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5화
7층 - 정리
유배자로서의 삶은 바깥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언가다.
그런 삶을 살다 보면 어떻게 될까?
사람의 몸은 단련한다고 해서 끝없이 단단해지지는 않는다.
주먹의 너클 파트를 단련하는 무도의 수련법도 원리는 미세한 골절을 유발한 후, 회복이다.
다시 붙는 뼈들은 점점 단단해지겠으나 뼈가 아닌 인대 같은 부분은 이야기가 다르다.
당장은 단단해지는 것같아 보이지만 어느 순간 골병이 들어 불구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음도 몸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단단해진다기보다는 무뎌진다.
그렇게 무디다가도 문득 푹 찌르고 들어오는 감정이 있다.
그럴 때는 조금 지친다.
* * *
남아 있는 인원을 제거하는 일은 아주 기계적이었다.
특별히 위협적인 장비나 능력을 가진 유배자는 없었다.
나름대로 날고 긴다고는 해도 겨우 7층.
총기를 보유했다거나, 천사로 종족이 바뀌었다거나.
그게 이상한 것이다.
우리 파티도 충분히 이상하고.
특기할 점이라면 소녀의 뒤돌려차기에 맞고 날아가 처박힌 암살자가 끝까지 생존해 있었다는 것이었다.
전신 골절에 기타 등등 어쩌고저쩌고.
힐링 포션은 레인저 파티의 것이 남아 있어서 살려낼 수는 있었다.
천사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파티였던 이의 목숨을 거두려 했다.
"있어 보지그래?"
"……네?"
어차피 다음 층으로 가면 샘은 있다.
지금 포션을 아낄 이유는 없었다.
소생한 암살자가 어리둥절해 하고 천사도 눈이 동그래졌다.
묶여 있는 레인저 파티도 풀어주고 불러왔다.
하는 김에 소녀와 사냥꾼, 막내까지 부른다.
맵이 맵이다 보니 날씨가 아주 춥다. 적당한 굴 안으로 들어가 벽을 파게 했다.
얼음 동굴 안에 불을 피우기만 해도 생각 이상으로 따뜻해진다.
어차피 우리 파티를 빼면 대부분은 적절한 방한구가 없었다.
살아남은 이들의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한다.
이글루 같은 교실이었다.
소녀가 올려다보며 감탄한 곳에 필기를 하며 암기를 시켰다.
이런 경험은 많다.
이제는 언제인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먼 옛날, 어떻게든 내 지식을 전파하고 사람들을 구해보려고 노력하던 시기에 정리한 초반 공략법이다.
어려운 내용은 없다. 알기 쉬우면서도 사용하기도 쉬운 것들뿐이다.
처음에는 미심쩍어했으나 천사조차 경청하는 모습을 보고 다들 집중했다.
해가 지고 나서야 수업이 끝났다.
그때는 다들 감명받은 눈이었다.
이미 익숙했던 우리 파티 멤버들이나 평소 같다.
천사가 조심스레 묻는다.
"저기 선배님, 죄송하지만 연차가 어찌 되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어, 97년."
이제 와서 숨길 이유는 딱히 없다.
천사를 빼면 다시는 만나지 않을 유배자들이며, 파티원들과는 충분한 교류를 가질 만큼 함께했다.
막내는 무슨 소린가 싶어 그냥 고개만 끄덕였고 소녀는 그냥 그런갑다 하는 표정이다.
사냥꾼은 살짝 놀란 듯했으나 곧 납득했다.
입이 떡 벌어진 것은 나머지들이다.
"하, 하이랭커 수준이 아니시군요."
"끝나기 직전까지 도전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적지?"
"은퇴하실 만도 하신데."
"으윽, 은퇴 같은 소리 하지 마. 역겨우니까."
랭커고 하이 랭커고 그런 식으로 불리는 고참들은 엄밀히 말해서는 도전자가 아니다.
도전자는 죽어 다른 세계로 넘어간다.
해방의 실마리, 탈출의 가능성.
