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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91화 (91/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91화

9층 - Lv. 99 파티 리더들(2)

앞에서 말했다시피, 미궁에서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실수는 방심이다.

나도 이 정도면 되겠지 하고 생각하는 경우는 많다. 하지만 그것엔 명확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물론 그 판단 근거가 부족할 수는 있다. 애초에 정보란 게 쉽게 제공되는 세계는 아니니까.

내 기억 속의 수많은 왕국에서도 중요한 내용은 대부분 랭커들 사이에서나 오가는 것이었다.

결코 그 아래로 흐르지 않는다. 왕국에서 정보의 독점보다 중요한 것은 그다지 없다. 신들조차 그에 동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강력한 신도를 잃게 될 수도 있으니 어쩔 수 없다.

그러니 모르는 건 죄가 아니다. 하지만 뭔가 잘못되어 감을 눈치채지 못하는 건 죄다.

그럼 죽어야지.

다만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오크 파티의 리더로 보이는 녀석은 아주 운이 좋았다.

[묠니르]라는 고정 아티팩트는 언제나 같은 설정을 달고 나오며 그 서버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진정한 ‘유니크’ 아이템이다.

단순히 아이템 등급으로서의 유니크와는 상당히 다르다.

그런 등급의 테두리 바깥에 존재하는 강력한 무기.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토르의 전승을 지닌 저 번개는 그 자체로 신성을 띄고 있다.

신성은 모든 언데드의 적이다.

그러니까 저 녀석은 운이 아주 좋다.

상성으로만 따진다면 나에 대하여 한없이 유리하다.

뱀파이어의 부정한 피는 신성으로 불타고, 번개로 불탄다.

전사의 무기답지 않게 광역 공격 역시 탑재되어 있다.

동급이었다면 질 수가 없는 수준의 상성이다.

우선 주변을 살폈다.

주변에 인간이 없다.

계획적이었군. 박격포반이 여기에 있으면 당연히 요격하러 누군가 나와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가장 기동력이 좋은 것은 박쥐나 늑대로 변할 수 있는 뱀파이어다.

바르바로이가 이곳에 나타날 거라 생각했으니 인간은 배제했다.

난쟁이와 오크의 피는 인간 기반 뱀파이어가 섭취할 수 없다.

포션은 언데드에게는 회복 수단이 아닌 무기다.

그리고 곧 해가 떠오른다.

지연전을 벌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전사 넷은 충분히 단단하며 지원사격을 할 총기 레인저 넷까지 확보되어 있다.

이것은 저들의 기준으로는 아주 차고도 넘치는 공략 환경일 것이다.

사실 진짜 바르바로이였다면 그럴지도 모른다.

지금의 상황이 어딘가 익숙하다.

그래, 우리 파티가 4층에서 겪은 그 상황이다.

하지만 그때 나에게는 소드 마스터씩이나 되는 검사가 있었고, [아카샤의 눈]도 있었다.

더스번 경의 얼굴이 잘 떠오르질 않는다.

외눈박이 장발의 검사가 술을 들이부으며 껄껄대는 장면이 아련하다.

어떻게 할까. 이 녀석들도 소녀의 훈련 상대로 좀 던져줘야 할까?

일단 조금 간을 보자.

너무 위협적이라 판단되면 여기서 지운다.

* * *

소녀는 아저씨가 말한 인간형 적과의 싸움에서의 리치 차이에 대해 확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지금 소녀는 공격의 범위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양손의 대거는 어디까지나 대거다. 암습이 아닌 전투용이라곤 하나 날 길이 50센티 남짓한 단검이다.

거기에 슬쩍 보기에도 요정 리더가 빼 든 롱소드는 날 길이만 1미터는 되어 보인다.

키도 문제다.

소녀는 자신이 어디 가서 비율로 진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리도 팔도 길다. 전체적인 길이가 짧을 뿐이지 비율상으로는 쭉쭉 뻗어 있다.

하지만 상대는 요정이다. 소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

키에서도 5센티 이상의 차이가 있어 보인다.

이걸 대충 팔 길이로 환산하면 또다시 2.5 센티미터.

별것 아니라 여겨질 수 있으나 일정 수준 이상의 전투에서는 치명적일 수 있는 간격이다.

흔히 달인은 종이 한 장 차이의 회피를 한다고 말해지는데 종이의 두께는 0.1㎜도 안 된다.

저것이 살에 파고든다고 생각하면 생사를 가르는 깊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런 식으로 밀리면 절대 안 되는데.

단검술로만 상대하려고 하지 말자. 아저씨는 언제나 입체적인 공격을 하라고 가르쳤다.

막아내며 동시에 중심을 움직인다. 갑자기 낮아지는 자세에 상대가 반응한다.

하지만 이미 체술의 간격에 도달했다. 양손의 검은 어디까지나 방어만.

다리를 활용하여 상대의 중심을 무너뜨린다.

이 생각은 유효했다.

