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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96화 (96/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96화

10층 - Lv. 335 황제 친위대(1)

10층은 분명 타임어택으로 플레이 해야 하지만 이미 장악한 9층에서 서두를 이유는 없다.

언제 계단을 내려가건 같은 시점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가 인간 사냥을 개시했다.

이미 서버가 열리고 시간이 충분히 지났기에 새로 넘어오는 인원은 적었다.

하지만 한 명 한 명이 무조건 1레벨이다.

아쉬울 이유가 없다.

그 과정에서 소녀는 마음의 정리가 되었음이 티가 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람의 목숨을 끊을 때, 들어가는 힘이 다르다.

처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베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고심 끝에 베는 것도 아니다.

어리다는 게 저래서 좋다.

고민이 많을 시기라 괜히 혼자 심각해질 수도 있지만, 누군가 이끌어준다면 또 쉽게 떨쳐낼 수도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옛날처럼 자신에게 솔직할 수가 없어진다.

누군가에게 쉽게 의존할 수도 없어진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걸지도 모른다.

소녀가 자신의 바람대로 어른이 되어 가는지는 모르겠으나.

한 명의 유배자가 되었다.

* * *

"오! 오오오오!"

소녀가 방금 기둥에 대고 서서 그은 금을 보며 감탄한다.

이전에 그어놓은 금보다 상당히 높아져 있다. 소녀는 그 사실에 흥분했다.

그리고 나는 조금 죄책감을 느꼈다.

그렇다, 사람은 휴식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소녀가 그동안 그다지 자라지 않은 것은 내 탓이 아닐까?

5층 이후에 늘어지게 쉰 적이 있었던가.

식사 역시 신경을 쓴다곤 해도 부실하면 부실했지 영양가 있지는 않았다.

보존식이 그렇지 뭐.

소녀는 불과 열흘 만에 키가 눈에 띄게 자랐다.

일단 본인이 가장 신기해했다. 바깥에서는 저런 속도로 성장하는 경우가 없다. 신기한 게 당연하다.

"성장통도 없어요!"

"느껴본 적은 있고?"

"없지만요!"

길어진 팔다리에 대한 미세조정은 곧바로 들어간다.

소녀는 어렵지 않게 익숙해졌다.

동시에 리치가 길어진 것에 대한 이점을 확실히 숙지한 것이 느껴진다.

소녀의 대거는 조금 더 내 몸에 쉽게 닿았고, 움직임도 한 타이밍씩 빨라졌다.

통상적으로 팔다리가 길어지면 대신 스태미나에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미궁의 보정을 받은 초인에게는 딱히 그런 일이 없다.

원래 초인이기도 했고 말이지.

그래도 꼬마 마법사보다는 작았다. 한 번 추월당한 키는 다시 역전되지 않았고 도리어 차이가 벌어졌다.

꼬마 마법사도 마찬가지로 [어린이]인지라 빠르게 자라고 있다. 넉넉한 프리사이즈의 대명사인 로브였음에도 맞지 않아 천을 덧대 수선해 줬을 정도다.

이제는 여궁수보다도 키가 크다.

미궁에 [어린이] 태그가 달린 유배자 NPC들은 신체적으로 아주 빠르게 성장하며 스탯에 보정을 받는다.

소녀는 이미 스탯이 너무 높기에 티가 좀 덜 났지만 꼬마 마법사는 달랐다.

"마법 다루는 게 갈수록 안정되는걸?"

"저는 원래 성장 보정이 지능 쪽으로 몰려 있어서……."

수수하지만 단정한 미인이다.

이미 여성으로서는 상당히 장신이라 이제 꼬마 마법사라는 호칭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마법사라고 부를까 했더니 꼬마 마법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 호칭이 마음에 드는 걸까.

그 바람에 어쩐지 소녀만 뿔이 났다.

* * *

캣틀링건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눈앞에서 목격한 것은 여궁수뿐이다.

다른 이들이 굳이 그걸 볼 필요는 없다.

기괴하다면 기괴하고 사람에 따라서는 공포에 질리기도 한다.

여궁수는 항상 심각한 표정으로 고양이를 돌보았다.

고양이는 어찌 되었건 여궁수를 몹시 잘 따랐다.

심각한 표정도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는 것을 보면 괜찮아 보인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인기 폭발이었다.

저런 귀여운 생물을 데리고 다닐 만큼 여유 있는 곳이 아니다.

귀여운 토끼가 있다 한들 사냥을 해야지, 기를 수는 없는 것이다.

[캣틀링건]은 잡아먹으려다간 사달이 날뿐더러 죽어도 시체가 안 남는다.