이런 것은 이미 포기하고, 그저 왕국에 남아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녀석들이다.
은퇴는 그냥 거창하게 전면에 나서 권력을 잡지는 않겠다는 선언 정도에 불과하고.
뭐, 그런 행동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도전자를 멍청이 취급하며 귀찮게 군다는 점이 문제다.
그냥 내버려 두면 될 것을, 도전자가 혹시 가져올지 모르는 굉장한 장비나 카드에는 또 눈독을 들인다.
나로서는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다.
대부분의 왕국은 그런 녀석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길드를 만들고, 권력을 쥐고 있다.
"네, 네에……."
천사가 꼬리만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대답한다. 원래도 꽤 주눅 들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아주 쭈글쭈글하다.
소녀 반만큼만 호기가 있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내 라인을 탈 생각이지?"
"물론입니다. 선배님!"
70년 차 이상으로 가면 새롭게 왕국에 진입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존재 자체가 화제가 될 정도다.
왕국에서는 연차를 숨길 수가 없다.
나도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럼 얼마나 피곤해지는지는 지겹도록 겪어보았다.
그 피곤함을 해결하는 과정도 아주 피곤하다.
그러니 천사를 먼저 보내어둘 생각이다.
47년 차 천사가 튜토리얼에서 덜렁 튀어나와도 화제가 되긴 하겠지만, 그 정도라면 어떻게든 자리를 잡을 수 있으리라.
일종의 선발대인 셈이다.
이번 회차는 참 별일을 다 해본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짓을 하는 건 나도 처음이다.
신선하군.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려, 근데 그거 말고 일단 먼저 해야 할 게 있다. 아주 심각해."
"네?"
"비행 연습 좀 하자. 천사라는 종족을 다루는 법도 배우고. 깃털 날리는 건 진짜 보는 내가 다 부끄럽더라."
"네…… 네에?"
표정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서 다 지어보았다.’ 같은 느낌이다. 희로애락이 한 얼굴에 모두 담겨 있을 수 있다니.
곧 고통과 슬픔이 되겠지만.
* * *
사실상 주도권을 혼자 틀어쥐고 있는 내가 침묵하고 있자 7층의 분위기는 어딘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 파티원들이야 그냥 늘 하던 대로 무기를 정비하거나 나에게 마인드맵에 관해 상담하거나 하지만 다른 이들은 슬금슬금 눈치만 보는 일이 잦았다.
어차피 이제 끝날 회차임을 모두가 알기에 힘이 빠진 탓도 있었다.
물론 몇 명은 다시 나를 찾아와 궁금한 것을 묻기도 했다. 기특하다기보다는 기계적인 미안함으로 대응했다.
소녀의 존재도 있어 조금씩 분위기가 풀어진다.
PVP층의 암묵적 룰이다.
모든 일이 끝나고 결과가 정해진다면 더 이상 적이 아닌 것으로.
죽은 파티원을 안타깝게 여기는 이는 있어도 그 자체를 원한으로 삼는 이는 적다.
그렇게까지 감정을 주기에는 교류도 짧고, 동시에 무뎌져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족하게 되었다.
"초반에 코볼트가 등장하면 지하를 탐색하라……."
"신의 접미에 따라 팩션 내의 종족 간에도 입지 변화가 있다니."
"의외로 요정들도 육식은 하는군요."
"알아둬야 할 오크 문자……."
어째서 학구적인 분위기가 되냐고 묻지는 말자.
저들로서는 그동안 의아하게 여기던 것이나 판단하기 힘들었던 상황을 많이 겪어왔을 것이다.
검색 한 번으로 해결해 주는 인터넷이 없으니 언제나 시행착오.
비록 이번에 왕국에 도달하지는 못했으나 회차를 수십 수백은 아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끝에 나는 감사마저 받았다. 우스운 일이다. 여기서 자신들을 죽이는 사람에게 감사라니.
하지만 그런 곳이니까.
여신께서 말하신다.
