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86화
9층 - Lv. 79 덜 약한 녀석들(3)
피의 지배력이라는 것은 사실 굉장히 애매하고 모호한 것이다.
이건 어느 정도는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바르바로이의 권능이 있어도 살아 있는 생명체의 체내에서 직접 피를 뽑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특별히 마법을 익히거나 마력을 다루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마법적 역장이 있기 때문이다.
미궁에 와서 마법을 죽어라 공부하며 놀랐던 점은, 마법이 상상 이상으로 그럴싸한 학문이라는 점이었다.
과학이란 분야에서는 미궁의 대륙이 현대의 지구 이상으로 치고 나가는 경우는 드물다.
미래에 우주 정거장이 건설되고 하는 시대조차도 그렇다.
그 시기의 언뜻 SF로 보이는 것들은 절반 이상은 마법이 작용하는 유사 과학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마법이라는 것이 의외로 또 과학적이다.
내 생각에는 생명체에게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견고한 마법적 역장이라는 것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다른 마법도 마찬가지다.
단지 현대 지구의 과학이 그곳까지 닿지 못했을 뿐이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도 같다고 하던가?
미궁에선 비유적 표현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서로 특별히 다른 것이 아니다. 방향성이 조금 다를 뿐.
발전하다 보면 언젠가 같은 곳에서 서로 마주치게 될 분야다.
과학은 영혼을 발견하고, 마법은 물리법칙을 발견한다.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이다.
참 재밌는 사실이지.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바르바로이의 권능, 혹은 평범한 뱀파이어의 피에 대한 지배력도 꽤나 의미심장한 작동 원리를 가지고 있다.
시야가 필요하다. 내가 확실하게 그 혈액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
그리고 그 혈액이 상대의 몸에서 벗어나 있는 것.
보통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간 혈액은 신체의 일부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피의 지배력이 미칠 수 있다.
몸에서 빠져나오는 그 순간 즉시 말이다.
이건 관측의 문제다. 그걸 자신의 신체로 관측하고 확정 짓는가.
마법은 그런 정신적인 부분과 관련이 깊다.
관측이란 것은 마법에 있어 아주 중요한 요소다.
난 그게 중요한 다른 학문을 하나 알고 있다. 양자 뭐시기라고.
언젠가 만났던 물리학자 출신의 유배자에게 물어보았던 적이 있다.
양자역학이랑 관련되어서 뭐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거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대충 그런 사고실험 아니었어?
물리학자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사실과 많이 다르며, 양자역학을 끌어들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왜냐고 묻자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도 몰라서 그래. 양자역학이란 게 원래 좀 그래.
그래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치웠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냥 오래 살다 보면 사소한 호기심도 생기곤 하는 법이다.
이렇듯 전공자도 아니고, 심지어 전공자도 모르는 분야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마법은 뭐, 이제 내 전공분야나 다름없는 수준이긴 하지만.
어쨌든 확인할 방도가 없으니 과학과 마법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저 내 심증이라고만 해두도록 하자.
* * *
소녀는 눈에 띄게 의기소침했다.
절망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이 마치 수능을 망친 고등학생 같았다.
표정이 풍부하다는 건 이럴 때는 단점이다.
보고만 있어도 나까지 우울해질 것 같다.
눈가가 촉촉하니 평소에는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색기마저 약간 엿보일 지경이다.
수능이라, 생각난 김에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도 수능은 보니?"
기특하게도 입을 조금 오물거리더니 대답은 곧잘 한다.
"저는 수시합격이었어요……."
"오, 무슨 과?"
"서울대학교 퇴마학과요."
음, 확실히 프리패스긴 하겠군.
그런데 그거 일반적인 학과라고 할 수 있나?
"민간 군사학과 비슷한 거라고 보면 될 걸요. 우리 세계에서 퇴마는 그런 거였어요. 국방이 달린 일."
"그건 참 신기하네. 내가 온 세계는 전투라고 해봐야 사람 사이에서만 벌어졌지."
"그건 저희 세계도 마찬가지였어요. 사람끼리 싸우는 건 어딜 가나 비슷한가 보네요."
