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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72화 (72/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72화

8층 - Lv. 195 요새 사령관(3)

오래 묵은 악의가 형태를 갖추면 이런 모습이다.

소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 봐야 고블린이 인상 쓰는 모습이지만 확실히 자꾸 보다 보니 좀 고운 고블린인가 싶기도 하다.

가장 먼저 이상함을 느낀 것은 오크들이었다. 체급이 가장 작았기에 독성의 효과가 빨리 돌았다.

그다음은 트롤들이었다. 엄청난 재생력은 마찬가지로 엄청난 신진대사를 담보로 이루어진다.

식량을 누구보다 빠르게 축내는 괴물들은 대량의 독성을 빠르게 섭취했고, 그 독성이 누구보다 빠르게 온몸에 돌았다.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오크들과는 달리 트롤은 결국 이겨낼 수 있겠으나 당장은 그로기에 빠진다.

상대적으로 멀쩡한 것은 오우거들이었다.

트롤처럼 전신이 근육이 아니며, 두꺼운 지방층을 가진 크고 둔한 괴물들은 식사도 천천히 하며 움직임도 굼뜨다.

내가 알려준 사실에 따라 고블린들은 트롤부터 노렸다.

트롤은 지금 끝장내지 못한다면 끊임없이 재생하며 고블린들이 넘지 못할 벽이 된다.

잠깐 동안 독으로 맛이 가 있을 때 최대한 마무리해야 한다.

정확히 자정.

고블린들은 개종하기 시작했다. 당장 방패가 없어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막내가 고블린들의 기도를 여신께 전달하는 중간 다리 역할을 했다.

워낙 숫자가 많으니 막내를 둘러싸고 열댓 마리씩 개종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막내는 밤새도록 혼돈의 선교사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그 역할에 기뻐했다.

고블린들은 재빨랐다.

꼭 폭풍울음 여단이 아니더라도 탈영 암살자는 많다.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가지 못한다면 소모품 취급인 것은 변함이 없다.

많은 나이든 고블린들이 자신의 과거 경력을 밝히며 무기를 들었다.

출세의 사다리를 오르다 견디지 못한 노장들은 의외로 많다.

[은신]의 그림자가 온 사방을 뒤덮는다.

밤은 깊었으나 어둠은 더욱 짙었다.

곳곳에서 억눌린 비명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병력들은 자신의 몸에 이상이 일어났음은 알았으나 그 원인은 알지 못했다.

감히 고블린들이 반기를 들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한 덕분이다.

주술사 몇몇이 전쟁의 신의 권능을 발현했다.

신성의 파문이 요새에 퍼져나가며 신도들을 광분케 했다.

몇몇 고블린들은 아직 개종하지 못했기에 오히려 그 덕을 보았다.

상태이상에 대한 저항력도 상승시켜주는 권능이지만 이미 효력이 발생한 독성이 어떻게 되지는 않는다.

게임적으로 말하면 걸리는 걸 막아주는 거지 이미 걸린 독을 풀어주지는 못한다.

곳곳에서 해롱해롱하고 있는 트롤들의 목이 떨어졌다.

오크들은 훨씬 쉬웠다. 이미 죽어 있거나 죽어가고 있던 오크들은 조잡한 단검에도 유명을 달리했다.

돌을 깎아 만든 그 단검은 평생 잡부로만 살아온 어느 고블린의 덜덜 떨리는 손에 쥐어져 있었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저항하는 것은 오우거들이었다.

상대적으로 독의 영향을 적게 받으며, 본능적인 마법이라도 구사할 수 있을 만큼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들이다.

고블린들도 피해를 입기 시작했다.

몽둥이질 한 번에, 날아드는 불덩이에, 많은 고블린들이 죽음을 맞았다.

그 모든 모습들을 스쳐 지나가며 막내를 제외한 파티원들과 함께 지붕을 타고 달린다.

그 뒤를 가장 정예라 할 수 있는 고블린 암살자들이 따른다.

판자촌이나 다름없지만 요새는 요새다.

거대하고 힘센 괴물들이 쿵쿵거리며 걸어 다니는 가운데 저절로 무너지지는 않을 정도는 된다.

아직 고블린의 짧은 팔다리가 어색한 사냥꾼이 몇 번인가 발을 헛디딜 뻔했다.

고블린이 되어 신체 능력이 저하되어 있음에도 탈 고블린급 완력과 민첩성을 지닌 소녀가 그때마다 사냥꾼을 끌어당겼다.

