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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68화 (68/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68화

8층 - Lv. 55 제자(3)

우주 걱정은 나중에 하자. 넘겨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천만다행인 일이 있었다.

당장에라도 성문을 향해 진격할 것 같았던 용암망치 충격대는 개판이 난 폭풍울음 여단과 합류했다.

근처에는 풀 한 포기 없기에 자연의 신의 권능도 미치지 못한다.

마법사와 요정 몇몇이 근방까지 관측을 하러 갔다.

합류한 두 군대는 주둔지를 다시 세우는 것부터 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살아남은 주술사들 역시 이쪽을 탐지하고 있을 것이다.

포격의 정체는 알려졌을 터이며, 이런 식의 공격이 다시 또 이루어지기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할 확률이 높다.

그 생각을 멋지게 배반해 주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사실이다.

잎사귀 요정 정령사 대다수는 마력 탈진 상태로 숲 귀퉁이에 널브러져 있다.

마력은 빠르게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탈진이 온 후 전력이 될 정도로 회복하려면 적어도 하루, 만전에는 일주일은 필요하다.

완전 방전이 아니었다면 좀 더 회복이 빠르다.

하지만 바닥까지 비워버렸다면 체내에 마나의 흐름이 다시 자리 잡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탈진까지는 가지 않았다.

최대한 남의 마력만 뽑아다 쓰고 내 마력은 온존한 덕이다. 이건 주술을 해봐야만 알 수 있는 요령이라 요정들은 못 한다.

그럼에도 지금 상태로 대마법을 일으키는 것은 오늘 안에는 불가능하다.

이렇듯 마법 클래스는 그다지 만능의 포대가 아니다. 급탄만 되면 장탄이 자유로운 현대의 포병이 더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아직 마법의 존재 덕에 화포가 발전하지 않았다. 난쟁이들 몇몇이 취미로 만들어 쓰는 정도다.

여력이 남은 사제급 잎사귀 요정들이 망가진 숲 주변을 돌아다니며 부상자의 체온 유지를 위해 불의 정령을 놓아두고 있었다.

그새 해가 꽤나 높이 떠올랐으나 여전히 날씨는 추웠다.

사냥꾼이 말했다.

"살을 에는 새벽이 끝났군요."

"이젠 아침인가?"

"밥을 먹어야겠군요. 그리고 요정들을 도우러 가야겠습니다."

"도와? 무엇을?"

"그루터기 요정들은 저 숲에서 지낼 테니 숲을 치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냥꾼은 놀랍도록 요정들의 사고방식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인간이 만든 건물에서 지낼 녀석들이 아니다.

잎사귀 요정들도 몇몇은 자신들의 천막을 치고 있다.

부상자들을 우선 안으로 옮긴다. 별것 아닌 것같아 보이지만 게으른 샐러맨더 한 마리 정도 불러두면 아주 따뜻해진다.

"그런데, 우리 밥 어디서 얻어먹어야 하나. 영주님한테 가면 한 끼 대접받을 수 있으려나?"

"영주는 이미 탈출했다고 합니다."

"탈출? 왜지?"

"이 성이 함락될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도망칠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원군을 이끌고 돌아올 생각이었나."

슬쩍 나타난 요정 마법사가 끼어들었다.

"그런 시스템이 되어 있는 걸로 아네. 거기에 좋은 소식이 있다면 경께서도 달려오시겠지."

"그러고 보면 그분은 무슨 일로 떠나신 겁니까?"

짧은 전투가 있기 전, 막연하게 가문으로 돌아갔다고만 들었다. 버렸다던 사람이 그랬으면 보통 일은 아니겠거니 했는데.

"더스번 티그리스 경, 잘 나가는 공작가의 망나니시지."

"오, 후계자인데 때려치우고 나온 고귀한 분이라도 되십니까?"

"바로 그거네. 그러니 내가 붙었지."

"과연."

왕자쯤 되나 했는데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신분으로 나이트 크로우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건 참.

망나니가 맞군.

그래도 사람 됨됨이는 훌륭했다. 귀족이라는 옷이 몸에 맞지 않는 것이었겠지.

