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74화
8층 - Lv. 415 용암망치 대대(1)
추운 새벽, 군데군데 눈이 쌓여 녹지 않은 얼어붙은 벌판에서 불을 피우지 않을 수는 없다.
장작은 부서진 요새의 잔해 중 잘 탈것 같은 것을 가지고 왔다.
어느 방향으로 가도 그린스킨의 마을 밖에 나오지 않을 테니 오늘은 꼼짝없이 야숙이다.
평야는 위험하다. 야간의 담뱃불조차 수 ㎞ 바깥에서 보인다고 한다.
모닥불 정도 되면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약간의 마법이 곁들여진다면 문제없다. 그것이 [투명화]처럼 완전할 필요도 없다.
마법진은 경우에 따라서는 단순한 원이기만 해도 된다. 그냥 땅바닥에 찍찍 그은 상징일 뿐이다.
이건 마법도 아니다. 그저 빛을 어느 정도 왜곡하고 차단하는 잡기술에 불과하다.
미궁의 마법사가 직접 마법을 공부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이런 잡기술은 스킬로 구현되어 있지 않다.
게임 시절의 미궁에는 삶이란 게 없었다.
그저 다가가면 그제야 작동하는 AI들의 집합체였을 따름이다.
그러니 이런 일상적인 마법은 스킬 중 하나로 끼어들기엔 자리가 없었던 모양이지.
얼어 있던 손이 녹아간다.
따뜻한 불길은 생명줄과도 같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인데, 두꺼운 방한복은 없는 열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단지 식어가는 것을 늦출 뿐이다.
아무리 껴입는다 한들 영하의 추위에도 불을 피우지 않고 버티는 방법은 없다.
[냉기 저항] 따위의 내성 스킬은 이래서 점점 중요해진다. 극한의 환경은 가면 갈수록 자주 나타난다.
그런 의미에서 언데드인 흡혈귀는 냉기에 구애받지 않았다.
조그마한 열 살배기 꼬마의 모습이지만 전혀 지치지 않았고, 추위도 타지 않았다.
사실 호흡도 하지 않는다. 식사도 인간의 피뿐이다.
모두 지쳐서 불을 둘러싸고 주저앉았을 때도 꼬마 흡혈귀는 처음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몸이 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언데드 종족들은 딱히 생명과 직결된 문제가 아닌 것에 무뎌지는 경향이 있다.
손끝이 살짝 얼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
불러서 불을 쬐게 했다.
꼬마는 아주 익숙한 자리라는 듯 내 무릎 위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말한다.
"따뜻하다. 따뜻한 아빠의 품은 처음이에요."
"뱀파이어가 되기 전엔 안겨본 적 없나 봐."
뱀파이어는 체온이 낮다. 손을 맞잡아도 따뜻하다는 느낌보다는 서늘하다는 느낌이리라.
새로운 감각에 부비적거리는 꼬마 흡혈귀를 보는 소녀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질투와는 다르다. 그래 그렇다기보단 뭐랄까. 귀여운 것을 보고 견딜 수 없어 하는 그런 느낌.
"아저씨."
"왜?"
"저는 어릴 적부터 꼭 여동생이 가지고 싶었어요."
"엄마잖아."
"아니, 그건. 음 그것대로 좋긴 한데. 음 딸이라.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어휴."
일단 친자식이 아닌 것은 확인되어 다행이다.
아니, 사실 뭐 물리적으로 그게 가능할 리는 없지만 그래도 오싹했던 것은 사실이다.
바깥에선 여자 손도 잡아본 적이 없었다.
미궁에서는 이래저래 연애도 해보고 그랬지만 그렇다고 자식이 있었던 적은 내 평생 없다.
미궁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할 짓이 못 된다.
"아빠라고 불리는 건 처음인데."
"아저씨는 안 해본 게 없는 줄 알았는데."
"애 키우는 건 해봤지. 하지만 그때도 호칭은 아저씨였단 말이야."
정을 받아주는 것은 한도를 두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먼저 아빠라고 부르라고 했다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번 회차는 어떤 의미에서는 평소대로지만, 참 새롭다.
감정적인 부분에서도 그럴지도 모른다.
파티원에게서 동료 이상의 감정을 느낀 것은 드문 일이 아니지만, 이런 고등학생 꼬꼬마랑 사귀고 그랬다고?
