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93화
9층 - Lv. ? [캣틀링건](1)
"그러고 보면! 혹시 우리는 다 자신이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NPC인가요?"
사냥꾼과 내가 얘는 또 뭔 소리냐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막내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는 얼굴로 돌아본다.
영감님은…….
"흠, NPC라니. 유배자들이 우리보고 그런 소리를 지껄일 때가 있었지. 그게 무슨 뜻인가?"
곤란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NPC가 확실한 이에게 어떻게 그걸 설명할까? 그것도 참 골치 아픈 일이지만 그 이후의 반응도 골치 아픈 일이다.
자신이 NPC임을 받아들이는 5단계를 근 한 달에 걸쳐 보게 된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보통은 싸움이 나고 무례한 유배자가 된다.
유배자에 대한 인식이 아주 나쁜 것은 이런 사실을 조심성 없이 밝히는 이들도 종종 있어서일 것이다.
이 문제의 악질적인 부분은 민감한 문제지만 결국 답은 알 수 없다는 거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 사실을 끝까지 괴로워하는 NPC도 있다. 자신의 가치를 어디에서 찾느냐는 사람마다 다른 법이니까.
귀찮은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 말을 돌리려고 하는데 소녀가 순진무구한 눈동자로 계속 이어가고 있다.
"지금까지는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블랑쉐 같은 유배자는 확실하게 NPC잖아요? 그치만 랜덤 생성 NPC라는 거도 있는 것 같고, 저는 인간이 맞는 걸까요?"
거 빨리도 생각해 본다.
차라리 더 빨리 생각해 보지 그랬냐.
사냥꾼과 눈이 마주쳤다.
영감님은 이게 무슨 소린가 하며 두리번거리고 있다.
소녀가 뒤늦게 영감님의 존재를 깨달았다.
늙은 오크 주술사님은 요 며칠 너무 넉살 좋게 지내셨다. 경계심이 다 날아갈 만큼.
"음, 뭐. 영감님은 왕국까지 저희를 따라오실 겁니까?"
"왕국이라. 그런 말을 하는 유배자들은 많이 봤지. 내가 좀 더 호기심이 있었다면 그거부터 묻긴 했을 텐데. 지금은 궁금하긴 하군. 거긴 뭐 하는 곳인가?"
영감님이 했던 발언, 자유를 달라.
신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 종족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곳.
그곳이 바로 왕국이기는 하다.
그곳은 여러 서버에서 흘러들어 온 수많은 NPC들도 자신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땅이니까.
신의 눈길이 닿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긴 하지만 간섭받을 일 자체는 없기도 하고.
영감님은 어차피 알게 되어 있다.
"흠, 뭐 말하기 곤란한 건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이 든 오크는 그러려니 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운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나이 든 트동트는 대체로 그랬다.
성녀, 그러니까 말년에 줍다시피 거둔 제자가 아니라면 무언가에 대하여 화를 내는 인물이 아니었다.
전투를 벌일 때, 보여주는 모습은 오크로서의 면모일 뿐. 한 개인으로서 화를 내는 모습은 아닐지니.
나는 굳이 질문을 피하지 않았고 영감님은 주름진 눈을 드물게도 크게 떴다.
"허어, 그럼 나는 무언가가 만들어낸 피조물에 불과한가. 아니 뭐 만물의 조물주가 있을 수는 있겠지. 그리 생각은 하였어. 신들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영역을 지켰으니."
눈이 다시 가늘어진다.
"하지만 신들 또한 유배자라 하였던가. 어찌 유배자들이 그렇게 끊임없이 나타나는지 알겠군. 여기 층이라고 했나? 홀수 층은 대륙과는 또 아예 다른 세계라 했지."
영감님은 굳이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이 뜻밖의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9층에 와서도 그랬다.
운동을 하는 와중에도 간혹 무언가 측정하듯 마력을 움직이며 명상에 잠기기도 했으니까.
