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84화
9층 - Lv. 79 덜 약한 녀석들(1)
낮이기에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어차피 피만 따로 회수해도 충분하니 레벨링은 파티원들에게 양보한다.
박쥐 몇 마리가 날아다니며 전황을 조감한다.
마법사가 둘에 궁수가 넷.
아직은 전사가 많다. 암살자일 수도 있겠으나 암살자가 장병기를 꼭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니 지금은 구분하기 어렵다.
어쩌면 몇몇은 [은신]으로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가장 먼저 문을 박차고 달려나간 것은 영감님이다.
날카롭게 벼려진 강철 도끼는 가죽이 덧대어진 손잡이 부분이 반들반들할 정도다.
삶에서 얼마나 되는 세월을 전사로서 보낸 것일까?
2층 유적에서의 근접전을 생각해 보자. 그 동작에는 무예라고 할 것은 없으나 노련함은 깃들어 있었다.
양날 도끼를 세우자 크고 넓적한 날이 날아오는 화살을 막는다.
"우오오오오오오!"
오크 특유의 전투 함성이 울려 퍼진다. 상대가 당황한 것이 티가 날 정도다.
종족을 바꾼 유배자는 저런 짓을 하지 않는다.
유배자의 기본은 기습과 속전속결이다. 효율을 중시한다면 있을 수 없는 행동이다.
전쟁의 신을 신앙한다면 모를까.
심지어 화살 몇 발은 막지 못하고 영감님의 몸에 박혔다. 그럼에도 개의치 않는다.
전투의 흥분에 몸을 맡긴 오크를 저지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그러나 상대 사수는 당황하지 않았다.
화살의 깃에 불꽃이 튄다. 두 발 다 특수 화살이다.
하늘에서 작은 번개가 내리꽂힌다.
본업은 주술사인 영감님이 그 힘을 중화해냈다.
누군가의 의지 하에서 발현하는 게 아닌 도구에 깃든 힘 따위가 주술사에게 제대로 피해를 줄 수는 없다.
그 번개는 도리어 커다란 양날 도끼에 깃들어 번뜩이기 시작했다.
상대 중 몇 명은 그 모습에 전쟁신을 섬기는 오크 전사이며, 권능을 활용한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누군가 기도를 올린다. 운이 좋아 만신전을 만났던 유배자인 모양이다.
작은 목소리라 어느 신에게 빌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일어난 결과를 통해 알 수 있게 되었다.
"으아아아아!"
상대도 마찬가지로 고함을 지른다. 광분한 인간 전사들이 달려들기 시작한다.
전쟁의 신이라고? 악연은 한 번 시작되면 끝이 없다.
삶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인지, 미궁이라 유난히 그런지는 모르겠다.
영감님의 도끼와 상대의 검이 부딪힌다.
꽤 훌륭한 재질로 보이는 고풍스러운 검은 우악스러운 도끼가 내려찍는데도 버텨낸다.
그러나 상대의 종족은 인간이다.
무기는 밀리지 않아도 사용자는 밀린다.
영감님이 힘을 주어 밀자 크게 밀려난다.
자세를 유지하고, 넘어지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역량이다.
마법이 날아든다.
오크 전사의 강력함에 주눅이 든 상대 리더의 지시다.
얼음이 날아왔다.
기다란 꼬챙이 같은 형태다.
냉기 계통은 유난히 물리적인 실체를 활용하는 마법이 많다.
도끼로 튕겨내는 순간 냉기가 폭발했다.
얼어붙은 오크가 되어야 했을 영감님은 뒤편에서 나타난 방패에 몸을 숨긴 채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좋군, 아주 좋아. 그린스킨은 방패를 들려고 하는 녀석이 없거든. 나도 마찬가지지만 말이야."
"저는 뭐 이제 방패가 이제 더 익숙합니다. 사람은 이걸로 패도 죽습니다."
사실 막내 같은 극단적인 탱커는 드물다. 남을 믿고 완전히 맡기는 형태의 장비와 마인드맵 세팅이다 보니 어쩔 수 없다.
짬이 차면 찰수록 저런 세팅을 받아들이는 파티원은 드물어진다. 저런 극단적인 탱커는 개인의 공격력이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스킬에 의한 보정이 전무하면 방패를 휘둘러 때려버리는 수밖에 없는데 보통을 그걸 해내지 못한다.
