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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78화 (78/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78화

8층 - Lv. 1230 대성녀(1)

그림자가 짙다면 빛이 강한 것이요, 단점이 크다면 장점도 크다.

밸런스 잡힌 게임이라면 어디에나 적용되는 당연한 법칙이다.

모든 유배자는 인간이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미궁을 끝낼 수 있는 클리어 자격을 가진 것도 인간이다.

괴물을 죽이는 것도 언제나 인간이다. 이 미궁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게임을 만든 개발자 놈들의 철학은 어디까지나 인간 찬가다.

그렇기에 인간이라는 종족은 약하다.

인간이라는 팩션 역시 약하다.

종족적 특성이야, 미궁의 열쇠를 쥐고 있는 유일한 종족이며 모든 유배자들의 출발점이라는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뿐이면 팩션으로서의 인간이 약할 개연성은 없다.

그곳이 바로 장단점으로 접근해야 하는 부분이다.

인간의 [히어로 유닛]은 멀쩡한 경우가 없다.

서버 생성 시점엔 이미 오크 같은 이종족으로 넘어가 있다거나.

어딘가에서 태어났을 이름도 성별도 모르는 [용사]의 운명을 지닌 아이라거나.

인간에게 실망해서 어디 은거하고 있는 대마도사라거나.

하나같이 그냥 내버려 두면 인간을 위해 헌신하기는커녕 유배자가 모르는 어느 구석에서 객사하거나 아예 적으로 돌아서 버린다.

대성녀도 그렇다.

이번 경우에도 아무도 케어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둔다면 그럭저럭 잘나가는 오크 주술사로 삶을 마칠 것이다.

강력한 아군이 그런 식으로 무력화되는 꼴은 못 본다.

훌륭한 유배자는 대륙의 역사에 아주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자들이다.

내가 만약 그린스킨의 편을 들고 있었으면 반대로 행동했다.

성녀가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최선을 다해 막으며, 훌륭한 오크 주술사를 넘어 오크 [히어로 유닛]으로 육성했을 것이다.

그대로 전쟁의 신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지 않았을까?

짬이 좀 찬 유배자라면 한 번쯤은 해보려고 하는 역사 컨트롤이다. 신들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고참 유배자들을 포섭하려 하는 것이고.

지금 이 서버 어딘가에는 그렇게 하려는 속셈을 가진 유배자도 있을 법하다.

[배신당한 성녀]라는 메인스트림을 애타게 찾아 헤매고 있겠지.

다들 늦었다. 내가 벌써 먹었다.

그리고 이건 아주 꿀같이 달달한 결과다.

인간 팩션 히어로 유닛이 멀쩡한 놈이 없고, 유배자들의 관심을 많이 받는 이유.

그만큼 더럽게 세서다.

* * *

적진 한가운데에 거대한 빛기둥이 내리꽂혔다.

자연의 신이 아주 기분 좋은 메시지를 내려 보낸다.

메시지 내용을 보니 전쟁의 신이 열 받아 날뛰는 걸 어디서 보고 행복해하는 모양이다.

모든 정황이 성공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 그걸로 끝은 아니다.

인간으로 되돌아와, 신성한 성직자로서의 힘을 되찾은 대성녀는 아주 강력한 존재다.

하지만 당장 눈이 돌아가 나를 쫓아오는 용암망치 대대의 괴물들을 5분 이내에 어떻게 해줄 수는 없다.

저쪽에도 충분히 강력한 대대장이 버티고 있다.

당연히 성녀가 질 리는 없고, 빠르게 처리하고 이쪽으로 오겠지만 그 전에 내가 다진 뱀파이어가 될지도 모른다.

뱀파이어의 종족 특성 [피의 샘]은 저장된 혈액이 충분하다면 끊임없이 [부활]하는 것과도 유사한 초고성능 스킬이다.

하지만 어디 가서 인간들을 대량학살이라도 한 게 아니라면 저장량은 한계가 있다.

나는 이미 몇 번 죽었다.

하지만 그렇게 미끼질을 한 덕분에 다른 파티원들은 큰 위험에 처하진 않았다.

사냥꾼은 나름대로 유격전에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원거리 클래스다 보니 위치도 가장 적진과 먼 곳으로 잡았다.

제대로 하는 지원사격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잊지 못하게 하는 정도로만 사격을 하고 있다.

현명한 판단이다.

꼬맹이와 막내는 주로 꼬맹이가 사용할 수 있는 [블링크]를 활용하여 도망쳐다녔다.

막내는 다음날이 걱정될 정도로 뛰어다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번번이 따라잡힐 뻔했다.