그리곤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일단 직접 만든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묻는다.
"아니, 그렇게 충격이야?"
"한강에 가고 싶어요."
"왜?"
"아저씨가 기껏 믿어주고 기회를 줬는데 똑바로 못 했어요……."
가끔 궁금해지곤 한다.
이 아이에게 나는 뭘까?
사랑을 갈구하는 여고생에게 유사 연애 경험을 주며 대신 그 능력을 갈취하는 악덕 뭐시기 아닐까.
흠, 어려운 문제다. 그래도 성심성의껏 하도록 하자.
넘어가는 일은 없겠지만.
머리를 문질문질해 주며 대답한다.
"합겨억!"
"네?"
"합격이라고."
어리둥절한 얼굴이 또 귀엽다. 오밀조밀하게 생겨가지고 움직임은 참 많다. 팔이 파닥거리고 있다.
"아무 정보 없이도 그 정도로 대응하는 걸 보여줬으니 충분해."
누구도 할 수 없을 만큼 훌륭했다.
로그라이크라는 장르가 원래 처음에는 아무 정보 없이 부딪히고 죽어가며 배우는 것이다.
그러니 죽는 건 당연한 거고 얼마나 선전하냐가 문제였다.
본격적으로 스킬을 세팅하기 시작하는 적은 아무 맥락 없이도 온갖 거지 같은 일들을 해낼 수 있다.
거기에 딱히 이치는 없다. 상상치도 못한 일들투성이다.
[메인 던전]으로 가도 마찬가지다. 거기서부터는 NPC들도 그러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 합리의 토대 위에 세워진 대륙과는 다르게 그곳은 정말 불합리의 결정체나 다름없다.
결국 임기응변이 중요한데, 소녀는 충분히 해냈다.
"뭐, 난 다 외우고 있지만 말이지."
"잘났어! 정말!"
울면서 함박웃음이란. 심지어 입으로는 매도하고 있다.
내가 좀 못 할 짓을 했나 싶기도 하다.
* * *
다른 파티원들이 제압당한 녀석들을 묶어왔다.
지혈은 신경 쓰고 있었으므로 방치되었음에도 죽을 정도로 출혈이 심한 녀석들은 없다.
각기 소지하고 있는 포션 병을 압수하고 솔솔 뿌려 준다.
물론 상태가 멀쩡해 보이는 녀석들의 피는 치료 전에 호로록 뽑아 마셨다. 죽지 않을 정도로, 마치 적십자에 헌혈하면 뽑아가는 정도로 말이다.
창작물에서는 흔히 피의 질에 따라 뱀파이어가 얻는 힘이 달라지고 뭐 그런 이야기가 있다.
여기선 별로 그런 건 없다. 피는 다 피고 딱히 고레벨이라고 구성성분이 다르지는 않다는 말이렷다.
애초에 인간 기반의 뱀파이어인 나는 인간의 피가 아니면 섭취할 수도 없다.
요즘 들어 부쩍 미궁에 대한 호기심이 늘어난 소녀가 묻는다.
"그럼 카드를 써서 뱀파이어가 되면 뭐가 달라지나요?"
"카드?"
"네. 천사 언데드 같은 게 존재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저건 바른 이해다. 뱀파이어 카드를 쓰면 당시의 종족 그대로 뱀파이어화 되는가?
이건 유추로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니까.
하지만 당연하게도 천사나 악마 같은 종족은 뱀파이어에게 물려도 뱀파이어가 될 수는 없다.
"흠, 너 진조라고 아니?"
"오……."
"아는 것 같으니 더 말하지 않겠다."
카드로 될 수 있는 뱀파이어는 말하자면 모든 뱀파이어의 시조에 해당하는 격을 지닌다.
모든 뱀파이어의 원조, 최초의 뱀파이어.
강력하기 때문에 천사나 악마처럼 고위종족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조금 미묘한 구석도 있다.
시조라고해서 대단히 특별한 힘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뱀파이어라면 열심히 마인드맵을 퍼뜨려서 메꿔야 할 약점에 처음부터 면역일 뿐이다.
