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4화
7층 - Lv. 46 비범한 유배자(3)
대부분의 경우 약자가 노릴 수 있는 것은 강자의 방심이다.
그 방심이 꼭 틀린 것이 아니다.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에도 전력을 다한다곤 한다.
그러나 어딜 봐도 어렵지 않아 보이는 상대가 나타났는데 전력을 쏟아붓는 것은 지극히 비효율적이다.
언제 아껴야 하고 언제 전력을 다해야 하는가.
이것을 아는 게 미궁의 고수가 되는 조건이다.
태어나서 처음 천사로서 빙하 위를 비행 중인 여인은 자신이 제법 고수라고 생각했다.
왕국에서도 고참 대우를 받는 70년 차 이상의 괴물들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미궁 인생 47년 차.
뭐가 똥이고 뭐가 된장인지는 안다고 생각했다.
날 때부터 천사인 미궁의 NPC 주민들과 싸우면서도 느꼈으며, 세 번이나 직접 목격한 적 있는 유배자 천사의 위용을 보면서도 느꼈다.
이번 회차는 날로 먹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언젠가 같은 길드의 선배님께 보스층의 랜덤 카드를 배운 이후 늘 기도하며 살아왔다.
그 기도가 처음으로 결실을 맺었을 때는 파티원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전원 10년 차 이상으로 나름대로 짬이 쌓인 이들이었다.
하나는 운 좋게 왕국의 문을 두드린 적이 있었고 둘은 왕국만이 소망이었다.
잘 따르는 게 참 귀엽기도 하고 그래서 열심히 보살폈으나, 이미 둘이 다음 회차로 사출.
자신은 생사를 걸고 웬 여자애와 결투 중.
그것도 인간임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공중전을 수행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세상은 나에게 왜 이렇게 모진 걸까?
서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싸워 이겨야 한다.
파티원들의 복수 같은 것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나름대로 마음을 주긴 했으나 정리하는 것에 부담을 느낄 짬은 아니다.
미궁은 혹독한 가르침만을 주는 곳이다.
그녀는 단지 상대 파티원 하나를 죽이기 위해 싸운다.
그렇게 자리를 만든 후,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기 위해서.
뭔가 잘못됨을 느끼고, 그 잘못됨의 중심에 있었던 남자에게서 어떤 바이브를 느낀 순간 깨달은 사실이다.
저 남자는 70년 이상의 왕고참이다.
그 기묘한 여유, 미친 것 같은 작전. 계속 이어지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
낯설면서도 익숙한 이 감각은 왕국의 하이 랭커들에게서나 느끼던 무시무시한 짬바였다.
이건 무조건 기어야 한다.
그런데 왜 아직 영입 제안이 안 들어오고 있지?
피도 눈물도 없는 하이 랭커라면 벌써 쓸모없는 파티원 정도는 직접 찌르고 손을 내밀었을 텐데.
아, 정말 4인이 아니라 5인 제한이기만 했어도.
전투의 와중에도 눈물이 찔끔 났다.
* * *
어라? 왜 울고 있지?
이 사람의 파티원이 사망한 것은 보았다.
혹시 동료를 몹시 아끼는 사람이었던 걸까?
소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대시]를 했다. 그리고 다시, 또다시.
슬슬 숨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강력한 농축 도핑을 마신 이후, 도저히 지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대시]만으로 비행을 따라잡고 있으니 금세 한계다.
하지만 티 내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중.
상대도 슬슬 자신이 어떻게 비행을 따라가고 있는지 깨달았을 터.
소녀는 힘껏 대거를 내질렀다.
단순한 비행보다 이 야매 비행이 나은 점이 있다면 방향 전환이 말도 안 되는 각도로 가능하단 것이다.
날개로 막을 수 없는 각도.
그런데 그걸 장저로 받아낸다. 피부는 베이지만 뼈를 베진 못했다.
장저, 손바닥의 아래쪽 부위는 인체에서 가장 단단한 부위 중 하나라 배웠다.
천사도 외형은 날개 달리고 고리 달린 인간일 뿐이니 비슷한 모양이다.
그렇다곤 해도 이걸 받아내나?
마법적 불길이 피어오르지만 곧바로 힘을 잃고 꺼진다.
비겁해. 나도 천사 하고 싶어.
소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왼손을 뻗어 자신을 향해 덮쳐오려는 날개를 붙잡았다.
휘두르는 동작이 제대로 시작되기 전에 붙잡았기에 그대로 타고 넘어간다.
천사가 몸을 뒤집는다.
어림도 없지.
