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95화
9층 - Lv. ? [캣틀링건](3)
혼돈의 신좌는 [심연]에 뿌리를 둔 악신 계통 신좌이다.
심연에는 태양이 없다.
언데드들은 대부분 태양 빛에 약하다.
혼돈이 언데드에게 유리한 신앙인 것은 바로 그래서다.
빛이 닿지 않는 심연에서 비롯한 신의 힘은 빛에 대한 저항력을 약간이나마 부여한다.
물론 그 저항력은 뱀파이어로서의 격 역시 크게 관여한다.
뱀파이어의 격이라는 것은 마인드맵에서 표기되지 않는 또 하나의 레벨 같은 것으로, 뱀파이어의 능력 전반에 크게 관여한다.
성장하는 방법은 피의 섭취, 그 경과는 겉으로는 크게 티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조용하게 내실로서 소화되며 쌓여간다.
가장 변화해가는 부분은 뛰지 않는 심장.
그리고 창백한 혈색이나 낮아진 체온이 점점 돌아오기 시작한다.
인간이 죽어서 걸어 다니는 시체지만 점점 강해질수록 인간으로 돌아가는 듯해 보인다니.
참으로 아이러니다.
그리고 유배자는 그런 부분에서도 유리하다.
신앙이 필수인 것 같은 흉흉한 동네가 대륙이지만 의외로 모든 이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의 주민들에게 신앙은 사치다. 중세 판타지 월드는 결코 현대처럼 정보와 교통이 발달한 시대가 아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신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어딘가 먼 나라의 이야기라 여긴다.
그 권능을 체험하는 것 역시 쉽지는 않으니.
유배자는 신에 대한 접근성조차 높으며, 자신의 종족과 클래스에 알맞은 신을 골라 신앙할 수 있다.
[혼돈으로 정제한 피의 샘]
그 성장의 효율을 올려준다는 점에서는 더없이 사기 패시브다.
혼돈신앙 뱀파이어에게만 주어지는 특권.
뽑을 확률은 랜덤이지만 결코 낮지 않은 확률이다.
그 외에도 자잘하게 포인트는 계속 쌓였기에 추가적으로 생긴 것도 있다.
우선은 [안개화].
몸이 안개가 되어 흩어지는 건 꽤 불쾌한 경험이다.
너무 퍼뜨리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사용하지 않는 게 더 낫다.
그럼에도 이걸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같이 바람도 불지 않고 햇빛도 약하다면 내가 다가오는 낌새를 전혀 감지할 수 없다.
넓은 공간에 나를 퍼뜨리고 흘러간다.
눈 덮인 나무의 가지 하나하나가 손에 잡힐 듯 느껴진다.
실제로 내 몸속에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감각이다.
그래도 오크는 피 냄새에 민감하다.
"피 냄새가 나는데……."
뱀파이어가 있는 전장이다.
모두 눈치챘다.
"바람! 바람 일으킬 마법사 없나!"
없다. 마법사들은 전부 제거되었다. 지금 남은 것은 전사와 사수들뿐이다.
다른 파티는 전멸했다.
피가 움직인다.
내 몸을 구성하고 있는 피는 지배할 필요도 없다. 원래 나의 것이니.
순식간에 안개가 짙어진다. 핏빛 안개는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농밀하다.
이미 방심한 몇 명은 목을 쥐고 질식하고 있다.
내부로 흘러 들어간 안개는 순식간에 폐까지 파고든다. 폐포에 피가 차오르면 아무리 숨을 쉬어도 숨이 쉬어지지 않는 고통에 빠질 것이다.
"숨 쉬지 마!"
애오오옹
캣틀링건이 발사된다.
물리무효나 다름없는 [안개화]지만 저 무식한 탄이 지나간 자리는 고스란히 소멸한다.
하지만 내 [피의 샘] 잔량은 너무나도 넉넉하다.
오크 리더가 빠르게 판단했다.
[대충격]
저거 가능하면 소녀에게 쥐여주려고 하는 스킬인데.
효과는 간단하다, 둔기 형태로 강력한 물리력을 가한다.
