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8화
8층 - Lv. 159 여단 본부(3)
혼돈의 여신은 오랜 세월 동안 유배자 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 몇 배나 되는 시간 동안 신좌에 앉아 여러 세계의 명멸을 지켜보았다.
서버는 그곳에 속한 모든 유배자가 사라져도 지속된다.
속한 유배자가 없어 진입할 방법은 완전히 사라지나, 신으로서 관조할 수는 있다.
닫힌 세계, 혹은 버려진 세계다.
NPC. 그것은 무엇일까? 대륙의 주민들은 게임적인 개념의 NPC가 맞냐고 물어본다면 확실히 그러하다.
그들에게는 미궁이라는 이름의 게임을 클리어할 자격이 없다.
그들에게는 명백하게 과거가 없다.
그들은 만들어진 자들이다.
어떤 새로운 튜토리얼이 탄생하는 순간 그와 함께 태어나는 세계요, 인물들이다.
하지만 그것이 생명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지금도 모르겠다.
여신은 어려운 것은 일단 치워두는 성격이다.
혼돈의 신은 본디 어떤 종족이 섬기는 일은 드문 신이다.
간혹 악마들이 섬기는 경우는 있으나, 새로운 서버가 열릴 경우 드물게 일어나는 일.
게다가 악마는 강력하긴 하지만 개체 수가 많지 않고 배척받는 종족이라 마땅한 세력이라 부르기 힘든 경우가 대다수다.
‘전쟁의 신좌에 내가 앉아야 했는데. 쯧.’
신좌는 고를 수 있는 것이 아니긴 하다. 고난의 끝에 도달하는 곳이 어느 신좌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
‘전쟁이었다면 꽤 이 녀석의 도움이 되어줄 수 있지 않았으려나.’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여신은 그 사실에 조금 놀랐다.
이런 생각을 해보았던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더라?
신으로서도 고참인 그녀에게 감정이란 슬슬 희박해져 가는 것이었다.
그저 기억으로 흉내 내고 있던 것일 뿐.
‘이제 와서 이런 소리를 해보아야 참으로 쪽팔리기는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던 것뿐이었다.
찾아오지 않는 도전자를 기다리기도 지쳤다.
스스로 죽음을 고르기로 했다.
신좌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이탈하는 신도들을 붙잡을 생각 없이 가만히 지켜보며 소멸을 기다렸다.
어렵지는 않았다.
귀찮게 굴고, 장난을 치고, 그저 재미를 위해 가지고 놀았다.
그것이 혼돈과 자유의 신좌가 지닌 성격이니까.
오랜 세월이 지났다.
마지막 신도마저 보내주고, 소멸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신격의 자살.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자 깨달았다.
본능 깊숙한 곳에서,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한 무언가가 치솟았다.
세월로 덮어두고 있었던, 혹은 덮었다고 생각했던 어린아이 같은 치기.
그녀 역시 동의하는 바이지만 성격은 외형에 종속되는 부분이 있다.
너무 긴 세월 어린 모습으로 지내왔는지도 모른다.
문득 그렇게 분출된 어린아이는 울음을 터뜨리며 삶을 갈구했다.
그렇게 신도가 다시 생겼고 죽음은 유예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신이 된 이후로 처음으로 신도에게 애착을 가지게 된 것 같다.
틱틱거리면서도 은근히 챙길 것은 다 챙겨주는 파티 리더 녀석.
헤헤거리며 말 상대를 해주는 꼬맹이.
겪어보지 못한 신실함으로 자신을 섬기는 거한.
수상쩍을 정도로 요정을 좋아하는 사냥꾼.
나쁘지 않다. 거대한 교단을 거느려 신의 위엄으로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의 동료처럼 가까이서 지켜본다.
창을 들고 저 사이에 같이 서 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랬다면 미궁의 클리어라는 위업에 좀 더 가까워지지 않았을까?
기묘할 정도로 이상적인 파티는 실로 그러해 보였다.
「혼돈이시여! 제가 출구에 도달했나이다!」
어딘지 맥아리 없는 천사의 기도가 들려온다.
기도 같지도 않은 기도를 하는 리더나 꼬마 녀석에 비하면 격식을 갖추었다.
