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69화
8층 - Lv. 55 제자(4)
로그라이크 게임은 진행하다 보면 원하건 원치 않건 운에 모든 것을 맡기고 던져야 할 때가 있다.
이것은 불가항력이다.
운칠기삼. 어쨌든 운이 7할이나 되기는 하니까.
물론 아무 근거 없이 배팅을 하는 것은 등신 짓거리다. 그 근거가 운이 아닌 3할이다.
나는 아직 이번 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하지만 미래의 내가 시간의 신전을 통해 준비했을 어떤 지원이 있다.
사실 이건 아주 든든한 근거로 못해도 5할 이상은 된다.
이 미궁에서 나 이외에 또 믿음직한 동료를 고르라고 한다면 유배자의 정점에 서본 신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신들보다 나 자신을 더 믿을 수 있다.
나보다 뛰어난 유배자를 본 적이 없다.
적어도 지금까지 97년을 보내오면서는 내가 최고였다.
"아저씨가 그렇게 말하니까 또 묘하게 신뢰가 가기도 하고……. 그런데 그 시간의 신전이란 거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면 안 돼요?"
소녀가 혼자 웅얼거리다가 묻는다.
"너 은근히 게임은 많이 해보지 않았냐? 어려워?"
"시간 여행하는 게임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냐."
시간여행의 개념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려울 수도 있다.
의외로 막내는 쉽게 알아들었고, 사냥꾼 또한 목표가 시간의 신전이었던 만큼 알고 있다.
소녀는 혼자서 바닥에 뭔가를 그리며 끙끙 앓더니 머리 위로 수증기를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진짜 그랬다는 건 아니고 표정이 그만큼 굉장했다는 뜻이다.
눈을 뭉쳐서 소녀의 이마에 대어주었다. 사르르 녹는다.
"으악 차가워! 뭐예요!"
"뜨겁군."
나도 바닥에 그림을 그려보자.
"1인당 한 번씩 기도를 바치면 시간의 신전을 쓸 수 있단 말이야. 그건 신도가 되지 않아도 사용할 수 있어."
이제 내가 막대기를 하나 주워 와서 바닥에 그림을 그린다.
소녀가 흥미진진하게 바닥에 그려지는 그림을 보고 있다.
선을 주욱 긋는다.
그리고 파티원들의 얼굴을 선의 한가운데에 그렸다.
"저는 더 예쁘게 그려줘요."
왜냐고 묻기도 귀찮아서 소녀의 얼굴만 지우고 더 공들여서 그렸다.
명암도 살짝 넣는다.
파티원들이 감탄한다.
선에 눈금을 만든다. 그리고 숫자를 기입한다. 현재 우리 파티의 위치는 8층.
그리고 16층에 동그라미를 치고 [시간의 신전]을 쓴다.
"여기서 과거의 짝수 층으로 돌아가는 거야. 한 명씩."
"안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원한다면 그럴 수는 있지. 하지만 봐봐."
8층의 우리 파티를 16층까지 진행시킨다. 거기서 내 얼굴에 화살표를 뽑아 2층까지 이었다.
"이건 이미 2층 요정 마을에서 온 그루터기 요정들이 관측한 사실이야."
"아저씨는 2층으로 간 거군요. 하지만 우리는 못 봤던 거 같은데."
사냥꾼이 대답했다.
"아가씨, 과거로 이동한 상태에서 과거의 자신에게 관측당하면 시간의 신이 권능을 거둡니다."
"어, 신전으로 강제로 돌아간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피해 다니니까 안 보이는 거야. 그리고 2층을 빼면 지금까지 미래에서 누가 온 적은 없다고 봐야 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응, 고생은 했지만 어쨌든 우리 선에서 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잖아."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군요. 확실히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게 맞나도 싶었고."
이게 ‘맞냐’ ‘아니냐’로 따지자면 확실히 ‘아니’긴 하다. 원래라면 이럴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카크리쉬는 그 당시 자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냐 하면 확실하게 아니다.