유배자들은 당연히 무기를 들고 생사를 다투는 싸움을 한다.

제대로 된 맨손 격투를 익히는 경우는 없다.

지극히 기술적인 서브미션이 시도된다. 물론 제대로 먹히진 않았다.

그러나 상상도 못 한 공격에 요정 리더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소녀는 허공을 그었다.

[궤적 재생]

그리고 다시 자세를 숙이고 이번에는 타격이 아닌 검격을 날린다.

한순간 반의반 호흡 정도 늦어진 요정 리더는 수세를 취했다.

올려치기.

막아내지만 몸이 뜬다.

궤적이 재생된다.

아쉽다. 치명타는 아니다.

마지막 순간에 머리를 젖혔다.

그러나 이마를 섬뜩할 정도로 베어냈다.

여전히 소녀의 공세.

살기 위해 시도한 무리한 회피 덕에 호흡 차이는 더 커졌다.

다시 공세를 되찾을 수 없게 만들자.

힘으로 밀어붙인다. 자세가 흐트러지면 동등한 힘이어도 받아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오싹한 감각이 돌격을 저지했다.

상대의 연기는 완벽했다.

하지만 연기라고 느낄 만큼의 위화감이 있다.

[하나하나 나를 상대한다고 생각해 봐. 그럼 생각보다 쉬워질 거야.]

지금 상대는 균형을 잃어 제대로 된 방어를 하지 못하는 타이밍이 맞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노골적인 허점을 내줄 만큼은 아니다.

작은 위화감이지만 결단을 내리기는 충분했다.

뭔가 노리고 있다.

아저씨라면 분명 그렇다.

상대는 검사. 아마도 사거리가 짧은 타입의 스킬.

소녀는 오히려 뒤 방향 [대시]로 빠져나왔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방금 소녀가 있던 자리를 거칠게 베고 지나간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다.

아저씨가 알려준 수십 개의 있을 법한 공격 스킬 목록.

[공간 베기]

쿨다운이 조금 길다. 조건은 궤적 재생과 같다. 날붙이의 공격이 지나간 자리에 잠시 후에 재생되는 연속된 참격이다.

애초에 [궤적 재생]의 상위 스킬.

그래서 피했구나. 알고 있었어. 자기도 구사하는 스킬이니까.

소녀는 고개를 살짝 꺾었다.

공부를 못했다고 하지만 전투에 있어서는 좀 달랐다.

단순 암기는 원래 흥미가 없으면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법이다.

소녀는 마음속으로 초를 세기 시작했다.

다시 쿨다운이 올 때까지 싸우면 좋지 않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다음 [공간 베기]까지 60초.

* * *

"이런 제기랄."

가장 큰 게 빗나갔다.

솔직히 말해 무기의 리치 차이로 버티고 있을 뿐이다.

순수한 기술적인 면에서는 요정 리더가 더 불리하다.

기껏 해봐야 마력을 운용하는 것이 조금 나은 정도.

하지만 요정 리더로서도 달인의 경지에 올랐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기껏해야 서로 받는 충격에 차이가 나는 정도인데 애초에 시작하는 체급의 수준이 다르다.

저쪽은 인간 사이즈 오우거다.

그런데 순수한 검술이나 체술의 영역에서는 한참 뒤떨어진다.

무기도 고급이다. 케찰코아틀인가? 불길에 닿은 팔이 아린다.

이건 시간이 지나면 필패다.

잎사귀 요정으로 온갖 보정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인 적에게 말이다.

그래서 지른 큰 기술이었는데 이걸 왜 아는 거지?

랭커라도 상대하는 것 같군.

그놈들은 대충 무슨 스킬이 있는지 다 알고 있다.

알고 있으니까 인상 팍 찌푸리더니 피하거나 막는다.

그러며 하는 말이 감이랜다.

에라이 X펄.

물론 요정 리더도 그 감각은 안다.

[궤적 재생]이야 한두 번 봐야 말이지.

그래도 [공간 베기]는 규모가 크니까 못 피할 거라 생각했는데.

전략을 바꾸자. 결투의 신의 가호를 받았으나 혼자 싸워 이길 녀석은 아니다.

손짓을 한다.

우선 뒤엉킨지라 차마 어떻게 하지 못하고 구축한 마법을 유지만 하고 있던 마법사가 움직였다.

지직.

푸른 방전이 소녀의 뒤편에 피어오른다.

요정 리더는 그대로 돌격했다.

소녀는 옆으로 피하려고 한다.

그 방향으로 몸을 날리는 전사가 있다.

부딪힌다.

방패를 들고 있는 전사는 몸의 안전한 부위만 막았다.

거의 치명상을 입었으나 순간적으로 붙드는 데 성공.

[대시]

요정 리더는 그대로 달라붙으며 폭탄 열매를 던졌다.

상대 소녀의 미간이 확 찌푸려진다.

옆에서 번개가 떨어진다.

마법사의 [썬더 콜링]이다.

일종의 섬광탄과도 같은 효과를 주변에 뿌린다.

