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67화
8층 - Lv. 55 제자(2)
전투는 끝났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자연의 신의 참전은 곧 요정 전체의 참전을 의미한다.
그룹 내 하위 종족별로 다른 신을 섬기는 난쟁이나, 아예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인간들과는 다르다.
지구에서야 신앙의 자유는 당연한 권리였으나 미궁의 대륙에서 신앙의 자유는 그다지 장점이 아니었다.
신이 실존하는 세계에서 종족신이 달리 없다는 것은 종 전체로 본다면 그저 손해일 뿐이다.
한데 힘을 모으더라도 다른 종족에 밀려날지 모르는 주제에 신앙을 비롯하여 온갖 이유로 서로 다툰다.
이렇듯 모든 유배자들이 인간인 것엔 이유가 있다.
인간이 제일 구리기 때문이다.
종족이 아닌 팩션으로서도 말이다.
게임은 원래 제일 구린 데서부터 시작해야 제맛이다.
그러나 현실이 되고 나서는 그냥 기분까지 구려질 뿐이다.
일단 할 수 있을 때, [배신당한 성녀]에 대해 조사해 보자.
인간을 팩션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규모로 조우하는 것은 이번 회차에서 처음이다.
그동안은 전부 인간형이기만 했지 인간은 아니었다.
"규율의 대성녀 메이릴리스 님 말입니까?"
"실종되셨다지. 혹시 뭐 들은 거 없나?"
수비병들과 기사들은 내게 호의적이었다. 유배자에 대한 편견을 싹 날려버릴 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었으니 당연하다.
게다가 새로이 성에 합류한 요정들도 내게 우호적이다.
아니 거의 은인마냥 모시고 있다.
그러니 인간들 역시 나에 대한 태도를 재고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공손해진다.
편리하다. 명성도 입지도 원하는 이상으로 다진 셈이었다.
규율의 신도라고 하는 병사는 조금 고민을 하다가 대답했다.
"여러 가지 흉흉한 소문은 많았습니다. 암살당했다는 소문도 있고……."
"신께서는?"
규율의 신은 일반적으로 메시지도 잘 내리지 않는 과묵한 신이다.
거기에 접미가 금전이면 더하다.
모든 것의 가치판단 기준은 돈이다. 한 푼도 되지 않는 일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을뿐더러 혐오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병사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말하기 싫다기보다는 말해서는 안 된다는 표정.
나는 금화 하나를 슬쩍 찔러주었다.
뭐 대놓고 줘도 상관은 없겠지만, 종교의 자유가 존재하는 땅인 만큼 타 신도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수비병이 뒷돈을 받는 것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사실은 교리를 따를 뿐인데.
규율의 신이다 보니 교리가 아주 엄격하다.
병사는 안심하고 말을 이었다.
"많이 노하셨습니다. 모든 신도에게 신언을 내리실 정도였지요. 신께서 내리는 금전을 대가로 온 교단이 거의 반년을 수색했습니다. 결국 아무 성과도 없었지만요."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조금 다르게 들리는 부분도 있다.
그는 조금 천천히 성녀를 되찾을 생각이었겠지.
이렇게 일이 빠르게 진행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주민들이 어찌 생각하건 신들은 사실 유배자다.
그들은 주민들과 다르게 서버에 귀속되어 있지 않다.
유배자들의 신규 회차가 시작되면, 새로운 튜토리얼 서버, 새로운 대륙이 탄생한다.
당연히 신은 그 이전에도 존재하고 있다.
신은 서버가 생성되는 순간 자신의 행적에 대한 기억을 얻고 새로 생겨난 신도들을 거느리게 된다.
새로운 서버가 탄생하는 순간 만들어지는 역사는 대체로 신좌의 흐름대로, 신 본인의 성향대로 쓰여지며.
유배자인 신은 한 걸음 물러난 곳에서 자신보다 열등한 자들을 내려다보게 된다.
누구보다 쉽게 주민들이 NPC임을 인식하게 되니 시뮬레이션 게임 같아 보이기도 하지.
어찌 되었건 [배신당한 성녀]는 출현한다면 인간의 교단 중 가장 교세가 강한 곳의 성녀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규율의 신이 현재 인간 팩션에서 가장 교세가 강하다는 뜻.