어거지로 잡을 방법은 있었지만 리스크가 지나칠 정도였다. 그러니 편법을 통해 넘어갔다.
아마 미래의 내가 되돌아간 것도 그래서겠지. 내가 과거로 돌아가 카크리쉬를 죽임으로써 8층에서 여기까지 사태가 진전되었다.
"그렇다면 8층에도 누군가가 와 있다. 왜냐하면 2층의 여파로 8층도 개판이 나버렸으니까. 내가 그걸 고려하지 않을 리가 없어."
엄밀히 따지면 6층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6층은 자력으로 커버쳤다고 생각한다. 외부조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저씨는 지금 이 8층 어딘가에 미래의 우리 중 하나가 이미 도착해 있다고 생각하는 거군요."
"그래. 정확하게 이해했어. 아마 하나뿐일 거야. 11층부터 우주라고 하니까 다른 파티원들은 그쪽에 투자했겠지."
소녀가 눈을 감고 으으음 하며 신음한다. 소녀의 자그마한 머리가 맹렬히 회전하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알겠다. 아저씨는 뭔가 방법이 있는 게 아니라, 미래의 누군가가 방법을 가져올 거라 생각한 거죠?"
"똑똑한 아이는 싫어하지 않아."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기쁜 듯 비벼온다. 잎사귀 요정들과 어울리더니 고양이가 된 것 같다.
* * *
물론 그렇다고 그것에만 완전히 의지하는 것은 아니다.
미궁의 시간여행은 확정적이지 않다.
처음으로 시간의 신전을 만났던 회차가 생각난다.
정확히는 시간의 신전까지 도달하지는 못했다. 왕국의 입구에 신전이 스폰되지 않았다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을 겪었을 뿐이지.
미래의 나는 철저하게 당시의 나 자신을 서포트했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멍청했다.
어떻게 멍청했냐 하면 그 미래를 결정된 사항이라 여겼다.
그래서 그냥 아무렇게나 대충 돌격했다.
미래의 내 흔적이 발견되기 시작한 이상 내가 무슨 수를 써도 시간의 신전에 도달하는 것 자체는 확정되었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나는 죽었고 그대로 다음 회차로 사출당했다.
여러 가지 세계선으로 분기하고 마지막까지 제대로 해야 그게 확정되는 형식이 아닐까?
미궁의 바깥에서는 시간여행을 해본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있나.
그래도 귀중한 교훈이었기에 두 번째로 시간의 신전을 만났을 때는 잘 써먹었다.
세 번째는 지금이다.
"그러니까 우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여기서 절대 죽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야."
"확정되지 않은 미래라니. 너무 어려운데요."
"[종족 메인스트림]도 비슷하게 작동하니까 알게 되긴 할 거야."
소녀는 다시 머리에서 수증기를 내뿜으려 했고 나는 소녀를 재부팅했다. 열심히 쓰다듬어주니 되었다.
사실 나는 저런 형태의 시간여행이, 이 세계가 게임이며, 내가 주인공이라는 증거 중 하나로 여겼다.
나의 죽음으로 이 세계는 끝난다. 다음 회차가 생성될 뿐이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게 아닐까?
뭐, 어차피 확실한 답은 없다. 중요한 건 이 세계가 어떤 식으로 형성되어 있는지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당면한 과제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린스킨 충격대대를 상대로 지연전을 수행할 방도를 지시했고, 속성으로 정령술 강의도 진행했다.
잎사귀 요정 사제들은 감탄했고 자연의 신은 흐뭇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자연의 신이 당신의 행동에 만족합니다.]
신은 생각 이상으로 신좌에 얽매여 제약당하는 부분이 많다.
그러니 고참 유배자를 신도로 삼아 대륙에 미치는 영향력을 늘리고 싶어 한다.
좀 더 미래에나 연구될 정령의 운용방법 보급 또한 그러하다.
서버, 그러니까 대륙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자연의 신은 알고 있는 내용이다.
