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87화
9층 - Lv. 79 덜 약한 녀석들(4)
눈보라도 잠잠해졌고, 하늘도 조금씩 개고 있다.
사실 이 막사 형태의 오두막은 썩 쾌적한 가옥이라 할 수는 없다.
급하게 나무를 깎으며 짜 맞추기만 한지라 벽에서조차 외풍이 솔솔 들어온다.
땡바람을 맞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춥지 않을 수는 없다.
안락한 설산의 별장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셈이다.
거기에 생나무를 베어 그대로 만들었기에 향이 고스란히 집안에 맴돈다.
딱히 나무를 골라서 만들었다기보단 대충 보이는 대로 베어 만든 탓이기도 하다.
온갖 종류의 생나무 향이 코를 찌른다. 피톤치드인가 하면 또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일단 9층의 지형은 숲이 존재한다.
툰드라 지대 수준은 아니고 타이가(Taiga)다.
지구로 치자면 대충 시베리아 벌판의 숲이라는 정도.
냉대기후의 숲은 농사를 짓기엔 척박하다. 목축도 순록을 어떻게 길들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뭐 어찌 살아갈 수는 있되 결코 편안한 곳은 아니다.
사냥꾼과 영감님이 순록을 한 마리 잡아 왔다.
나는 그걸로 수프를 만들었다. 재료는 이전 층에서 가져온 것이 있다.
대부분은 막내의 등짐에서 나온 것이다.
파티원은 개인이 소지할 수 있는 짐의 한계 때문에라도 필요하다.
무게는 그렇다 쳐도 부피는 거인이라도 되는 게 아니면 방법이 없다.
꼬마 마법사는 뭐라도 돕겠다는 듯 내 옆을 맴돌고 있다.
"요리 잘해?"
"네? 아, 아니요."
"그럼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그럼에도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나는 마지못해 그릇을 건네며 식기를 놓아달라고 했다.
할 일이 생기자 오히려 안심이 되는 듯하다.
사냥꾼이 처음 합류했을 때가 생각나는군.
그 양반도 2층에서는 저렇게 버려질까 봐 전전긍긍했다.
지금은…….
"술입니다!"
"술이군!"
영감님과 함께 생포한 유배자들의 소지품을 검사하다가 만세를 부른다.
술을 싫어하는 유배자는 거의 없다. 술을 싫어하는 오크는 그냥 없다.
완성된 수프는 내가 보기에도 훌륭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요리사나 해야겠다.
호응도 당연히 격렬하다. 맛은 진하지만 싱겁지 않게, 풍미는 강하지만 지나치지 않게.
미궁에서 익힌 재주 중에 가장 쓸모 있는 것 중 하나다.
쓸 일도 가장 많다. ‘의식주’에서 ‘의’와 ‘주’는 마인드맵을 바탕으로 초인이 되어간다면 크게 연연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식’은 방법이 없다.
깨어나서 무엇을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던 꼬마 마법사의 임시 동료들은 일단 주니까 받아먹는다.
나는 그 앞으로 가서 팔을 좌우로 펼치고 눈을 감았다.
꼬마 마법사는 소심한 행동에 비해 눈치가 빠르다. 마법은 똑똑해야 배운다.
작은 손으로 박수를 먼저 치기 시작하자 다른 이들도 따라 한다.
나는 열화와도 같은 성원에 감사하며 고개를 숙였다.
"뭐, 장난은 이쯤하고 당신들한테 물어볼 게 있단 말이지. 아, 먹으면서 말해."
탐문조사는 적의 규모에 대해서다.
일단 인간을 상대로는 질 수가 없으니 아무리 많아도 상관이 없다.
천사같이 극상성의 종족이 있지만 않으면 된다.
천사와 악수만 해도 언데드인 나는 대미지를 입을 것이다.
물론 정확한 정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눈 덮인 숲에서 추격당하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살아남기에만 급급하면 시야가 좁아지는 법이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 윤곽은 잡을 수 있다.
"그 정도면 별 상관없겠군."
어딜 도망가기야 하겠나 싶다. 어차피 이미 여기서 레벨링을 어느 정도 진행한 녀석들일 것이다.
벌써 뭐가 나올지 모르는 보스 층인 10층으로 떠나고 싶은 녀석들은 없다.
뭐가 되었던 좀 더 바닥까지 이득을 긁어 취한 후에 이동하고 싶어 하겠지.
그렇다면 내가 겁을 줄 필요는 없다. 어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알아서 이곳으로 찾아오고 있는 상황이다.
아직 인간인 파티원들에게 휴식을 줄 필요도 있으니 머무르다가 이동하는 것이 맞다.
꼬마 마법사의 임시 동료들은 피가 모자란다면 생각해 보자. 어지간하면 그냥 놔줄 생각이다.
딱히 이유는 없다. 굳이 꼽으라면 우리 파티를 적대하지는 않았다. 이것 하나.
