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9화
8층 - Lv. 159 여단 본부(4)
"경께서도 계십니까?"
"아니오. 그분은 잠시 가문으로 돌아가셨다오."
"귀족을 버리신 분이라 들었는데, 이 침공에 대해 생각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왜 아니겠소? 사실 뱀파이어들도 이 도시로 모여들고 있으니."
"인간인 척하겠군요."
"낮에는 못 싸우니 크게 도움이 된다고는 못하지. 그래도 말이오."
당연하지만 나이트 크로우의 소속원들이 모두 뱀파이어의 피해자인 것은 아니다.
흡혈귀는 분명 위협적인 존재지만 그 외에도 사람을 죽이는 것들은 널려 있다.
인간의 영역 안에서 살아가는지라 뱀파이어가 주목받을 뿐.
"뱀파이어 클랜은 이럴 때는 또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되니 참 우습지."
"고블린 암살자가 침투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겠군요."
"그렇지."
자 생각을 해보자. 눈앞의 이 요정 마법사가 카크리쉬를 죽인 장본인이라고 친다면, 아마 마지막까지 도전자로서 클리어를 향해 나아가던 자일 것이다.
나처럼 미궁 외적으로 지식을 지닌 상태가 아니라면 왕국 이전 타이밍에 히어로 유닛을 상대할 전력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한 달 만에는 불가능하다.
가능성은 이 양반 또한 게이머인 경우.
그렇다면 일흔 먹은 노인이라는 것도 블러핑이겠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신상을 드러내는 고참은 거의 없다.
대충 다 뻥을 쳤다고 봐야 한다.
애새끼 같은 외형까지 포함해서 오래 묵은 게이머 랜덤 NPC인가?
이미 프로방스가 등장한 마당에 불가능할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럼 닉네임을 물어야 하나?
아니지 지금 불리한 건 어딜 봐도 나다.
그래도 종족이 요정인 것을 보면 적어도 그린스킨의 편은 아니다.
하기야 누가 그린스킨의 왕 노릇을 하고 싶을까.
그동안 봐온 케이스도 언제나 요정이나 인간, 하다못해 난쟁이 측에서 대륙을 집어삼키려 했다.
원래는 모두 인간이었던지라, 그리고 멍청한 그린스킨의 지배자가 되어봐야 얼마나 골이 빠개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요정 마법사가 검지로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한다.
"바르바로이 혈족은 일단 나이트 크로우에서 알기엔 죄다 흩어져 종적을 알 수 없다네."
"자기네들 클랜 마스터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잘 모르겠군요."
"유배자로서의 인연이 닿아 있었을 테니 아주 못 본 것은 아닐 텐데. 죄다 죽어 있었나? 어디 보자. 지금 여기서 만난 것을 보면 설원 테마겠군."
"보는 족족 얼어 죽어 있더군요."
"하긴 우리가 처음 보았던 게 용의 늪지였나? 그곳이 여기서 크게 멀진 않아."
뭐라고? 용의 늪지? 이런 젠장. 어째 에인션트 악어가 있더라.
"그건 왜 말 안 해주셨습니까?"
"그야 뭐, 어차피 그땐 잡을 전력도 안 되지 않았나."
"하, 그래도 본 드래곤은 잡아야 했는데."
"썩은 드래곤 하트도 드래곤 하트긴 하지."
고정적으로 등장하는 지명으로 유추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현지의 주민을 통해 탐문하지 않으면 챙길 수 없는 종류의 인카운터다.
그 늪지 가장 아래 깊숙한 곳에는 본 드래곤이 잠들어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나이트 크로우 전원을 그 자리에서 동원해서라도 잡아볼 만한 사냥감이었는데.
"나로서는 우리 대원들이 다치는 걸 보고 싶진 않았으니, 이해 좀 해주게."
"그건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선배님."
"뭐, 하여간 그래서 내가 당장 소개해 줄 수 있는 뱀파이어는 있네만. 그 망토, 바르바로이 클랜의 혈족이 아니어도 사용할 수 있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클랜 마스터의 고유한 설정에 가까운 것이다. 비슷한 게 권능이다 보니 편의상 권능이라고 부르지만 그것과도 또 다르다.
"그럼 내가 도움이 될 수는 없겠군. 나는 바르바로이 클랜의 잔당이 어디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서 말이지."
인간의 영역에서 쫓겨난 낙오 클랜의 동향까지는 파악할 이유가 없긴 하겠지.
"그래서 이번 임무는 뭔가?"
"와이드 맵입니다. 그냥 계단만 찾아서 내려가면 되겠지만 아무래도……."
"끌끌끌, 그거 아마 폭풍 울음 여단 본부에 있을 것 같은데."
역시 여길 침공 중인 건 그 녀석들이다. 트동트와 성녀도 와 있겠군. 여단 전체가 진군했다면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처리해야 할 문제가 많다. 원래 RPG는 맵이 넓어지면 그만큼 사이드 퀘스트도 많아진다.