자연의 신도는 미래에도 과거에도, 다른 대륙에도, 우주에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면 신의 계시라는 형태로도 미래를 알려주기 힘들 것이다.
이야기 속의 신은 전능하다고 묘사되지만 실제로 그 전능함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아마 그 신들 또한 미궁의 신들처럼 무언가의 죄수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최선을 다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 오우거와 트롤들이 점심을 든든하게 먹고 전쟁에 나섰다는 보고가 왔다.
우리 파티는 성을 빠져나와 크게 우회하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전사한 기병들의 말을 쓸 수 있었다.
* * *
미궁의 힘 스탯은 물리적 신체능력을 끌어올려 준다. 민첩 스탯 역시 어느 정도는 관여한다.
하지만 그 작용은 어딘가 이상할 때도 있다. 반고리관은 강화가 안 되던가?
소녀가 말 멀미를 호소했다. 그래서 고삐를 쥐여줬더니 이젠 말이 날뛴다.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다가 마법으로 재우고 내 등에 꽁꽁 묶어 떨어지지 않게 했다.
사냥꾼은 말을 탈 줄 알았다. 막내는 사냥꾼이 고삐를 쥔 말의 등에 타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성이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빠른 말을 타고 달려도 요새까지는 사흘은 걸린다.
밤낮없이 달렸다. 몸이 축날 정도의 강행군이었지만 말들만큼은 아니었다.
사람을 태운 말이 지치면 풀어주고, 빈 말로 옮겨 탔다. 몇 번을 반복하고 나니 말들도 이젠 지쳤다.
둘째 날, 날이 밝았을 무렵에는 말들이 모두 지쳐 나가떨어졌다. 과로로 급사한 말도 있었다. 피로에 찌든 말고기는 썩 맛있지는 않았다.
그런 강행군 끝에 드디어 오크 제국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그린스킨들은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지 않는다. 영토를 감시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며, 그 끝에 맞이하는 죽음은 신의 곁으로 가는 영광이다.
영토 내에서 눈에 띄지 않게 활동하는 것은 쉬웠다. 기온이 낮은 북부는 그린스킨들이 선호하는 땅이 아니다.
정복하긴 했으되 인구 밀도는 낮다.
주둔하는 군대도 적다. 아래에서 더 많은 병력들이 올라오고 있을지도 모르긴 하지만.
방비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이들은 전쟁이 시작되어도 영토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손해로 여기지도 않는다.
더 길어진 전쟁에 열광할 뿐이다.
근질근질한 느낌은 곳곳에 나타났다. 자기들끼리 싸움을 벌이는 오크들을 멀찍이서 보기도 했다.
여기서부터는 파티원 모두가 분위기가 별로였다. 온 사방이 적이다. 들킨다면 살아남기는 힘들 것이다.
이제는 말도 풀어주는 게 아니라 죽여야 했다. 그린스킨은 말을 고기 이상으로는 쓰지 않는다.
당연히 기르지도 않는다. 갑자기 말들이 돌아다니면 아무리 멍청해도 이상함을 느낀다.
날씨도 매서웠다. 여름이 끝난 시기다. 남쪽으로 향하고 있음에도 따뜻해진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루 종일 맞바람을 맞는 말 위에 있어야 하니 여러모로 몸이 축난다.
셋째 날 새벽, 마침내 멀리 요새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말을 멈춰 세웠다.
춥고 메마른 황야였다. 바위들이 듬성듬성 있고 주변에 마을이랄 것도 없다.
"마법은 편리하지. 그걸로 재운다. 다들 지금부터 딱 세 시간만 자는 거야."
"아저씨는요?"
소녀가 앙칼지게 묻는다. 무리하는 것을 의심받고 있다.
나는 마법진을 설치하며 대답했다.
"위장 걸어두고 잘 거야. 무슨 일이 있기 전에 나랑 사냥꾼은 깰 거니까 둘은 걱정하지 말고."
