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56화 (56/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56화

8층 - Lv. 159 여단 본부(1)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물론이지."

"으윽, 으으윽."

처음에는 어둠 속성의 여파 때문에 멘탈이 흔들흔들하나 했는데 그냥 타고난 성정이 이런 모양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멘탈이 쉽게 박살 나지만, 그만큼 쉽게 회복되는 사람들.

엉엉 울다가도 한 번 울고 나면 다시 방실방실 웃는다.

천사가 꼭 그랬다.

"너, 원래 하던 거 광전사라며? 아니 대체 왜 그런 걸 하면서 마음은 여려?"

"그래서 하는 거예요! [광화]하면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와, 비겁하게 맞는 말로 반박하네.

"알았으니 가라."

"으끼야아아악!"

떠밀려 날아가는 모습이 위태위태하다. 자유비행이 가능한 종족을 해본 경험이 아예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저런 사기 종족을 잡고도 헤매지.

이 녀석이 하다못해 하피라도 해본 적이 있었다면 여기서 전멸한 것은 우리 파티일지도 모른다.

중력 50배가 걸려 있는 얼음 바다 위를 고장 난 파리처럼 지그재그로 비행한다.

실수하여 떨어지더라도 죽기는커녕 아무 손상도 없겠지만 엄청나게 추울 거다.

천사라 한들 고통을 느끼는 감각은 인간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오히려 훈련할 때는 더 갈구기 쉬워지는 면이 있다.

고통은 비슷하게 느끼는데 절대로 죽거나 다치지는 않는다.

교관으로선 이보다 좋을 수가 없지.

그 외에도 천사라는 종족에 익숙해지도록 많은 훈련을 병행했다.

지치지도 않으니까 다른 일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굴렸다.

그러면서 혼자서도 연습할 수 있게 최대한 중점적으로 학습해야 할 내용을 미리 주입시킨다.

왕국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숙달되어야 한다.

천사라는 것만으로도 무수한 주목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엄청난 양의 스카웃 제의도 쏟아질 건데, 내 라인을 타기로 한 이상 모두 거절하고 자수성가해야 한다.

세력을 구축하거나 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집이나 한 채 구해두고, 꽤 쓸 만한 유배자 중 하나로서 왕국에서의 입지만 구축해 준다면 만족할 만한 성과지.

‘도전자’는 아니긴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47년 차의 짬이 어디 가진 않는다.

정신 상태는 참으로도 미숙하지만 지식이나 몸에 배어 있는 짬은 느껴졌다.

천사임에 익숙해지기만 해도 어떻게 아쉽게 되지는 않으리라.

당연하지만 개종도 시켰다.

여신님은 천사 경험은 없었다지만 악마 또한 자유비행의 종족이다.

이후에도 틈틈이 좀 가르쳐달라고 하니 싫은 척하면서 실실 쪼개신다.

신이면서도 신도가 없어 시야가 우리밖에 없었다는 점이 못내 불만스러웠던 모양이신데, 좋은 게 좋은 거지.

* * *

천사를 충분히 훈련시켰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만 하루가 더 필요했다.

숙달은 속성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연습해야 할지, 어떻게 익혀나가야 할지는 다 가르쳤다.

종족에 따라 또 달라지는 마인드맵 보정에 대해서도 외우게 했다.

이후에도 여신님이 짬짬이 조언을 할 테니 문제없겠거니 싶다.

애초에 왕국 이전에 천사를 죽일 수 있을 만한 층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에도 살아서 다음 층은 간다.

원래 목적부터가 왕국에서 귀족이나 다름없는 ‘천사’로서 잘 먹고 잘살기인데 어련히 사리면서 전진하겠지.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는다.

"그래 가서 무슨 일 있으면 여신님한테 일러바치고."

"넵!"

각이 딱 잡힌 것이 어딘가 여궁수네 파티의 꼬마 마법사가 생각나는군. 어딘가 심약해 보이는 면이 닮았다.

그쪽은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일단 발견된 시체나 목격한 파티 중에는 없었다.