요새 사령관의 방은 삼엄한 경비가 있지는 않았으나 병력의 밀집지에 있었다.

같이 달리던 암살자들이 흩어졌다.

트롤인 사령관은 가장 힘세고 강인한 동족들을 자신의 곁에 두었다.

그들이 깨어나기 전에 저 암살자들이 제대로 일을 해내는가가 관건일 것이다.

요새 사령관의 방 천장에서 멈춰 섰을 때, 나는 손짓으로 파티원들을 물러나게 했다.

코 고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유난히 코를 크게 곤다는 점은 파악해 두었다.

우리의 기척을 감지한 거대한 트롤이 무기를 휘둘렀다. 빈약한 천장이 통째로 날아간다.

한발 앞서 회피한 덕에 모두 무사히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사냥꾼이 활을 쏘았다. 평소 같은 정확도는 나오지 않는다.

단지 견제의 의미일 뿐.

그럼에도 얼굴을 노리고 날아든 화살은 조금이나마 시선을 분산시킨다.

소녀가 달려들었다. 고블린이 되어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 능력치는 그나마 민첩성이다.

소녀의 속도는 조금 느려졌으나, 고블린의 움직임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나도 빨랐다.

그것은 사령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미처 대응할 생각도 하기 전에 소녀가 사령관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했다.

하지만 변방의 한직이라도 하나의 요새를 맡은 트롤은 전투에 있어서만큼은 노련하다.

눈이나 코는 재생을 기다리는 짧은 시간도 치명적일 수 있는 감각기관이다.

트롤은 자신의 재생력을 믿었기에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머리를 들이밀어 감각기의 손상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녀가 시도한 것은 공격이 아니다.

병이 날아간다. 트롤의 입안으로.

우렁찬 전투의 포효를 내지르려던 입은 상상치도 못한 투척에 미처 다물리지 못했다.

오히려 조금 늦게 다물리는 바람에 병을 씹는 결과가 되었다.

파괴불능의 아티펙트인 병은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투척할 때만큼은 평범한 유리병으로 돌아간다.

유리가 와자작하고 씹히며 끔찍한 맛의 액체가 요새 사령관의 입안으로 흘러든다.

대부분의 마법적인 효과를 지닌 포션들은 구강으로 복용할 수 있으나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효과를 발휘한다.

게임적으로 해석하면 입이란 것이 없거나, 소화기가 제 기능을 하지 않는 종족에게도 효과가 나와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거대한 트롤은 소녀를 힘껏 밀쳐내었다.

날아간 소녀는 조금 불안정했으나 어떻게 낙법을 취하며 굴렀다.

트롤은 다시 함성을 내지르려고 했다. 입안의 유리 조각 정도로는 트롤을 상처 입힐 수 없다.

"크아아아악! 이 쓰레기 잡것들이……?!"

분노를 담은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트롤은 의문을 느꼈을 것이다.

낮고 쇠를 긁는 듯한 괴성이 점차 가늘고 날카롭게 변해간다.

시야도 낮아진다.

몸이 줄어들고 줄어들어 마침내 자신의 무기조차 제대로 들 수 없게 되었다.

"크아악?"

고블린이 된 요새 사령관은 어리둥절하게 손을 눈앞까지 들고, 더 이상 두껍고 억세지 않은 자신의 손바닥을 보았다.

"어이, 트롤. 이제 공평하지? 케륵케륵."

고블린의 웃는 소리는 웃음이라기보다는 신음 같다.

"케륵……."

트롤이었던 것도 같은 소리를 낸다.

* * *

00:10

전세는 아직 고블린들에게 유리했다.

혼돈의 여신은 오랜만에 군대를 지휘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충실한 신도들은, 비록 하찮다고 여겨지는 고블린일지언정 충성스러웠으며 용맹했다.

「피해라! 뒤로!」

그렇게 한 고블린의 목숨이 조금 더 길어졌다.

「좀 더 위를 찔러라. 조급하지 마라. 신중하게, 천천히. 상대는 쓰러져 있다.」

그렇게 한 오크의 목숨이 사라졌다.

「음, 그건 싸우지 말도록. 그냥 도망쳐라.」

그럼에도 이미 요새의 중심부 근방에서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특히나 크고 흉포한 트롤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에 정신을 차리는 것도 상대적으로 빨랐다.