이 녀석 또한 기특하기 그지없다.
천사 신도는 기나긴 세월 동안도 처음이다.
요즘, 삶이 조금은 재밌다.
이 파티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계속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 또한 결국엔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되새기게 되는 나날이다.
* * *
난쟁이 상인은 더 이상 전장에 접근하는 것에 큰 난색을 표했다.
전장을 크게 돌아 이동하는 것도 위험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전장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바위 난쟁이 마을로 돌아가려고 하기에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상인은 마지막으로 거래를 제안했다.
"그 등에 메고 있는 길쭉한 것들 혹시 팔 생각 없나?"
"죄송하지만 이건 안 되겠습니다."
상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더 이상 묻지 않고 떠나갔다.
이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유배자가 가지고 있기도 하는 기깔나는 무언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있었던 모양이다.
총기를 지금 대륙에 흘리는 것은 썩 좋은 선택이 아니다.
미래에서 가져온 물건이니 바위 난쟁이들에게 주고 오거나, 저 상인의 손에 넘겼다면 시대의 발전이 빨라지긴 하리라.
그것은 너무 큰 변수다. 통제할 수 없는 변수를 줄여나가는 것이 로그라이크의 기본이다.
"그럼 우리는 천천히 상황을 보면서 성에 들어가 보자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걸어서 이동하여 전장을 크게 우회한다.
오크 제국의 군대는 성을 포위하지 않고 있었다.
그냥 치다 보면 뚫는다는 자신감일지, 포위전략 같은 대단한 것을 할 자신이 없는 것일지.
날이 어두워지자 전투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전쟁과 야성의 신을 섬기는 그린스킨들은 결코 야습이나 암습을 하지 않는다.
그것이 허가된 것은 제대로 된 신도로 취급조차 못 받는 고블린뿐이다.
밤에 싸우는 것은 약한 것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게 그린스킨들의 지론이다.
그렇기에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보며 성의 동문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공격 받고 있는 것은 서문이다.
"거기! 누구냐!"
횃불의 불빛이 비쳐 식별되는 거리까지 도달하자 잔뜩 예민해져 있는 초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소리쳤다.
"유배자요!"
"뭐?"
* * *
유배자라 함은 대개 인간이다.
적어도 지금 시대의 대륙에는 그리 알려져 있을 확률이 높다.
대부분의 유배자들은 초반 구간을 중세 정도의 시간대에서 보내게 된다.
초반부터 현대나 미래, 혹은 고대로 짝수 층의 시간대가 튀는 파티는 아주 불운한 것이다.
혹은 다른 시대의 장비를 파밍하는 행운아일 수는 있다.
어찌 되었건 인간 팩션은 위기상황에서라면 유배자를 쉽게 받아들여 준다.
같은 종족이라는 것은 이 세계에서는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말과도 큰 차이가 없다.
"거기 둘은 동방에서 온 모양이군."
동문 수비대장이 소녀와 나를 보며 말했다. 유배자에 대해 잘 모르는 티가 난다.
아예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종류의 인간이다.
하지만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의뢰할 것이 있나?"
"흠? 의뢰라니. 네놈들은 할 게 있어서 여기 나타난 놈들 아닌가?"
묘하게 내비치는 적의.
어디선가 주워들은 편견으로 가득하다. 귀찮고 피곤한 타입이다.
"달리 없어서 하는 말인데. 유배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상종하지 못할 놈팽이들이라 알고 있지."
"다른 소문은 없나?"
경비대장이 신음했다. 옆에 있는 다른 병사를 부른다. 석회로 석판에 무언가 기록하고 있는 일을 하던 병사다.
둘이서 잠시 자리를 비우곤 무언가 대화하는 듯하더니 돌아왔다.
소녀에게는 들린다.
물어보자 우리의 처우를 논의하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름대로 수비대장의 브레인인가?
"좋아, 우선 용병으로 대우하도록 하지."
"용병들이 많나? 계약 조건부터 좀 알고 싶은데."
돈은 중요하다. 지금 이 정도 판이 깔린 이상 이후의 모든 짝수 층은 인간의 역사와 긴밀하게 엮여 있는 상태일 것이다.
