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60화
8층 - Lv. 159 여단 본부(5)
총기 레인저는 극단적으로 장비빨에 의존하는 클래스다.
마스터리도 없고 관련 스킬도 거의 없다.
그나마 적용되는 스킬도 총기 전용 스킬이라기보다는 활이나 심지어 투척에도 적용되는 공용 스킬이다.
마인드맵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이라곤 민첩 스탯 자체의 원거리 무기 보정뿐이다.
즉 클래스 성능 자체가 절대적으로 장비에 의존하게 된다.
어찌 보면 현실의 흐름과도 같다. 세월이 흐르며, 과학이 발전하니 점차 개인의 능력에 의존하는 부분이 줄어드는 것이다.
검과 마법의 세계는 퇴색되어 가고 총기 앞에 무력한 검사와 마법사가 남는다.
물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닌 만큼 부분적으로 살아남기는 한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아직 아니었다.
요정 마법사는 황급히 [파이어 볼트]를 떨치고 일부는 회수했다.
투사 무기가 있다곤 해도 돌격소총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뱀파이어들은 총이 뭔지 모르니 그냥 덤빈다. 나는 [대시]를 동반해 거리를 벌리며 날아드는 불꽃을 피했다.
황급한 와중에도 유도 성능이 있다. 본인이 직접 조작 중이다.
능숙한 유도에 몸 곳곳이 그슬린다. 지능 스탯과 천사 깃털 패딩이 충분한 마법 저항을 제공한다.
마법적 불꽃은 옮겨붙지 못했다.
겉에 두른 망토가 불타고 형광 녹색의 패딩이 드러난다.
탕! 탕!
[파이어 볼트]가 일부 피격하는 것을 보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화려한 불꽃 사이로 총탄이 지나간다.
불꽃마저 휘감은 탄환이 뱀파이어의 심장을 꿰뚫는다.
머리조차 급소가 아닌 녀석들이지만 심장만큼은 얄짤없다.
조정간 점사.
끊어 쏠 때와는 다르게 중첩되어 두두두 하고 들리는 소리와 함께 거리를 두고 마법사를 호위하듯 서 있던 뱀파이어도 쓰러진다.
지체 없이 마법사를 노렸으나 방어막이 생겨나 막아낸다.
스킬에 의존하지 않는 마법 구사다.
뛰어난 실력자다. 저런 수준의 마법사는 미래에도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한다.
남은 탄을 모두 쏟아붓자 방어막이 버티지 못한다.
온몸의 털이 쭈뼛하고 선다.
몸을 빠르게 굴리며 노리쇠 후퇴 고정.
탄알집이 빠짐과 동시에 준비한 다른 것을 끼워 넣는다.
총기의 단점 중 하나, 스킬이나 장비로 화살을 메기는 과정 자체를 없앨 수 있는 활과 달리 장전을 꼬박꼬박 해야 한다.
무한 탄알집 같은 게 없다.
내가 몸을 피한 곳에 거꾸로 솟는 방전 현상이 인다.
타이밍 맞춰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번쩍하고 낙뢰가 내리꽂혔다.
곧바로 노리쇠 후퇴 전진.
조정간 연발.
요정 마법사가 있을 위치로 반동 제어하며 사격.
딱 그 순간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스륵하고 등 뒤에 번쩍이는 불빛.
으스스한 푸른 선이 방금 떨어진 낙뢰의 위치와 이어진다.
[체인 라이트닝]이네?
총을 내던지고 손짓을 동반하여 마력을 움직인다. 마법이 되기 전의 마력이란 것은 시야 내에서는 빛만큼이나 빠르다.
요정 마법사가 설치했으나 아직 번개가 되지 못한 마력이 내 간섭에 흩어진다.
그와 동시에 목에 서늘함이 다가왔다.
거합처럼 뽑아서 벤 케찰코아틀 롱소드가 불꽃을 튀기며 막아내었다.
한눈에도 위험한 녹색으로 번들거리는 단검이었다.