"1년 전이라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오크 주술사로서의 레벨이 높지 않아 보이더라니, 1년이면 상당히 최근에 발생한 일이다.
이미 10년 이상 지난 일인 경우도 있다. 그러면 오크로서의 삶에 적응해버린 후라 골치 아파진다.
1년 정도면 아직 자신이 인간이라 생각하고 있을 때다. 몹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신께서는 그럼 이제는 침묵하고 계신가?"
"네, 그렇습니다. 평소대로입니다."
"그렇군. 도움이 되었네."
금화 한 장을 더 건넸다.
생활에 큰 보탬이 되기도 하겠지만 신앙으로서도 큰 이익을 얻으리라.
규율과 금전의 신이라면 어떤 식으로건 이익을 발생시킨다면 신앙이 쌓인다.
선신 계통은 전부 그렇다. 신격에 따라 정해진 교리를 따름으로써 신의 힘을 빌려 권능을 행사할 자격을 얻는다.
신실할수록 더 강한 권능, 주민들 입장에선 기적을 발현할 수 있다.
이러니 신이 실존하는 세계의 신앙은 지구보다 훨씬 공고할 수밖에 없지.
매번 그런 생각을 한다.
초기 설정으로 갈라져 있는 인간들의 신앙을 모두 하나로 묶을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제정일치 마키아벨리즘이라는 괴이한 사상이 되어버리겠지만 이미 그린스킨과 요정이라는 좋은 예가 있다.
철권통치의 전쟁의 신, 모든 요정의 어머니인 자연의 신.
이런 세계라면 신정독재도 꼭 나쁘지는 않다
애초에 신이라면 그야말로 군주론의 ‘철인’이 아니겠나.
뭐, 그렇다고 한들 정말로 신이 팩션의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신앙이라는 중심축의 존재만으로도 팩션의 힘은 공고해진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기 힘들다.
어차피 인간이 약한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대성녀는 지금 인간 팩션 소속이 아니다.
인간 팩션의 [히어로 유닛]은 원래 다 이 모양이다.
통수 맞고 쫓겨났거나, 어디서 객사 안 하게 돌봐줘야 하거나, 아예 제 한 몸 잘사는 것만이 목표인 소시오패스거나.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대륙에서 어찌저찌 명맥을 유지하니 그것을 인간의 저력이라고 해야 할지 어떨지.
그렇다 보니 요정이 합류한 지금도 오크 제국과의 객관적인 전력 차는 눈앞이 깜깜해질 지경이다.
일개 여단을 상대로도 요정의 최정예가 승산이 없을 정도니 유배자의 개입 없이는 이길 수 없는 전쟁이다.
그래도 어떻게 보면 좋은 일일 수도 있다.
슬슬 뭘 좀 알고 앞서나간 고참들은 왕국에 도달했을 시기다.
왕국의 고참들이 유입될 가능성이 있을까?
요정 마법사에게 물었다.
"몇 층까지 가셨습니까?"
"15층까지 갔지. 거기서 시간이 다했지. 그래서 여기서 다시 만났을 때, 자네가 뻥을 친다고 확신했고."
"22층이 있지도 않은데 거기라고 말했군요."
"그렇지. 그런데 참 자네는 아주 험하게 지내고 있나보군. 10층 이전이지?"
"8층입니다."
요정 마법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 늙은 마법사가 시사하는 바가 아주 좋지 않다.
"그럼 혹시 이번 서버는 16층이 왕국입니까?"
요정 마법사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엄청 싸한 기분이 든다.
왕국 이전 구간은 짧을수록 더럽다.
"3번째 테마가 뭡니까?"
"무엇일 것 같나?"
10층 이전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라면 이곳에 올 수 있는 테마는 절대로 아니다.
그런 테마는 몇 개 없다.
예를 들어 테마 자체가 시간대가 완전히 어긋나 있는 경우라거나.
"우주군요."
"그래도 내 경우에는 통과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네."
요정 마법사가 허허하고 웃는다.
제대로 된 무장 세력과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단지 위험한 야생 생물들 사이를 매우 빠르게 지나쳤을 뿐.
"극단적으로 짧은 튜토리얼이군요. 통과자가 거의 없겠습니다."