현재 오크 측에 인간의 히어로 유닛이 있기도 하니 어느 정도의 금전은 필요하다.
"흠, 그건…… 용병대장에게 묻는 게 더 나을 걸세."
우두머리가 있단 뜻이다.
생각보다 체계가 잡혀 있군.
나이트 크로우도 그렇고 이 대륙의 인간들은 제법 세가 강한 편인 모양이다.
나는 간단히 고개 숙이고 빠져나왔다.
병사 하나가 와서 용병들의 숙소로 안내해 주었다.
숙소라곤 하지만 공터에 늘어선 천막촌에 더 가깝다.
한참 전쟁 중의 분위기가 감돈다. 성의 규모가 작지는 않았기에 용병의 규모도 적지 않았다.
대장이란 자는 거대한 도끼를 다루는 대머리 거한으로 우리 막내와 똑 닮아 있었다.
"유배자? 좋아. 마음대로 움직이도록. 난 유배자랑 엮일 생각 없어. 가끔 다 같이 움직일 때의 지시만 따라줘."
"물론, 그 정도야 하지."
"흠, 내가 본 유배자 중에선 가장 믿음직한 태도로군. 그리고 거기 자네가 참 마음에 들어. 있지도 않은 동생과 재회한 기분이야."
막내가 멋쩍게 웃었다.
그야 뭐 쌍둥이처럼 닮았으니 말이지.
이렇게 대강의 입지를 확보했다.
전시에는 유배자라고 경원시할지언정 내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린스킨은 아마 내일이나 되어서 습격을 해올 것이다.
초병들이 경계하는 것은 고블린 암살자 정도뿐.
나는 내 용건을 해결하러 가야 한다.
사냥꾼은 나름대로 용병 경험도 있었고 그 생리를 아는 편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같이 일해본 정도지만 말입니다."
"어차피 내가 돌아올 때까지 별일은 없을 거야. 우리가 다 같이 돌아다니면 귀찮은 일이 생길 수 있으니까."
유배자가 아닌 용병이라도 야밤에 무리 지어 움직인다면 영주가 싫어할 것이고 최악의 경우 기사를 보내온다.
판타지 중세의 기사는 결코 경시할 수 없는 무력이다. 현대로 친다면 전차쯤 되는 존재다.
현실의 중세라면 비용과 위상이 전차라 하겠으나.
판타지 세계에서는 말 그대로 그렇고, 물리적인 의미로도 그러하다.
"그럼 애들 잘 보고 있으라고."
"허허."
파티원들을 뒤로하고 움직인다.
어둠은 뱀파이어를 위한 시간이다.
활동하는 뱀파이어가 있다면 지금일 것이요, 그것이 아니더라도 어딘가에 있을 아지트를 찾아내야 한다면 밤이어야 한다.
정말 우습게도 인간의 땅이 타 종족의 공격을 받는다면 그곳에는 뱀파이어가 반드시 있다.
그들은 포식자지만, 인간의 피가 아니면 살아가지 못하는 편식쟁이들이다.
결국 인간과는 운명공동체다 보니 먹이를 지킨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 * *
나이트 크로우 지부 또한 아주 비밀스러운 곳에 있다.
물론 비밀결사 이런 기묘한 단체는 아니고 나름대로 국가 공인이긴 하다. 하지만 어중이떠중이들이 기웃거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제법 으슥한 곳에 자리한다.
적어도 평범한 용병이나 병사들은 알 수 없다.
나는 안다.
나이트 크로우 소속이었던 적도 있다.
물론 그린스킨의 공격이 시작된 지금 상황에서 함부로 나이트 크로우와 접선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있다.
욕심 많은 늙은이 같은 것과도 마주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뱀파이어를 제일 잘 아는 건 본인들을 제외하면 나이트 크로우다. 그다음이라고 해봐야 라이칸스로프 정도일까.
성의 규모가 작지 않기에 뒷골목이라 할 만한 곳도 가깝지는 않았다.
거리는 조용했으나 주민들이 불안에 떨지는 않았다.