여파는 충격파의 형태로 퍼져나가며 그 충격파는 거의 원본 타격과 동등한 위력을 낸다.
안개가 순간적으로 밀려난다.
나는 육신을 형성했다. 원래의 몸은 아니다.
박쥐들이 난다. 동굴 속이라도 된 듯 푸드득 날아간다.
사수들이 요격하려고 했다.
캣틀링건이 다시 울기 시작한다.
박쥐들이 뛰어든다.
박쥐들이 폭발했다.
사방이 불꽃으로 뒤덮인다.
* * *
「오 이런 미친.」
"뭘 한 거죠?"
드물게 여신님의 신언에 진심으로 황당하다는 감정이 실려 있었다.
소녀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마투사로 원거리 공격을 하는군.」
"그게 안 되는 마법 체계라고 하지 않았어요?"
「본래는 그렇지. 사정거리를 희생하는 대신 발동 속도와 위력만을 강화하는 패시브를 주구창창 찍으니까.」
그 위에 성립하는 것이 마투사다.
마법에 올인하지만 근접 격투가나 다름없는 전투방식을 지닌 클래스.
「지금 박쥐 하나하나로 마법을 구사하는 중인 것 같은데. 저 녀석 본업이 마법사라더니 농담이 아니었군.」
"그거 듣고 좀 충격이었어요. 전 왜 마법사한테도 얻어맞고 다니는 거죠?"
「비교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사람마다 기준은 다른 법이니까요!"
혼돈의 여신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마법의 신이 이 꼴을 봐야 하는데.
그럼 그 미친놈은 당장 뱀파이어 신도를 구해서 훈련에 들어갈 것 같다.
* * *
[자연의 신이 어떻게 한 거냐고 묻습니다.]
‘보면 아시지 않습니까. 박쥐 한 마리 한 마리, 폭발을 거는 거죠.’
「그걸 몰라서 묻는 건 아닌데? 마력이 이어지긴 하나? 말만 한 몸이지 사실상 분신인데 분신끼리 마력을 공유하는 것도 아니지 않나.」
‘하지만 전부 제 의지가 미치고 있지요. 그리고 마법은 의지의 발현입니다.’
「지금 박쥐 하나하나를 어느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거지? 박쥐로 동전 쌓기 가능한가?」
‘흠, 쉽진 않겠지만 할 수는 있을 거 같은데요.’
「자네 민첩이 몇이지?」
‘거 바빠 죽겠는데 좀 있다가 물으시면 안 됩니까?’
자연의 신은 조금 침묵하더니 수긍했다.
「다른 서버의 신도에게 가르쳐봐야겠군.」
생각보다 쉬운데 이거. 발상의 문제일 뿐이다. 마법은 대부분 발상의 문제로 가능과 불가능이 나뉜다.
마투사가 마법 발동이 빠른 건 마력 운용의 과정이 극도로 짧기 때문이다.
박쥐로 흩어진 상태에서 마법을 구사하기 힘든 것은 마법의 주체가 될 마법사의 정신이 사방으로 분산되기 때문일 뿐이다.
극도로 간소화된 마투사의 마법 운용 방식이라면 아슬아슬하게 가능해진다.
물론 나도 마인드맵 없이 이걸 하라고 하면 못한다.
미궁 특유의 묻지 마 보정이 들어오니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배자 마법사들은 스킬에 지나치게 의존하며 스스로 마법을 연구하지 않는다.
진정한 마법사들인 원주민들은 마인드맵이 없다.
실재하는 마법과 게임적 시스템의 절묘한 조화.
이 사실을 남에게 이해시킬 수 있다면…….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나는 좀 회의적이긴 하다.
* * *
난쟁이 리더는 날아드는 박쥐를 어떻게 캣틀링건으로 격추시켰다.
정밀한 조준을 할 필요도 없다. 이 알 수 없는 고양이는 자신이 고개를 꺾으면 알아서 박쥐들을 격추했다.
간담이 서늘하다.
총기 레인저는 무기 자체에 관련된 스킬이 적은 관계로 기동성에 투자를 많이 한다.
[대시]를 포함해 [긴급 회피] 등의 도주에 유용한 스킬들을 차곡차곡 수집해 놨다.