막내는 타고난 거구와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괴력으로 그걸 해냈다.
원거리 공격에 잠깐의 공백이 생긴 사이 크게 돌며 휘두른다.
오크의 내려침도 버텨낸 전사들이 주춤주춤 물러선다.
특별히 다른 공격수단을 확보하지 않은 만큼 단순히 방패를 다루기 위해 완력에만 어마어마하게 보정을 넣어뒀다.
거기에 우리 파티의 평균 레벨은 이미 저 너셕들을 가볍게 넘어서고 있으리라.
"죽이지 말라니. 아주 귀찮은 걸 요구하고 있군. 하지만 이 또한 피가 끓어오른다. 전사는 더한 고난 앞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 법!"
스스로에게 되뇌는 것 같은 말투지만 성량은 이미 고함이다.
오크 영감님이 달려들어 도끼를 휘두른다. 죽이진 않는다. 팔다리를 제거할 뿐이다.
생존에 꼭 필요한 부위는 아니니까.
전사들이 그렇게 고통을 겪는 동안 적의 후열은 다음 공격을 서둘러 준비했다.
화살을 메기는 것에 보정을 주는 스킬을 가진 녀석이 하나 있었다.
화살통의 화살이 저절로 시위를 당긴 손으로 빨려 들어간다.
단순히 능숙하다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한 속도의 속사가 이루어진다.
계속해서 날아드는 화살이 전사들을 견제한다.
하지만 이쪽이라고 원거리 딜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냥꾼은 실로 오래간만에 날카로운 표정으로 활을 집어 들고 나섰다.
요즘 들어 완전히 풀어져서 실실 웃기만 하고 있는 보릿자루였다.
하지만 낮이라서 내가 집에 처박혀 있을 거라고 하자 표정이 달라진다.
스스로 이 파티의 서브 리더 정도의 위치라는 자각이 있다.
그것은 실제로도 옳은 말이다.
마법적 재능이 전무함에도, 내가 추측하건대 왕국의 입구 근처까지는 가본 적이 있는 12년 차 ‘나름대로 고참급’ 사냥꾼은 빠르게 손을 놀렸다.
아마 상대방 쪽에는 사냥꾼보다 더 연차가 되는 유배자도 제법 있겠지만, 레벨링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장비는 말할 것도 없다.
남들이 어쩌다 운이 좋아 얻을 장비를 우리가 맞닥뜨린 적들은 당연히 그런 것처럼 들고 다녔다.
지금도 제대로 된 갑옷조차 없는 녀석들이 있다. 사냥꾼은 멀쩡한 레더 아머로 무장 중이다.
활과 화살의 넉넉함은 말이 필요가 없다.
적 궁수들 중 마법에 걸린 활 따위를 가진 자는 없다.
같은 궁수끼리의 대결에 약간의 장비 차이는 결과를 크게 다르게 만든다.
특수 화살 한 발 사용하지 않음에도 상대의 몸을 노리고 화살이 매섭게 날아든다.
빠르게 속사하던 궁수도 몸을 나무 뒤로 숨기는 수밖에 없었다.
속사는 가능해도 조준 보정 마법이 걸린 활이 여기 있는 이상 이쪽은 조준을 가늠하는 시간이 생략된다.
기이한 고착 상태가 형성되었다.
사냥꾼을 먼저 쏴서 제압하기에는 든든한 방어구가 보인다.
단 한 발에 확실히 제압이 가능할까?
아마 힘들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반면 습격자들의 장비는 부실하기에, 사냥꾼의 화살이 한 방이라도 정타로 적중한다면 절명하는 수도 있다.
궁수들끼리 서로 그렇게 교착 상태에 빠진 듯하자 마법사들은 얼른 엄폐한 상태에서 주문을 짜 올리기 시작했다.
가만 보면 마법사와 궁수들이 숨어 있는 나무 사이로는 함정도 깔려 있다.
밟는 순간 마법이 발동하는 종류다.
어떤 것일지는 몰라도 아마 [바인드] 따위의 속박이 새겨져 있을 듯하다.
마법이 구현되면 좀 곤란해질 것이다. 막내가 막아내는 것도 한계가 있다.
조준 실력이 좀 괜찮다면, 혹은 아예 집에 불을 지르거나 사냥꾼을 노린다면 방법이 없다.