마법사는 솜씨 좋게 단검으로 롱소드를 흘리고 다시 내지른다.
몸을 뒤로 눕혀 피하며 드롭킥처럼 드러눕는다,
앞으로 [대시].
발끝에 차이는 체중이 있어야 하지만 없다.
대신 상대가 그림자처럼 흩어진다.
[은신]은 초반 사기 스킬이다. 지속적인 상대 마력의 소모라도 유도할 수 있으며 순간적이나마 동작을 잘 보이지 않게 해준다.
바로 그 틈으로 단검이 날아왔다. 던지는 동작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속도니 그냥 팔을 들어 막는다.
천사의 깃털이 빛을 내며 단검을 튕겨내었다.
어지간한 방탄복이나 방어 마법 로브보다 이게 낫다. 괜히 천사 카드가 귀한 게 아니다.
독액을 흘리는 단검의 그림자 속에 또 다른 단검이 하나 더 숨겨져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마찬가지로 패딩으로 튕겨내고.
단검을 향해 힘껏 주먹을 날린다.
[점멸]로 나타난 마법사가 제대로 얻어맞고 날아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 손끝에서 번개가 튄다.
마법 저항력이고 뭐고 직격은 타격이 없을 수가 없다.
온몸에 저림이 퍼지고 들고 있던 롱소드를 떨어뜨렸다.
무릎이 저절로 꿇린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서로 다시 몸을 날려 거리를 벌렸다.
"이런 제길, 뭐 이렇게 잘 싸우나? 총은 또 뭐고? 뱀파이어들까지 불렀으니 쉽게 갈 것 같았는데."
"저도 사격으로 끝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주 노련하시군요."
기습적인 총격을 이런 시대에서 염두에 두는 놈이 있다면 그건 고수가 아니라 멍청이다.
정말로 모든 경우의 수를 상정한다면 단 한 발짝도 뗄 수 없다.
"내가 좀 그렇게 많이 죽어봤거든? 이젠 죽으면 다음 회차도 없으니 어쩌겠나."
대화를 하면서도 서로 숨을 몰아쉰다.
힘에 크게 투자하지 않은 것은 피차일반이다. 애초에 근접 힘 싸움은 전문이 아니다.
"마법을 얼마나 잘 쓰는지 한번 보지."
말과 동시에 사방에 불꽃이 튄다.
번개는 대인전에서 가장 효과적인 원소다.
눈으로 보고 즉시 간섭하지 않는다면 필중.
하지만 그렇기에 전조가 있다.
마력 감지를 퍼뜨리는 동시에 간섭으로 낙뢰를 지운다.
그 순간 상대의 마력이 확 끓어올랐다.
큰 거를 쓰면 약간이나마 딜레이가 발생한다.
나도 손가락을 튕겼다. 이건 내가 마법을 구현하는 트리거 같은 것이다. 자기암시의 일종.
번개와 불꽃, 그리고 얼음이 피어오른다.
사방에서.
"이런 제기랄."
마법사가 인상을 쓴다.
내가 발현했으나 나 자신의 안전조차 고려하지 않은 공격이다.
마법사도 시야에 닿는 모든 마법은 발현 이전에 지웠지만 그럼에도 발을 얼리는 서리는 남아 있었다.
다시 한번 번개를 구현.
마법사는 최선을 다해 번개를 지우려고 했지만 나도 저항했다.
이렇게 마주 보며 진행되는 마법 구현 싸움은 결국 누가 더 효과적인 마력의 흐름을 일구어내느냐다.
내가 일단 한번 마력의 흐름을 [낙뢰] 마법으로 구현하고 있다면 조금쯤 틀어져도 관성에 의해 발현한다.
마법사의 마력이 끊임없이 뻗어 나와 내 마력이 [낙뢰]의 형태로 완성되지 못하게 두드린다.
구체적인 원리는 전혀 다르지만 모양새만 보면 영화 속 해커들의 싸움과도 비슷하다.
다만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지키는 쪽이 더 유리하다.