고양이가 중간에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그루밍을 시작했을 때는 섬뜩했다.
박쥐는 끊임없이 날아다니며 사방으로 흩어진 유배자들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화망이 잠깐이라도 끊어지면 죽는다.
죽어라 구르고 뛰며 피하고 있자니 고양이가 불편하다는 듯 가늘게 울었다.
"제발! 제발 부탁이다! 간식이라면 얼마든지 줄 테니까!"
알아들은 건지는 알 수 없다. 육포를 내밀자 잽싸게 받아먹는다.
열심히 턱도 긁어주었다.
고양이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이번엔 조금 낮고 사나운 소리였다.
캬오오오옹
주변을 날던 박쥐들이 모두 사라졌다. 난쟁이 리더는 간신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총탄이 알아서 휘며 박쥐들을 요격했다.
애옹! 애옹!
고양이가 깜찍한 표정으로 돌아본다. 잘했지 않냐는 표정이다.
난쟁이 리더는 서둘러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고양이가 기분 좋은 듯 그르릉거리기 시작했다.
박쥐는 더 나타나지 않았다.
* * *
오크 리더는 항복을 외쳤으나 응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다.
유배자가 아닌 NPC가 딱히 그를 스카웃해야 할 이유는 없다.
본래 인간이지만, 이제는 오크가 된 뇌가 분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오크 리더는 뒤돌았다. [묠니르]는 없지만 예비로 준비해둔 무기는 있다.
망치를 휘두르며 날아드는 박쥐들에게 맞섰다.
폭발은 요령껏 치명상만 면했다.
오크의 강인한 육신은 어떻게 견뎌내었다.
포션도 열심히 들이켰다.
박쥐는 소모시킬 수 있다. 이미 해가 떠올랐다.
시간만 끈다면,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이 진짜인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크답게 눈앞의 일만 본다.
휘두르는 망치가 점차 예리해진다. 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박쥐가 찢긴다.
그 핏물이 다시 송곳이 되어 찔러오지만 포션을 삼키며 견뎌내었다.
이미 죽은 다른 유배자의 시신을 발견하면 구르면서 깨트렸다.
체감상으로는 몇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박쥐들이 모여든다.
마침내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요행히 저 심장을 으깨버릴 수만 있다면!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갔다.
[대충격]
뱀파이어는 가만히 선 채 공격을 허용했다. 대신 팔을 뻗어 오크를 붙잡았다.
오크의 체격은 인간 기반의 뱀파이어보다 훨씬 크다. 2미터에 가까운 거구가 내려친 스킬의 일격은 뱀파이어의 반신을 으깨어 놓았다.
상반신은 확실히 사라졌다.
오크 리더의 얼굴에 희망이 얼핏 지나갔다.
하지만 허공에 둥둥 떠 있는 팔이 오크의 목을 잡았다.
멱살을 잡을 수 있는 체격의 차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오크는 죽음의 감각을 깨달았다.
많이 죽다 보면 문득 알게 된다. 아 이건 죽었구나.
잡힌 팔에서 마력이 흘러든다. 체내의 구석구석을 파고든다.
저항하려고 해보았으나 소용없다. 격류와도 같은 마력이 온몸 구석구석을 헤집었다.
몸이 불타듯이 뜨거워졌다.
아니, 실제로 재가 되어 흩날리고 있다.
머리와 눈이 완전히 타버리기 직전에 보았던 것은 작은 박쥐다.
그것이 상반신이 없는 뱀파이어의 몸으로 날아오는 것이었다.
그 박쥐는 오른쪽 가슴 부위에 자리를 잡더니 반쯤 죽어 있는 시커먼 심장으로 변했다.
* * *
피가 많이 생겼다.
마투사의 폭발은 기본적으로는 열량을 발생시키는 주문이지만 박쥐로 구사하는 폭발이 시체까지 깔끔하게 태워버릴 정도는 못 된다.
대부분은 폭압에 쓰러지고 기절한 상태지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융단폭격이라는 게 은근히 살상의 효율은 떨어지는 편이다.
그렇지만 모두 출혈은 있다.