원래 미궁은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게 속 편하다.
"그럼, 하던 거나 계속하면 되겠군."
장비는 지속적으로 노획하게 될 테니 문제없다.
기본기에 가까운 하위 스킬들 말고, 본격적으로 클래스 분화가 이루어지는 중위 스킬을 다듬어볼 시간이다.
9층을 벗어나면 더 이상 느긋하게 쉴 시간은 없다.
3번째 테마인 우주는 달리다시피 빠르게 돌파해야 한다.
소녀 버전 헬 난이도에 우주가 더해진 상황이다.
시간의 신전을 통한 과거 간섭이 없었다면 돌파할 수 없는 수준의 난장판이 11층부터 펼쳐진다.
정상적으로라면 나라도 그건 못 돌파했다.
하지만 행운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시간의 신전도 쉽게 나타나는 게 아니니까.
요번 회차는 모든 랜덤 요소가 정말 아슬아슬하게 어떻게든 할 수 있게만 나오는 기분이 든다.
* * *
9층을 점령한 유배자 연합은 신중하게 움직였다.
바르바로이의 악명을 구체적으로 모르던 자들도 경험한 자들의 설명을 듣고는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강대한 네임드 뱀파이어인 것만으로도 곤란한데, 클랜 마스터로서의 권능이 피를 지배하는 것.
그것도 상처만 나도 피를 빨아갈 정도로 강력하고 범위가 넓은 권능이다.
당연히 공략의 주축은 인간이 아닌 자들이 되어야 했다.
용맹한 오크 전사를 필두로 작전 계획이 수립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자기네 파티의 리더에게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럴 필요가 있습니까? 리더."
"뭐가?"
"우리는 충분히 레벨링을 했습니다. 그냥 다음 층으로 넘어가면 되는 것 아닙니까?"
파티 리더인 잎사귀 요정 여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녀석도 분명 있을 거야. 하지만 지금 그럴 수는 없어."
어째서인가?
파티원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의문이다.
이 녀석은 연차가 얼마 안 되는 녀석이었지.
37년 차 요정 리더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축이 되는 4개의 파티 중 하나는 그녀의 파티다.
하지만 그 외에도 쓸모를 인정받아 하수인처럼 부려지고 있는 다른 파티들도 많다.
모두 합치면 이미 죽은 두 파티를 제외하더라도 60여 명은 될 것이다.
9층은 충분히 넓었고, 각자가 새로이 들어오는 유배자들을 사냥할 만큼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연히 다들 욕심을 부린다.
이번 회차는 운이 좋았다. 그러니 몸을 사리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20년도 못 채운 애송이들이다.
운이 좋았으니 앞으로도 좋을 것이다. 혹은 좋지 않은 일이 생기더라도 얻어둔 장비나 올려둔 레벨을 바탕으로 극복할 것이다.
이게 더 올바른 스탠스다.
유배자로서 도태되는 것은 별 게 아니다.
아직 다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사리기만 하는 것이다.
죽어도 어차피 다시 시작된다. 2층에서 혼자 반나절 정도 훌쩍이며 마음을 달래고 나면 다시 나아갈 수 있다.
물론 그 말만으로는 파티원이 납득하지 못했다.
요정 리더는 이해했다.
이제 겨우 삶에 급급하지만 않고 미궁의 시스템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단계다.
걸음마를 막 떼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 위에서 보면 당연한 것도 아래에서는 알 수 없다.
그러니 더 알기 쉬운 이유를 알려 주자.
"이미 외통수야. 그 오크 녀석들 있잖아."
현재 주축인 4개 파티 중에 가장 강한 세력.
아티팩트인 [묠니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파티들이 탐을 내기보다는 적대하지 않기를 원할 정도로 압도적이다.
네 명 전원이 오크 카드를 손에 넣었다.
심지어 자신처럼 5층 보스전의 히든 던전에서 손에 넣은 것도 아닌 모양이다.
그냥 운이다.
선을 넘을 정도의 행운.
"그 녀석들이 하자고 했어. 모두 함께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거기에 다들 이미 넘어갔단 말이지. 이때 우리만 빠지겠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도달하기 쉬운 결론이다. 오히려 연차가 낮을수록 약탈과 살인이 더 자주 일어난다.
당장의 안위도 위태로우니까 그렇다.
"지금 다들 서로 슬쩍슬쩍 눈치 보고 있는 게 뭐 예뻐서 그런 줄 알아? 빠지겠다는 파티는 즉시 공격받을 거야."
빠지려고 했다면 알리지 않고 그냥 계단으로 무단이탈해야 했다.
오크 녀석들이 막고 있긴 하겠지만 어떻게든 기습 강행돌파한다면 못할 것도 없다.
"이미 한 배에 탄 것이지."
그리고 마찬가지의 속셈은 요정 리더에게도 있었다.
9층의 유배자 연합에서 가장 연차가 높은 것이 그녀다.