하지만 암살자는 그런 상황을 위해 존재한다.
앞에서 엉겨 있는 전사들의 사이를 지나, 연약한 마법사들은 인지하기도 힘들 속도로 무언가가 달려나간다.
급하게 몸을 내밀고 요격을 시도한 궁수 몇몇이 사냥꾼의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사냥꾼이 놓친 자들은 동작도 없이 갑작스레 날아간 단검에 화들짝 놀라거나 부상을 입었다.
마법사의 머리가 세차게 가격당했다.
소녀가 제자리에서 통통 튀며 멈춰 섰다.
옆에 있는 다른 마법사가 기겁하여 팔을 젓는다.
"얌전히 있어야 안 아파요."
퍽!
복부에 올려치는 깔끔한 펀치 한 방.
가녀린 팔에서 발해지는 귀여운 타격 같지만, 허리가 꺾일 정도에다 몸이 떠오르는 수준의 타격이다.
배에 구멍이 난 기분일 거다.
그보다 얌전히 있다고 안 아플 공격은 아닌데?
* * *
마법사를 모두 제압한 소녀는 아저씨가 한 말을 떠올렸다.
아저씨 몸의 일부인 박쥐들은 소리 없이 바깥으로 빠져나가 상황을 살폈다.
[저놈들은 아마 간 보려고 투입됐을 거야. 근데 어제 녀석들도 그리 약하진 않았단 말이지? 그럼 저놈들을 부리는 좀 더 고참이 있겠지.]
죽인 사람 하나가 그대로 1레벨이다. 이런 파격적인 이벤트 환경에서 먼저 적을 습격할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이나 다름없다.
아저씨는 이미 이 층에 꽤 그럴싸한 규모의 조직이 자리했을 거라 생각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땅에 정착하진 않아. 서든데스가 없다곤 해도 척박한 동토지. 그러니까 전부 인간 사냥에 열을 올린 거야. 정착지는 다음 기회로, 우선은 전력 향상에 신경 쓰는 법.]
멍청이가 아닌 만큼 적이 되어 좋을 상대와 그래서는 안 될 상대를 잘 구분한다.
이쯤 오면 아무래도 멍청이는 이미 죽고 없다.
손을 잡고 구역을 나누는 것이 더 일반적인 일이다.
서로의 사냥터를 알아서 가르는 것이다.
[우리가 많이 늦은걸 감안하면 여기 이 9층이 형성된 지는 꽤나 오래되었을 거란 말이야. 제법 고레벨이나, 고참이 있을 수도 있지.]
시험이라고 했다. 한 번 싸워서 이겨보라고.
100년이 넘는 세월을 미궁에서 떠돈 끝에 마침내 주민이 되어버렸다는 요정 마법사가 떠오른다.
마법사임에도, 정말 순수한 마법사임에도.
그 마법사의 천적이었어야 할 클래스인 소녀는 쪽도 쓰지 못하고 털렸다.
물론 변명은 할 수 있다.
경험의 차이부터 해서 전격 마법의 특성을 잘 몰랐다거나, 마력을 아직 제대로 다루기 전이었다거나.
그렇지만 소녀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녀가 강해지고 싶은 이유는 진심을 부딪치고 싶어서다.
아직도 아저씨가 자신을 싸고돈다는 사실은 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가면 갈수록 깨달았다.
자신을 혹사시키는 대신 파티원의 편의를 도모한다.
입으로야 감당할 능력이 있으니까 감당해 주는 거라곤 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저 파티원들이 짐이니까 본인이 더 열심히 일할 뿐이다.
어쩔 수 없지 하고 막연히 생각하던 것도 8층에서 일어난 수많은 일들로 확실해졌다.
소녀는 쓸모가 없었다.
누군가는 초회차가 이 정도 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어느 정도 배우면서 따라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저씨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어딘가를.
자신이라는 짐을 업고 내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
잠깐 보았을 뿐이지만, 한 마리의 암표범처럼 치명적이며 무시무시했던 근미래의 암살자가 생각난다.
아직도 소녀는 그 여자의 하위 호환이다.
배울수록 더 잘 알게 된다.
그 여자보다 더 나은 점이 하나도 없다.
* * *
소녀가 제법 비장한 표정이 되었을 때는 ‘아이고, 이 꼬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네~’ 싶었다.