나는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바에서 졸고 있는 주인에게 가서 주문을 했다.
"주인장, 맥주 좀 멀쩡한 건 없나?"
요정 마법사가 작게 소곤거린다.
"난쟁이 양조장에서 가져온 걸로 좀 주게."
"그리고 보면 그 양조장은 대체 어디 있는 겁니까?"
"여기 북부로 올라가 보면 얼어붙은 광산이 있는 곳에 바위 난쟁이 마을이 하나 있지. 광산 안에 온천이 있는데 그 온천수로 만든다더군."
어라, 내가 거기 있다가 온 것 같은 기분인데? 확실히 그 마을에서 술은 코빼기도 못 봤다. 뭔가 수상하긴 했다. 난쟁이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 이야기를 하자 요정 마법사가 박장대소를 했다.
"우리가 대량으로 구매해가는 바람에 자기들 마실 것밖에 없어서 그럴걸?"
하여간 술에는 지나치게 진심인 종족이다.
* * *
요정 마법사의 말에 따르면 이 성을 영역으로 삼고 있는 뱀파이어는 프로보리 클랜이라고 한다.
마법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무투파 전사 클랜으로 단순한 만큼 강력한 것이 뱀파이어 전사인지라 세가 강한 경우가 많다.
한잔 걸친 후에 술집을 나섰다.
요정 마법사는 내가 뱀파이어가 되었을 때를 대비해 얼굴을 알려두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바르바로이 클랜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쫓겨난 녀석들이다.
뱀파이어 사회에서도 아무렇게나 사냥해도 되는 취급일 것이다.
유배자 뱀파이어라면 클랜과 무관하게 자신들의 사냥터를 침범하지 않는다.
영역에 민감한 뱀파이어에게 유배자 뱀파이어는 어차피 곧 떠날 손님이나 다름없다.
굳이 적대하지 않고 쉬쉬할 뿐이다.
그 사실이 알려져 있지 않다면 공격받을 수도 있다.
그러니 저 호의는 이치에 맞다.
만약 서로 같은 유배자라면 그렇다.
하지만 정착해버린 요정 마법사가 내게 그렇게까지 호의를 베풀 이유는 없다.
수상쩍기 그지없는 제안이다.
그럼에도 일단 잠자코 따라가기로 했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다.
서로 단 한 번도, 카크리쉬나 북부의 [미티어 스웜]에 관하여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아이와는 어디까지 갔나?"
"어디까지라니요. 전 그런 꼬마를 연애 대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런가? 연차는 모르겠지만 아직 인간적이로군. 지극히 유배자적인 마인드야. 도전자로서는 그게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요정 마법사가 멈춰 선다. 어두운 골목을 지나 도착한 공터였다.
마법의 여파로 좀 요란한 소리를 내더라도, 누군가 하나 죽어 시체를 치우더라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만한 그런 으슥한 장소.
"난 이전부터 도전자를 썩 좋아하진 않았다네. [메인 던전]을 찾아내고 그곳에 도전하기 위해 주민들의 삶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지."
마력이 일어난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에 비해 아주 막대한 양의 마력이다.
바르바로이 때는 힘을 숨긴 게 맞았던 모양이다.
그때의 낙관적인 태도는 더스번 경의 승리를 믿었던 게 아니라, 정리할 자신이 있었던 것일지도.
그게 아니라면.
어둠 속에서 뱀파이어 몇 명이 모습을 드러낸다.
병기를 하나씩 소지한 모습을 보면 프로보리 클랜이다.
처음부터 나이트 크로우에는 다른 생각으로 잠입해 있었나?
뱀파이어의 국가를 세우는 것도 좋지. 해두고 보면 의외로 관리도 편하고 좋긴 하다.
빠르고 편하게 날로 먹는다면 최적의 테크 중 하나다.
요정 마법사가 계속해서 말한다.
"난 대륙의 역사를 멋대로 휘두르는 도전자들이 늘 싫었다네. 오래 살다 보니 동화되고, 애착을 가져버렸는지도 모르겠어. 난 이 대륙의 주민일세."
마법이 구현되어간다. 거창하고 화려한 것이 아니다. 수없이 여러 갈래로 분열한 [파이어 볼트]의 다발이다.
지극히 실전적인 마법 운용인 동시에 스킬에만 의존해서는 다룰 수 없는 응용이다.
"그 아가씨에겐 미안하군. 내 삶의 터전을 어지럽히게 둘 수는 없어서 말이야. 뭐, 그래도 유배자에게 사랑은 금기 아니겠나."
나는 피식 웃었다.
"선배님도 이 대륙을 참 사랑하시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가지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시는 모양이다.
그러려면 유능한 유배자는 방해가 된다.
왕국에 도달한 후, 다른 오래된 서버의 유배자들을 끌어올 입구는 하나라도 줄이는 게 좋다는 거겠지.