몇 명의 암살자들이 하늘을 난다.

자의는 아니었다.

여신은 조금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때, 강력한 신성의 파동이 터져 나왔다.

일반적인 권능의 발현이 아니었다.

자연의 신이 성 앞에 숲을 만들어내었을 때처럼, 아주 본격적인 신의 간섭이었다.

여신은 서둘러 그의 건방진 신도들의 시야를 보았다.

고블린이 되는 것까지는 보았다. 그 뒤로는 무난히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여 굳이 지켜보지 않았다.

예상외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전쟁의 신이 그 어느 때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했다.

죽음의 위기에 몰린 요새 사령관 고블린에게는 이미 상당한 버프가 발라져 있었다.

비록 본래의 재생력은 잃었으나 신체 능력만큼은 큰 차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소녀가 제대로 겨루지 못하고 힘들게 흘려낸다. 그 사이를 건방진 신도가 노려 소녀가 벗어날 틈을 만들었다.

그야, 간섭하겠지.

본격적인 신도의 약탈이다. 이것은 단순한 선전포고와는 다른 문제다.

신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전쟁은 정말로 노한 것이다.

여신은 틀림없는 위기의 상황임에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상대의 급함이 느껴져서다.

흥, 이 싸가지 없는 트롤 자식. 꼴좋다.

전사에게는 훌륭한 신이기에 기꺼이 그녀를 배신하고 개종하던 수많은 신도들이 떠오른다.

스스로 놓아주었던 시기도 있었으나, 그 이전에도 혼돈과 자유의 교단은 필연적으로 많은 신도들이 흘러나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심지어 전쟁의 신은 노골적으로 탐욕을 드러내기도 했다.

메이저한 신인 동시에 오래 산 덕에 적당히 똑똑해진 트롤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신도 빼먹기에서도 아슬아슬하게 선만 넘지 않았을 뿐, 나름대로의 패악질을 부려왔다.

머리 나쁜 종족이 신이 되면 이게 문제다.

이미 많은 신들이 지금의 전쟁에게 ‘꼬움’이 있으리라.

하지만 틀림없는 위기이기도 했다.

갑작스레 터져 나온 신성은 권능의 월권행위를 불러일으켰다.

아직 지속 시간이 남았을 폴리모프가 해제된다.

전쟁의 신에게 정화의 권능은 없다.

그저 특유의 강화를 무식하게 때려 넣은 결과물이다.

충분한 힘 앞에서 잔재주는 큰 의미가 없어진다.

혼돈의 여신은 생각했다. 어쩌면 저 건방진 신도의 상극은 오히려 전쟁의 신 같은 게 아닐까 하고.

대체로 잔재주에 잔재주를 엮어내 상황을 유리하게 가져가는 것이 저 신도의 방식이다.

오히려 순수하게 압도적인 스펙 차이를 만들어버리는 적이 더 위협적일 수 있다.

지금 바로 그 일이 일어나고 있다.

혼돈의 여신으로서도 걱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궁지다.

하지만 여신은 아주 심하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대신 시야를 좀 더 넓게 가져가며 요새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살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사냥꾼이 없다.

뭐, 그렇겠지.

전쟁의 신이 이토록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니 걱정이 크게 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떻게든 헤쳐나가리라.

그런 믿음을 신에게까지 주고 있다.

하지만 조금 부족한 것 같은데.

딱 그렇게 생각할 때, 여신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이런 추운 평야에 있을 리가 없는 박쥐 한 마리가 요새 저 멀리에서 날아들고 있다.

오호라.

* * *

00:15

전세는 고블린들에게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미처 처리하지 못한 트롤들이 극심한 중독에서 깨어나 활개 치기 시작한다.

이미 고블린들을 수없이 잡아 죽인 오우거들은 전쟁의 신이 임하자 더욱더 미쳐 날뛰었다.

오크들도 마찬가지다. 주술사마저 몇몇이 살아남아 제대로 된 무기가 없는 고블린들을 학살하기 시작한다.

기습의 우위는 사라졌다.

정면으로 쾅 하고 부딪히는 싸움이라면 승산이 없다.

그때부터는 불길이 일었다. 고블린들은 일제히 정해진 루트를 따라 후퇴했다.

아예 요새를 벗어나 바깥으로 향한다.

그 사이사이를 불길이 수놓는다.

특별히 방화에 대한 대책을 하지 않은 요새는 거대한 모닥불이 되어가고 있었다.