흔히 재능 있는 뉴비들일수록 더욱 저런 함정에 빠져들기 쉽다.
미궁은 아주 특수한 환경이다.
모르면 죽어야 하는 것이 너무 많다.
잘 싸운다곤 해도 그것은 결국 바깥의 방식이다.
미궁에는 미궁의 방식이 있다.
[마인드 맵]의 존재가 그렇고, [스킬]의 존재가 그렇다.
이제 겨우 9층, 그것을 깨닫기는 쉽지 않을 타이밍이다.
하지만 이런 규모의 층을 조직적으로 장악하려는 무리가 있다면 어느 정도 그것을 아는 놈들일 것이다.
딱 좋은 상대다.
장비나 레벨링은 압도적 우위에 있으니 빠져나올 수 없는 위기에 처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니 적당히 고생하며 미궁의 [스킬]이라는 것을 어떻게 다루는지 미리 배우기 좋은 것이다.
뭐, 사실 처음부터 노리긴 했다.
8층에서 다시 만난 요정 마법사는 고참 유배자의 위엄을 보여주기 아주 적당한 상대였다.
딱 좋게 소녀가 불만이 쌓이고 있는 것이 보이기도 했다.
거기서 실컷 두들겨 맞고 나서는 누군가만 특별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는 저런 괴물 같은 유배자들이 제법 많다는 사실을 실감했으리라.
실제로 그 후에 미궁을 대하는 자세가 훨씬 진지해졌다.
바깥에서 쌓아온 자신의 힘만을 믿는 게 아니라 미궁의 방식에 더 적극적으로 적응하려고 하는 게 보였다.
좋은 태도다.
반면, 어느 정도 의기소침한 부분도 있어 보이긴 했다.
요즘 들어 적극적인 의견이 없었다.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한 것은 좋지만 이 또한 정도가 지나치면 좋지 않다.
이번 회차에서 내가 만들 파티는 모든 면에서 완벽해야 한다.
그 날, 요정 마법사에게 부탁해 적당히 꺾어둔 후 시간이 좀 지났다.
이제 다시 자존감을 채워줄 때다.
"꼭 해내고 돌아올게요! 꼭!"
미끼로 내건 것은 정말로 항상 데리고 다니겠다는 것.
그러니까 전투에서 단독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동료로서 함께 등을 맡기겠다고 했다.
좀 더 나이를 먹은 아이였다면 중학생도 아니고 그게 무슨 오그라드는 소리냐고 했을 수도 있겠지만.
이 녀석 그동안 지켜봐 온 결과, 은근히 유치한 걸 좋아한다.
뭐 본인이 생각하기에 멋있으면 된 거지. 로망이란 게 원래 그런 거니까.
과연 어반 판타지 한국 출신.
어쨌든 예상이 정확하게 적중해서 눈을 빛내며 달려나갔다.
박쥐 한 마리가 따라붙으며 상황을 관찰한다.
정 위험에 처할 것 같으면 직접 나설 생각이다.
하늘은 충분히 흐리다. 굉장히 컨디션적으로 별로인 선택이긴 하지만 전투가 불가능하진 않다.
* * *
꼭 추가적인 강한 적의 존재만을 암시한 후에, 아저씨는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일종의 시험인 이상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 맞다.
소녀는 그리 생각했다.
숲속을 가로질러 달린다.
마력 탐지를 구사할 정도는 아니지만 마력을 다루는 일 자체에는 꽤나 익숙해졌다.
의식적으로 마력을 퍼뜨려 주변을 어느 정도 감지할 수도 있게 되었다.
육감이라고 할 정도의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오감이 좀 더 날카로워진다는 감각은 있다.
원래도 좋았던 귀가 더 민감해진다.
발소리.
사실 그렇게 부를만한 것도 아니었다.
나뭇가지를 밟아 뿌득 소리가 난 것도 아니며, 눈이 밟히며 뽀득 소리를 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어딘가 미세하게 위화감 있는 소리가 느껴졌다.
자연스럽지 못한 순간적인 한 타이밍.
"찾았다."
[대시][대시][대시]
이것도 따로 연습한 것이다. 동시 발동은 억지로 하면 불가능하지는 않다. 포탄처럼 소녀가 쏘아졌다.