다른 7층을 지났거나, 아직 6층에 있다고 봐야 한다.

확실히는 모르겠다. 진작 리타이어하고 시체는 바다로 던져졌을 수도 있지.

"그런데 잠깐, 가기 전에 말이야. 거기 엎드려 봐."

"네?"

소녀와 사냥꾼을 불러왔다.

"깃털 뽑아."

"네에에에?"

갈땐 가더라도 챙길 건 챙겨야지.

천사의 깃털은 정말 귀한 소재다. 단순히 여신님께 제물로 바치기만 해도 꽤나 많은 신앙 점수가 쌓일 것이며, 귀걸이 따위의 액세서리로 만들어도 다양한 추가옵션이 붙는다.

주로 민첩 전사의 방향과 신앙 부분의 옵션이 붙는데 우연찮게도 이미 확보해 둔 패딩이 있다.

"흐익, 히익, 끄이이익."

사냥꾼은 안쓰러워하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다면, 소녀는 묘하게 가차 없이 잡아 뽑는다.

"그런데 이거 막 폭발하고 그러던 거 아닌가요? 엄청 튼튼하기도 했는데."

"전투 시에는 신성력이 흐르니까 그렇게 되는 거고 그게 평소에도 그렇지는 않지."

평소에는 보이는 그대로 공기를 잔뜩 머금은 푹신푹신한 깃털이다.

그리고 그렇게 파티원들이 깃털을 뽑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냐 하면.

"어허, 고개 돌리지 말고. 딱 고정하고 울란 말이야."

아파서 찔끔찔끔 흐르는 눈물을 병에 받았다.

천사의 눈물, 이름만 들어도 벌써 귀해 보이지 않냐고.

실제로도 아주 귀하다.

마법 계통에서도 연금술 쪽으로 조예가 있다면 다양한 시약과 포션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다.

이 귀한 걸 버릴 수는 없지.

"아파도 참아. 뚝. 아니지 뚝 그치진 말고. 울긴 좀 더 울고. 응?"

"살려주세요오오."

"미래를 생각해. 부귀영화. 행복하고 평안한 삶. 잘생긴 남편에 토끼 같은 자식."

"흐윽, 부귀영화아."

달리 병이랄 게 없어 그냥 포션병에 받았다.

작업이 끝나고 나서는 마지막 힐링 포션으로 말끔하게 복구시켜 주었다.

몸은 멀쩡하지만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듯해서 조금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동안 이제 다른 이들을 보내준다.

"감사했습니다!"

왜 내가 무슨 은사가 된 기분을 맛보아야 하는 지는 모르겠다.

고통 없이 죽는 방법은 유배자에게는 꽤 중대한 정보다.

학생들은 마지막으로 고통 없는 자결의 실기를 치렀다.

거참.

소녀가 거기에 대고 합장하며 읍한다.

저게 맞긴 한데, 동시에 맞지 않기도 하다.

나는 그냥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금방 헤실거리기 시작했기에 걱정을 덜었다.

* * *

"자자, 정리해 보자고. 대물 저격총 하나에 자동 소총 셋. 탄은 얼마나 남았지?"

사냥꾼이 점검을 끝낸 탄알집을 정렬한다.

"300발 남짓밖에 안 될 것 같습니다. 아쉽군요."

"뭐, 6층에 자동 소총이면 살아남은 게 용하지. 아, 그래도 좀 살살 쏘라고 할 걸 그랬나. 여기서만 500발은 쓴 거 같은데."

"반쯤 차 있던 박스 하나만 들고튀었다고 하니 그 정도가 맞을 것 같습니다."

"저지력으로 천사 운신을 제약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날 줄 모르는 애라서."

"보통은 모르는 게 정상일 것 같긴 합니다만……."

자동 소총의 5.56㎜ 탄은 그렇다 치고, 12.7㎜탄도 얼마 없었다.

"한 탄창 남았습니다."

"제길, 내가 왜 저 반푼이 천사한테 그렇게까지 했던 걸까."