마법사는 간섭을 포기하고 방어막을 만들었다.
번개가 내리쳤다.
마법이 구현되기 전에 간섭하는 것은 방어가 유리하지만, 구현된 마법을 방어 마법으로 막는 것은 오히려 손해다.
원소 마법은 자연스레 주변의 마력까지 함께 융화되어 투자한 마력의 몇 배나 되는 위력을 낸다.
방어막은 온전히 자신의 마력이다.
큰 손해를 본 요정 마법사가 무릎을 꿇었다.
급조된 방어막은 제대로 전격을 흘려내지 못했다.
로브 자락이 타고, 몸이 감전으로 떨린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입으로 짜내듯이 말한다.
"좋아. 항복. 과연 카크리쉬를 왕국 이전에 제압할 만한 솜씨로군. 전투 마법으로 누구에게 져본 건 되게 오랜만인데."
"예?"
"항복하겠다고 했네. 앞으로는 협조할 테니 목숨은 좀 살려주게나."
"그게 아니라 카크리쉬가 뭐요?"
요정 마법사의 얼굴에도 의문이 드리운다.
"어, 북쪽 바위 난쟁이 마을 근처에서 [미티어 스웜]을 갈긴 게 자네 아닌가?"
"그건 제가 맞습니다."
"카크리쉬를 죽인 건?"
"저는 선배님이라고 생각했는데?"
짧은 정적이 흘렀고 둘 모두 인상을 한껏 찌푸렸다.
목소리가 겹쳤다.
""그럼 누구지?""
그리고 동시에 성루에서 적습을 알리는 종이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이건 굉장히 고레벨인데?"
사냥꾼이 중얼거렸다. 눈에 금빛이 살짝 번뜩인다.
시력 강화 액티브 스킬 [호크 아이]의 효과다.
마법사 역할을 하고 있는 리더가 없는 이 상황에서 은신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사냥꾼뿐이다.
"잠깐만요."
소녀가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더니 [대시]를 섞은 도약으로 무언가를 찔렀다.
[은신]이 흩어지는 이펙트가 나면서 고블린 하나가 나타나 쓰러진다.
소녀의 대거에는 피가 흥건히 묻어 있다.
"아니, 어떻게?"
"제가 요인 경호는 해본 적이 있어서. 헤헤."
성인이 된다면 반대로 인간을 암살하는 일도 맡게 된다.
소녀는 그래서 바깥에서는 계속 아이로 남아 있고 싶었다.
"그게 그렇게 설명이 되는…… 아니, 따지는 내가 바보지."
불합리한 존재라면 고정 네임드 유배자들이 있다. 그들처럼 생각하면 어렵진 않으리라.
"그런데 이거 우리 어디까지 활약해야 해요?"
리더가 없으니 사냥꾼이 대행이다.
사냥꾼은 고심 끝에 여신님께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응답이 없으셨다.
사냥꾼은 두어 번을 더 불렀다.
「앗, 아아. 미안하다. 저쪽이 너무 흥미진진해서.」
소녀가 펄쩍 뛰어올랐다.
"무슨 일 있어요?"
「너희 ‘아저씨’가 이겼으니 진정해라. 큰일은 아니고 그냥 재밌는 일이다.」
여신이 굳이 신언으로 헛기침을 내려보내며 무안한 티를 낸다.
「크흠, 흠, 물어보니 너희 리더가 최선을 다해 활약하라는군. 아예 눈에 확 띄어서 추가 수당을 받을 정도로.」
"돈은 중요합니다."
막내가 엄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사냥꾼은 헛웃음을 지으며 활시위를 당겼다. 총은 아무리 그래도 아깝다.
"날뛰면 된다는 거죠?"
「그래, 어차피 전쟁의 신과는 이미 전쟁 중인데 뭐 어때. 인간과는 친해야지 않겠니.」
실로 옳은 말이었다.
* * *
고블린들의 습격은 목숨을 도외시하고 계속되었다.