"음, 좋아요. 그렇다면 뭐."
그렇게 다들 마법으로 재워두고 나는 위장을 빠져나왔다.
미래의 내가 무엇을 해놓았을지는 알 수 없다. 현재의 나는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잘 해두어야 한다.
오랫동안 처박아두고 잊고 있었던 포션병을 꺼낸다.
내부에 있는 액체를 어떤 경우에도 신선하게 유지시키는 아티팩트답게 천사의 눈물은 아직도 그 신성을 잃지 않고 있다.
회복의 샘물이 신성과 마력이 혼재된 수용액이라면 천사의 눈물은 수분이 아닌 신성 그 자체다.
어느 쪽이 더 포션 제조의 촉매로 뛰어나냐고 한다면 당연히 천사의 눈물이다.
6층에서 수확한 투명화 열매 중 하나를 먹었다. 이로운 효능이 있는 열매는 대체로 다 먹어야 효과가 있다.
생긴 건 이상하지만 맛은 나쁘지 않았다.
봐두었던 근처의 고블린 부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료는 챙겨왔다. 요새 잠입을 위한 포션을 만들자.
* * *
제자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폭풍울음 여단은 괴멸판정을 받았다. 용암망치 대대의 대대장은 음습하고 사악한 트롤이었다.
그는 오크 연대장과 지휘권을 나눠가지려고 하지 않았다.
도착한 날 아침부터 그 모양이다. 트롤들은 오크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하위호환, 그런 식으로 여기는 것이 분명하다.
연대장이 빠르게 항복했다. 늙은 오크 전사는 치욕을 무릎 쓰고도 이번 전투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트동트의 의견도 그 결정에 일조했다.
"오랜 친구로서 충고하지. 이 전투에 끼어들지 말게나."
오크 연대장은 화를 낸다기보다는 어이없어했다.
"신께서 보고 계시는데 그런 말을 하나?"
"지금은 다른 곳을 보느라 바쁘실 거라더군."
"그걸 어찌 아는가?"
"다 아는 방법이 있지. 나를 믿게."
늙은 오크 전사는 제자의 기준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순순히 트동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폭풍울음 여단은 패잔병들을 이끌고 철수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남고자 하는 전사들은 남았다. 그들은 전쟁에 참가하여 신의 곁으로 가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이었다.
"제자여, 우리라고 늙으면 순해지지 않는 것은 아니란다. 모든 것은 세월의 풍파 앞에 스러지게 마련이지. 투쟁심도, 증오심도 말이다."
"저는 아직 아니군요."
"복잡하겠지."
스승은 능글맞게 웃었다.
여단장의 재량으로 트동트는 임시 복직했다. 결국은 다시 집행될 형벌이나, 당장 부대를 추스르는 것이 더 급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주술사들은 많이 죽었고, 남은 자들도 토를 달지 못했다.
굳이 따지자면 주술사들은 젊을 적부터 덜 호전적인 자들의 클래스다.
"뱀 같은 자들입니다. 오크답지 못하군요."
"육체적 투쟁에서 한발 물러서는 오크들은 권력으로 투쟁하지. 전장에서 상대의 목을 취하느냐, 막사에 앉아 상대의 목을 취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란다."
"인간과 다를 바 없군요."
"사고하며 살아가는 모든 생물의 공통점 아니겠느냐."
스승은 ‘네 입에서 오크답지 않다는 말이 나오다니 우습구나.’ 하며 껄껄대었다.
그리곤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대신 계속해서 데리고 다니는 꼬마 흡혈귀에게 관심을 가졌다.
꼬마는 자력으로 곧잘 걸을 정도로 회복되었으나 여전히 말은 없었다. 실어증이라도 온 듯한 태도다.
성녀였던 제자로서도 잘 알지 못하는 클랜이었다. 알고 있는 그 어떤 뱀파이어 클랜과도 특징이 일치하지 않는다.
외모는 어딘가 동방의 피가 섞인 듯한 얼굴. 그럼에도 모발은 은발에 홍채는 적색이다.
