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88화
9층 - Lv. 79 덜 약한 녀석들(5)
저녁나절까지 마인드맵을 상담해 주거나 알아야 할 내용을 설명하거나, 그리고 집기와 가구를 만들거나. 그러며 보냈다.
저녁나절이 되어 해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소녀와 집 옆에서 대련을 했다.
이번에는 [스킬]에 대응하는 법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함이다.
순수한 체술이라면 더 발전하기 힘들다. 기술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경험이 부족하다.
나라고 모든 스킬을 가진 것은 아니기에 스킬은 어느 정도 마법으로 대체한다.
마법 저항을 없애기 위해 요정 사제의 로브는 벗겼다.
대신 꼬마 마법사의 로브를 입혔다. 다들 단벌 신사니 뭐 어쩔 수 없다.
소녀가 감지하지 못할 정도의 미세한 마력 운용으로 내가 아는 스킬들을 구현한다.
매번 다른 것으로.
스타일도 다르게 했다. 궁수로서, 마법사로서, 전사로서, 때로는 암살자로서.
"으갸악!"
소녀는 앞으로 넘어지며 눈에 머리를 박았다.
[컨퓨즈]에 걸렸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균형 감각이었으나 소용없다.
"히이익!"
소녀는 겁에 질려 몸이 얼어붙었다.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피어]다.
대체 뭘 본 건지 엄청나게 혼났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나를 때리는데 좀 귀엽긴 했다.
"윽! 엑! 아약!"
소녀는 자신이 던진 단검에 얻어맞았다. 날을 세우지 않고 깎아 만든 목재였기에 혹이 났을 뿐 다치지는 않았다.
아무 맥락 없이 투사체를 반사하는 [리플렉트 미사일]이다.
"우와아아아아아!"
소녀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자의는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아무 맥락 없이 중력을 잠깐 반전하는 [리버스 그래비티]다.
사냥꾼과 막내는 그 정도로 가혹하게 단련시킬 생각은 없다. 저 친구들은 제 역할만 잘 해주면 된다.
사냥꾼은 슬슬 탄이 바닥나가는 플린트락을 아쉽게 바라본다.
막내는 방패를 어떻게 수리할 방법이 없나 궁리했다. 나는 없다고 단언했다.
영감님은 흥미가 있어 보였다. 몇 번은 소녀를 나 대신 상대해 주었다.
전사로서, 주술사로서, 심지어 주술을 쓰는 전사로서.
의외로 팽팽한 전적이 나왔는데 전사인 트동트에게는 소녀가 승리했다.
주술사인 트동트에게는 아주 혼쭐이 났다.
"주술 전사가 별로 좋진 않군요."
"내 감이 아직 덜 돌아와서일세!"
영감님이 정색하며 반박했다.
주술 전사로서는 팽팽했다.
이제 녹초가 된 소녀가 말했다.
"저 그냥 주술 배울까요?"
"왜? 개사기 같아?"
"네."
"크흠흠."
내심 기분 좋아하는 영감님을 내버려 두고 마법으로 눈을 녹여 물을 만든다.
땀을 잔뜩 흘릴 정도였으니 세탁과 목욕을 시켜줄 필요가 있지.
놀랍게도 오두막에는 샤워실도 만들어 두었다.
평소에는 전혀 챙기지 못하는 위생이지만, 쉴 때만큼은 쾌적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풍족하진 못하기에 성별끼리 묶어서 셋씩 쓰게 한다. 물을 데우는 건 나다.
공교롭지만 여성은 꼬마 마법사와 소녀, 그리고 꼬맹이뿐이었다.
꼬맹이는 깨어난 후에도 한동안 아무도 눈치를 못 챘을 정도로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고만 있다. 정상인 상태는 아니다.
이걸 어떻게 그 8층에서 본 맹랑한 녀석으로 만들지?
일단 냄새가 날 정도로 더러우니 둘에게 데려가서 씻기라고 했다.
"훔쳐보면 죽일 거예요!"
"그래그래. 귀엽다. 귀엽다."
"이 씨! 저 곧 성인이거든요!"
정말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소녀의 대사와 함께 여성진들이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실로 들어간다.
물의 온도를 유지하며 오랜만에 박쥐를 날려보았다.
주변에 무슨 일은 없나?
있었다.
"이 녀석들 뭐 아예 공사를 하고 있네? 공성전 준비인가."
어이가 없군. 그냥 작은 오두막인데.
그냥 찾아올 때까지 내버려 두기로 했다.
따끈한 김을 피워 올리며 여성진들이 나온다. 막내와 영감님은 더블 바이셉스 포즈를 서로에게 취하더니 함께 들어갔다.
사냥꾼도 싫은 표정으로 그 사이에 낀다.
영감님은 아무래도 막내가 알려주는 현대 피트니스의 정수에 깊은 감명을 받은 듯했다.
보디빌딩이라도 할 생각인 건지. 대체 포즈 연습은 왜 하는 거야?
물 온도를 또 유지하고 있자니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소녀가 다가온다.