"우주는 눌러앉기도 힘드니까. 홀수 층에서도 다른 유배자를 본 적이 없다네."
2번째 테마 설원에서도 우수수 걸러질 것이다. 그다음이 우주라면 대부분은 다음 회차로 넘어갔다.
우주는 정보가 그 무엇보다 중요한 테마다.
고참이 아니라면 가혹하다.
거기에 같은 테마 내 분포 인원이 극단적으로 적다면 PVP는 발생하지 않는다.
요정 마법사가 홀수 층을 별문제 없이 통과한 것을 보면 우주 테마에 도달해 살아남은 이는 극도로 적은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냥 휙휙 지나가기만 했으니 팩션에 대한 정보는 없다네. 그린스킨이 어찌 되었는지도 잘 모르겠군."
"우주는 그런 층이 많은 편이긴 하지요."
환경이 지나치게 극한이니 난이도 자체는 비교적 쉽게 나온다.
경험 많고 노련한 유배자라면 단순히 통과하기는 더 쉬울 수도 있다.
직접적인 전투가 없는 경우에는 위협의 종류만 알고 있어도 피해갈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우리 파티도 그럴 수 있을까?
우주 그린스킨을 보고 싶지는 않은데.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그들의 강력한 신체 능력은 빛이 바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호전성만은 어느 시대에도 위협적인 요소다.
시대가 흐를수록 방어력은 공격력을 따라잡지 못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너도나도 한 방인 상황에서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들은 공포의 대상이다.
"흠, 이게 참. 미래를……. 아 진짜 돌아가시겠군."
고민을 좀 해보자. 진짜로 많은 고민을 해봐야 한다.
시간의 신전은 일 인당 한 번씩만 사용할 수 있으며, 튜토리얼의 끝자락에만 나온다.
효과는 과거의 짝수 층으로 되돌아가는 것.
내가 과연 어떻게 파티원을 배분했을까? 카크리쉬를 죽인 것은 내가 확실하다.
2층의 요정들이 나를 보았다고 했다.
나 자신은 배제하자. 시간의 신이 정한 규칙 때문에 내가 미래의 나와 직접 만나는 일은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녀는 어디로 갔을까?
사냥꾼은? 막내는?
어느 층으로 보내었는가.
그것을 고려해야 한다.
나는 나를 믿는다. 틀림없이 필요한 순간 필요한 곳으로 보내었으리라.
사실 시간의 신전에 도달한 시점에서 정답을 이미 알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긴 하다.
사실 게임 시절 시간의 신전은 아주 단순하게 작동했다.
2층으로 돌아간다면 그저 내가 떠나온 순간의 2층으로 다시 돌아갈 뿐이었다.
동료를 보내는 일 같은 건 할 수 없었고 내 캐릭터 혼자 과거로 떠날 뿐이다.
그곳에서 못다 한 일을 마무리하고 다시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오면 된다.
어렵고 복잡할 것 없는 간단한 기믹이다.
현실이 되고 나서는 좀 더 복잡해졌다.
신전에 대고 기도함에 따라 그 층의 언제 어디로 갈지를 결정할 수 있다.
일단 시간의 신이 정한 규칙에 따라 시간대가 다른 동일인물은 만나서는 안 된다.
그 즉시 시간여행은 끝난다.
시간의 신이 걸어둔 제약으로 설명되는 규칙이었다.
타임 패러독스를 걱정해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시간의 신이 그런 것을 좋아해서인지는 모르겠다.
혹은 뭐 직접 대면하고 수다라도 떨 수 있었다가는 과도하게 편리해서일 수도 있고.
하나하나 따지기에는 어차피 지구에서 시간여행을 해본 것도 아니다.
미궁의 법칙이라고 해버린다면 그러려니 할 수밖에.
우선 지금 이곳은 8층.
여긴 틀림없이 미래의 파티원인 누군가 이미 와 있거나 올 것이다.
그렇지 않을 리가 없다.
와이드 맵이 열렸고 [종족 메인스트림]이 얽혀 있는데 내가 이 층에 아무도 보내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겠는가.
누구일까? 소녀가 가장 유력하긴 한데.
정리하면 현재로써 확정된 것은 내가 몇 층으로 갔냐 뿐이다.
정리를 마친 후, 조금 더 고민하다가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정보가 너무 적다. 미래의 나는 과거의 나에게 정보를 상당히 제한했다.