제아무리 트롤이라도 계속하여 불타면 죽는다.

그린스킨들은 고블린을 따라 바깥을 향해 무질서하게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생존의 문제였다.

온 사방에 난리가 났다. 밤이 불길로 환하게 밝혀졌다.

오히려 그 눈부심 속에서 몇몇 숙련된 암살자들이 암습을 시도하고, 성공했다.

그들이 새로이 섬기는 신의 이름만큼이나 큰 혼란이 펼쳐진다.

* * *

00:18

"아니 진짜 너무하네."

사냥꾼이 멀리서 격발한 대물 저격총이 트롤의 머리에 명중했다.

폭발해야 할 머리는 그저 과격하게 꺾이는 것으로 끝났다.

총탄이 박히지 못하고 튕겨 나간다. 그저 물리력만을 전달했을 뿐이다.

짧은 시간 동안 방어력을 말 같지도 않은 수준으로 올려주는 전쟁의 권능이다.

이미 트롤의 이미 몸은 온갖 권능의 향연이었다.

요새 사령관이라고 특별히 신실한 것은 아니다.

대량으로 신도가 탈주하자 상황을 파악한 전쟁의 신이 반동마저 감수하며 아낌없이 권능을 퍼붓고 있다.

이런 짓을 해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신도를 확보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총탄이 완전히 떨어질 때까지 신의 권능을 둘둘 감은 괴물 트롤을 어떻게 하지 못했다.

나는 [은신]을 발동했다.

소녀는 투명화 열매를 먹으라 신호했다.

갑작스레 상대하던 두 명이 자취를 감추자 트롤은 못생긴 얼굴에 한껏 인상을 쓰더니 포효했다.

신성이 가득 담긴 포효는 내 [은신]을 벗겼다.

열매를 통한 [투명화]였던 소녀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노출되었음을 보고 암습각을 보기 위해 돌아서려 하기에 말렸다.

이쯤 되었으면 차라리 시간을 질질 끌다가 인간으로 돌아간 후, 완전무장하고 다시 와서 싸우는 편이 낫다.

물론 그렇게 한다면 고블린 혁명은 실패다.

우리가 있어도 아슬아슬하다고 생각했다. 아예 이탈한다면 가망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손절의 때다.

원래라면 여신님께서 바로 전달해 주었겠으나 자연의 신은 무전기질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저 관음만 하고 있는 못난 신에게 적극적으로 요청하자 한 다리 거쳐 소녀에게 전달이 된 모양이었다.

미심쩍게 나를 바라보았는지 기척이 멈칫하다가 사라졌다.

근접전은 무리다. 홀로 쫓기는 몸이 되었으나 어찌 보면 더 편하다.

견제를 위한 마법을 되는대로 흩뿌린다. 타격은 줄 수 없다.

마법으로 저 권능들을 뚫고 제대로 된 피해를 주려면 실력 있는 마법사의 대마법급 공격이 필요할 것이다.

최선을 다해 구르고 도망친다.

요새를 벗어나기 전에 시야에서 따돌려야 한다.

이 추격전이 길어져서 좋을 것은 없다.

[자연의 신이 필요하다면 월권을 해서라도 당신을 돕겠다고 말합니다.]

정말 희소식이군, 최소한 내가 죽지는 않겠는데?

하지만 마냥 기대하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다.

이미 전쟁의 권능이 마구 흩뿌려진 공간에서 강제로 개입하려고 해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 설상가상으로 다른 트롤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머리 위를 몽둥이가 스친다. 몸이 작은 고블린이라 간신히 피했다.

내려찍는 망치를 피하자 곧 불꽃이 날아든다. 방화가 아닌 마법적인 불꽃이다.

갑자기 적들의 움직임에서 질서가 느껴진다.

누가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뭐야, 이거 포위인가?"

[자연의 신이 어떤 트롤에게 비겁하다고 욕을 합니다.]

이건 뭐, 신도 몇몇을 아예 화신처럼 쓰고 있는 모양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나를 죽이겠다는 뜻.

과연 트롤일지라도 신은 신. 사태의 심각성을 빠르게 파악한 모양이다.

혁명이란 걸 겪어본 적이 있는 걸까?

짧게 고민한 한 후, 자연의 신께 혼돈의 여신과의 연결을 돌려달라고 청했다.

세 번째를 써야 한다.