아직까지는 꽤나 성공적으로 침공을 방어하고 있다. 거리의 분위기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평소처럼 술집이 운영되고, 공방엔 불이 켜져 있다.
성벽 밖에 살던 농민들이야 불안에 떨고 있으나 도시의 시민들은 평소와 다름없는 삶을 영위한다.
가로등에선 마법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밤이 본격적으로 성벽에 발을 걸친다.
깔끔하지 못한 슬럼가에도 장막이 드리워진다.
걷어낼 빛이 없으니 마법 없이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다.
나는 손끝에 불을 피워 올렸다.
내가 마법사요 하고 광고를 하면 어중이떠중이들이 꼬이는 걸 막을 수 있다.
습격하려는 듯 품 안에 손을 집어넣은 부랑자 하나가 인상을 쓰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슬럼가에도 술집은 있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더 많다.
나이트 크로우는 보통 그런 곳에 둥지를 튼다.
허름한 술집들 가운데서도 그나마 깨끗해 보이는 곳을 찾는다.
간판 같은 건 있을 리가 없다. 내가 찾는 것은 건물 외벽에 있을 수 있는 표식이다.
세 번 허탕을 치고 네 번째서야 발견했다.
"아, 진짜 더럽게 꽁꽁 숨겨뒀네. 하긴 뭐 지들은 대충 다 알고 올 테니."
그래도 게임 시절에 비하면 낫다. 그때는 일정 이상의 우호도로 소개 없이는 입장할 수 없는 곳이었다.
투덜거리며 들어가자 초 몇 개만이 밝히고 있는, 으슥하고 낡은 테이블들이 보인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취객들이 저마다 떠들거나 드르렁거리며 코를 골고 있다.
개중에는 아직 피 냄새가 나는 무기를 차고 있는 녀석도 있었다.
용병조차도 못 되는 수준이지만 한몫 벌어보겠다고 수비병에 자원한 녀석일 것이다.
나른하게 내부를 바라보던 주인에게 걸어가 펜던트를 올려놓았다.
주인이 짜증을 내며 컵으로 펜던트를 덮었다.
"이런 건 좀 은밀히 주시오."
그러며 슬쩍 빼가는 솜씨가 대단한 야바위꾼이다.
바 뒤편에 손을 넣어 진위를 확인한 후 돌아왔다.
"더스번 경의 물건이로군. 그럼 자네가 바로 그?"
"소문이 벌써 여기까지 퍼졌나?"
"그야, 경께서 매일같이 흡족하게 떠들고 다니시니. 아마 모르는 까마귀가 없을 거요. 잠깐 기다리시지."
싸구려 양조주 한 컵이 내 앞에 올라온다. 마시란 뜻은 아니겠지?
난쟁이 상인의 리큐르가 상당히 훌륭했기에 입대기가 싫다. 난쟁이들은 술에 상당히 진심인 족속이다.
그나저나 입이 무거운 양반 같지는 않았지만 뭘 그걸 또 그렇게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녀.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술냄새나 맡고 있자 주인이 돌아왔다.
누구도 함께하고 있지 않았다.
대놓고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연락이 갔을 것이다.
보통 지부의 책임자는 손님인 척 홀에 상주한다.
나는 자연스레 뒤편의 테이블을 살폈다.
한 명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손을 들어 올린다.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손.
그리고 후드 속에 살짝 엿보이는 앳된 턱선.
가까이 다가가자 확실하게 후드 속이 보였다. 거리가 멀면 인지를 흐리는 마법인 모양이다.
청년과 소년 그 사이 어딘가의 얼굴을 한 요정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오랜만이군, 아직 인간인 걸 보니 바르바로이의 잔당은 못 찾았나 보오? 지금 몇 층인가?"
요정 마법사가 빙긋 웃었다.
"22층입니다. 안 그래도 뱀파이어에게 좀 물리려고 왔는데 혹시 정보 좀 있으십니까?"
나도 블러핑을 치며 마주 웃었다.
있을 것 같았다. 인간 종족의 미래가 결정될지도 모르는 시발점이다. 오크 제국이 강대하니만큼 요정 역시 엮여 들리라.
유배자 출신이라면 이런 이벤트를 놓칠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