「그것 또한 신기한 일이네. 너처럼 오래된 고참은 드물게 보지만, 너처럼 인간으로 남고 싶어 하는 이는 보지 못했어.」
‘그야, 클리어하려면 인간이어야 하니까요. 전 집에 돌아갈 겁니다. 그곳에서는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고요.’
「그것도 이상한 일이야. 그냥 미궁에서 부귀영화를 누릴 생각은 없어?」
왕국에서 랭커라 불리는 이들처럼 하려고 하면 할 수는 있다. 아니, 오히려 더 잘하겠지.
‘오래 살다 보니 이제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해왔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처음에는 게임이니까 당연히 깨야지. 뭐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네요.’
「흠, 최초의 동기인가. 어딘가에 집착하는 것은 미궁에서 살아남는데 중요한 요소라 생각하긴 해.」
‘여신님은 무엇이었습니까?’
랭커로 안주해서는 신좌에 도달할 수 없다. 마지막까지 도전했던 유배자들이나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이제 기억이 안 나는데.」
사실 신씩이나 되었으면 방어기제는 필요 없다. 지쳤다면 그저 신좌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되니까.
‘그나저나 만신전 없습니까?’
7층은 꽤 의미가 있는 확률을 가진 층이다.
만신전은 홀수층이라면 어디에나 출현할 수 있다.
하지만 파티 모집 광장 같은 역할을 하는 3층이나, 보스층인 5층에서는 아무래도 보기 힘들다.
그러니 보통 제일 처음 만신전을 조우한다면 그건 7층이다.
「만신전에선 신들의 시야도 제한되잖아. 나도 몰라.」
‘어차피 우리 말고는 신도가 없으시지 않습니까.’
「저 천사는 나 줄 거 아니냐?」
‘그건 맞습니다만.’
「후후후, 신난다. 나도 천사나 악마 신도를 가져보고 싶었어. 예전부터 맨날 다른 신들이 자랑하는 걸 구경만 했다니까.」
천사나 악마인 신도가 있다면 신으로서의 삶이 꽤 윤택해지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귀찮아지는 부분도 있는데, 좋아하시니 미리 말하진 말자.
아무도 없는 빙산의 가장자리로 가서 앉았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얼어붙은 빙해가 보였다.
대부분은 얼지 않았으나, 얼음이 곳곳에 떠 파도에 출렁인다.
마침 석양도 지고 있다.
고즈넉하면서도 쓸쓸한, 낭만적인 광경이다.
홀수 층은 짝수 층처럼 대륙의 일부가 아니다.
독립된 어딘가의 아공간에 가까운 형태다.
그러니 이곳은 대륙에 없는 땅이다. 이 층을 벗어나면 다시는 볼 수 없는 풍경일 것이다.
"왜 그렇게 감상에 젖어 있어요?"
"감상? 그냥 보고 있는 거다."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를 죽이고 나타나서 깜짝 놀라긴 했는데 내색하진 않았다.
"전혀 안 놀라네. 왕 하고 덮칠 걸 그랬나."
"그래봐야 귀엽기나 하겠지."
사실은 좀 놀랄 거 같긴 한데.
"상담할 게 있는데 괜찮아요?"
"연애 상담은 좀……."
"아니, 그걸 본인한테 어떻게 상담해요! 진짜!"
화났다는 표정을 만들려는 것 같은데 코만 찡그려져 있다. 입가는 웃고 있다.
표정 관리를 참 못하는 아이다.
내가 승낙하거나 말거나 소녀도 내 옆에 주저앉았다.
그리곤 말한다.
"제가 밖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아세요?"
"퇴마사."
"아, 그건 말이 그런 거고……. 그거보단 히어로 같은 거였어요."
"……요즘은 고등학생도 중2병이 오니?"
"아니!"
버럭하며 소녀가 하는 이야기는 그런 것이었다.
그 지구는 사람을 습격하는 괴물들이 끊임없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난다고 했다.
