의 전위가 생긴다면 더 이상 막내가 필요 없어진다는 사실까지도.
하지만 말이다.
‘여신님, 저는 인간입니다. 아직은.’
「빨리 탈인간하려고 살아 있는 뱀파이어를 찾아 헤매는 것 아니었나?」
‘그런 의미가 아님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약간의 뜸을 들인 후 여신님께서 말했다.
「고맙다.」
‘별말씀을. 신이시여.’
여신님의 신언은 약간 젖어 있다. 막내가 정말 정말 마음에 드신 모양이리라.
신좌는 무료한 곳이다. 적성에 안 맞는다면 그저 살아가는 것보다 괴로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냉정히 충고하는 모습은 과연 신좌에 다다른 유배자답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저걸 잡으러 간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 상황이 아주 나쁘진 않아."
더 큰 무리, 더 큰 도박을 해야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이 맵에 자동 소총이 최소 한 정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작전명은 뭐 ‘천사를 향해 쏴라’ 그런 걸로 할까?"
모두가 입을 모아 촌스럽다고 질타했다.
젠장.
* * *
천사 쪽 파티의 작전은 어떻냐면 개요 자체는 훌륭하다.
빙산은 거듭된 충격으로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시간이 있다.
기껏해야 상부가 조금씩 뒤틀리는 정도다.
지금부터 우리는 총을 가진 녀석들을 찾으러 간다.
어차피 그 녀석들도 상황은 파악했을 것이다.
운이 나빠 총기를 가진 적들이 나오거나, 자동화기라는 보상에 합당한 시련을 통과한 파티다.
천사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순순히 협력하리라.
이른바 전략적 티밍이라는 것이다.
"거기 무너뜨려."
소녀가 [강격]을 사용한다. 둔기는 언제나 보조로 가지고 다닌다.
우리가 나온 출구가 무너져 내렸다.
"두어 개 더 무너뜨리고 저쪽에서 조금만 기다리면 나올 수밖에 없을 거야."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대기 시간 동안 돌아다니면서 외웠지. 이거 벌레가 파놓은 굴이거든. 아이스 웜이 맵에 존재하고 있을 거야. 습성을 알면 쉽지."
"……다른 고참들도 다 이럽니까?"
"여신님은 알고 계셨을걸?"
신언으로 긍정이 내려왔다.
사냥꾼은 기묘한 표정이 되었다.
"이젠 놀라지 않겠다고 매번 생각하지만 끝이 없군요."
"미궁에서 하는 게 밥 먹고 도전하기 말고 더 있나? 하하."
그 어떤 바깥세상의 삶도 미궁에서만큼 밀도가 높을 수는 없으리라.
군 복무의 2년도 사람을 완전히 바꾸어놓는데 미궁은 어떠하겠는가.
다행스럽게도 타이밍은 맞아떨어졌다.
애초부터 총기를 위시하여 개미굴 같은 빙산 내의 통로에서 승부를 보려고 하는 녀석들이었다.
이 시기도 총은 엄청나게 강력하지만 개활지에선 마법의 변수가 있으니 좋은 전략이었다.
누군가 빙산째로 작살을 내려고 하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가장 귀가 좋은 소녀가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발소리가 들려온다고 알렸다.
모두 소리 없이 대기했다.
다시 먼 곳에서 쿵 하고 울리는 소리.
빙하가 비명을 지르며 흔들린다.
지금 생존자가 몇이나 남았을까?
발소리의 주인들이 나타났다. 예상대로 총신부터 보인다.
안으로 파고들었던 다른 파티는 이들에게 당했을 것이다.
빠르게 방패를 제작해서 망정이지 좁은 통로에서 자동소총은 너무한 무기다.
바깥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쉽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완벽하게 기습당했다.
소녀의 유령 같은 움직임이 뒤편의 두 명을 제압했다.
나와 사냥꾼이 각자 앞에 나온 한 명씩 쓰러뜨려 제압했다.
마지막으로 막내가 사나운 생김새를 살려 한껏 인상을 쓰고 방패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쿵 하는 소리가 중후하게 울려 퍼진다.
우리 파티인데도 소름이 돋을 정도다.
"이, 이런?"
"제기랄."
반응을 보니 말이 잘 통할 것 같다.