야매 비행을 섞어 위치를 바꾸고 다시 찌르기.
이번에는 쿨다운이 돌아온 [강격]이다.
[궤적 재생]은 위력이 올라가는 게 아니라 단순히 두 번 치는 효과기에 적합하지 않다.
파생기라 쿨다운은 공유한다.
날개를 노린 공격이었는데 어떻게 빗겨나갔다.
디딜 땅이 없으니 위력도 운신도 크게 불편해진다.
소녀는 슬슬 한계가 오고 있음을 숨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 * *
갑자기 상대 중인 소녀가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천사는 그제서야 어떻게 상대가 인간의 몸으로 자유비행을 흉내 내고 있는지 눈치챘다.
[대시]의 연속 사용? 정말 사람인가?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사릴 이유도 사라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을 뿐, 알게 되었다면 상황은 단순히 정리할 수 있다.
천사는 또다시 자신을 붙잡고 넘어가며 체력은 아끼려는 소녀를 붙잡았다.
상대가 충분히 지쳐 있어 가능했다.
그리고 날개를 접는다.
수직으로, 빙하의 가장 단단한 곳으로.
7층에 올라오고 가장 많이 취한 공격 방식을 택한다.
천사는 본래도 전사 클래스만 하는 유배자였지만 탱커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검이나 도끼 등의 거대한 무기를 사용하는 광전사.
천사라는 종족의 스타일에 맞추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괜한 흉내보다야 이편이 차라리 낫다. 무기를 제대로 된 것을 구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이런 힘이라면 아예 워해머라거나.
소녀가 버둥거리며 저항한다. 어림도 없다. 신체 능력은 거의 동등한 것 같지만 인간인 이상 여기까지다.
포션도 체력은 회복시켜주지 않는다.
끝이다.
죽이고 가서 머리를 박을 것이다.
* * *
"저! 저저저저! 저 자식이 뭐하는 짓이야!"
소녀가 예상보다 오래 버티지 못했다. 이건 좀 큰 오산이다.
천사와 함께 내려 찍히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아찔했으나 즉사하진 않았다.
힘 스탯은 어찌 되었건 맷집에도 관여한다. 태생부터 이상한 소녀의 생명력과 신체 강도도 인간을 초월한 영역에 발을 걸친 모양이다.
내려 찍히는 순간만큼은 위치가 고정된다.
어디선가 사냥꾼의 총이 불을 뿜었다.
레인저 파티들은 미덥지 못했기에 신호를 보내 사격을 정지시켰다.
천사는 사격에 노출된 상황에서도 공격을 시도했다.
이건……, 저 자식. 죽일 셈이군.
내가 전력을 다해 달려가자 천사가 멈칫했다.
어딘가 머뭇거리는 듯한 모습.
어째서?
결론에 도달한 것은 사고의 과정을 거쳐서가 아니다.
무수히 겪은 비슷한 경험이 즉시 답을 이끌어낸다.
저 천사 생각보다 더 짬이 되는 녀석이다.
뭔가 느낀 게 분명하다. 어째서 이렇게 손쉽게 자신이 제압당하는가.
그리고 그 중심에 누가 있었는가.
똑똑한 녀석이라 다행이다. 무식하면 용감하고 그런 놈들이 더 답이 없다.
나는 그대로 달려가서 킥을 날렸다. 천사가 차마 나를 공격하지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붙잡는다.
제압하려는 속셈인 것 같지만, ‘아틀라스의 피’ 같은 거인종의 피는 용종의 피가 올스탯을 올려주는 수치를 다 합친 것만큼 힘을 올려준다.
게다가 농도도 진했다.
마법사가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보면 비상시 근접전을 상정한 배분이었으리라.
근력이 완전히 압도당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적어도 지지는 않는다.
얕보고 있다면 더하다.
붙잡으려는 팔을 역으로 잡아 꺾는다. 고스란히 암바를 시도.
짬이 된다면 반응할 거라고 믿었다.
믿음은 배신당하지 않는다.
저항하려고 신경이 쏠리는 순간을 노렸다. 바로 몸으로 뛰어올라 날개에 그래플링을 건다.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윙바(Wing Bar)?
하지만 격투기의 서브미션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나는 완전히 부러뜨리기 위해 이 기술을 만들었다.
압도적인 근력 차이가 나는 게 아니라면…….
이런 젠장. 안 부러지네?
빠르게 포기하고 팔을 붙잡는다.
치천사의 날개는 지나치게 억세다. 기천사였으면 꺾을지도 모르겠는데.