다만, 그 이상으로 호기심을 충족하는 행동이 폐가 될지도 모르니 크게 나서진 않았던 것이다.
"차라리 편하군."
"그렇습니까?"
"그래, 뭐 내가 또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자네가 보는 내가 처음이 아니고. 이런 일들이 뭐가 중요하겠나. 이미 다 내려놓고 온 몸인 것을."
"그리 생각하신다면 다행입니다."
"세상의 진실이라. 젊은 날 농담으로 하는 치기 어린 소리였는데."
지금은 그저 천둥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겠군.
그런 소리를 하며 영감님은 그대로 망치를 집어 들고 구석으로 갔다. 가만히 앉아 눈을 감는다.
주술사는 저런 식의 교감을 하는 훈련을 많이 한다. 자신의 힘보다 자연 상태의 마력을 더 많이 끌어다 쓰니 자연히 하게 되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마 다른 이유일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말이지.
* * *
"야!"
"아이, 하지만! 갑자기 딱 생각이 났는데! 어 싶더라고요!"
소녀가 가드를 올리고 변명을 한다. 나는 들어 올린 손을 그대로 머리를 긁는 데 썼다.
"그래, 뭐 그럴 수는 있지. 사실 다들 그러기도 하고."
사냥꾼이 어깨만 으쓱했다.
"아가씨, 누구나 불안함은 안고 살아갑니다. 저는…… 그냥 제 눈앞만 보기도 벅차더군요. 그러면 불안할 틈도 없습니다."
거짓말이다. 누구보다 불안해하던 사람이다. NPC를 사랑하던 사람.
자신 또한 그저 그런 설정을 지녔을 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사람.
누구보다 격렬한 감정을 품고 있었을 테니 더욱더 그 감정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것에 고통받았을 거다.
이런 것은 단지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두려워진다.
소녀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가요? 사실 저는 괜찮은 거 같긴 해요."
당돌하면서도 자신만만한 미소.
해맑은 얼굴에 걸맞은 상쾌한 표정이다.
"제 과거는 별로 제 마음에 들지 않거든요. 옛날이 어쨌건 여기 들어온 시점부터는 제 자유의사였고! 저는 온전히 제 의사로 아저씨한테 반했으니까! 지금은 그걸로 되었어요."
아니 눈치챈 걸지도 모르겠다.
이건 소녀가 사냥꾼에게 하는 말이다.
사냥꾼은 쓰게 웃었다. 그도 알아들은 모양이다.
"뭐, 설마 제가 아저씨를 좋아하도록 설정이 되어 있기야 했겠어요?"
"흠, 그 부분은 확실히 먼저 그런 설정이 없어도 개연성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두목님은 든든한 파티 리더긴 하지요."
막내는 어떤가 싶었는데 덩치 큰 거한은 사나운 인상의 눈매를 기울이며 말했다.
"사람이 사람 같지 않은 세상. 사람이 맞는지도 모르겠는 세상. 그런 건 그렇게 멀리 있던 것도 아니라서."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덧붙였다.
"오히려 그래서 신앙이 더 중요한 가치가 되던 세상입니다."
이거 일반적인 지구가 아닌 건 알았지만 뭔가 수상할 정도로 힘든 세계구만.
물어봐야 하나? 하다가 말았다. 서로의 비밀을 캐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나는…… 지금도 당신들을 NPC로만 생각하고 있다고.
그 말을 어떻게 하겠냐고.
* * *
가장 먼저 치유의 샘을 확보했다. 나는 근처도 가지 않았다.
샘은 언데드에게는 화생방 가스실 같은 곳이다.
치유의 샘물의 구성 성분 중 하나인 신성은 꽤나 강력하다.
저 샘 자체가 모든 신들의 신성을 모아 그리되도록 법칙으로 만들어낸 그런 것이다.
대신격들의 신성조차 스며 있으니 언데드를 그렇게 뒤지게 아프도록 만드는 것도 이해가 간다.