당장의 전력 문제로 오크 파티에게 파워 게임에서 밀려났을 뿐, 그 녀석들만 어떻게 된다면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다.
안 되면 다시 시작하는 거고.
요정 카드가 썩 좋은 카드는 아니다. 5층에서 뽑기를 한 번 더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말이지."
여기서부터는 혼잣말이었다.
주변을 둘러본다. 이미 인간이 아닌 유배자들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
본래라면 9층 수준에서 이러기는 쉽지 않다.
하기야 2테마가 설원인 것부터 너무하다.
어딘가 이상한 회차다.
거기에.
"벌써 미래까지 튀었다가 돌아온 파티도 있고……."
연합의 또 다른 주축 파티.
총기는 물론 로켓도 넉넉하게 챙겨왔다. 탄약고를 탈탈 터느라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확률이 좀 이상해 다들."
이번에 출현한 홀수 층의 바르바로이만 해도 그렇다.
난이도 이상을 보면 왕국까지의 여정이 짧을 것은 확정 사항이다. 그러니 좀 후반에나 모습을 드러낼 현상들이 왕왕 일어날 법은 하다.
하지만 대체 뭐가 이렇게까지 펑펑 튀어대는 회차인지 모르겠다.
결정적으로, 요정 카드는 썩 마음에 드는 결과도 아니었다.
"X발, 나만 운이 없다니까 하여튼."
* * *
여궁수는 파티 리더를 그만두었다.
다른 파티의 아래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32년 차 유배자인 바위 난쟁이가 리더로 있는 그 파티는 9층을 갈라 먹고 있는 4개 파티 중 하나다.
꼬마 마법사는 빠르게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노인, 그리고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전사와 함께 도주하던 중, 전사가 배신했다.
전사는 노인을 베어버렸다. 명백한 암습 판정에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여궁수 본인은 궁수였다. 갑자기 시작된 근접전을 수월하게 해낼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전사는 팔을 잃고 저항할 수 없게 된 자신을 추격자에게 바쳤다.
‘제길, 이래서 중간에 갑자기 영입하는 파티원은 좀.’
자결할 방법을 따로 마련해 두지 않아서 귀찮게 되었다.
이제 와서 정조에 연연하지는 않지만 미궁에는 법이 없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죽은 것은 전사였다.
32년 차 까마득한 고참인 난쟁이 선배님은 배신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면 도리어 전사의 머리를 메이스로 박살 냈다.
귀찮고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난쟁이 리더가 말했다.
"그 작은 파티에서도 리더를 하고 있었으면 쓸 만한 녀석이지. 몇 년 차인가?"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꼬마 마법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행방을 알아보려고 했다.
"그쪽은 우리 영역이 아니어서 말이지. 마법사 전문은 드문데 아쉽게 되었군."
다들 침범에 민감하다. 서로를 신뢰하는 관계는 아니기에, 위험을 감수하기 싫다고 했다.
합리적이다. 여궁수는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그런데.
바르바로이?
뭔지 모른다. 설명은 들었다. 아주 위험한 뱀파이어다.
고참들도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하는 의문을 가졌다. 애초에 목격한 것이 여궁수의 리더인 난쟁이와 다른 쪽의 여자 요정 파티 리더뿐이다.
하지만 염탐하러 간 암살자들이 시신을 발견했다.
가장 먼저 의문의 오두막을 습격했던 파티다.
4개의 주축 파티 중에서 유일하게 리더가 인간이었던 파티였다.
미라나 다름없는 몰골이었다. 피가 모두 사라져 있다.
미궁은 모든 것을 직접 확인한 후 행동할 수 없는 땅이다.
고참들은 바르바로이의 존재가 사실이라고 믿기로 했다.
직접적인 흡혈로 피를 뽑았다고는 믿기에는 한순간에 혈액이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그 이후 일어난 일은…….
이건 뭐 이미 단체 레이드나 다름없다. 왕국 이후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고 들었는데, 여궁수로서는 들어보았을 뿐인 일이다.
마법사들이 함께 큰 포위진을 그린다.
오두막 근방으로는 이동하지 않는다.
마력이 감지될까 봐 제대로 된 마법도 사용하지 않고 움직인다.
여궁수 본인도 동원되어 궁수 클래스나 암살자 클래스들은 물리적인 함정을 잔뜩 설치하고 있다.
수류탄이나 클레이모어 따위의 현대적인 병기를 잔뜩 루팅해 온 파티에서 어느 정도 물건들을 풀기 시작했다.
든든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바르바로이가 아니라 바르바로이 할애비가 와도 어쩔 수 없어 보이는 토벌대였다.
하지만 여궁수는 한 가지 불안함을 지울 수 없었다.
반응을 보면 바르바로이를 파티원으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꽤 의아한 일인 모양이었다.
여궁수는 의아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선배님을 한 분 더 알고 있다.
최근엔 보지 못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