미궁은 대체로 어느 정도 노련한 사람들이 체념이 빠르다.
죽음을 좋아할 수는 없겠으나, 목숨은 하나가 아니니까.
* * *
정말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비교적 싱겁게 제압한 이 파티가 정말로 무장이 출중했다는 사실이다.
무장해제를 시키고 나도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대물 저격총은 뭐야 대체?"
그럴 만한 시기긴 하다. 이미 우리 파티는 심연 덕에 한 달을 날렸다.
지금 우리와 마주치는 녀석들은 어떤 이유에서건 비슷할 정도로 진행이 늦은 파티다.
그게 5층에선 그저 능력이 모자라 늦게 온 녀석들이 대부분이었다.
하나 보스전도 넘어간 지금은 개빡센 6층을 만나 힘겹게 극복하느라 시간을 많이 쓴 경우도 많다.
테마도 설원이었으니 장난 없었겠지.
"공격 헬기로부터 도망쳐 왔지……."
상대 파티 리더가 황망하게 대답한다. 허무감이 짙다.
이 정도 무장이면 신이 났을 텐데 죽게 생겼으니 아쉬울 것이다.
"이야. 싸운 건 아닐 거고 진짜 죽어라 도망만 다녔나 봐?"
"말도 마. 한 달 동안 도망 다녔어. 급습해서 무기만 챙기고 바로 계단으로 내려갔다고. 하. 그런데 이렇게 끝나다니."
상대 파티는 넷 모두 레인저였다.
아니, 그렇다기보단 총이 네 자루가 생겼으니 당연하게도 레인저를 한 것이었다.
원래 셋은 전사였고 하나는 마법사였다.
말이 총기 레인저지, 본디 총만 있으면 성립하는 클래스다. 지금이 민첩의 투사 무기 대미지 보정을 따질 시기도 아니고.
피로에 찌든 표정을 하고 있는 넷에게 물었다.
이번 회차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봐, 난 지금 여기서 너희들을 죽일 생각이 없어. 지금 계속 쿵쿵거리는 거 뭔지 알겠어?"
말을 끝내자마자 또 어디선가 진동이 퍼져 나온다.
"뭐 힘센 종족이라도 있나 보지."
"천사야."
"뭐?"
믿을 수 없어 하는 얼굴.
"그런 종족은 말로만 들어봤는데."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한다. 고참급 정도로 짬밥이 되는 연차의 유배자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걸 잡아야 하는데 말이지."
큰 설득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이미 게임 오버인데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졌다.
누가 거절하겠는가?
* * *
의외로 이들이 동굴 안에서 사냥한 파티는 둘뿐이었다고 한다.
우리 파티와 조우한 후, 극도로 경계하느라 놓쳤다나.
"잠깐만, 우리가 아홉을 잡았거든?"
"천사가 있는 파티에서 꽤 많이 잡았을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을 거야. 천사의 이점을 제대로 못 다루고 있어. 어떻게든 빠져나간 녀석들은 다 굴속으로 숨었겠지."
충분히 사냥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면 빙하를 갈라버릴 생각은 하지 않을 거다.
천사씩이나 되어도 저 복잡한 굴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제법 부담이다.
게다가 파티원들은 인간일 테니 바깥에서 자유 비행의 이점을 살리려고 했으리라.
사냥꾼에게는 대물 저격총을 쥐여줬다.
상대 파티는 불만을 가지지 못했다. 총기를 전부 우리가 쓰겠다고 해도 뭐라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되레 세 정을 순순히 돌려주었음에 의아해했다.
상대 리더가 미심쩍어하며 묻는다.
"원래 하던 클래스대로나 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총은 왜 돌려주지?"
"저 여자애는 총 쏠 줄 몰라. 저 친구는 방패 들어야 하고."
"당신은?"
"난 마법사야."
"……그거 둔기가 아니라 지팡이였나?"
섭한 말씀을 하시는군.
마법사(임시)라서 그다지 마법사 같아 보이는 부분이 없긴 하다.
그래도 가죽 갑옷 정도는 마법사용에 역보정이 붙지 않아서 곧잘 입고 다니는데 말이지.
행동방침이 결정되면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희생자가 더 발생하면 기습이 힘들다.
슬슬 다들 마력탐지조차 자제하고 있다.