이 샘은 언제나 어떤 형태로건 밀폐되어 있다. 지금은 나무가 유난히 빽빽하게 벽을 치고 있다.
이 경계를 넘어가면 샘물은 사라진다. 샘물을 밖으로 들고 나갈 방법은 포션병뿐이다.
단순 작업이다.
물을 뜨고 밖으로 나와 널브러져 있는 유배자들에게 뿌린다.
상처를 회복시켜 주지 상태 이상을 회복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마법적 수면에 빠진 이들은 전부 조용히 쓰러져 있다.
각각의 몸에 난 상처에서 피가 빨려 나와 내게 흘러들어 온다.
하는 김에 꼬맹이도 옆 그늘에 앉혀놓고 밥을 먹이고 있다.
낯선 집에 풀어놔 겁에 질린 고양이마냥 구석에서 꼼짝도 안 하고 훌쩍이던 꼬맹이는 그래도 배는 고팠는지 꼴깍꼴깍 잘도 받아먹었다.
고양이도 밥 주는 사람은 안 싫어한다.
소녀가 툴툴거렸다.
"재미없어."
"원래 게임에서 하는 노가다는 재미없잖아."
"제가 레벨 업 하는 거면 재밌죠."
"그럴 수는 있어."
[자연의 신이 참으로 흥미롭고도 사악하며 반인륜적인 수단이라고 극찬합니다.]
"그거 칭찬 맞습니까?"
[자연의 신이 착하다는 건 욕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내가 말을 말지."
피는 무한히 복사되지는 않는다.
그럴 일이 거의 없어서 잘 모르는 일이지만 포션을 들이부으면 효과가 점점 약해진다.
몸 자체가 어느 정도 신성을 띠게 되면서 약발을 덜 받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대량의 포션을 쓸 일이 없으므로 상관이 없지만 이런 꼼수에 제한을 두기 위해 존재한다.
사실 뭐 수도관을 개통해서 포션 수도를 만들려는 시도도 이전에 본 적이 있다.
다양한 꼼수가 가능한 미궁의 세계에서도 선을 넘는 방식은 엄격하게 차단된다.
그래서 어느 정도 피를 재생성하는 데 한계가 생긴 몸뚱이들은 가차 없이 처분이다.
파티원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레벨링은 잘 나눠서 해. 어느 정도 평준화할 필요가 있으니까. 서로 레벨 확인하면서."
이곳에서 얻은 포인트들이 또 다른 스킬이 될 것이다.
사냥꾼은 마법을 다루지 못하지만 스킬의 형태로 강제적으로 사용할 수는 있다.
소녀는 뭐 극도로 빠르고 강력한 초근접 암살자의 길을 꾸준히 걸으면 될 것이다.
막내는 이미 왕국 기준으로도 눈독 들일 길드가 많을 탱커다.
꼬맹이가 조금 문제긴 하다. 이 녀석을 쓸 만하게 만들려면 빨리 가르치기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당장 뱀파이어로서 아사 직전까지 몰렸던 모양인지라 기초 체력부터가 문제다.
피를 자꾸 먹인다. 내가 좀 덜 먹어도 이 녀석도 먹일 필요가 있다.
"읍 으브브읍! 끄읍!"
피를 콸콸콸 때려 붓는다. 익사도 안 하면서 유난은.
자고로 한창 클 때는 잘 먹여야 한다.
* * *
여궁수는 미심쩍은 표정을 거둘 수가 없었다.
고양이였다.
등 쪽은 노란 털, 배 쪽은 하얀 털.
앞발은 노란 털이 다리를 타고 내려가다 끝부분만 양말을 신은 것처럼 하얘진다.
우리 속에서 햇빛을 받으며 자고 있다.
난쟁이 리더가 우리를 열었다.
그르릉거리며 고양이가 이쪽을 바라본다.
살살 머리를 긁어주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오크 리더도 함께 보고 있다.