천사 기준으로는 팔뚝이 날개보다 더 약하다.
하지만 천사도 이번에는 당해주지 않았다.
몇 번의 공방 끝에 나는 완전히 포기하고 뒤로 물러났다.
천사는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대신 눈과 얼음이 흔들흔들할 정도로 넙죽 엎드리더니 말했다.
"저, 저기 선배님? 저 좀 받아주시면 안 될까요?"
여신이 끙하고 신음했다.
어둠 마법은 정신에 영향을 준다. 우울감과 절망감을 고취시키는 데는 그만한 게 없다.
아까의 시점에서 이미 이겨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 * *
그 와중에도 나는 조금 감탄했다.
동작이 엄청나게 빠르고 과격하지만 아주 제대로 된 큰절이다.
손을 포개고 있는 것까지 완벽하다.
어디서 배운 거지?
천사의 외모는 금발의 서양계 여성인데, 언뜻 그리운 한복이 겹쳐 보일 정도였다.
스스로도 별게 다 그립군 하며 어이없어했다.
"하."
아무리 입맛이 써도, 현실도피는 이쯤 하고,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사람은 사람이다.
완전히 쓰레기이기만 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유배자도 그렇다.
조금은 무뎌질지라도 마음속 한구석에 동정심이나 양심이 일말의 흔적도 없는 이는 드물다.
그렇게 살아가는 와중에 가장 골치 아픈 일은 이렇게 누가 잘못했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대체 누가 악역이겠는가.
일 자체가 이렇게 될 것이라 여신님과 함께 짐작하긴 했으나, 상대는 생각 이상으로 절박했던 모양이다.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대로 무방비함을 드러내고 있다.
원래 인간에게 없던 신체기관은 잘 다루지 못한다면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바들바들 떨리는 날개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걸리는 모든 것을 분쇄할 위력적인 것과 동일한 것이 맞나 의심스럽다.
다시는 볼일이 없으나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온다면 매몰차기도 힘들다.
오히려 여신님께서 악마답게 속삭이셨다.
「지금 죽여.」
‘여신님, 한 가지 잊으신 것 같은데 저 녀석이 저러고 있어도 당장은 어떻게 잡을 방법이 없습니다.’
「아니, 왜 마법사를 해가지고.」
‘6층에선 그게 최고로 안전한 선택이었습니다만.’
나는 눈에 띄지 않게 가려서 허리에 매어둔 아카샤의 눈을 만지작거렸다.
한 번밖에 안 남게 되지만 이 또한 나쁜 선택은 아니다.
클리어 조건으로 제한 4인이라는 것은 이 맵에 존재 하냐의 여부다. 심연은 애초에 층이 아닌 곳이니 정말 문제없다.
지금 이걸 보여주며 심연으로 보내버리면 나는 위험한 공략법을 시작하지 않아도 되며.
천사는 별 위험 없이 무사히 다시 층을 진행하여 왕국에 도달하리라.
심지어 우리 파티보다 먼저 도착할 확률이 높다.
따로 파티가 없어도 종족이 천사라면 블랑쉐가 부럽지 않은 전투력이다.
이번 미궁의 왕국이 어떤 상황일지는 알 수 없으나, 미리 연이 닿은 유배자를 보내둔다면.
그러니까 결코 여기서 나는 이 녀석과 싸울 이유가 없다.
이성적으로는 말이다.
아직도 엎드려 있는 천사의 뒤를 본다.
얼음이 갈라져 있다.
충격에 의해 사방으로 거미줄처럼 금이 번져 있다.
그중에서는 꽤나 깊게 갈라진 것도 있다.
가해진 힘의 정도가 한눈에 느껴진다.
그 한가운데에 엎드려 있는 소녀가 있다.
의식은 없다.
기분에 따라 팔랑팔랑 움직이는 것 같던 윤기 있는 단발이 피에 젖어 가라앉아 있다.
이 사실이 왜 이렇게 불쾌할까?
미궁의 사고방식이 아님은 안다.
내가 그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이득 볼 것이라고 해봐야, 먼저 왕국으로 보내둘 천사의 기를 완전히 꺾어두는 것.
사실 크게 그럴 필요도 없다. 이 녀석은 이미 대항할 생각이 없으니까.
이 게임은, 이 미궁은 근본적으로 RPG다.
왕국에 오래 눌러앉은 고참들은 랭커, 또는 하이 랭커라 불리며 경외의 대상이 된다.
손에 쥔 정보가 다르며, 쌓아 올린 레벨이 다르고, 쌓아 올린 장비가 다르다.