"하하, 저는 리더의 인간미를 보아서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홀수층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확실히 모르는 상황에서 천사의 존재가 확인되니 전력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짝수층 같은 난이도만 반복된다면 정말로 그래야 하니까.

하지만 이 정도면 아직 정상적인 운의 영역이다.

있을 수 있는 일.

트럭에 치이는 정도야 뭐 지구에서도 매일같이 어딘가에서는 일어나는 일이니까.

생각을 다시 해봐야겠다. 확실히 프로방스 정도를 제외하고는 유배자에 한해서는 있을 법한 수준을 넘어가지 않고 있다.

영향이 없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왕국 이전에서는 짝수 층이라고 통칭되지만 엄밀히 따지면 역사가 흘러가고 있는 대륙의 일부를 스테이지로 유배자가 출현하는 것에 더 가깝다.

난이도라는 것은 결국 얼마나 위험한 곳으로 계단이 열리고 맵이 제한되냐의 문제다.

딱 거기까지만 영향을 미친다면 납득할 수 있는 스케일이다.

개발자 놈들의 개발 성향을 생각해도 이게 맞다.

데우스 엑스마키나적인 무언가를 넣는다기보단, 항상 뒤지게 고생하면 그만큼 꿀은 빨게 해준다가 철학이었다.

묘하게 쓸데없는 현실성을 집어넣어 유저를 괴롭게 만드는 것도 그렇고.

사실 지들 취미일 거야.

아무튼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소녀 같은 이레귤러도 단순히 그냥 그렇다는 식일 것 같지는 않다.

행운의 신과의 접점을 찾아봐야겠군. 그런데 행운의 신도 접미가 붙지 않는 대신격이라 만날 수 있을지는 잘…….

심연만 가면 어쨌건 제단이 있는 심연의 신이 양반이다.

「행운의 신이라면 나도 만나보고 싶긴 한데, 내가 하꼬라서 미안하네.」

‘뭐, 자연의 신은 행운의 신이랑 친구라도 먹었답디까?’

「그럴 리가, 대신격들은 늘 그렇듯 침묵하고 있지.」

신전이 아니라면 존재도 알 수 없다. 신도가 되어도 메시지나 신언 같은 걸 내리지도 않는다.

고고하면서도 진정으로 ‘신’ 같은 것들이다.

원래 유배자이기나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건 개발자 놈들도 비밀이라며 안 알려줘서 나도 모른다.

* * *

눈을 꼭 감고 있는 천사를 뒤에서 찔러 심연으로 보냈다.

아카샤의 눈에 박힌 구슬 하나가 다시 빛을 잃는다.

아깝다는 생각까지는 안 든다.

아직도 한 발 남았다.

상대가 무엇이건 심연으로 치워버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이건 아무래도 10층에서 쓰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짝수 보스층이라니. 후.

이제 맵에 온전히 우리 파티 4인만이 남았다.

쿠웅 하는 효과음과 함께 계단이 출현했다.

이런 건 원래 파티 리더 앞에 나타난다.

"천사 깃털 패딩 따뜻해요?"

"그럼, 이게 이래 봬도 한 유니크 아이템 정도는 될걸?"

사실 게임 시절에도 존재하던 아이템이다. 패딩 입은 유배자를 잡아서 패딩을 얻고 천사 깃털과 합성.

지금은 물리적으로 패딩을 뜯어서 안에 있는 오리털을 빼고 집어넣었다.

꿰매는 거야 뭐…… 바느질 도구 정도는 무슨 테마에서도 만들어서 가지고 다닐 수 있다.

"눈물은 어디에 쓸 거예요?"

"왜? 궁금해?"

"그, 좀 하다 보니 불쌍하긴 해서. 그럼 좋은 데에 써야 하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그 마음은 착한 거니? 나쁜 거니?"

"어어, 착쁜 걸로?"

사람이, 아니 천사도 만화처럼 콸콸 눈물을 쏟아낼 수는 없다.