일부 초인적인 힘을 지닌 가문은 대대로 그런 것으로부터 세상을 지키는 역할이다.
"으, 이렇게 말하니까 엄청 쪽팔리는 소리 같은데. 하여간 서양권에선 이걸 히어로라고 했어요."
"그럼 한국에서도 그렇게 부르게 되었겠네. 역사는 비슷하잖아."
"뭐 대충 그렇긴 한데. 사실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에요. 그냥 방과 후에 호출당해서 처리하러 가거나, 경찰이랑 협력해서 도주하는 범죄자를 제압하거나."
"경찰의 민간 협력 업체 같은 느낌이야?"
"그러네요. 인기가 많고 그렇지도 않았어요. 그냥 직업 중 하나라는 느낌? 저 같은 경우는 가업이고요."
평화로운지 평화롭지 않은지 잘 알기 힘든 세계로군.
"그래서 고민이 뭔데?"
"아이, 분위기 잡고 있는데 섬세하지 못하긴."
"남자는 원래 그래."
"하여간, 사람을 지키는 일이었단 말이죠.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래서 해왔고. 어릴 적부터 훈련받으면서도 항상 그렇게 배웠고."
"그래서 힘든 일도 참았고?"
"네에……. 그런데……."
표정이 많은 아이다. 깊은 수심이 항상 발랄하게 올라간 눈꼬리조차 가라앉힌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이번 층에서는 갑자기 모르게 되었어요. 왜, 그동안은 항상 먼저 공격해왔잖아요."
생각해 보면 그렇다. 무법자들은 누가 봐도 악의를 가진 범죄자였다. 지켜야 할 난민이 있음도 확실했고.
그리고 그린스킨은, 처음 미궁에 들어온 사람이 이종족을 인간처럼 여길 수 있다면 그게 더 대단한 일이다.
어딜 봐도 인간처럼 생기지 않기도 했고.
"처음에 얼음굴에서 봤던 다섯 명, 복장이……."
그 녀석들은 뭔가 알고 헤쳐 나온 파티는 아니었다. 오히려 어느 정도는 운이 좋아 도달한 종류였지.
2번째 테마가 설원씩이나 되어버리니 어쩔 수 없다.
너덜너덜해지긴 했어도 청바지에, 티셔츠에, 후드티 따위의 바깥 세계의 옷과 복장.
그리고 부러진 안경을 어떻게 간신히 고친 녀석도 있었고.
"그리고 패딩 입고 있던 사람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뭘 하고 있나 하는."
"밖에서 살인해 본 거 아니었어?"
"제압 못 할 범죄자 상대로는요?"
"그땐 어떤 기분이었어?"
소녀가 잠깐 고민한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어른들한테 엄청 혼났어요."
"왜?"
"웃으면서 사람 찌르지 말라고."
"어, 그건 좀 그렇긴 한데."
진짜로 좀 그래서 쳐다보고 있었다.
소녀의 표정이 이상해진다.
제 잘못을 알고 있는 고양이가 그렇듯 쭈글쭈글 쭈그러들며 훌쩍거린다.
"으으, 하지만. 딱히 사람이 아니었어도 그냥 베는 손맛이 좋아서……. 괴물들한테 그럴 때는 칭찬 받았는데."
"진짜 그게 다야?"
"저는 정직하니까 솔직히 말할게요. 사람이 좀 더 손맛이……. 으으으."
눈물을 닦으며 또 코를 찡그리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성과 감성이 충돌하는 현장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절대로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으니 더 괴로운 그런 건가?
이걸 뭐라고 해야 한다. 교화가 잘된 사이코패스?
그래도 그런 문제라면 나도 해줄 말이 있다.
"세상이 참 학교에서 배운 거랑 다르지?"
"정말 하나도 안 같네요. 미궁은 배운 적도 없지만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평화를 지키는 숭고한 직업이라고 들었는데. 저는 이래도 되는 걸까요?"
거 사춘기 맞구먼 뭐. 늦게 찾아오는 사춘기도 있는 법이다.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시키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다면 그렇게 되기도 한다.