비주얼을 다시 떠올려도 외눈에다가 어깨까지 내려와 흔들리는 지저분한 장발.

참 막산다는 느낌이 드는 소드 마스터다.

"인간 팩션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합니까?"

"늘 그렇듯이 말이지."

"하여간 어느 회차에나 똑같군요."

"하나 된 인류. 이것도 참 도시 전설 같은 말 아니겠나."

실제로 나도 본 적이 없다. 종족 색이 강한 다른 종족들과는 달리 인간은 개인 성향이 너무나도 튄다.

도무지 화합하기는 힘든 군상들이다.

"경께서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셔야겠군요."

"그래도 나라가 여러 개는 아니니 참 다행이지."

"서너 개의 왕국이 난립하며 전쟁통에도 저긴 남의 나라입네 하는 꼴을 보느니, 그냥 인간 팩션이랑은 엮이지도 않습니다."

"나도 그랬네."

이번에는 적일 뿐이지 사실 그린스킨도 친해지면 꽤 좋은 녀석들이다. 멍청해서 답답하긴 한데, 멍청하니까 겉과 속이 다르진 않다.

요정조차도 음습한 녀석들은 음습한데, 순박할 정도로 강함만을 숭상하는 오크나 오우거들은 가끔 귀엽기도 할 정도다.

* * *

트롤과 오우거는 멍청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지만 꼭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늙은 생명체들은 대부분 교활하고 영리하다.

물론 트롤과 오우거의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그 비율은 아주 낮다.

어찌 되었건 관측된 용암망치 충격대의 대대장은 아주 늙어빠진 트롤이었다.

늙은 트롤은 보통 교활하고 영리할 뿐만 아니라 사악한 기질도 가진다.

세상에 자기보다 튼튼하고 강한 게 없어 보일 테니 그럴 법도 하다.

늙었다고 해서 힘이 덜 위협적이란 뜻은 아니다.

애초에 젊은것들을 격투로 제압하지 못하면 지휘관을 할 수 없다.

저대로 내버려 둔다면 후에 [히어로 유닛] 같은 것으로 등장할 수도 있는 수준의 용맹한 트롤이다.

단순히 지금 적이니까가 문제가 아니라 다시 마주치게 될 경우도 생각해야 한다.

원한을 남기지 않아야 하는 것은 유배자가 아니라 주민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상대를 어느 시간대에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유배자 입장에서는 이번에 놓친 잠재력 있는 적이, 이후에 정말로 강대한 보스가 되어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당하면 참 골치 아픈 일이다.

여력이 있는 정령사들은 관측을 계속했다.

주술사들은 하늘을 날아 관측하는 정령들을 알고는 있었겠지만 내버려 두었다.

그린스킨은 자신을 숨기지 않는다. 전투에서 불리해질지라도 그것을 이겨내는 것이 그린스킨이다.

내가 오크로서 군단장의 자리까지 올랐던 회차에서는 그래서 고블린을 더 잘 써먹었다.

고블린들은 전쟁의 신을 섬기지만,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적이면 피곤하고 아군이면 든든하다.

애초에 내가 정정당당함과는 거리가 있는 스타일을 지향하기도 하다.

다시 미래의 내가 안배했을 것까지 생각해 보자.

머리에 김이 날 정도로 생각한 끝에 당장의 방향성은 정했다.

우선 맵의 크기가 어느 정도나 될지 궁금했기에 지도를 좀 보자고 했다.

이 시대의 지도는 그 자체로 군사기밀이기에 난색을 표했으나, 영주 다음으로 지위가 있는 기사들이 문관들에게 몰려가 인상을 썼다.

권력의 단맛이여.

구두로만 듣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이번 회차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지도를 보게 되었다.

맵의 위쪽 끝은 가보아서 알고 있다.

이미 6층에서 한 번 왔던 지역임에도 며칠을 머무르며 수색한 이유다.

와이드 맵이라는 건 이름처럼 대충 넓기만 하면 붙는 수식이다.