마법은 거둔다. 더 가성비 좋은 권능을 쓰자.
* * *
난쟁이 리더는 고양이를 안고 정신없이 계단을 향해 달렸다 일단 살아남고 봐야했다.
그러나 뒤편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뒤돌아보기는 겁났으나 그러지 않을 수는 없다.
피의 해일이 몰려오고 있었다.
눈에 덮여 새하얀 숲에서 붉은 액체가 노도처럼 밀려오는 모습은 아주 그로테스크했다.
난쟁이 리더는 이 모든 것이 악몽이길 바라게 되었다.
고양이를 내려놓았다.
뒤돌아서 죽음을 마주했다.
고양이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리고 난쟁이 리더의 생각을 깨달은 모양인지 애처롭게 야옹하고 울었다.
피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고양이 한 마리만 남게 되었다.
* * *
고양이를 안고 혹시 모를 생존자를 제거하기 위해 순찰한다. 그 와중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포션을 끼얹어주니 멍하게 눈을 떴다.
"이야, 오랜만인걸."
"……선배님?"
여궁수는 산발에 온통 헤진 남루한 꼴로 눈을 껌뻑였다.
"유능했으니 혹시 이쪽에 붙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곤 생각했는데."
"아니, 정말 선배님이십니까?"
꼬마 마법사가 좋아하겠다고 생각했다.
거지꼴이 된 여궁수와 함께 돌아갔더니 땀을 닦고 있는 막내와 영감님이 보였다. 새로운 집은 벌써 그럴싸한 토대가 완성되어 있다.
이전처럼 크게 지을 필요도 없으니까 뭐.
고양이는 여궁수가 안고 왔다. 체온이 낮은 뱀파이어를 좋아하지 않아서다.
여궁수는 고양이를 안은 채 비척비척 걸어왔다.
넋이 나간 것 같았다.
꼬마 마법사는 아주 기뻐했다. 올 지능을 찍는 이유가 미궁을 받아들이기 힘든 성격이어서다.
정신력이 보정 받는다고 정 많고 여린 성격 자체가 어찌 되지는 않는다.
여궁수는 자신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꼬마 마법사를 보며 쓰게 웃었다.
재회를 하게 내버려 두고 다른 유배자가 없는지를 살폈다.
하루 종일 박쥐들이 숲을 뒤지고 다녔다.
쥐 죽은 듯이 숨어 살던 몇 명이 발견되었다.
전부 경험치가 되었다.
그날 밤, 여궁수와 꼬마 마법사에게 왕국까지 보내줄 테니 잠깐만 파티에 합류하겠냐고 물었다.
원래 같으면 사정을 해서라도 합류하겠다고 했을 사람들이다.
꼬마 마법사는 아주 기뻐했다. 하지만 여궁수는 지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 층은 서든데스가 없다고 하셨지요?"
"그렇지."
"저는 여기서 지내겠습니다."
"쉬는 건가. 그럴 때도 있는 법이지."
여궁수는 자신이 미궁에서 어떻게 지내왔는지를 말하기 시작했다.
게이머인 나로서도…… 조금 놀랄만한 삶이었다.
"……혹시 밖에서도 워커홀릭이었나?"
"하하, 한 번 뭔가 목표를 정하면 쉬지를 못하는 성격이라."
"그런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지칠 때가 있는 법이지. 뭐, 도전자인 유배자라고 모두가 쉬지 않는 건 아니야. 나도 그랬어."
사실 나는 97년간 단 한 번도 쉰 적이 없다. 미쳐 있을 때조차도 한편으로는 미궁에 대해 궁리하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저 그렇게 말했다.
여궁수는 어쩐지 훨씬 늙어버린 느낌이었다. 사실은 어딘가 피로가 누적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신적 피로는 자신 스스로 알기 힘들 수도 있으니까.
하물며 언제나 파티 리더를 자처해왔다고 한다.
"그 고양이. 고양이를 보았더니 제가 어디에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고양이 싫어하나?"
"아니요. 좋아합니다. 하지만 입에서 총탄이 나가는 고양이는 어떨지 모르겠군요."