비상시에는 막내만 죽고 꼬맹이는 던져버리라고 했다.

인간인 두 명은 죽어도 부활할 수 있다.

뱀파이어 둘은 심장이 으깨진다면 그대로 죽는다.

우스운 꼴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따라잡히고 있다.

박쥐로 변해 날고, [블링크]를 구사하고 별의별 짓을 다 하더라도 한계는 있다.

다리 길이부터가 다르니 덩치 큰 괴물들이 금방금방 따라잡는다.

대여료를 받아내 보자.

‘지연이시여, 뭐 좀 해주실 것 없습니까?’

[자연의 신이 성에서 구해주지 않았냐고 반문합니다.]

‘여기서 제가 죽으면 투자한 보람이 없으시지 않습니까.’

아무 말 없이 바닥에서 덩굴이 솟아났다. 덩굴은 순식간에 괴물들의 발목을 순식간에 낚아챘다.

대부분은 큰 효과가 없었다. 그래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선두의 몇몇은 목표가 가까워서인지 방심했고, 그래서 굴렀다.

거기에 걸려 넘어지는 녀석도 몇 명인가 생겼다.

작은 혼란이지만 추격이 순간적으로 느슨해졌다.

파티원들 모두가 약간이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으아아, 죽는다. 빨리, 성녀 빨리!"

대대장이 쓰러지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그때까지는 살아남아야 하는데.

* * *

소녀는 그대로 달아나서 아저씨에게 합류하려고 했다. 뒤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잠깐 마주친 오크 주술사 스승과 제자 둘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아저씨에게 들었다.

하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히어로 유닛]이 강하다고, 중요하다고 아무리 말로 들어도 초회차 신참 유배자인 소녀로서는 와 닿지 않는다.

그런 것보다는 우리 파티원들의 안위가 중요하다.

저 여자 오크가 무언가 한다고 하는데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대지가 진동한다. 얼어붙어 먼지라고 부를 것이 없어야 할 땅에서 구름 같은 흙먼지가 솟구친다.

갈색과 흰색이 뒤섞인 해일이 파티원들을 향해 밀어닥치는 꼴이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철갑 괴물들의 실루엣은 미궁에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소녀도 오싹오싹할 정도였다.

지금 땅에 지진계를 설치하면 진도가 측정될 것이다. 진도 5 정도는 나오지 않을까?

그렇게 흔들리는 땅을 달려나가는 소녀를 무언가가 붙잡았다.

빛의 고리였다.

"어라? 으아아아아아?"

슝 하고 몸이 끌려 날아간다.

뒤돌아보지 않고 달렸지만 고리가 몸을 틀어 강제로 뒤편을 보게 했다.

화려하고도 화사한 외모의 여자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으에에엑?"

빛의 고리가 아주 신성하게도 빛난다. 소녀는 이걸 만든 것이 저 여자고, 저 여자가 인간으로 돌아온 성녀라는 것을 눈치챘다.

위기의 상황에서도 제일 먼저 외모를 살핀다.

스스로도 어디 가서 꿇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그렇게 된다.

저 여자도 우리 파티에 합류할지도 모르잖아.

본능적인 위기감이 찰나의 순간에도 빛을 발했다.

그리고 상대는 과연 그럴만한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옅은 백금발이 화사하다. 자연스레 웨이브져 흔들린다. 얼굴은 어딘가 콧대 높고 도도해 보이는 느낌.

약간은 블랑쉐가 생각날 뻔도 했지만 나이는 소녀와 또래로 보였다.

그리고 왜인지 알몸이었다.

아니지, 로브가 벗겨졌구나.

그 옷을 쥐고 있는 거대한 트롤은 성녀가 뻗은 다른 손에서 피어난 빛에 붙들려 있었다.

와, 신성하기도 하셔라.

신성력이라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어쩐지 알게 된 기분이 든다.

휘황찬란한 금빛이 형체를 이루고 있다. 눈부시지 않고 은은하게 어루만지듯.

부드러운 빛이었다.

그 본질은 마력과 같은 것이라 배웠지만 그럼에도 신성이라 따로 구분되는 이유를 즉시 납득했다.

그 누가 저것을 보고 신의 은총을 떠올리지 않을까.

이 세계의 신자들이 지구에 비해 유난히 신실한 이유를 단박에 납득할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 부드러운 빛은 적에게는 가혹했다.

붙잡힌 트롤은 으깨지듯 우그러들다가, 마지막에야 간신히 저항하여 속박을 떨쳐냈다.

트롤이 땅을 디딘다.

일부러 힘주어 밟은, 마치 무슨 의식 같은 행동이었다.

그리고 함성.