대량의 포인트를 아낄 수 있다는 부분은 분명 장점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뱀파이어로도 한 1,000렙 정도 찍으면 도달할 수 있는 영역다 보니 엔드 컨텐츠 기준의 성능은 미묘하다고 해야 할까.
그쯤 되면 그냥 고레벨 뱀파이어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NPC로서도 서버마다 꼭 한두 놈은 어딘가에 얼쩡거리고 있지만 대체로 보게 될 일은 없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근거지랄 것도 없는 녀석들이다.
가끔은 우주 공간으로 사출된 후에도 죽지 않아서 생각하기를 그만두는 케이스도 있을 정도라서 뭐.
"알아야 할게 정말로 많네요."
"아냐, 뱀파이어들은 그냥 약점만 알아두면 되는 거야. 시조 뱀파이어는 히어로 유닛급이긴 하지만 메인스트림에 관여하진 않거든."
"길 가다 재수 없이 마주칠 수도 있는 필드 보스?"
"딱 그거지."
어라, 잠깐만. 우리 파티에 이상한 걸 다 끌어당기는 녀석이 하나 있는데.
그래도 뭐 진짜로 그런 일이야 있겠어.
* * *
오두막을 막사처럼 지어둔 것엔 이유가 있다.
생포한 녀석들을 보관해야 하니까.
전부 기절시켜서 눕혀두었다. 마법적으로 의식이 돌아오지 않게 해두었다. 철저할 때는 철저해야 한다.
"음, 아무리 유배자라지만 이건 또 좀 도의적으로……."
"그래?"
파티원들이 조금 질린 표정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어차피 목숨이 하나도 아닌 친구들인 데다가 고통도 없고 정말 편안히 갈 건데. 눈 떠보면 다음 회차일걸?"
영감님은 오크답게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포로로 잡혔다면 어떻게 쓰여도 상관없는 법이지. 하하하."
비주얼적인 문제가 있는 건 알겠지만 꼼꼼하게 따져도 특별히 못 할 짓은 아니다.
내가 저들은 그냥 죽이건 이렇게 죽이건 대체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 와중 소녀가 눈을 꼭 감고 명상하듯 앉아 있다. 얼씨구, 가부좌도 틀었네.
"뭐 깨달음이라도 얻으려고?"
소녀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여전히 명상하는 자세는 그대로다.
"복기해보고 있어요."
그러면서 입은 연다.
"실패한 전투를?"
"집에선 항상 이렇게 했거든요."
좋아, 일단 내 유배자 취급에 불만은 없는 모양이군.
보기 불편한 것 같아 미래의 꼬맹이가 가져왔던 망토를 커튼처럼 달아서 가려두었다.
그리고 막내가 간단하게 나무를 깎아서 만든 식탁에 둘러앉는다.
소녀는 한쪽 눈만 살짝 뜨고 살피더니 메뉴가 전투 후에 사냥꾼이 잠깐 나가서 잡아 온 새고기인 것을 보고는 얼른 달려와 앉았다.
다들 피식하며 고기를 뜯는다.
평화로운 아침이다.
고소한 고기 냄새가 자극이 되었는지 기절하듯 잠들어 있던 꼬마 마법사와 임시 동료들이 하나둘 눈을 뜨기 시작했다.
* * *
설원은 나쁘지만 자유 PK층은 좋다.
9층에 자리를 잡고 유배자 사냥을 벌이고 있던 파티들은 모두 자유 PK층이 호재라고 생각했다.
미궁은 그 특성상 아무리 노력해도 한 층에서 얻을 수 있는 재화나 경험치가 제한되어 있다.
일부 예외를 빼면 그렇다. 자유 PK층이 바로 그 예외다.
레벨이 절대적인 강함의 척도가 아님을 어느 정도야 알고 있지만, 반대로 그만큼 손쉽게 강해질 방법도 달리 없다.
당장 왕국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거나, 좀 더 멀리 내다봐서 왕국에 제대로 자리를 잡을 만큼의 힘을 원하는 유배자들은 어렵지 않게 뭉칠 수 있었다.