그렇게 눈물을 쏙 빼놓고도 병의 바닥에 찰랑일 정도밖에 안 된다.

"사실 그냥 해부해서 눈물샘을 채취하는 게 더 편하긴 한데."

소녀가 몸을 떨었다.

"아니, 안 그랬잖아."

"무서워요……. 순간 감정 이입했어요."

"뭐,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서 어차피 여기선 못했어."

천사도 왕국 이후에 [메인 던전] 같은 곳을 진행하다 보면 비둘기 떼처럼 우르르 나온다.

그때쯤 되면 그렇게 수집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다들 준비는 끝났지?"

"네!"

소녀가 대표로 우렁차게 대답한다.

기분은 아주 좋아 보인다. 다행이야.

막내는 변함없이 여신님께 기도하며 계단으로 발을 디뎠다.

계층이 바뀌는 부유감이 몸을 감싼다.

[TIP : 와이드 맵은 통상보다 훨씬 넓은 계층을 의미합니다. 통상적인 계층은 국지적인 경험만을 제공합니다만, 와이드 맵에서는 더 대국적인 정세에 간섭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륙의 주민들에게 미움을 사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와이드 맵? 이것도 왕국에서 찾아 들어가는 종류의 계층이지 결코 왕국 이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 시점에서 와이드 맵이라.

어느 정도 [종족 메인 스트림] 따위에 얽히기 시작하면 이런 맵이 튀어나오곤 한다.

그런 식으로 인과가 있어서 열리는 맵이라면 당연히 예측도 가능해진다.

그래……. 이건 그린스킨과 엮여 있을 확률이 아주 높다 못해 그냥 100%다.

그럼에도 테마는 아직 설원이다.

이젠 불길한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 * *

다시 눈보라를 헤치고 나아가 간신히 마을에 도달했다.

계절에 약간의 변화가 있어 보인다. 땅이 녹고 있던 얼마 전과 달리 꽁꽁 얼어 있는 게 눈에 띈다.

추측건대, 최소 몇 달이 지났다.

최대, 1년 이상이 지났다.

"왜 여기를 다시 돌아오게 된 거죠?"

"전쟁의 신이 많이 노하셨나 보군."

사실 신이 그렇게까지 간섭할 수단은 없다. 하지만 지금 잘못했다간 전쟁의 신의 분노를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난쟁이 마을은 조금 놀라긴 했으나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마을엔 큰 변화가 없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초등학생 정도의 키에, 중학생 정도의 얼굴을 한 촌장은 바위 난쟁이다운 담담함으로 나를 맞았다.

"촌장, 우리가 떠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석 달이 지났습니다. 다시 겨울이 찾아오니 한번 뵈었던 인연도 다시 오시는군요."

이건 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는 말이다.

"당분간 신세를 좀 져야 할 것 같아."

"은혜가 있으니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편한 대로 지내시지요."

그래도 이 부분은 진심이었다. 바위 난쟁이는 요정으로 치면 그루터기 요정과 비슷한 이들이다.

교활함보다는 선량함에 더 가까운 장인들.

"요정들은 떠나고 없겠지요?"

소녀가 아쉬운 듯 묻는다.

"저번에 뵌 후에 빠르게 다시 남쪽으로 내려갔다고 알고 있습니다."

조금 더 생각을 해보아야겠다.

와이드 맵인 이상 저번보다 훨씬 넓은 영역까지 우리에게 열려 있을 것이다.

와이드 맵 자체가 일종의 인카운터이므로 계단에 별다른 조건도 없을 터.

다만, 계단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얼마나 위험한 장소에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영역까지, 혹은 요정의 영역까지 맵이 이어져 있다면 더 좋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번에 보았을 때, 바르바로이의 클랜원이 이 근방에 셋이나 동사해 있었다.

그럼 나머지들도 비교적 근방에 있을 확률이 높다.

최우선 목표를 정하자.

어떻게든 뱀파이어를 찾아 목을 대주고 인간부터 포기해야겠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