작은 맵으로는 서사를 감당하기 힘든 수준인 [종족 메인 스트림] 같은 것의 중요 분기점이기 때문에 나타난다.

맵의 크기도 당연히 제멋대로다. 북부의 끝은 이미 확인하고 왔다.

설원 테마가 무색하게도 그다지 춥지 않은 지역까지 포괄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린스킨 요새가 아주 가깝군요."

정말로 그랬다.

반지 버리러 가는 영화에서 왕국의 수도와 마왕성이 참 가까워 보이는 영화적 허용이 있었는데, 전략적으로는 거의 그 수준이다.

말을 타고 쉬지 않고 달린다면 삼 일이 채 걸리지 않을 듯하다.

기사 하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태도에서 나에 대한 경의가 느껴진다.

"최전선 중에서도 최전선입니다."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기사는 마력에도 민감해진다.

반드시 소드 마스터의 트리를 타는 게 아니더라도 그렇다.

언뜻 전혀 마법과 무관해 보이는 광전사조차도 마력을 안 쓰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병사보다는 기사들이 정령왕의 출현과 공격에 경악했고, 걸맞은 대우를 해주는 경향이 있다.

문관들은 대충 힘센 유배자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최근 이 근방을 들쑤시던 그린스킨들의 거점도 이곳입니다. 요새 이외에도 은퇴한 노병들이나 새끼를 치는 것들이 주변에 마을을 만들어 살고 있습니다."

물론 나 역시 공손하게 대한다. 그린스킨의 경전차가 트롤 기병이요, 중전차가 저기 저 멀리 저 중무장 오우거 트롤들이라면 인간의 전차는 기사다.

이래 봬도 정말 강하신 분들이다. 지금의 나로서도 삼 대 일 정도가 한계다. 그 이상이면 못 버틴다.

서로의 강함이 존중을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사회다.

"이렇게 국경을 맞대고 지금까진 용케 별일이 없었네요."

기사가 자부심이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사들만큼은 최강을 자부하는 이들만 부임할 수 있는 곳입니다."

국방의 최전선 뭐 그런 건가 보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계획이 하나 있습니다. 다른 지휘관분들을 좀 불러주시겠습니까?"

시간이 썩 넉넉하다곤 못한다. 관측대로라면 지금 용암망치 대대도 점심 식사 중이었다.

그린스킨이 밥을 먹고 배가 부르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전쟁이다.

* * *

지도를 보고 내린 결론은 와이드 맵 치고도 정말 더럽게 넓다는 것이었다.

지금 접점을 만들어둔 세력이 너무 많아서 그런 모양이었다.

왕국 이후에도 우리 파티는 꾸준히 와이드 맵이 나오거나 그에 준하는 중요 지점에 드랍될 모양이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넓냐 하면, 요새를 지나 한참을 더 가면 나타나는 그린스킨 도시라고 불러도 될 정도인 거주 지역까지 맵 안에 들어온다.

대부분은 평야이며 내려갈수록 추워지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북부다.

오크 제국의 귀퉁이 변방에 불과한 땅.

인간들의 입지는 북부의 귀찮은 이종족 정도가 아닐까 싶다.

게임적 설정으로도 왕국으로서 등장하는 팩션과 제국으로서 등장하는 팩션의 덩치 차이는 현격하다.

"이러면 저 끝에 계단이 있겠군요."

"그렇지. 저 도시까지 가야 할 거야."

와이드 맵의 법칙.

계단은 가장 뭣 같고 위험한 곳에 존재한다.

전쟁의 신과 시비를 턴 시점에서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정말 빠르다.

11층부터는 우주라고 했지? 아주 큰일이군. 우주로 진출한 그린스킨들에게 내가 어떻게 구전되고 있으려나.

사냥꾼이 담담한 시선으로 나를 본다.

"왜?"

"저라면 잠입하려 하겠습니다만, 리더라면 아마."

"아니, 나도 잠입할 거야. 도시를 어떻게 밀어. 내가 지금 여기 지휘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놀라워하는 반응이 반대편에서 들려온다.

"아니에요?"

"아닙니까?"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막내도 눈만 껌뻑껌뻑한다.