처음부터 등에 메고 있었지만 인지 저해 마법으로 드러나지 않게 해둔 무기를 단 한 번의 동작으로 겨눈다.
실력 좀 볼까?
총탄은 아끼자.
조정간 단발.
일 사로부터 사격 개시!
* * *
"아저씨가 늦네."
"누님, 불편하진 않으십니까?"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부담스러운 호칭이었다.
단순한 건달이겠거니 했는데 생각보다 제대로 된 사람이었고, 소녀의 원래 세계에서는 그녀가 지켜야 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이렇게 깍듯하게 자신을 대한다.
한국인으로서 마음 한구석이 찝찝해지다 못해 가려워 죽을 지경이다.
"아이, 그러지 마시라니까."
오만상을 찌푸린 소녀의 얼굴이 우스웠던지 사냥꾼이 낮게 웃었다.
"남자 사이에 부대끼게 되었으니 어쩌겠습니까."
"사냥꾼 아저씨도 좀……."
하지 말라고 해도 계속해서 그렇게 대하는 모습이다. 소녀는 툴툴거리면서도 잠자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아저씨는 이제 무엇을 하러 가는지 확실하게 말하고 떠났다.
나이트 크로우는 나쁜 사람들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그 펜던트도 있으니 별일은 없겠거니 싶다.
용병을 위해 준비된 천막은 당연하지만 협소했다.
체구가 작은 소녀를 감안하더라도 그만큼 커다란 막내 때문에 도저히 세 명은 들어갈 수 없는 구조다.
"리더가 돌아오면 둘씩 교대로 불침번을 서면 되지 않겠습니까. 먼저 주무시지요."
"저도 불침번 설 줄 아는데."
"한창 클 나이라고 리더가 잠은 잘 재우랬습니다."
저런 배려는 고맙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리고 키는 크고 있긴 한 건지.
여기에 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대고 금을 그어둘 벽이 있는 것도 아니니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사냥꾼이 제일 먼저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이러면 말은 그렇게 해도 아무도 소녀를 깨우지 않는다. 사실 체력도 가장 좋은데.
눈 부릅뜨고 있다가 교대해야지.
암만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몇 번 당해봐서 알기에 소녀는 눈을 감지 않기로 했다.
소녀가 먼저 천막 구석에 자리를 잡자 막내가 거구를 어떻게 구겨 넣어 들어온다.
체격의 문제로 좁은 공간이면 이렇게 둘둘 나누는 수밖에 없다.
"저는 돌아눕겠습니다. 누님."
"네에."
홍일점에 홀로 어린애. 노약자라도 된 기분이다.
바깥에서는 항상 지키는 입장이었던 소녀로서는 간질간질하다 못해 두드러기가 날 것 같은 배려다.
막내의 널찍한 등판을 보며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바깥에서는 하지 못했던 생각이다.
그땐 그냥 계속 어린애이고 싶었다.
한편으론 참으로 모험을 하는 기분이다. 어찌 되었건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니까 더욱 그렇다.
게임 같네 같네 하지만 파면 팔수록 게임 같다.
아저씨는 언제 오려나? 단둘이서 야밤에 작은 모닥불이라도 피워두고 우후후.
해보고 싶네. 그런 거.
안 자고 있다고 혼날 거 같긴 하다.
그러면 필살 애교로 녹여봐야지. 매일 시도하고 있지만 반응이 시큰둥하긴 했다.
그래도 눈빛이 어딘가 따뜻해지곤 하는 걸 보면 아주 효과가 없는 건 또 아닌 거 같고.
아닌가? 손녀 재롱 보는 기분인가? 젠장.
그런 생각을 하다 깜빡 잠에 들었나보다.
바깥에서 사냥꾼이 소리쳤다.
"일어나! 빨리 둘 다 일어나!"
천막이 휘청일 듯한 기세로 뛰쳐나왔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느껴진다.
"몇 시예요?"
"이제 슬슬 교대하려던 참이었습니다만."
대충 두 시간 지났나?
"무슨 일입니까?"
"고블린이 들어온 모양인데. 꽤나 고레벨이."
사방이 혼란하다. 기사들이 있을 성도 불이 켜져 있다.
용병 캠프도 마찬가지다. 비명이 들려오고 피 냄새가 난다.
언뜻언뜻 그림자가 번지는 듯한 연기가 불빛 사이사이로 보인다.
알고 있는 이펙트다.
[은신]
"아저씨는요?"
"리더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조금 화가 났다.
또야? 맨날 없는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 아직도 안 온 거 보면 또 무슨 일이 있다.
이럴 거면 나도 데리고 가지. 위험하면 나도 옆에 있어야 할 거 아냐.
이건 명백하게 과보호다.
"사람을 맨날 애 취급이나 하고!"
빼액 소리를 지르자 사냥꾼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짐작한 듯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