팔을 엑스자로 교차하고 자잘한 나뭇가지 정도는 몸으로 뚫고 날아간다.
아직도 훌륭하게 기능하고 있는 요정 사제의 로브는 충분한 방호능력을 제공하고 있다.
케찰코아틀의 비늘이 재료로 들어간 단검이 불길을 일으킨다.
[투명화]라도 걸린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보조 무기인 다른 단검 하나도 왼손에 꺼내 들었다.
그리고 마력을 담고, 일어나는 케찰코아틀의 불길을 바닥을 향해 내려찍는다.
조정은 섬세하게, 사실 아직 잘한다고는 못한다.
전적으로 장비에 의지한 아주 옅은 [파이어 노바] 같은 것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은신]이나 [투명화]의 가장 큰 약점은 약간의 마력적 간섭만으로도 쉽게 무력화된다는 점이다.
일단의 무리가 나타난다.
순간적으로 세어보니 딱 네 명.
복장으로 판단하건대 전사, 궁수, 마법사, 암살자의 가장 표준적인 조합이다.
그리고 앞선 녀석들 보다 더 고레벨에, 더 고참일 거라는 아저씨의 판단은 옳았다.
소녀가 나타나는 즉시 날아드는 단검, 그리고 화살.
활을 꺼내 드는 동작도 보이지 않았다. 일종의 스킬인가?
치직 하고 튀는 푸른 번개도 보인다.
요정 사제의 로브는 높은 수준의 마법 저항을 제공한다.
그 끔찍할 정도로 강력했던 요정 마법사의 전격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 수준임이 뻔히 보인다.
저걸로는 소녀에게 짧은 마비조차도 일으키지 못한다.
하지만 피했다. 아저씨는 뭐든지 맞는 습관을 들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했다.
거의 딜레이 없이 날아든 단검에 화살은 물론이요, 전격조차 탄착 직전에 사선에서 벗어나 회피한다.
"미친……!"
억눌린 신음 같은 비명이 누군가 그 모습에 경악했음을 웅변했다.
단검 투척은 가장 처음 아저씨의 행동을 보고 연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아저씨가 봐도 박수를 쳐줄 정도로 능숙해졌다.
단순히 달려드는 동작이지만 이미 세 발의 단검이 비행 중이다.
이렇게 세 명 제거.
그렇게 생각했는데.
쇳소리가 났다.
단검이 박혀 쓰러졌어야 할 셋이 어떤 식으로건 막거나 피해내었다.
한눈에도 알 수 있다. 육체적 스펙에서는 소녀는커녕 지금의 아저씨에도 미치지 못한다.
제대로 보고 반응한 것이 아니다.
투명한 막이 주변에 나타나 있다.
알고 있는 것이다
[오토 실드]
3층에서 아저씨가 붙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어떤 남자가 가지고 있던 스킬이었다.
아저씨가 가장 마지막에 강조했던 말이 떠오른다.
[30년 차 근방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왕국까지 갈 자신은 없어. 어떻게 갈 수는 있지만 운이 조금 나쁘다면 쉽게 전복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왕국 이전 구간에선 까마득한 고참으로 취급받는 수준이지만, 결국 그 정도일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보통 그때 리셋 마라톤을 제대로 하게 되는 거지.]
그러니 아마 그런 어중간한 수준의 고참이 발견된다면.
3층의 그 남자처럼 뭔가 대단한 운이 따라줄 때까지 자살을 반복했을 확률이 아주 높다.
그 이후에도 틀어지기 시작하면 기꺼이 목숨을 던진다.
30년쯤 미궁에서 살다 보면 그렇게 되는 시기가 꼭 있다고.
아저씨는 그 후에 말했다.
그래서 이것이 시험이다.
"거기에 추가로 조건도 걸려 있고."
죽이면 안 된다. 제압만 해야 한다.
왜냐하면 피를 뽑아야 하니까.
표면상의 이유는 그거지만 소녀는 약간 다르게도 느꼈다.
7층부터 시작된 흔들림.
여기서 사람들을 죽이는 게 맞을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옳은 걸까?
그때부터 어딘가 공격에 사정을 두게 되었다.
어딘가, 아저씨가 그 생각을 오만하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니 이런 걸 조건으로 내건 것 아닐까.
이곳은 그런 여유가 있는 곳이 아니다.
바깥세상의 도덕은 버려라.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