천사의 존재를 깨닫고 숨으려고 하는 것이다.
데스매치던 맵 기믹이 술래잡기로 변질되어 간다.
"숨어."
근처의 굴로 모두 뛰어들었다.
천사가 비행하며 지나간다.
깃털 몇 가닥이 하늘하늘 떨어져 내리더니 반짝이며 주변을 소멸시킨다.
흘러내린 깃털마저도 저런 위력이다.
다행스럽게도 천사는 아는 얼굴이 아니다. 적어도 고정 네임드는 아닌 것이 확정.
고정 네임드 유배자들은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개성적이다.
천사의 청력은 경이적이기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함정을 판다."
"무슨 함정을 말이지?"
레인저 파티의 리더가 물어온다.
단지 총기가 있다고 해서 저런 고위 종족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얼굴이다.
나는 소녀에게 물었다.
"케찰코아틀의 피, 한 병 남았지?"
"아, 네. 제가 가지고 있어요."
게임 시절에도 도핑은 장비 이상으로 중요한 요소였다.
초반일수록 도핑의 존재감은 더 크다.
지속 가능한 능력치인 장비와 일시적인 능력치인 도핑.
둘 중 어느 것이 지금 당장 고성능인지는 말해야 입이 아프다.
이런 게임은 위기 상황 한 번만 넘기면 어떻게든 되는 경우가 많다.
"저쪽도 보스 도핑은 가지고 있을 거란 말이지. 어떤 괴수의 피일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못 쓰게 하는 게 제 역할이고요?"
"똑똑하군."
소녀가 피를 들이켠다. 태생이 이래서 중요하다.
5층을 떠나올 때, 내 병에는 피를 표준 농도인 5대5로 담았다.
소녀의 병에는 단기간 폭발적인 위력을 내기 위해 9대1쯤 되게 담았다.
다른 둘은 포션으로서 기능하게 내버려 두었다.
소녀는 이로써 도핑 없는 천사와 거의 동등한 신체 능력을 확보했다.
자유 비행은 연속된 [대시] 사용으로 메꾸자.
"날개를 꺾어버려."
"2층에서 했던 거랑 비슷하네요."
"쟤만 날 수 있으면 비겁하잖아? 천사가 정정당당해야지."
레인저 파티의 리더가 지랄이 짜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아직 내게 익숙하지 못하군.
그래도 걱정되니 소녀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나랑 싸우듯이 해. 알겠지? 그럼 지지 않을 거야."
"아저씨보다 센 거 아니에요?"
"내가 트롤만 되었어도 쟨 박살 냈어."
소녀가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다.
그러고 잠깐 생각하더니.
방긋 웃으며 머리를 들이밀었다.
"위험한 거 하러 가는데 뭐 해주는 거 없어요?"
흠, 과거의 삶에서도 저런 소리를 하는 여자들이 가끔 있었다.
소녀의 머리카락을 젖히고 이마를 드러냈다.
두상이 예쁘군.
소녀가 당황했다.
"어어어?"
가볍게 이마에 입맞춤.
소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놀라울 정도로 크게 들린다.
소녀는 얼굴을 보여주기 싫은지 곧바로 뒤돌아섰다.
"으아아아!"
그대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달려나간다.
귀가 빨갛다.
"뭐지? 이걸 원한 게 아닌가?"
"순수한 아이입니다."
"순수하군요."
"지금 뭔 짓거리야?"
각각 사냥꾼, 막내, 레인저 파티의 리더가 말했다.
사냥꾼이 낄낄대었다.
"우리 리더 솜씨가 참."
"아직 애니까 적당히 하십쇼. 두목."
나는 어이가 없어 반박했다.
"아니, 애니까 적당히 한 거지."
여신이 아주 불쾌한 목소리로 말하신다.
「이래서 인싸들은…….」
‘억울합니다. 전 밥 먹고 게임만 하는 아싸였습니다만?’
「짜증 나니까 제발 닥쳐라.」
진짠데. 미궁에 들어오기 전까진 여자 손도 못 잡아봤다고.
‘아니, 여신님. 만화라고 아십니까? 거기 보면 다들 이렇게 한다고요.’
「그냥 죽어. 여자의 적.」
하, 참. 그래도 다들 긴장은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