시야가 어지럽고 귀가 들리지 않는다.

소녀가 뛰어내리면서 일으킨 파이어 노바 덕에 녹아내린 물이 흥건하다. 전격이 타고 흐른다.

순간적인 마비.

하지만 허공의 폭탄열매를 베는 데 성공했다.

짧은 순간 두 여자의 눈이 마주친다. 요정 리더는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한쪽 입꼬리만 슬쩍 올라간다.

요정 리더의 단검은 언제나 마법사가 가지고 있다.

[점멸]

열매가 폭발했다.

* * *

튀는 번개는 위험하니 거리를 가까이하지 않는다.

오크 리더는 과격하게 [묠니르]를 휘둘렀다.

저 신성한 번개는 사방으로 아주 잘 번진다.

하지만 맞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아티팩트도 자주 주워본 놈들이 잘 다룬다.

번개는 언제나 그렇듯 파괴적이지만 컨트롤은 가장 어렵다.

온 사방을 날아다니며 회피기동을 하는 박쥐를 제때 요격하는 건 쉽지 않다.

다른 오크 전사들도 박쥐를 공격하고는 있다.

차라리 사격하는 난쟁이들이 더 위협적이겠다.

그러나 피의 권능하에 있는 박쥐들은 죽어 핏물이 되더라도 곧바로 박쥐가 되어 날아오른다.

지금 상태의 나에게 유효한 타격을 주려면 제대로 된 마법이 필요하다.

혹은 용암망치 대대 같은 그야말로 압도적이고도 어마어마한 물리력이 있던가.

그땐 괜히 도망 다닌 게 아니다.

그 미친 철갑 오우거와 트롤들에게 제대로 맞으면 뼈도 추리지 못했으리라.

압도적인 물리력은 마법과도 다르지 않다.

핵의 불꽃도 결국 물리 아니던가.

지금은 레벨 400대의 괴물들에 비하면 가소로울 지경이다.

기껏 해봐야 저 [묠니르]의 방전 정도나 어떻게 내게 타격이 된다.

번개가 번뜩인다. 화가 난 오크 리더가 온 사방으로 번개를 흩뿌렸다. 제 아군 몇몇이 감전되어도 개의치 않는다.

옳은 판단이다. 애초에 내 박쥐들의 회피 동선이 다른 오크를 방패 삼는 동선이다.

죽지만 않으면 살릴 수 있으니까 문제없다.

좋아 시간을 끌자.

[마투사]의 공격력은 경이롭다.

저 오크들 사이로 틈을 잡아 한번 크게 때려 넣으면 끝날 거다.

그렇지만 [묠니르]는 어쨌건 마법적이고 신성하기도 해서 제대로 맞는다면 나도 절명하는 수가 있다.

저들 역시 시간만 끌어도 이긴다고 생각할 테니 쉽게 이루어지는 소망이다.

전투가 지지부진해진다.

아직은 몇몇 박쥐가 불타 사라지는 선에서 버티고 있다.

그리고 직접적인 부딪힘이 없다면 다른 곳의 전황을 보는 것은 의외로 어렵지 않은 일이다.

[자연의 신이 개소리 말라고 합니다.]

진짠데…….

아무튼 현재 박쥐의 시야로 보이는 소녀의 모습은 만신창이였다.

폭발의 순간 [실드]를 올렸다.

내가 가장 필수로 세팅하려고 했던 스킬이다.

소녀의 플레이 스타일은 힘살자에 알맞다.

힘살자는 필요에 따라서는 단검 전사라는 요상한 직종을 수행해야 한다.

이미 마인드맵에서 단검 마스터리도 챙겼기에 다른 무기는 선택지에서 사라진다.

이건 멀쩡한 클래스가 아니기에 그야말로 ‘잘’ 해야 하는 영역이다.

소녀는 충분히 잘했다.

상대의 힘을 잘 빼놓고 있다.

다수와의 싸움에서 속전속결을 하지 않는 것은 언뜻 보면 굉장히 나빠 보이지만 소녀 같은 체력이 있다면 괜찮다.

다수를 상대로 적극적인 공세만 취한다면 빈틈을 어떻게 공격당할지 모른다.

첫 기습으로 요정으로 보이는 저 파티 리더를 완전히 보내지 못한 것은 아쉽다.

하지만 꽤 많은 카드를 뽑아냈다.

이건 소녀가 버티기만 해도 이기는 싸움이다.

잘하고 있다.

하지만 좀 아쉬운 점은 있다.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마력을 다루는 것이야 입문한 지조차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수준급이다.

대신 무기술이나 체술 자체는 여기 수준에서는 비할 데가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움직임이 보인다.

몰아붙이면 막아내지 못할 상황에서도 한 수 물린다.

항상 나를 적으로 가정하라고 했던 게 실수였나?

정말 나인 줄 알잖아.

애 키우는 게 참 쉽지 않군.

그래도 소녀가 질 가능성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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