미궁에 와서야 처음으로 자신을 마주하는 사람도 의외로 많다.
딱히 나이가 어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더 이상 자신을 지켜주는 울타리도, 혹은 자신이 지켜왔던 울타리도 없는 땅.
몸 하나만 가져와 온전히 자신의 삶만을 마주 보는 것이다. 정상적으로는 하지 못할 경험이다.
나는 가끔 그런 정신적 문제를 호소하곤 하던 파티원들에게 늘 하던 말을 했다.
"그럼 날 믿어."
"네?"
"너 나 좋아서 따라다니잖아. 나 좋아서 이런 상담하고."
"자기 입으로 말하는 건 좀 깨는데……."
깨면 지가 어쩔라구.
"내가 보증하는데, 넌 잘하고 있어. 그렇게만 하면 되는 거야. 사람을 죽이는 게 맞는지를 고민하지 마. 서로 단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 야생동물들도 그러잖아?"
"네에……."
"나 존나 쩔잖아.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대충 다 알고. 잘 모르겠어도 그냥 때려 맞추면 맞고."
"네."
간혹 지쳤을 때, 남모르게 어딘가에 처박혀 마음을 달래는 것은 이유가 있다.
나는 언제나 파티의 중심, 모두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아야 한다.
그래야 파티가 제대로 굴러간다.
신격화될 정도로의 든든한 기둥이 없다면 후반에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러니까 나는 항상 말한다.
"네가 틀리면 내가 먼저 말할 거야. 네가 힘들어도 내가 먼저 봐줄 거야. 이렇게 찾아오지 않아도 먼저 가줄 거야. 이게 파티 리더다. 알겠지? 마음껏 의지하도록 해라."
"흐윽. 어떡해. 아빠보다 믿음직해. 훌쩍."
"아빠 소리는 좀……."
"그럼 오빠?"
"그건 사귀고 나서."
순간 소녀의 귀와 꼬리가 쫑긋 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없지만 아무튼 느낌이.
"어, 지금 이거 고백이에요?"
"아니, 네가 도전할 거라며. 난 항상 응원하고 있단다."
이런 대응은 최대한 감정을 빼고 무표정과 기계적인 어투로 해야 한다.
소녀의 눈동자가 내 얼굴에서 감정을 찾으려고 움직인다.
당연히 실패한다.
"이씨. 이거 조건이 너무 불분명해요."
"네가 멋대로 시작하고 멋대로 만든 조건 아니었어?"
"후, 이러다가 먼저 고백해 버리겠어. 완전 좋아."
"안아줄까?"
"네에."
말꼬리를 늘어뜨리며 품에 안겨든다.
조용히 지켜보던 여신이 말했다.
「넌 참 힘들게 사는구나.」
‘이번엔 인싸가 어쩌고 안 하십니까?’
「농담을 하기엔, 네가 지고 있는 부담이 너무 대단해 보이니 어쩌겠느냐.」
‘어째 말투도 어른스러우십니다?’
「어른 맞으니까 그런다. 애송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신이란 건 좋다.
97년간 무수한 삶을 살아오면서도, 내가 두각을 드러내 신과 친해진 다음이라면 이런 대화를 하곤 했다.
신들은 언제나 나를 이해했다.
수천 년의 삶이란 것은 나로서도 알 수 없는 영역이다.
그 정도 세월을 살다 보면 정말로 어른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가끔 찡찡대도 됩니까?’
「필요하다면.」
‘거 참 고맙군요. 여신님도 저한테 찡찡대도 괜찮습니다. 서로 위로하고 살지요.’
「아, 나는 항상 하고 있지 않으냐.」
‘듣고 보니 그렇군요.’
잠깐, 시간이 지난 후 여신이 다시 말한다.
「이런 소리까지 서로 해두고 배신하기 없지? 개종하면 안 된다? 응?」
‘아, 내 감동 돌려줘.’
「살아야 감동도 있는 법이다.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