"야, 나도 사람이야 사람."

하지만 조만간 그렇게 되긴 할 거다.

그린 스킨을 다 밀어야 한다. 자연의 신은 내게 터무니없는 것을 요구했다.

[자연의 신이 이 대륙에 다시 요정의 나라가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제국이라 말 안 해서 어찌나 다행인지. 저걸 왜 나한테 바라냐고 따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기에는 도움 받은 게 너무 컸고, 앞으로 받을 도움도 크다.

그린스킨을 어차피 밀어버릴 거라면 겸사겸사 해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자연의 신이 미소 짓습니다.]

이 양반은 성별이 뭘까? 우리 여신님이야 까고 들어와서 알지만 보통은 신의 신상을 그렇게 쉽게 알 수는 없다.

전쟁의 신이야 누가 봐도 트롤이니 다들 알겠지만.

파티원들과 수다를 떨고 있자 흩어져 병사들을 추스르던 지휘관들이 모두 모였다.

내가 회의실로 들어서자 시선이 집중된다.

기사들, 병사들, 요정들, 그리고 요정 마법사와 나이트 크로우 대원들.

명목상으로는 문관이 영주 대리로 소집한 회의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듯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뭔가 묘책을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유배자라고.

"자연의 신께서도 말하셨습니다. 그린스킨들과의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선량한 그루터기 요정들이 미소 짓는다. 전쟁도 웃으면서 하는 대단한 녀석들.

잎사귀 요정들은 그저 머리를 좀 긁적인다. 귀가 쫑긋거리는 것을 보니 나름대로 신난 모양이다.

어찌 이리 다들 호전적인지.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데.

"영지 마법사님들의 통신을 통해 현재 영주님이 이끈 원군이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일개 유배자에게 기밀을 유출한 셈이니 문관 하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영지의 마법사 병대장이 실실 웃으면서 귓가에 뭐라 속삭이자 인상이 펴졌다.

"함락될 것이라 상정하고 이곳을 무리하게 지키지 마시고 최대한 지연전을 부탁드립니다."

"지연전이라니. 애초에 수성전 아닙니까?"

수비대장 하나가 손을 들며 발언했다.

얼굴이 낯익다 했더니 동문의 부대장이다. 그 띠꺼운 수비대장은 전사했나?

"여기서 말하는 지연전은 성을 버릴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판타지 중세의 성벽은 마법의 도움을 받아 훨씬 더 높고 두껍게 축조된다.

그러니 트롤 기병 정도라면 육탄 돌격으로 뚫기 힘들다.

애초에 대부분의 트롤과 오우거들은 무기랍시고 쓰는 게 어디서 뽑아온 나무다. 피륙에는 효과적인 둔기겠으나 성벽에는 아니다.

반명 충격대대는 중무장한 괴물들의 부대다. 모두 모여 망치로 벽과 성문을 두들기기 시작하면 결국 무너지리라.

정령왕을 사용할 수 없는 지금, 이 성을 수비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내가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나는 버리고 도망갈 생각이었다.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사실 밖에서 이미 시민들과 농민들을 대피시키는 것은 이미 보았다.

용병들도 불안에 떨고 있다. 그들에게는 특별히 사명감이나 직업의식이 없을 거니까.

일반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다.

성을 당장 지킬 방법이 없다. 우선은 내어주고 나중에 탈환해야 한다.

다들 그 사실을 알고 있었겠으나 무언가 다른 방법이 있었으면 했던 거겠지.

거기서 말을 끝낼 거면 이렇게 불러 모으지는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끌어주신다면 저희 파티가 요새를 함락시키겠습니다. 오늘 하루만 버텨 주시죠."

모두의 눈이 커진다.

어차피 도박을 시작했으면 끝까지 가야 하지 않겠나.

미래의 나를 믿고 배팅한다.

이 상황을 이겨냈다면 뭔가 지원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녀도 트동트도 분명히 이 맵 어딘가에 있다.

애초에 둘 다 폭풍울음 여단 소속이었지?

아 몰라. 묻고 더블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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