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66화
8층 - Lv. 55 제자(1)
전신에 탈력감이 깃든다.
온몸이 나른하여 도저히 더 이상 다른 것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같으면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우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엎어지기로 했다.
몸에 걸린 부하는 나눠가진 덕에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그대로 정령왕을 향해 달리며 발생했던 페널티는 대부분 더 큰 힘이 나타나며 무마되었던 모양이다.
"정말 다행입니다. 지옥의 아가리가 열리고 있었던 참인지라."
마지막까지 계약식을 지켜보고 있었던 그루터기 요정의 말이었다.
그건 좀 많이 오싹한데. 정령왕의 출현으로 닫혀 버렸으니 망정이지 그린스킨보다 더한 재앙을 풀어놓을 뻔했다.
지속되는 [지옥의 아가리]는 끊임없이 악마를 뱉어낸다.
고위 악마이자 플레이어블인 데몬이나 데빌은 거의 나오지 않을 거다.
하지만 악마라는 종족 자체가 터무니없이 강력하다 보니, 졸지에 그린스킨과의 극적인 휴전과 공동전선이 발생했을 수도 있다.
"아니, 그러니까 이런 걸 떠넘겼단 말이지. 어우 죽겠다."
혼돈의 여신이 잘못했어.
아무튼 그렇다.
[자연의 신이 당신에게 감탄합니다.]
얼씨구.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방금 전은 좀 쩔긴 했다.
솔직히 다시 하라고 하면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마지막에 달려 버린 것에는 설계도 뭣도 없었다. 그저 완전한 도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임이라고는 하지만 내 스타일은 아니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더 철저해야 한다.
[자연의 신이 상대의 닦달에 마법의 신 역시 마찬가지로 감탄했음을 전합니다.]
마법의 신이라면 요정 마법사의 눈으로 보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럼 보다 끊겼겠군.
이런 사소한 단서도 중요하다.
자연의 신은 마법의 신과 친분이 있음. 메모.
우리 여신님은 누구랑 안 친하시려나. 뭐 친했다곤 해도 지금은 영향력이 전혀 없는 상태니 절교당했을지도.
일단 파티원들을 찾아서 여신님께 따져야겠다.
지금 내 상황으로 보아하니 강제 개종 같은 경우는 아닌 것 같다.
신앙은 마인드맵에 영향을 준다. 신앙 스킬 같은 것의 출현 여부도 있으나 그냥 이런저런 확률 보정이 달라진다.
그리고 배경 색이 조금 다르다.
자연의 신을 상징하는 녹색의 기운이 배경에서 일렁이고 있지 않다.
여전히 혼돈을 상징하는 얼룩진 보랏빛이 은은하게 마인드맵을 비춘다.
그러면 아마 나를 자연의 신에게 빌려준 모양인데, 중계하는 느낌이려나.
꽤나 변칙적인 방식이다. 무리가 갈 수도 있는 데다가 신도가 적은 여신님은 신격에 타격이 클지도 모른다.
미궁의 신은 죄수다. 신좌는 그 족쇄다.
권능도 제약도, 그리고 신좌에 저항했을 때 발생하는 고통도 모두 신좌에서 나온다.
그것을 버텨내는 것은 많은 것들이 그렇듯 체급인데, 신에게 체급이란 결국 신앙의 크기다.
한숨을 내쉬는데 어떤 그루터기 요정들이 다가왔다.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인데 요정답게 잘빠진 외모다.
복장이나 장비로 보아 그다지 큰 마을은 아니지만 꽤나 오래된 전통을 가진 마을의 대장 정도나 될까 싶다.
그루터기 요정은 종교적 지도자가 세속적인 지도자를 겸하지 않는다.
정착 생활과 유랑민의 차이일까.
"다시 한번 저희 요정들을 위해 힘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뭐?"
구면이라는 듯 친근하게 구는 요정 남자의 태도에 의아함을 띄우자.
"저번에 뵈었을 때는 시간대가 달랐지요. 유배자란 참 어려운 존재군요."
"아……. 잠깐만 뭐라고? 다시 한번 설명해 봐."
[자연의 신이 끅끅대며 웃습니다.]
이런 젠장할.
지금 너무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혼돈의 여신도 알고 있었나?
아니지, 알지 못하도록 미래의 내가 언질을 했나?
그리고 사냥꾼에게는 희소식이겠군.
오 맙소사.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이 정도로 정신없는 확률의 장난에 휘말린 적이 이전에는 없었기에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마음가짐부터 바꿔야 한다.
우리 파티에 행운의 신과 관련된 존재가 있는 이상 내가 알던 확률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배제가 능사가 아니다.
있을 수 없는 확률도 가정할 필요가 있다.
통탄할 실책이다. 미리 알았다면,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의식도 했다면 더 잘 풀어나갈 수 있었을 텐데.
3만 5천 시간을 헛썼군.
후, 나란 병신 새끼.