동시에 저쪽에도 신이 임한다.

강대한 전사는 전쟁신의 총애를 받는다.

여러 가지 몸을 강화하는 권능이 트롤의 몸에 깃든다.

성녀가 코웃음 쳤다.

"성직자 앞에서 그런 것을 해보아야……."

그다지 높이지도 않은 나직한 목소리였다.

트롤의 몸에 임하던 모든 권능이 끊어졌다.

전쟁의 신이 화내는 것이 성녀에게도 느껴졌다.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는다. 그녀가 섬기는 신은 규율과 금전의 신이다, 그러는 동안 소녀는 어안이 벙벙한 채 성녀의 손아귀에 붙잡혔다.

"멱살을 잡은 것처럼 되었네. 미안해."

오싹함.

또래의 여자아이를 본다기보다는 불타오르는 거대한 힘의 형상을 눈앞에서 목도하는 기분이었다.

인간이 맞나?

이게 [히어로 유닛]?

아니……, 인간의 영웅…….

와…….

감탄의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모습이었다.

성녀는 트롤이 놓친 로브를 거칠게 다시 가져왔다. 오크의 체형에 맞춰져 있었기에 이제는 품이 너무 헐렁했다.

성녀는 펄럭이는 낡은 옷자락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한순간이었지만 소녀는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소녀의 몸에 빛이 깃든다.

"어? 어어?"

소녀는 어딘가 몸이 달라짐을 느꼈다. 더 강하고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그리고 그건 느낌이 아니었다.

들고 있던 단검에 빛의 축복이 흘러든다.

"잠깐만 저걸 상대하고 있어. 나는 당신의 파티 리더를 구하고 올 테니."

"어……. 네."

소녀는 생각했다.

큰일 났다. 성녀가 아저씨한테 반하면 어떡하지? 못 이길 거 같은데.

어쩐지 몰려오는 패배감. 그런 기분 속에 소녀는 트롤과 대치했다.

가라앉는 정신 상태와 다르게 몸은 그 어느 때보다 힘이 넘쳤다.

적어도 지지는 않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트롤은 그 흉악한 생김새로도 인간이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어처구니없어함을 표현했다.

소녀도 동의했다.

성녀는 날아올랐다.

빛의 날개가 펼쳐졌다. 몇 장이지? 여섯 장? 와아아…….

* * *

다행스럽게도 성녀는 이쪽의 사정을 내 생각보다 더 빠르게 고려해 주었다.

"오, 세상에."

빛의 폭격이 쏟아졌다. 스킬 [치천사의 날개]는 실제 치천사의 날개보다 더 고성능이다.

물리적 실체인 천사 종족의 날개와 강력한 신성 주문의 차이다.

그래도 그 형태만은 비슷하다.

주변을 소멸시키는 폭발이 펑펑 터지는 천사의 깃털을 따라 만든 주문이라는 설정이니 당연하다.

문제는 저건 통짜 신성력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점이다.

물리적 육체와 물리적으로 실체화될 정도로 강대한 신성력, 뭐가 더 강할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7층에서 보았던 깐츄롤이 부족한 초보 천사의 깃털 폭격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을 뽐낸다.

비주얼도 그렇다.

금빛의 광선이 온 사방으로 날아들어 대지를 갈아버리고 있다.

철갑도 저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영웅이란 그런 것이다.

나는 잽싸게 멀어졌다.

당연하게도 언데드인 나와는 상극인 힘이다. 죽는다. 죽어.

우리를 노리고 돌격하던 그린스킨들의 분노가 강제로 식는다.

생물인 이상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분노조절을 실패하긴 힘들다.

그들은 냉정해져야 했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금빛 광채를 상대할 방도를 짜내어야 했다.

몇 번의 투창과 투척시도, 그리고 마법적 요격시도 끝에 몇 명의 오우거들이 자의적인 판단을 내렸다.

이건 아니다.

작전상 후퇴는 생각 외로 충격대대에게는 표준적인 전술이다.

사실 내부적으로는 후방으로 돌격한다는 명칭으로 통하긴 하지만.

어찌 되었건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후방으로 돌격하기 시작했다.

철갑을 두를 만큼 본능을 이겨낸 그린스킨들은 전략과 전술이라는 것을 탑재했다.

이럴 경우, 뒤에 남아 후방돌격을 지원하는 것은 가장 강한 병사다.

병사들의 안위를 책임지는 역할이다. 그 자체가 이미 명예다.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사실을 직감한 대대장이 먼 곳에서 포효했다.

그리고 소녀가 날아왔다. 유성처럼 땅에 처박힌다. 반짝반짝 빛나는 신성이 소녀의 몸에 감돈다.