조금 더 동쪽, 추위가 덜한 초원에는 이런 외모를 가진 인간들이 살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 곳에도 흡혈귀는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다 이런 곳까지 와서 그린스킨에게 사로잡힌 것일까.
참으로도 불쌍…….
잠깐, 이게 무엇이지? 자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인간과 닮았을 뿐, 시체에 불과한 뱀파이어를 보고도 측은함이 드는구나. 나는…… 하. 신이시여.
이제는 들리지 않는 신의 목소리가 그리워졌다.
저는 어디에 기대야 합니까? 신이시여. 당신이 너무나도 그립습니다.
하지만 오크인 채로는 돌아가 복수를 할 방법도, 다시 신께 닿을 방법도 없는 것이다.
* * *
트동트와 성녀는 나에게 원한이 있을까? 지금까지의 상황으로만 보아서는 그럴 확률이 크다.
하지만 미래의 내가 2층으로 돌아갔다.
그게 꼭 카크리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고블린 몇 놈을 급습해서 잡았다.
전쟁과 야성의 신은 고블린을 천대한다.
신체적으로 약해빠져 전쟁이라는 이름의 투쟁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암살자라도 되지 못한 고블린들은 잡역에 종사한다. 노예나 다름없는 처지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늘어도 줄어도, 그리고 신조차도 제대로 된 신도로 여기지 않으니 신언이나 메시지는커녕 제 신도가 맞나 확인도 잘 하지 않는다.
천사의 눈물에 붙잡은 고블린의 피와……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이것저것을 으깨서 넣는다.
요정 마법사나 영지의 다른 마법사들이 가지고 있던 잡다한 재료들도 같이 넣고 마력으로 달군다.
불이 아니라 마력으로 달궈야만 한다. 지난 삼 일간 육체야 어쨌건 마력은 만전의 상태로 회복되었다.
세 시간 정도 다른 그릇에 옮겨 약한 마력으로 달이자.
냄새가 지독하니 어떤 그린스킨이 이상함을 느낄 수도 있다.
땅을 파고 그 안으로 마력을 흘려 달였다.
약이 완성되었을 때쯤, 파티원들이 하나둘 눈을 뜨기 시작했다.
소녀가 도끼눈이 되어 째려보았다.
"아저씨, 안 잔 거 아니죠? 그건 뭐에요?"
의심과 호기심 사이 어딘가에서 갈팡질팡하듯 눈동자가 쉬지 않고 움직인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동그랗게 오므린 입술을 검지로 꾹 눌러 멈춰 세우고 마법을 걸었다.
코와 미각을 마비시키는 마법이다.
"으겍, 뭐한 거예요? 갑자기 느낌이 이상한데."
코를 열심히 킁킁거리는 소녀에게 방금 만들어진 포션을 건넸다.
한 모금만 삼키라는 말에 소녀가 의심스러워하며 마신다.
"뜨거워요."
인상을 잔뜩 찌푸린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몸이 줄어든다. 뽀얀 피부는 흉측한 녹색으로 변하고, 맑은 눈망울도 탁하고 째진 못생긴 모양으로 변해간다.
"케르르륵? 뭐야. 뭐야."
목소리도 갈라지고 째진다.
옷이 너무 커져 흘러내렸다.
못생긴 고블린 하나가 눈앞에 있다.
막내와 사냥꾼이 입을 떡 벌린다.
"[폴리모프 ? 고블린] 포션, 제대로 만들어졌군. 아주 훌륭한 품질인걸?"
망연자실해 주저앉은 소녀를 보고 있던 막내가 슬며시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얘는 무슨 짓인가 하였는데.
「지금 여자애한테 무슨 짓이냐!!!」
여신님께 엄청나게 혼났다.
아니, 그치만, 잠입해야지.
일단 트동트를 만나보고 생각하자. 2층으로 돌아간 미래의 내가 뭔가 해두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때 생각하는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