"춥다. 머리 말려. 아니지 그것도 있다가 내가 해줘야 하는구나. 그립다. 드라이기. 그립다. 전기."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한다.
"져버렸어요!"
"뭘?"
"중학생 마법사한테…… 저는 고등학생인데!"
"키? 비슷하던데. 네가 약간 더 작아졌어?"
"그거 말고요!"
뭔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투덜투덜하며 자긴 언제 크냐는 소녀에게 작아도 귀여워서 좋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요?"
급격하게 싱글벙글.
그래도 전투에는 키가 좀 큰 게 더 좋을 텐데 말이지.
그러고 보니 천사를 잊고 있었다. 소녀의 손을 붙잡는다.
소녀가 눈이 커지더니 여신님이 말하는 것을 듣고는 실망한다.
그래도 손은 놓지 않는다. 반대 손도 가져와 꼭 잡고 있다.
「천사? 이제 막 왕국의 입구에 도달했다.」
‘이제 말입니까? 우주에서 고생 좀 했나 보군요.’
「좀 이상한 게 많이 나오긴 했는데, 천사는 맨몸으로도 우주 공간에서 자유비행이 가능하니 말이지.」
‘신도가 우주를 관측했으니 이제 고블레타리아 연방과 이어졌겠군요.’
「그건 아니지. 우주 괴물들한테나 쫓겨 다녔지 문명을 관측하진 못했거든.」
미궁에서 대륙의 미래라는 것은 확정되기 전까지는 어떤지 알 수 없다.
명확하게 유배자 신도가 그 사실을 관측해야 신도 미래의 신도와 이어질 수 있다.
여신님의 신도는 아직도 어디 구석탱이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작은 고블린 무리들뿐이다.
만약 혼돈의 신도인 누군가가 미래에서 고블레타리아 연방과 접촉하게 된다면 그 순간부터 여신님은 수십억 고블린 연방 신도를 거느리게 된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아주 기대되는군. 후후후.」
NPC 신도의 가치는 유배자 신도만큼 크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스케일 자체가 다른 우주 시대의 인구를 거느린다는 점은 의미가 크다.
그런 미래는 인구는 많지만 과학과 마법의 발달과 유배자의 정체를 알게 되는 등의 문제로, 신앙의 힘이 아주 약해진다.
그 상황에서도 하나의 나라에 국교로 남아 있는 혼돈의 교단이라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대체 어떻게 한 걸까요?’
「내가 좀 굉장하지.」
진짜 굉장하기 때문에 부정하지 않았다.
신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오래해 본 것도 아니다.
신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노하우라면 여신님이 나보다 위라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도록 하자.
「아니, 그럼 그것까지 이겨 먹으려고?」
‘제가 좀 굉장하니까요.’
「그건 맞지.」
이걸 인정해 버리시다니. 허허.
‘혹시 천사가 블랑쉐는 못 봤답니까?’
가능성은 낮지만 모를 일이다.
「못 봤다는데?」
다행이군. 이상한 악연이 내가 모르는 곳에서 늘어나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이미 왕국에 넘어가 있다고 봐야 할까?
그럴 만한 시간이긴 했다.
나는 바깥에서 공사를 벌이고 있는 일단의 유배자 무리들을 박쥐를 통해 관찰하며 꼬맹이에게 갔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를 못하고 있다. 이럴 때는 약간 충격 요법이다 뱀파이어에게 피란 것은 육신이며 영혼이며, 뭐 아무튼 전부다.
서로의 손가락에 피를 낸다.
이 상처를 마주 댄다. 혈관이 하나로 이어졌다.
다른 클랜이 아닌 같은 혈족이기에 거부감 없이 이어져서 흐른다. 상대의 생각이, 그리고 내 생각이 서로 뒤섞인다.
여기서 충격 요법이라는 것은 유배자가 가진 무수한 절망, 그리고 끔찍한 기억.
내 것은 당연히 아주 순도가 높다.
그러며 나도 저쪽의 생각을 읽는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귀찮고 피곤하군.
그냥 죽고 싶어 하는 상태다.
삶에 동기부여를 해주자. 내 삶의 일부를 간접체험 시켜주마.
약 10분이 흐른 후, 꼬맹이는 바들바들 경련하고 있었다.
후후, 내 안의 어둠이 이 정도란다.
마침내 눈동자가 움직인다.
"누구……?"
사정없이 떨리는 새빨간 눈.
경련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에 떨리는 몸.
과연, 이렇게 아빠라고 부르라고 한 건가?
솔직히 말하면 온전히 내 의지인지는 모르겠다.
미래에서 이미 그렇게 흘러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로 선택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망토를 보여주었다.
어깨 한쪽을 덮는 자그마한 갈라진 망토.
눈에 아주 익은 물건일 것이다.
"으음, 그래. 아빠란다?"
꼬맹이의 눈이 커진다.
더듬더듬하더니 앞으로 달려온다. 그리고 폭 안긴다.