잠깐 목을 꺾으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빛을 숨기기 위한 위장으로 마력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느낌이 기분 좋다.
따뜻한 모닥불이 기분 좋다. 품속의 더 작은 꼬마가 수줍게 꼼지락거리는 것이 기분 좋다.
그리고 눈앞의 소녀가 약간, 망상의 나래를 펼치며 싱글벙글하고 있는 것이 기분 좋다.
문득 깨닫기에, 그 어느 때보다 힘든 튜토리얼 시기를 보내면서도 그 난이도에 비해서는 많이 풀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뭐, 나쁘지 않지."
철저하게 설계와 실행만을 반복하는 기계가 되어서는 성공할 수 없다. 그것을 깨달은 것이 대충 80년 전.
스스로의 마음을 위해서도 어느 정도 인간적일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60년 전.
게이머로서의 감상이나, 미궁과 나를 분리해서만 생각하는 고집을 버린 것이 40년 전.
그럼에도 남아 있는 자잘한 비효율적인 부분과 필요한 부분을 구분하여 정리했다고 생각한 것이 20년 전이다.
나는 매년 클리어에 가까워졌다. 간혹 후퇴하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전진했다.
변화란 좋은 것이다. 어느 사마귀 괴물의 말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죽는다. 미궁의 도전자로서 죽는다.
"이리 와."
"서비스예요?"
"그래."
소녀가 쪼르르 내 옆으로 다가와서 앉는다. 온기를 나누려는 듯 몸을 바짝 붙이고 떨어지지 않는다.
아니, 숫제 비비적댄다. 이 녀석은 고양이인가?
에이, 뭐 어차피 사귄다잖아. 결정사항의 미래와는 다르지만 사실 그럴 마음이 아주 안 드는 것도 아니고.
가만, 따지고 보면 이 꼬마 흡혈귀가 미래를 알려줘서 내가 허술해진 기분도 든다.
흠, 혹시 계략인가? 미래의 소녀가 꾸민?
이건 타임 패러독스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
미래에 일어난 일이 과거에 영향을 미치고, 그래서 그 과거 또한…….
아, 어렵군 집어치워.
다들 노곤한 몸을 이끌고 침낭 속으로 들어간다.
평지라고는 하지만 땅을 파서 어떻게든 바람을 피할 공간을 만들었다.
그 위에는 꼬마 흡혈귀가 미래에서 가지고 온 망토들을 이어 덮는다. 텐트라면 텐트인데 지하 텐트다.
"저, 약한 불을 유지하는 연습 많이 했어요."
"오, 그래?"
난방은 꼬마 흡혈귀가 담당했다.
대강의 사정은 들었으니 나머지는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몇 날 며칠을 날 밤 까고 달렸다. 죽기 싫다면 푹 쉬어야 할 때다.
불침번은 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 꼬마 흡혈귀가 섰다.
* * *
자고 일어나니 좀 더 멀쩡한 생각이 들었다. 무리해서 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나 보다.
가장 먼저 달라붙는 소녀를 밀어내었다.
"워워, 진정해라. 저쪽의 미래가 그렇다 해도 여기서도 그렇다고 장담할 수는 없어. 이 동네 시간여행은 여러 시간 축이 존재하는 평행세계라고."
"하지만, 어제는 잘해줬으면서. 앞으로 사귄다는데!"
"나이를 더 먹고 오도록."
"미궁에서도 그게 중요해요?"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야."
"피이. 어차피 넘어올 거면서."
삐진 척은 하지만 아침부터 싱글벙글이다.
묘한 확신이 서렸다고 할까. 요즘 들어 조금 시들해지나 싶던 애정 공세에 도로 힘이 실렸다고 할지…….
어렵군 어려워.
간밤은 다들 아주 편안하게 푹 잘 수 있었다. 따뜻하기가 온돌방의 구들장이 생각나는 포근함이었다.
노숙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꼬마 흡혈귀가 불 다루는 연습을 많이 했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마법 배우는 게 싫어서 열심히 안 했어요. 그래서 전 도움이 안 되었어요."
"뭔가 계기가 있었나 봐?"
갑자기 입을 꾹 다물더니 소녀에게 간다. 그리고 폭 안겼다.
"그건 지금 말 안 할래요."