새로 9층에 진입하는 유배자들이 스폰되는 장소는 정해져 있다.
그 자리를 지키다가 기습하는 것은 좋은 전략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강해지고 나서는 특별히 그럴 필요도 없게 되었다.
부익부 빈익빈이다.
선점한 자들은 점점 뒤늦게 9층에 들어오는 자들과의 차이를 벌린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일종의 오락으로서 인간 사냥을 즐기게 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미궁이란 기묘한 환경은 사람을 쉽게 미치도록 만든다.
그러다 보면 미친 사람을 혐오하는 이들도 생긴다.
그러나 당장 자신의 이익을 위해 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서로 다를 것이 없다.
그 이익을 지키기 위해 서로 영역을 갈라서 사냥감을 나누어 가지던 모두가 모였다.
"바르바로이?"
"그 클랜 마스터 말하는 거요?"
당연하지만 소식을 들은 다른 파티의 리더들은 의아함을 표한다.
어느 정도 고참급에서는 악명 높은 바르바로이다.
겪어보지는 못했어도 왕국에 가보았을 정도면 들은 적은 있다.
"그걸 파티원으로 삼을 수가 있다고?"
"아니, 그보다 바르바로이가 그런 식으로 권능을 다루나?"
의아함은 커져만 간다. 하지만 그 장면을 지켜본 이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피를 그런 식으로 다루는 건, 바르바로이가 아니면 시조 뱀파이어가 와도 무리지."
"모습은 확인했습니까?"
"어딘가 은신하고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인데."
"전투 장면이 잡혔다는 오두막의 여자애도 이상하게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생각을 하는 파티도 있다.
"저거 집 엄청 그럴싸한데? 어떻게 저걸 하루 만에 지었지?"
"더럽게 추운 날씨에 틈만 나면 눈보라. 지긋지긋한데 말이지."
그들의 불행은 전투 장면을 기록으로 남길 정도의 마법사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용기를 품은 자가 생겨났다.
"가서 죽이면 똑같지 않나? 그거 뭐 어렵다고."
으르렁거리듯 말하는 이는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오크.
전사로서는 충분히 강인하며 용맹한 종족이다.
성격적으로는 호전성이 늘어나는 부분도 있다.
바르바로이가 인간 기반의 뱀파이어기에, 인간에게는 결코 지지 않는 수준의 위용을 자랑하는 바르바로이를 상대로도 할 만할지도 모른다.
다른 모든 파티들은 반색했다.
"저희는 양보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시오."
가장 처음 피가 숲을 휩쓰는 장면을 보았던 여자와 남자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들의 생각에는 인간이 문제가 아니었다.
클래스도 확인되지 않은 바르바로이는 뭔가 대단히 불길한 느낌을 주고 있다.
하지만 호전적인 오크 전사도 아주 바보는 아니다.
"남이 나서서 벌집을 쑤시는 걸 구경만 하면 안 되는 거지. 안 그런가?"
그 이후로는 눈치 보기 싸움이었다.
서로를 그리 신뢰하는 관계는 아니다 보니 결론이 나는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앞장서는 것은 오크 전사의 파티지만 다른 모두도 후방에서 지원을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바르바로이에게 피를 바치는 멍청한 짓만 하지 말라고. 회복하기 시작하면 답이 없어지니."
오크 전사가 번개가 양각된 해머를 집어 들었다.
이번 회차는 아주 운이 좋았다. 전사를 주력으로 하는데 오크 카드와 [묠니르]를 얻었다.
매직이니 유니크니 하는 등급의 규격 외에 존재하는 [고정 아티팩트]다.
한 서버는커녕, 한 회차에 단 하나만 존재하는 아주 귀중한 무기.
정 안 되면 왕국에 가서 이걸 팔아치우기만 해도 부귀영화가 기다린다.
물론 오크 전사의 야망은 거기서 끝나지는 않았다.
왕국의 맛을 본 자들 중, 정착에 만족하지 않는 자들의 새로운 목표는 언제나 랭커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