망토를 만지작거린다.
내가 바르바로이와 비슷하게 생겼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바르바로이는 아주 귀족적이고 오만하고, 고압적인 올백 머리다. 잘생기긴 했는데 차가운 느낌.
나는 좀 따뜻해 보이지 않나?
꼬맹이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모양이다.
"흐아아앙! 으아아앙!"
* * *
힘들긴 했네.
대충 바르바로이 클랜이 와해되어 클랜원들이 낙오된 후의 이야기를 들었다.
더듬더듬 말하고 어눌하지만 눈에는 총기가 있다.
마법에 대한 재능은 대체로 똑똑하다는 뜻도 된다.
흠, 소녀도 그런가? 기본적으로는 똑똑한 거 같은데 한 번씩 아주 맹할 때가 있단 말이야.
그거야 어찌 되었건 애를 달래는 것은 익숙하다.
여신님께 바치지 않고 남겨둔 사탕도 하나 물려주자 꼬맹이는 완전히 안정되었다.
자칭 엄마인 소녀가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더니 말했다.
"여신님이 요즘 왜 사탕이 없냐고 투덜거리시는데요?"
"그럼 이걸 뺏어주리?"
소녀가 잠깐 눈을 위로 향한다. 그걸 또 묻고 있나 보다.
「참으신데요.」
그럼 뺐을 고민은 해봤다는 거 아냐. 요리를 너무 잘해도 문제군. 신마저 유혹하는…….
"그럼 진짜 아빠는요?"
바르바로이 이야기군.
"곧 만날 수 있을 거야. 여기서 좀 지내다가 가면 있을 거란다."
꼬맹이의 눈에 깃드는 것은 의구심, 그리고 적개심.
어쩔 수 없나? 처음 보는 모르는 뱀파이어가 갑자기 클랜 마스터의 권능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본능적으로 알 것이다. 피도 섞었으니 더 확실히 안다.
나는 클랜 마스터가 아니다.
"일단은 편하게 지내도록 하렴."
나는 그 이상으로는 말하지 않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소녀가 알아서 하겠지. 아주 귀여워했으니까. 나라고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녀가 더 나을 거다.
저 녀석도 1층에서 대뜸 처음 보는 나를 좋다고 졸졸 따라다니는 수준의 친화력이 있으니까.
잎사귀 요정들이랑은 그새 얼마나 친해졌는지 한 번씩 보고 싶다는 소리도 한다.
밖으로 나갔다.
이젠 해가 완전히 졌다.
공사를 벌이고 있던 녀석들은 얼른 철수했고, 아예 숨어들었다.
아마 내가 밖으로 나가면 감지할 수 있도록 무슨 장치를 해두었겠지.
밤에 뱀파이어와 싸우는 짓을 하려는 바보들은 없다.
철저하게 숨어다니다가 준비한 것을 바탕으로 나를 공략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일개 유배자 뱀파이어를 상대로 하기엔 준비가 아주 과하군. 어째서지?
몸 전체를 박쥐로 바꿔 날아올랐다.
작은 박쥐 여러 마리로 흩어질 수도 있으나 좀 더 커다란 박쥐 소수로 변하면 컨트롤이 더 편하다.
드문드문 살펴보고 깨달을 수 있었다.
곳곳에 설치된 마법진은 불이나 번개를 일으키는 종류다.
하지만 그 형태가 기묘하다. 밟으라고 만든 함정이라기에는 둥그렇게 오두막 주변으로 큰 원을 그리며 이어져 있다.
결계 같은 느낌이다.
마법적으로 뭔가를 막아내는 게 아닌, 물리적으로 통과하는 뭔가를 태워버릴 수 있는 결계.
그래, 예를 들면 그 위를 흐르는 박쥐, 혹은 혈액을 태워버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장벽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좌푯값 설정을 확인해 보니 더 확실하다. 꽤 높은 고도까지 감지해서 반응하게 만들었다.
"이건, 그거구만. 바르바로이가 여기 있다고 생각하나 보네."
어찌 되었건 상당히 유능하다. 준비도 엄청나게 빠르다.
이게 어째 홀수 층에서 만나는 유배자들도 점점 그 층 수준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법사도 유난히 많이 보이고 있고.
이것도 소녀의 영향일까?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우리 파티가 더 훌륭한 파밍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마주치게 될 유배자들이 어디서 알뜰살뜰하게 뭔가를 잘 챙겨 와서 바치는 거지.
아쉽군, 천사가 카드를 아직 사용하지 않은 상태였다면 우리가 낼름 삼키는 건데.
예상은 얼추 맞아떨어지는 듯하다.
아주 잘 숨겨두었지만 클레이모어도 몇 개가 보인다.
이건 뱀파이어 대책이라기보단 오두막 안에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몰라서라고 봐야겠군.
하지만 이게 있다는 건, 해가 뜬다면 우리 집을 습격해 올 녀석들이 아주 운이 좋았다는 뜻이다.
갖다 바칠 게 정말 많은 녀석들이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