"세상에 너무 귀여워!"
뭐 그렇게 내버려 두고 미래의 내가 전달하라고 한 정보를 받았다.
메모에 세심하게 기록되어 있었는데 일단 첫 문장부터 뿜었다.
"와, 행성 상공의 우주 개척 시대를 삼분하는 세력 중 하나가, 고블레타리아 연방이라고?"
"고블린들이…… 살아남은 수준이 아니라 아주 굉장하군요."
"고생한 보람이 있습니다. 두목."
특히나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막내는 무언가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들어보면 저쪽의 원래 세계도 묘하게 착취당하는 노동자라거나 그런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으니…….
이게 말이 되나?
슬쩍 다시 소녀를 본다. 좋건 나쁘건 뭐든지 큼직큼직하게 일이 굴러가고 있다.
행운의 신이라. 게임에서는 존재만 알려졌지 명확하게 묘사되지 않은 신이다. 사실 그냥 밀린 업데이트 중 하나였겠지만.
여신님의 언급도 그렇고 아마 어떤 식으로건 관련은 있을 게 분명하다.
소녀는 그 자체로 내가 바깥에서 게임하던 시절에도 모르던 정보의 집합체다.
슬쩍 떠본 적은 있지만 완전히 깨끗하다.
본인도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도 일단은 좋은 일이니까.
"어쨌든 우주가 아주 큰 일이긴 하군. 시간의 신전이 아니었다면 제대로 돌파 못 했을 것 같은데."
진짜 보고 있으니 하나하나 가관이다. 우주전까지 고려해야 하다니.
이렇듯 미래의 정보는 그 무엇보다 귀중하다. 지금부터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두 알게 되었다.
물론 지금 저기 소녀에게 안겨 있는 꼬마 흡혈귀가 온 시간선과는 다른 곳이니 있는 그대로는 아니리라.
조금씩은 틀어지고 달라질 수 있겠지.
그러나 단순히 정보를 취합해 얻는 예측 이상의 정확도를 확보한 것은 큰 이득이다.
사냥꾼도 아주 즐거워 보였다. 기분을 망치지는 않도록 하자.
자연의 신께서는 좋은 소식이라면 좋은 소식을 알려왔다.
[자연의 신이 마침내 용암망치 대대가 공세를 멈추었다고 전합니다.]
성은 사실 첫날에 이미 함락되었다. 그 이후로도 많은 피해가 있었다. 일개 특수 대대에 불과하지만 그것에 의하여 국경선은 쑥대밭이 되었다.
보급을 우려한 모양인지 더 이상 깊이 진격하지는 않았으나 단지 전초전만으로도 체급이 차이가 여실히 드러난다.
[자연의 신이 더 많은 요정들이 인간의 왕국을 향해 모여들고 있다고 말합니다.]
요정 역시 최후의 방어선을 인간과의 연합을 통해 굳힐 모양이었다.
나는 고민을 해야 했다.
당장 주어진 선택지는 여러 가지가 있다.
미래의 나는 일어난 사건 하나하나를 디테일하게 기록하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았다.
다른 시간선은 아주 흡사한 평행세계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큰 틀에서는 똑같더라도 세세하게는 다를 수 있다.
미래를 안다 한들 내게는 아직 자유의지가 남아 있다. 대부분의 사건은 확정된 사항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의 내가 미래를 알게 되었기에 어긋남의 진폭이 커질 것이다.
시간여행이란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없는 끝없는 사슬과도 같다.
당장 지금 고블레타리아들을 내가 전멸시켜 버린다면 10층 이후의 전개 또한 바뀌리라.
무엇이 가장 좋을까. 갑자기 정보량이 너무 늘었다.
"돌아가서 용암망치 대대를 날려 버려야 하나?"
[자연의 신이 당장 정령왕을 운용해야 할 정도의 위기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우선 성녀를 챙겨야겠군요. 그럼 정령왕이 나설 필요도 없어질 테니."
생각난 김에 오랜만에 계약한 정령왕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혼자서는 소환할 엄두조차 못 낼 존재지만 그 자아는 미약하기 짝이 없다.
너무 방치하면 애가 삐딱하게 자란다. 제대로 키워 줘야 한다. 생각보다 화력적인 측면으로도 영향력이 있다.