아마 그런 모습을 내게 투영하고 있겠지.
진짜, 정말로.
비효율적이고.
쓸데없는 위험을 감수하고.
내 게임 철학에도 반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화를 내고 싶다.
마침 막내가 돌아왔다.
설치한 함정의 준비가 끝난 모양이다.
막내는 다가오다가 상황을 보고 파악하기를 포기했다.
대신 확실히 해야 하는 일을 했다.
치유의 샘물에 잠기다시피 한 소녀가 부스스 깨어난다.
도핑은 끝났다. 체력도 고갈되었다.
힘없이 두리번거리더니 자신이 졌음을 깨닫고 시무룩한 표정이 된다.
지금 보면 강아지와도 또 다르다. 토끼 같은 녀석.
나는 아직도 얌전히 기다리는 천사에게 말했다.
"덤벼. 이기면 한 자리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안 그래?"
널 좀 때려야 이 화가 가라앉을 것 같다.
준비도 끝났고.
여신이 말한다.
「어둠 속성의 부작용 아니냐?」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저 녀석은 확실한 것 같고, 저도 말입니다.’
「악마들도 별로 안 좋아하는 속성이니 뭐.」
천사가 고개를 들었다.
시험에 든 신자 같은 결의에 굳은 표정.
잠깐 괜한 소리를 했나 생각이 들었는데, 천사가 말했다.
"선배님, 저 총 든 녀석들이랑 마법사는 파티원 아니시죠?"
흠.
나도 참 간사하다.
그 질문에는 아주 가볍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천사는 쓸모가 있지만, 그 녀석들은 별 쓸모가 없어서겠지.
* * *
레인저 파티의 리더는 상황이 아주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천사가 대뜸 넙죽 엎드린 순간이었다.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몇 가지 생각.
어차피 4인 제한.
저 천사의 파티원은 모두 사망.
그렇다면 지금 자신들은 어디에 붙어야 하는가.
저 천사와 같은 편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네 명을 맞춰야만 살아남을 가능성이 생긴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사격 개시.
그것을 하필이면 천사가 막아섰다.
총탄은 날개를 뚫지 못한다.
"아까 쏴야 했는데. 이런 제기랄!"
모두 별다른 저항 없이 제압당했다.
그렇다. 제압당했다.
의아해하는 동안 꽁꽁 묶인다.
"미안하긴 하니까, 이따가 도움이 될 만한 강의를 좀 해주지."
대충 이럴 것 같긴 했다. 처음에 끌어들인 남자가 조금 미안하다는 듯이 말한다.
뭐라고 대꾸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상황을 조금이라도 늦게 파악한 쪽의 잘못이다.
그것이 미궁이다.
레인저 파티의 리더는 한숨만 내쉬었다.
이래서 다들 고참과 안 엮이려 한다.
* * *
아카샤의 눈은 정말 활용도가 높다.
본인도 원할 테니 그냥 찔러서 보내주면 되었지만 싸움을 다시 걸었다는 설명을 들은 사냥꾼이 어처구니 없어했다.
"왜 그런 짓을 하십니까. 그냥 심연으로 보내서 살려 주겠다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막내가 아까의 상황을 소곤소곤 말했다.
소녀가 아주 두들겨 맞았고, 죽음의 고비에 가까웠다고.
사냥꾼은 잠깐 생각했고. 태도를 바꾸었다.
"허허. 그렇다면야. 좀 맞아야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형님."
소녀는 꽤나 사랑받고 있군.
막상 당사자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가, 막내에게 듣고는 눈만 껌뻑이고 있다.
"뭐야, 다들 왜 그래. 저 부끄러워서 죽고 싶어졌어요."
"안 돼. 임마. 겨우 살려놨더니."
"쥐구멍이라도 하나 만들어주세요……."
아무튼 소녀는 구석에 치워두었다.
이번 층에서 이상하게 의기소침하기도 했고, 묶어둔 친구들이 큰일 나지 않도록 지켜봐달라고만 했다.
묶어둔 파티는 제대로 뭔가 가르쳐서 보낼 생각이다. 사람이 최소한의 도리는 있어야지.
천사가 사냥꾼과 막내를 노려보았다. 소녀를 빼놨으니 타겟은 저 둘이 될 수밖에 없다.
막내는 경건하게 방패를 집어 들었다.
사냥꾼은 ‘이게 아니었나……. 나는 잘못된 선택을 했나.’ 하고 중얼거리기에 사실 아까 다 끝장날 뻔했다고 알려주었다.