아, 그런 면이 있긴 하지. 그냥 웃고 넘기는 사람이나 오히려 귀엽다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냥 자신이 알던 사실 자체가 완전히 어긋난 듯한 이런 특수무기를 보고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
여궁수는 좋게 말하면 성실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꽤나 고지식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캣틀링건]은 이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허용치를 넘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군.
"솔직히 선배님이 제일 무서웠습니다. 저는 바르바로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다시는 근처도 가지 않겠다고 생각했을 정돕니다."
피가 움직이며 사람을 공격하는 모습.
날아드는 박쥐가 폭발하며 사람을 터뜨리는 모습.
전부 그럴 수 있다.
잠깐, 내가 잘못했나?
"그래도 저 고양이는 기르는 게 좋을 거야."
"저걸 말입니까?"
언뜻 보이는 공포에 질린 얼굴.
"여긴 자유 PK층이라고. 아마 앞으로도 누군가 들어오겠지. 인적이 완전히 끊길 때까지는 호신무기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총 쏴봤어?"
"저도 미국 사람입니다. 하지만 고양이를 쏘아본 적은 없는데……."
"친해지면 자기가 알아서 조준도 해줘. 잘 키워봐."
고양이가 애옹하고 울면서 다가와 여궁수의 다리를 핥았다.
"입에서 총알 나가는 거 빼면 보통 고양이랑 똑같아. 아니지 훨씬 사람을 잘 따르고 똑똑하기까지 하니까 더 좋지. 고양이 치고 좀 무겁긴 하지만."
여궁수가 조심스럽게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약간 폭탄을 만지는 듯한 조심스러움이 느껴진다.
"밖에서는 고양이를 다섯 마리 길렀습니다. 이제는 다시 볼 수가 없군요."
"그럼 잘하겠네."
여궁수가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사람은 갑자기 무너지기도 한다. 열심히 살았다면 더욱 그럴 수 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양호하게 쉴 기회를 잡은 것이다.
* * *
"10층은 보스층이다. 그리고 우린 이제 15층까지 잠깐도 쉬지 못하고 달려야 할 수도 있다."
소녀가 손을 들었다.
"좋아, 거기 학생 질문하도록."
"왜죠?"
우선 10층이 정상적인 난이도가 아니다. 8층에서 지나치게 뭔가를 진행해둔 덕에 이상한 트리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미래의 정보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는 클리어 할 희망이 있다는 것.
"10층은 고대 요정 전쟁 때 봉인된 유적이다."
"그게 왜요?"
"카크리쉬랑 성녀 기억나?"
"히어로 유닛이었죠. 엄청 강하고."
오크 이야기다 보니 영감님도 귀를 기울인다.
"요정이 아직 살아남아 대륙에 존재하는 건 당연히 그린스킨도 충분히 큰 피해를 입어서지. 제일 결정적이었던 게, 영웅에 해당하는 그린스킨들이 대량으로 실종되어서야."
영감님이 탄식했다.
"아니, 잠깐만 그 유적 말이면 설마."
"전쟁의 신이 찾고 있었죠?"
"그렇다네."
"찾아냈을 겁니다."
요정의 왕족인 꽃잎 요정들은 최후의 최후에 그린스킨의 영웅들을 끌어들여 함께 유적에 묻혔다.
그 유적은 봉인되고 위치마저 비밀로 부쳐졌다.
하지만 그들이 죽었냐고 하면 꼭 그렇진 않다.
애초에 꽃잎 요정들은 오크의 영웅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단지 시간의 신의 도움을 받아 유적 전체의 시간을 멈추었을 뿐이다.
그곳은 시간의 무덤이다.
1000년 전의 [히어로 유닛]들이 서로 싸움박질을 하던 모습 그대로 박제되어 있는 무덤.
미래의 정보에 따르면 우리가 10층에 진입하면 동시에 그린스킨의 주술사들도 유적으로 진입한다.
서로 [히어로 유닛]을 먼저 깨워야 하는 시간 싸움이다.
당연하지만 그린 스킨의 영웅들이 숫자도 훨씬 많다.
[자연의 신이 흐뭇하게 웃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