한없이 진지한 모습이었다.
고양이의 머리를 긁어주는 난쟁이 리더는 바위 난쟁이였기에 초등학생이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다들 바짝 긴장해 있다.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일촉즉발의 상황처럼 모두 침묵한다.
긴장, 공포, 불안.
여궁수는 제대로 설명을 듣지 못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도저히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분위기다.
폭탄 해제라도 하고 있는 것 같다.
여궁수는 눈치껏 침묵했다.
난쟁이 리더가 어디서 구했는지 육포를 내민다. 고양이가 받아먹기 시작했다.
누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간식을 즐긴 고양이는 제 앞발을 할짝할짝하더니 그걸 얼굴에 문질러 세수를 한다.
그러고는 난쟁이 리더에게 머리를 비비기 시작했다.
그릉그릉 하는 기분 좋은 소리가 난다.
난쟁이 리더가 조심스럽게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그림만 보면 지금도 귀여운 아이가 고양이를 조심조심 만져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고양이가 얌전히 품에 안겼다.
하지만 자세가 조금 이상했다. 고양이를 키워본 경험이 있는 여궁수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할 뻔했다.
왼손으로 고양이의 목을 쥐고 앞으로 뻗는다. 오른손으로는 배만을 받친 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오른손이 고양이의 배를 살살 긁었다.
여궁수는 이게 도대체 무슨 촌극인지 알 수 없었다.
참다못해 질문하려던 참이었다.
오크 리더가 조심스럽게 다가가더니 무언가 속삭였다.
난쟁이 리더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양이의 꼬리를 잡아당겼다.
고양이가 그르릉대기 시작했다.
크게. 좀 더 크게.
여궁수는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알고 싶지도 않아졌다. 그저 지켜보았다.
난쟁이 리더의 오른손 손가락이 다시 고양이의 배를 간질였다.
애오오옹.
울음소리와 함께 무언가 발사되었다.
소리는 있었다. 총성이라기엔 지나치게 작았으나 무언가 후두둑 쏟아지는 듯한 그런 소리였다.
빗소리? 아니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그래 마치 빗방울 수천 발이 동시에 어딘가 부딪힌 듯한.
결과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난쟁이 리더가 고양이를 총처럼 겨누고 있던 앞쪽의 나무들이 모두 사라지거나, 쓰러졌다.
전부 줄기가 크고 제멋대로인 형태로 파였다. 치명적이고 무시무시한 총탄의 일제사격이 그곳을 스치고 지나간 듯했다.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기쁨도 섞여 있다.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커진다.
오크 리더가 인상을 쓰며 쉿 하는 손짓을 했다.
난쟁이 리더는 고양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든 채, 다시 우리에 집어넣었다.
파티원 하나가 작은 가죽 부대를 가지고 갔다. 우유가 들어 있었다.
고양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할짝거리며 우유를 핥았다.
여궁수는 드디어 질문할 수 있었다.
"저게 대체 뭡니까?"
여궁수의 선임자가 된 인간 파티원 하나가 기묘하게 찡그린 표정으로 대답한다.
"나도 잘 모르지만, 미궁의 [특수 무기]라는 게 죄다 저 모양인가 봐. 끔찍한 농담 같은 것들이지."
"저게…… 무기라고요?"
"마법적 방어건 뭐건 무시하고 있는 그대로 방금 본 위력으로 때려 넣는다던데. 뭐 이 층에서 가지고 나갈 수는 없다지만."
여궁수는 신음했다. 모든 유배자에게 미궁은 악몽일 것이다.
엄청나게 현실적이면서도 필요한 곳은 또 기묘하게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그동안의 유배자 생활 동안 가장 독보적으로 괴이한 것이 눈앞에 있다.
여궁수는 고참 유배자들이 왜 점점 미쳐가는지 알게 된 것 같았다.
미궁이 좀 더 끔찍하고 실감 나는 악몽이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