포탄 같은 낙하였으나, 덕지덕지 발린 버프 덕에 무사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우오아아아아악! 아저씨이! 저거 너무 세요!"

"당연히 세겠지!"

그런데 누가? 위에 있는 날개 달린 성녀? 아니면 널 쳐서 날린 트롤?

"둘 다요!"

그것도 맞지.

성녀는 충분히 살살하고 있었으나 그 여파만으로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하늘에 쏟아지는 빛의 샤워는 비유할만한 것이 없다. 오로라가 무너져 쏟아진다거나, 유성이 흩뿌려진다거나.

그런 식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이한 광경이다.

깜깜하던 먹구름에서 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얇은 눈발은 바람에 실려 하늘하늘 내려오다가 빛에 휩쓸려 사라졌다.

열량을 동반한 공격은 아니었으나 대지를 울리는 충격과 진동만으로도 충분한 열이 발생했다.

얼어붙은 대지가 녹아서 눅진눅진해지기 시작한다.

점차 진창으로 변해가는 벌판을 패퇴하는 오우거와 트롤들이 달려가고 있다.

그린스킨의 감정은 격렬한 만큼 휘발성이 높다. 저들의 마음에는 이제 공포가 새겨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방에서 파편처럼 튀어대는 신성력의 여파에 언데드의 부정한 육신이 조금씩 타들어 간다.

지나친 신성력의 행사에 벌판이 일시적인 성역화가 될 조짐이 보였다.

우선 꼬맹이부터 챙겨두고 소리쳤다. 마력을 실어서 힘껏.

여기가 성역화되면 나는 죽는다고.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혼돈의 여신과 자연의 신이 규율의 신에게 그 말을 전달한 모양이었다.

성녀는 포격을 잠깐 멈추고 다가왔다.

"뱀파이어라니. 본능적으로 태워버리고 싶어지는군요."

"그러지 말고 저기 뒤에 달려오는 트롤이나 좀 어떻게 해봐."

"음, 오랜만인데. [그랜드 크로스]"

하늘에서 빛의 십자가가 떨어져 내렸다. 그 크기는 말 그대로 어딘가의 체육관만 하다.

포효하며 달려오고 있던 대대장이 높이 뛰어올라 십자가를 후려쳤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십자가가 산산조각 나고 대대장도 땅에 처박혔다.

"안전해진 거 같으니까 우린 신경 쓰지 말고. [성역]화는 안 되게 좀 부탁해."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랜드 크로스]"

발해지는 주문과 함께 하늘에서 다시 십자가가 떨어진다. 아니, 아주 쏟아져 내렸다.

물리적인 힘을 지닌 신성 주문은 그대로 대지를 짓눌러 으깨버렸다.

대지에 새겨진 성흔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모르는 크레이터가 생겨난다. 십자가 모양의 크레이터.

물론 고레벨 트롤 전사는 저 정도로는 절명하지 않는다. 성녀는 다시 하늘에 떠올라 구덩이로 다가갔다.

손을 뻗는다. 빛이 휘감기며 거대한 트롤이 소녀를 향해 끌려온다. 재생 중이지만 이미 너덜너덜하다.

우리 파티의 소녀와 별반 차이 없는 체구의 인간이 5미터를 가뿐히 넘을 것 같은 거대한 괴물의 멱살을 틀어쥔다.

그것도 공중에서.

자못 초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뭐 미궁이 그렇지.

* * *

성녀는 잠깐 동안 그 자세를 유지했다.

대화가 시작되었다.

다른 신도와 몸이 닿아 있기에 전쟁의 신이 화를 내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님을 알고 있다.

1년 이상 뵙지 못했던 자신의 신께 전하는 말이다.

「네놈도 이곳에서 나와 전쟁을 벌일 셈이냐? 제2서버에서의 협정은 어떻게 된 것이지?」

쇠를 긁는 듯한 낮고 거친 목소리. 전쟁의 신이다.

그에 응하는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는 그녀가 모시는 신이시다.

「서버가 달라지면 계산도 따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쟁이시여. 일단 제 성녀를 건드리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고만 말씀드리죠.」

「더러운 수전노 자식. 누가 이기나 해보지. 이 서버에서만큼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저도 그럼 자연과 손을 잡도록 하겠습니다. 건투를 빌지요.」

「모두 으깨주마!」

신께서는 간혹 저런 알 수 없는 단어로 대화를 나누신다.

설명하신 적은 없다. 설명을 받을 이유도 없다.

그녀는 자애로운 규율의 신을 섬기는 도구.

이제 오랜만에 다시 그 도구가 제자리를 찾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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