잠깐 동안 감응을 시도했던 나는 곧 한숨을 내쉬었다.
"삐졌네. 요 녀석."
좀 더 자주 말 걸어주고 보살펴주자. 정령이란 성가신 생물이다.
쬐끄만 드래곤 모양 정령은 당분간 대화에 응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일단 꼬마 흡혈귀의 능력의 한도를 파악했다. 마법적 자질도 체크한다.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다.
소녀는 그 모습을 보며 다채로운 마법의 존재에 신기해했다.
"그럼, 일단 출발하자."
고블린들은 밤새 자연의 신이 인도한 숲을 향해 떠나갔다. 정확히는 혼돈의 여신께서 내린 계시의 형태를 취했다.
저 작은 집단이 미래의 거대 공산 연방이 된다라. 미래의 내가 한 묘사로는 악의 제국 같던데 이거 괜찮은지 모르겠다.
하지만 저 개새끼는 우리 개새끼다.
미래에서 온 꼬마 흡혈귀는 현재의 자신이 폭풍울음 여단에 붙잡혀 있다고 말했다.
어째 그렇게 찾아도 없더라니. 일찌감치 오크들에게 잡혀간 것이 문제였다.
트동트는 이미 2층으로 돌아가 카크리쉬를 죽인 나를 통해서 포섭이 끝난 모양이다.
모든 패는 손에 들어왔다. 빠르게 8층을 작살 내고 10층을 준비하자.
우주보다 더 힘들지도 모르는 보스전이다.
"그런데, 지금부터 아무리 빨리 달려도 폭풍울음 여단과 용암망치 대대가 합류한단 말이지."
이건 피치 못할 문제다.
미래의 꼬마 흡혈귀의 경험에 따르면 트동트는 이미 나에게 완전히 호의적으로 협력했다고 한다.
이런 것까지 틀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 부분은 이제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잘했어 미래의 나!
하지만 동시에 접선까지 격렬한 전투가 있었다고도 말했다.
그 당시의 꼬마 흡혈귀 본인은 삶에 대한 의지가 없었다고 한다.
가족을 잃고 홀로 굶주리며 방황하다가 오크들에게 잡혀갔을 뿐.
그래서 그저 전투가 있었고 싸움이 끝났다고 알고 있을 뿐 자세한 것은 몰랐다.
미래의 내가 알려준 정보에도 무사히 성녀를 확보했다는 걸 추론할 만한 내용만 있지 구체적이지는 않다.
달라질 수 있는 미래와 과거의 디테일이 바로 이런 점이다.
[인간 카드]가 잘 있는 품속에 손을 넣어 확인했다.
플라스틱처럼 매끌매끌한 질감이 손끝에 느껴진다.
당면 목표는 분명해졌다.
용암망치 대대와 합류한 폭풍울음 여단의 잔당 사이에 어떻게 트동트와 접선하고 성녀를 설득해야 한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우리 파티가 용암망치 대대를 상대로 승리할 방법은 없겠으나.
인간의 [히어로 유닛] [대성녀 메이릴리스]가 다시 돌아온다면 문제없다.
설득하고, 다시 인간으로 만든다. 그것이 승리 조건이다.
히어로 유닛이란 그런 존재다.
그리고 한 가지 오랜 문제가 또 하나 해결되었다.
"너의 미래에 바르바로이는 죽고 없지?"
"죽지는 않았지만 조금…… 다르게 되었어요."
이건 또 뭐가 희한하게 엮였나 본데? 나중에 알아보도록 하자.
"어쨌든 내가 바르바로이의 지배를 받을 걱정은 없는 모양이군. 그걸 제일 걱정하고 있었는데."
클랜의 뱀파이어들은 클랜 마스터의 소유물이다.
내가 바르바로이의 권능을 사용하기 위해 같은 혈족이 되는 순간 그의 지배를 받는 수가 생긴다.
아주 위험한 일이고 조심해야 할 문제였다.
안심하고 종족을 바꾸자.
나는 앉아서 목을 깨끗이 닦았다. 애 밥 주는 건데 더러우면 안 되지.
"물어."
꼬마 흡혈귀가 쭈뼛거리며 다가온다. 소녀가 몹시 부러워했다.
"나도 물고 싶어……. 조금 있다가 물어봐도 돼요?"
보통은 반대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