시간의 신전이라고 반드시 만능이진 않으니 어쩔 수 없나.
좋아, 그냥 나 자신을 믿자. 누구를 보냈더라도 틀림없이 가장 완벽한 순간에 나타날 것이다.
설계한 것이 나잖아?
요정 마법사가 말했다.
"생각은 다 했나?"
"음? 아직 계셨습니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다음 전투를 준비해야 하는데."
요정 마법사가 폭풍울음 여단의 주둔지 방향을 가리킨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시간 벌기 정도는 충분할 포격이었다. 정령왕 치고는 약하다곤 하지만 먼 미래에도 전략 병기 취급을 받는 존재다.
"주둔지 자체를 반파시켰습니다. [천리안] 없습니까? 저쪽도 당장 오늘 공격해 올 여력은 없을 겁니다."
"반파? 그 정령왕으로? 아주 잠깐 소환되었던 것 아닌가?"
"5초면 떡을 치죠."
"흠. 난 정령사를 해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군."
"일편단심 정통 마법사만 고집하신 겁니까?"
"내가 마법을 좀 좋아하거든. 로브와 고깔모자, 그리고 수염을 쓰다듬으면 꽤 그럴싸했다고."
난 피식하고 말았다.
"요정은 수염이 안 날 텐데요."
"젊음보다 중한 게 어디 있겠나. 자네도 늙어보면 알 걸세."
"그럴 수 있다면 좋겠군요."
"좋게 생각하자고. 자네는 죽을 때마다 회춘하지 않나."
"그걸 그렇게 받아들이는 발상이 너무 놀랍습니다."
요정 마법사가 끌끌끌 하고 노친네처럼 웃는다.
여전히 얼굴과는 매치되지 않는 행동거지다.
* * *
수비병 중에는 당연히 마법사도 있다. 비교적 희소하고 중요하기에 지휘관들도 잘 건드리지 않을 정도로 자율적이다.
그들의 합동 관측을 통해 내 공격이 주둔지에 도달했음을, 그리고 전술적으로는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혔음이 확인되었다.
다만 상대는 그린스킨이다.
사기 저하 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
전쟁의 신 역시 잔뜩 화가 나 있을 터, 추가적인 공격을 배제할 수 없다.
"폭풍울음 여단의 생존 병력은 대부분 트롤과 오크들입니다."
"오우거는 크기도 맷집도 어중간했나 보군."
요정 사제들 역시 관측한 사실을 알려 온다.
대표 격인 듯한 잎사귀 요정의 사제가 숲을 지나는 병력의 규모를 전파했다.
"대규모의 트롤과 오우거 보병들이 진군하고 있습니다. 방향으로 보아 괴멸한 폭풍울음 여단과 합류하려는 모양입니다."
수비대장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오크나 고블린은 없습니까?"
"주술사도 보이지 않습니다."
무언가 아는 듯한 병사들의 탄식이 흘러나온다.
"깃발은 식별하셨습니까?"
"불을 두른 망치가 보입니다."
그린스킨을 상대할 때 좋은 점이라면, 그들이 자신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사기 저하를 불러오기도 한다.
"용암망치 충격대대로군."
침묵이 감돈다. 회의에 참석했으나 멀뚱멀뚱 보고만 있는 내가 보아도 확연하게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오크 제국은 제국이다.
그 전력은 끝이 없다.
그린스킨의 충격대대.
현대식으로 풀이하자면 전차부대 같은 것이다.
소수로 운용되는 트롤 기병 등이 아니다. 부대원 전체가 트롤과 오우거다.
"기사 수준의 장비로 중무장하고 있습니다……."
"확실하군."
그 거대한 몸뚱이에 맞게 만들어 입히는 것만으로도 보통 일이 아닌 철제 갑옷을 두른 트롤과 오우거.
그리고 대충 어디서 뽑아 다듬은 나무 몽둥이가 아닌, 정련된 강철의 해머.
맨몸을 드러내는 것이 자랑임에도 기꺼이 갑옷으로 몸을 가리는 것을 감수할 정도로 훈련된 전쟁 병기들.
이것은 그야말로 중세 판타지의 전차들이다.
이 부대에 주술사가 없는 것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