* * *
제자는 황망하게 쑥대밭이 된 주둔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스승은 과연 옳았다. 그동안 퉁명스러웠던 마음이 절로 공손해질 지경이다.
주술사란 멀리 내다보는 자라고 했던가.
어디까지 내다보셨는가.
그런데 주술에 예언이나 미래를 보는 방법이 있었나?
성직자로서 정점에 도달했던 그녀로서도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죽은 자를 되살릴 수는 있어도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언제나 금기였으며, 방법도 없었다.
"흠, 생각했던 것보단 훨씬 강한데? 어찌 네가 아니었으면 죽을 뻔했구나."
"어떻게 이런 공격이 올 거란 사실을 아셨습니까?"
"나도 들은 것이다."
"……?"
누구에게 들었단 말인가?
스승은 그저 껄껄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하늘에서 난데없이 출현한 무수한 포격, 그래 그것은 포격이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육안으로 관측될 정도로 압축된 공기의 덩어리가 수없이 날아와 폭발했다.
그녀도 다루어본 적이 있어 안다. 인간보다 강인한 그린스킨이라 할지라도 결국 살아 있는 육신이다.
대기를 찢어버리며 터져 나오는 충격파는 공기로 이어져 있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찢어버린다.
근방이라면 산 채로 고기 조각이 되어버리고 조금 떨어져 있어도 내장이 파열되어 죽는다.
무수히 많은 시체가, 아니, 시체였던 것이 생겼다.
거의 10여 초간 지속된 포격은 주둔지 병력의 절반을 갈아버렸다.
말 그대로 갈렸다. 형체가 온전한 시체보다는 온전하지 못한 시체가 더 많다.
어찌 보면 그래서 피해가 적었을 수는 있다. 저런 식의 공격은 피탄자를 확실하게 죽음으로 인도하는 대신 살상 반경이 넓지는 않다.
골고루 흩뿌려진 기압탄은 골고루 뿌려진 만큼 듬성듬성했고 운 좋게 그 사이에 머물렀던 이들은 살아남았다.
트동트는 아니었다. 제자가 이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형체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의 직격이었다.
"여단장님께 가 보자."
"하지만 죄인의 신분이시지 않습니까?"
"교단을 이끌었다더니 아직 어리구나. 이 꼴이 났는데 그런 걸 따지게 생겼느냐. 내 정적도 반은 죽었을 것인데."
"……."
실로 그러했기에 제자는 입을 다물었다.
트동트는 움직이기 전에 흡혈귀가 살아 있는지 확인을 했다. 우리가 박살이 나 햇빛에 화상을 입고 있었다.
천으로 가만히 덮어주고 일으켜 세웠다.
조그마한 아이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퀭한 눈이 멍하니 앞을 본다.
"치료를…… 아니, 소용이 없겠군."
언데드에게 치유를 걸었다가는 도리어 치명적이다.
"다른 살아남은 인간이 없는가."
"근처에 붙잡혀 온 다른 유배자들이 제법 있었습니다만."
대부분은 자결한 후였다.
목숨이 하나가 아닌 것들은 이게 문제다. 도대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가 없다.
자결하지 못하도록 꽁꽁 묶어두었으나 혼란의 와중 어떻게든 목숨을 끊었다.
어설펐기에 아직 살아 있는 남자를 찾아내 치유했다.
"끄으윽. 빌어먹을 오크 녀석."
스승의 명대로 흡혈귀를 데려가 남자의 팔을 내밀었다.
흡혈귀는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다.
"스승님, 이 꼬마는 별로 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살려 데려가야 한다. 그것이 조건이었으니."
"조건은 또 무슨 말씀입니까?"
"그자가 네게 직접 말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보거라. 나는 그때 입을 열기로 했다."
그자? 오크 영웅 카크리쉬가 죽을 때, 그녀는 그 자리에 없었다. 오히려 멀리 있었다고 해야겠다.
유적에서 보았던 유배자, 노련한 그의 스승마저 당혹스럽게 만들고 놀아나게 했던 인간.
제자는 한숨을 내쉬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난 1년은 그녀에게 너무 가혹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흐르는 대로 살아갈 뿐.
꼬마 흡혈귀는 피를 입에 대려 하지 않았다.
분명 굶주릴 텐데도 그렇다. 이 아이도 비슷한가.
그다지 살아가고 싶지도 않고 살아갈 이유도 없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어딘가 연민이 차오르는 것은 어째서일까.
인간이 아니게 되고 나서는 인간이 아닌 것을 보고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그래도 살아야지. 꼬마야."
직접 피를 내어 강제로 입안에 흘려보냈다. 그다지 많이 넘어가지는 않았으나 조금이나마 상태가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그냥 잘 모르겠다.
그녀가 하던 일은 언데드를 구축하는 것이었지 살려내는 일이 아니었다.
죽은 채로 움직이는 시체일 뿐인 것을 살린다는 말도 우습고.