"천사가 먼저 쫄아서 안 굽혔으면 전멸했을 거야. 날개가 생각보다 더 튼튼해서 안 부러지더라고. 아니면 내가 생각보다 약한가?"
윙바가 안 먹힐 줄이야. 거기서 대뜸 숙이고 들어와서 망정이지 큰일이었다.
그래도 ‘아틀라스의 피’ 도핑은 아직 남아 있다.
미리 준비를 다 끝마쳤으니 시작하자마자 끝낼 수도 있다.
시작하자는 내 말에 긴장된 표정의 천사가 날아올랐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만 빼면 정말 체육대회 같다.
이전부터 간혹 했던 생각인데, 죽어도 서로가 완전히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시켜 버리는 미궁의, 어쩌면 게임의 설정은 세상 다시없는 악질이다.
마치 사람의 마음을 어디까지 유지할 수 있는지 부수고 또 부숴서 시험하는 듯한 끔찍함이 있다.
천사는 전력을 다했다.
그 전력이란 날개라는 서브 웨폰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식이었고.
당연하게 하늘에 떠서 깃털을 흩뿌리려 했다.
나는 막내가 자신의 피와 여신님의 지도편달로 그려낸 마법진을 가동했다.
[그래비티]
미리 준비했기에, 4층에서 나이트 크로우의 요정 마법사가 보여준 것과는 차원이 다른 출력이다.
마법진을 그려둔 범위만큼 작용 중이다.
천사는 낭패한 기색이 되었다.
모든 것의 무게가 수십 배로 치솟는다.
비행이 불안정해지며 급격히 휘청이기 시작한다.
신체 능력과 부양 능력은 또 별개다. 비행에 익숙하지 못하면 강해진 중력 탓에 자세를 제어하기 힘들다.
미리 알았다면 처음부터 이렇게 했다. 정보가 참 이래서 중요하다.
사냥꾼의 사격이 날개를 노리기 시작한다.
천사는 멀리서 보아도 우는 얼굴이었다.
누군가 하나를 죽여야 하는데 그래야 내가 살아남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얼굴이다.
천사는 땅으로 내려왔다.
어떻게든 술자인 나를 제압할 생각이다.
어울려 주었다.
근접 공격력에 관여하는 힘 스탯이 도핑되어 있는 이상 딱 소녀를 상대하는 느낌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점점 이상하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표정이 소녀와도 조금 닮아 있다.
아무리 빨라도 동작이 단순하다. 소녀만큼 몸에 익은 기술도 없다. 본래부터 이런 클래스를 하던 친구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무식한 방식으로 운용했군.
점점 허무해지기 시작했다. 소녀 덕에 화가 나서 시작한 짓이지만 결국 약자를 괴롭히는 짓이다.
게다가 제멋에 사는 멍청이도 아니고 살려고 발버둥 치는 녀석이다.
나는 그냥 손을 들어 멈춰 세웠다.
"되었어. 합격."
아카샤의 눈을 본 천사의 눈이 커졌다.
몸은 만신창이지만 얼굴이 되살아난다.
희망이 차오르는 모양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래플링으로 잡고 막내의 [방벽] 위로 30미터 [그래비티] 둠스톤 파일 드라이버를 꽂아볼 생각이었는데.
천사라는 종족의 내구도도 좀 더 테스트해 볼 겸.
날개를 붙잡은 상태면 비행은 할 수 없다. 그대로 목이 꺾여도 절명은 하지 않겠지만.
모처럼 떠오른 파괴적인 아이디어였다.
다른 곳에서 써먹어보자.
마법도 거두었다.
땅에 주저앉아 훌쩍이는 천사를 내버려 두고 이상한 표정으로 싱글벙글하고 있는 소녀에게 갔다.
사실 이걸 제일 먼저 해야 했다.
"몸은 좀 괜찮니?"
"네에. 마음도 완전히 회복되었어요."
"왜 그렇게 실실 쪼개고 있어?"
"여신님이 알려줬어요. 아저씨 저 기절하고 표정이 엄청났다던데."
그리고 자못 근엄한 얼굴을 해 보인다. 뭔가 할 말이 더 있지 않냐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은 또 참지 못하는 모양이다.
괘씸해서 머리를 꽁하고 때렸다.
"아악! 왜요!"
"몸조심해."
"2층에서 자기도 죽을 뻔했으면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안 할게."
"어, 어어. 그래요."
소녀가 눈을 피한다.
말없이 그옆에 주저앉았다.
삶은 자주 허무하다. 가끔 이렇게 찾아오는 허무감이 참 싫다.
빨리 왕국까지 내려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