야성 접미의 전쟁신일 경우, 그린스킨 팩션 내의 고블린들은 도구와도 같은 취급을 받는다.
당당하게 정면 승부를 하는 전사가 아니라면 제대로 된 사회의 일원조차 못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고블린은 전사가 되기에는 재능이 없는 종족이다.
황제가 명했고 지휘관이 그 명을 받아 명령한다면, 고블린들은 죽음의 순간까지 묵묵히 적을 노릴 것이다.
함성조차도 허락되지 못한 그린스킨의 부속품들이다.
불길에 몸이 탈 것을 알면서도 달려들어 불사르는 나방이 따로 없다.
아직 먼동이 터오기엔 이른 시각, 무수한 시체가 쌓인 채로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으으."
소녀는 스스로 제 눈을 가렸다.
전투원들이 상주하고 있던 곳은 저항할 수 있었으나 시민들이나 농민들이 지내던 구역은 이야기가 달랐다.
얼마 되지 않던 수비병들은 참혹하게 찢겨 있었다.
방어가 없는 곳에 살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가씨도 참 신기하군요. 그냥 시체는 괜찮으면서 허물어진 시신은……."
"아, 말하지 마요."
광경을 보자면 과연, ‘허물어진’도 제법 고상한 표현이었다.
막내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건, 당장 이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거 같습니다."
"병사들이 아닌 민간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이로군."
전쟁은 언제나 모두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일상을 영위하는 비전투원들은 전장의 병사들만큼이나 중요하다.
병력을 먹이고 입히고 재울 재화는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그린스킨은 똑똑하지는 못할지언정 투쟁에서 이기는 법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
이 성에서 있었던 일은 이제 널리 퍼져 나갈 것이며 수성전이 다시 일어날 때마다 불안과 공포라는 이름으로 회자될 것이다.
특히나 잔혹하게 살해한 것은 그런 심리를 자극하기 위함이 분명하다.
용의주도하게 생존자도 만들어두었다.
영주가 저들을 죽여 입을 막을까?
소용없겠지, 병사와 용병들 사이의 소문으로 타고 퍼질 테니.
"휴, 겨우 찾았군. 다들 무사해?"
리더의 목소리였다.
소녀가 달려가서 안기…….
아니, 태클을 걸었다.
거의 벽에 메다꽂힌 리더가 경련을 일으킨다.
사냥꾼의 귓가에 소녀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속삭이는 거치고는 화가 나서 많이 커다란 소리가 들린다.
"싸울 거면 나 데려가요. 다음에도 이런 식이면 진짜 부러뜨릴 거예요?"
"악, 이미 부러졌어 부러졌다고!"
옆에 서 있던 마법사가 웃는다. 구면이다. 나이트 크로우의 문양을 숨기지 않고 있다.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모양인지 머리카락도 타고 너덜너덜하다.
사냥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보나 마나 어디 별동대라도 들어오는 걸 눈치채고 막으셨겠지.
그렇다 해도 소녀의 말에는 동의한다.
리더는 좀 더 파티원에 의지할 필요가 있다. 너무나도 많은 것을 혼자 떠맡으려고 한다.
"거기 자네들이 유배자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친 표정의 문관과 횃불을 든 병사였다.
문관임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깃펜과 양피지, 그리고 체격 덕분이지 갑옷에 무기를 차고 있는 것은 똑같다.
곳곳에 피가 튀고 등에 멘 창대에도 피가 흐르고 있다.
내성에서도 격렬한 전투의 밤이었던 모양이다.
으와아아아아아아아아!
전쟁의 신이시여어어어어!
마침 성벽 너머에서 함성이 들려온다.
전투 이전의 의식이다. 상대에게 자신을 알리고 당당하게 승부하고자 하는 의식.
문관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먼동이 터오는 대로 즉시 그린스킨들이 공격을 시작할 것이다.
"영주님께서 급히! 아주 급히! 부르시오!"
말한다기보단 밀려 나온다는 음색으로 문관이 말한다.
당장에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