혼돈의 권능으로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맵 리롤? 고블린 무리를 신도로 얻었다곤 하지만 교단의 규모는 아직도 보잘것없다.

그런 규모의 권능 행사가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캐스팅 실패 부작용을 심연 추방으로 만들어달라고 해야겠군.

심연에서 살아 돌아오는 것까지는 혼돈의 신도인 만큼 그리 어렵지 않다.

신의 총애가 이렇게 중요하다.

심연 같은 곳을 아예 비상 탈출구로 써먹을 수도 있을 정도니.

그렇게 마음을 굳혔는데 자연의 신이 어떠한 응답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조금씩 더 궁지에 몰리고 있다.

그린스킨을 배반하지 않은 고블린 암살자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적들의 공세에는 짜임새가 있다.

[점멸 단검]을 냅다 던져 나를 향해 휘둘러지는 몽둥이에 맞췄다.

박을 생각은 아니다 맞은 단검이 멀리 날아간다.

타고 도망치려고 했는데 어디선가 날아간 단검이 내 [점멸 단검]을 맞춘다.

단검이 팽이처럼 회전하며 다시 내 근처로 떨어진다.

"에라이,"

대응이 완벽하다. 신좌에 앉은 트롤의 지휘는 일사불란했다.

그때 자연의 신의 메시지가 날아왔다.

[자연의 신이 혼돈의 말을 전합니다. ‘미래의 네가 생각을 잘한 모양이다.’]

그래? 그게 뭔데? 지금 딱 필요하긴 한데. 나 새끼야 뭘 준비해 뒀니?

이미 요새의 외곽이 머지않았다.

사실 나는 저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고블린의 주력으로는 평지에서 추격당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

하다못해 인간 상태라면 좀 더 나을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폴리모프 포션 지속 시간도 계산해 둘 걸 그랬나?

어째 일이 너무 잘 풀리더라니.

다시 한번 날아오는 단검을 고개를 젖히며 흘리고, 장애물째로 나를 날려버리기 위해 날아오는 몽둥이를 굴러서 피한다.

불꽃이 날아왔다. 아이고 이건 좀 맞아줘야겠는데. 포션에 여유가 있던가…….

조금 위험하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불꽃의 방향이 이상했다.

나를 노리던 오우거와 트롤들이 불길에 휩싸였다.

그리고 나를 중심으로 온 사방에 불길의 벽이 솟구쳤다.

[파이어 월]?

그런 마법사가 여기 있을 리가…….

갑작스럽게 박쥐 떼가 나타났다. 불길로 저지한 짧은 시간 동안 박쥐들이 내 눈앞에 모인다.

본능적으로 상대를 파악한다.

뱀파이어다. 바르바로이보다는 체격이 작다. 많이 작다.

박쥐의 개체 수로 볼 때 열 살 남짓…….

내 전투태세는 나타난 꼬마의 얼굴을 보는 순간 풀렸다.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겠다.

자그마한 체구에 붉은 눈동자, 불길에 휘날리는 은빛의 머리카락.

어설프게 들어 올린 손끝에서 마력이 춤춘다. 뭔지 알겠다. [디스펠 매직]이군.

이렇게 순간적으로 짜 올릴 수 있는 마법이 아니다. 그게 되었으면 내가 스스로에게 디스펠을 걸었다.

어느 정도 태생의 차이도 있겠지만 장비가 더 화려하다. 마법 연산을 보조하는 갖가지 물건들을 주렁주렁 걸치고 있음이 보인다.

바르바로이 클랜의 꼬마 뱀파이어는 랜덤 NPC에 대륙의 주민이다.

하지만 그런 주제에 어지간한 고정 네임드 유배자를 씹어 먹는 성장성을 달고 나온다.

그래서 손에 넣고 싶었다. 내가 마법사(임시)를 그만두고도 남을 정도의 고성능 NPC기에.

마법을 지우는 마법이 내 몸을 감싼다. 다시 인간으로 돌아왔다.

알몸인 게 큰 문제라면 문제인데, 꼬마 흡혈귀가 살짝 고개를 돌리며 망토를 던져주었다.

서둘러 걸치니 좀 낫다. 바바리맨 같긴 한데 어쩌겠어.

"좋아, 거기 너. 미래의 내가 클랜 마스터냐?"

미래에서 온 꼬마 흡혈귀가 조금 감정이 부족해 보이는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네, 아빠."

잠시만,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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