거적때기를 씌운 후, 주섬주섬 등에 업었다. 스승이 앞장섰다. 제자도 따랐다.
어찌하여 우연히 잡혀 온 이 뱀파이어가 중요한지는 모르겠으나 시키니 할 뿐이다.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는 그녀에게 남은 것은 생명으로서 약간의 살고자하는 본능.
그리고 거두어준 늙은 오크에 대한 감사와 공경뿐이다.
어릴 적부터 성녀로서 지내오며 배어든 습관과도 같은 것일지 모른다.
폭풍울음 여단의 여단장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쪽 또한 나이 든 오크다.
늙은 전사는 황망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 * *
그루터기 요정 몇몇에게 아직 하지 않은 일에 대한 감사를 어색하게 받은 후, 파티원들을 찾으러 갔다.
성의 인간들은 처음에는 혼란에 빠져 있었으나 이젠 어느 정도 정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시체를 치울 시간은 없고 다음 공격에 대비하는 모습이다.
수비대장 하나가 다가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유배자지 않습니까?"
내가 했다고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내성의 모습이 어, 조금.
윗부분이 많이 주저앉았군.
저게 왜 박살 났지? 나겠지? 너무 촉박한 시간에 아무거나 마구 락온했는데 확실히 오우거나 와이번이 아닌 것도 섞여 있었던 것 같다.
대충 고도만으로 판단해 찍어댔으니 성의 높은 부분이었다면…….
"자연의 신께서 도우셨습니다. 요정 군대가 도착했음을 보셨지 않습니까?"
"오…… 그건 보았습니다만. 혹시 당신이?"
"아, 제가 자연의 신의 총애를 받고 있어서 말입니다."
"세상에."
[자연의 신이 뻔뻔해서 오히려 좋다고 생각합니다.]
‘거 사실이잖습니까.’
[자연의 신이 과거에나 미래에나 한결같아 좋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이 양반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군.
인상을 찌푸린 채 파티원들을 찾았다. 소녀가 호다닥 달려왔다.
"아까 그거 완전 멋있었어요!"
"내가 한 줄은 아는구나?"
"말고 누가 했겠어요?"
그보다는 사냥꾼이다.
사냥꾼은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여신께 무언가 언질을 들은 모양이군.
"리더, 이번 회차의 마지막에는 시간의 신전이 있는 겁니까?"
"찾던 게 그거지? 맞는 것 같아. 미래의 내가 이것저것 많이 해둔 모양이야."
시간의 신전.
왕국의 문 직전에 극히 낮은 확률로 출현하는 제단.
시간의 신을 섬길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자 그 자체로 대단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인카운터이다.
무려 과거에 지나온 짝수 층에 일시적으로 돌아갈 수 있다.
계단을 한 번 넘어가면 되돌아갈 수 없는 미궁의 특성.
그리고 짝수 층 전체가 하나의 대륙에서 펼쳐지는 연대기와 다름없는 특성상 일종의 치트키다.
놓친 파밍을 다시 할 수도 있으며, 챙기지 못하거나 확정 짓지 못한 과거의 관계를 다시 수립할 수도 있다.
출현율에는 어떠한 보정도 없이 0.1% 고정. 그것도 확률 체크는 왕국의 문에 도달한 순간 계산되는 단 한 번.
왕국에 1천 번 도달하면 한 번 볼 수 있는 희소한 인카운터이다.
사냥꾼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드디어…… 드디어……!"
나는 쓰게 웃으며 옆에 있는 소녀의 손을 붙잡았다.
소녀가 깜짝 놀라 몸을 빼려 했다.
꽉 붙잡고 끌어당긴다.
신도와 몸이 닿아 있으니 여신께서 내게 말하실 수 있으시다.
「해낼 줄 알고 있었느니라.」
‘무게 잡지 마십쇼. 저 화났습니다.’
「뭐, 어쩌라고? 어차피 시간의 신으로 갈아탈 것 아니냐.」
‘시간의 신 좋죠. 하지만 미래의 저는 시간의 신도가 아니었을 겁니다. 자연이시여 그렇지 않습니까?’
[자연의 신이 불만스럽게 긍정합니다.]
여신은 잠깐 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짧았다.
「왜지?」
‘지금 여신님을 부려먹을 계획을 너무 많이 세워놔서 말입니다. 저 아니면 못 사는 신이란 게 얼마나 귀합니까. 최대한 뽑아먹어야죠.’
시간, 심연, 행운 따위의 대신격들은 소통은커녕 메시지조차 보내지 않는다.
인격이 있기는 한가도 의문인 존재들이다.
내 왕국 이후의 계획에 필요한 것은 한때 유배자의 정점에 올랐던 신이다.
‘아시겠습니까? 소멸하는 것도 제 허락이 필요할 겁니다.’
여신은 짧게 웃었다.
「하, 정말 신을 공경할 줄 모르는 신도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