순수한 의미의 반려동물이 될 수 있다.

우선 사냥꾼부터가 아닌 척은 다 하면서 몰래몰래 뭔가 먹을 걸 주고 있다.

다들 모른 척해주고 있기에 본인은 들켰다는 걸 모른다.

막내는 여신님의 요청으로 늘 고양이에 대고 기도를 올렸다.

그 덕분에 혼돈이 고양이를 보겠다고 이 땅에 강림하는 일은 없었다.

"흠, 저 털 난 소시지 같은 걸 왜 그리도 좋아하는지 모르겠군. 타지도 못하는데."

오크 감수성이 충만한 영감님만 의문을 가졌다. 그린스킨에게 털 달린 짐승은 전부 식량이나 탈것이다.

"호랑이라면 좀 길들이는 보람이 있겠지."

"에이, 영감님. 저건 그거예요 그거. 영감님이 성녀님 볼 때 무슨 생각이 들어요?"

"흠, 어린 것이 불쌍하고 고생 많이 해서 참 안쓰럽고 그랬지."

"대충 비슷해요."

"……저거랑 말인가?"

"으으음, 뭔가를 귀엽다고 느낀 적 없으신가요?"

"이 망치는 아주 귀엽군."

"번개 튀는 망치가요?"

소녀는 객관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고양이의 귀여움을 오크에게 납득시킬 수 없었다.

"맛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살도 별로 없고."

"좋아요. 취향은 존중해야 한다고 배웠어요."

다시 한번 말한다. 소녀는 최선을 다했다.

* * *

다시 5일이 더 지나. 9층에 머무른 지 보름이 지났다.

눈보라가 몰아치던 날, 나는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좋을지 확정 지었다.

이걸 위해 파티원을 늘렸다.

상대보다 먼저 깨워야 할 요정 영웅들은 많고, 깨우기 전에 처리해야 할 오크 영웅들은 더 많았다.

전투력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필요하다.

10층의 구조는 미로다.

구체적으로는 1층이 생각나는 미로다. 애초에 1층의 쓸데없이 장엄하고 우주적인 양식이 고대 요정 제국의 특색 중 하나였다.

더 정확히는 마법 양식이다.

고대 요정 제국은 환경을 마법의 일부로 만드는 것을 즐겼다.

게임식으로 말하자면 필드 자체에 마법이 깔려 있는 방식이다. 설치형 마법진을 넘어서 구조물 하나하나가 마법의 일부.

2층 유적에는 마법적 함정은 없었으나 그건 요정 제국의 막바지에 급조된 탓이리라.

유적수호자의 레벨만 보아도 그렇지 않겠는가.

히어로 유닛의 봉인을 지키라고 둔 것이 레벨 100이 안 된다.

카크리쉬는 언제나 마지막까지 남아 그린스킨을 이끌다가 장렬하게 봉인되는 전사다.

요정 전쟁은 항상 카크리쉬마저 객지에 봉인되는 것으로 끝난다.

요정 레인저의 악명도, 숲에서 벌이는 유격전의 달인이라는 이미지도 그때 생겨나서 전해 내려오는 것이다.

당연히 이 유적은 인위적으로 그런 치고 빠지기를 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

그린스킨들은 결코 걸어오는 싸움을 거부하지 않으며, 함정임을 알면서도 걸어 들어와 결국 같이 봉인되었다.

요약하면 더럽게 복잡하고 어렵고 위험한 유적이란 뜻이다.

곳곳에 히어로 유닛들이 정지한 시간 속에 박제되어 있다.

더 빨리 더 많은 영웅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다.

우리가 인간이나 오크인 것은 문제없다. 신께서 아군임을 증명하리라.

계단을 내려가기 직전, 영감님은 어쩐지 씁쓸한 표정이었다.

"이제부터 그린스킨들과 싸우게 될 것인데 뭐 찝찝하십니까?"

"싸움과 투쟁은 우리의 본질이지. 그것은 관계없지만 어찌 되었건 오랜 기간 대주술사 직위에 머물며 생겼던 인맥은 있지 않겠나."

"아는 사이가 있나 보군요."

"나도 좀 더 오크다운 출신이었다면 황제 친위대가 되었겠지. 그래서 안면은 있다네. 아, 자네는 알고 있겠군."

"아닙니다. 저는 각 세계의 영감님들을 모두 다른 인물이라 생각하니까요."

"그건 고마운 말이군."

여궁수는 굉장히 어색하고 불편한 얼굴로 고양이를 안고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다시 보게 되리라. 그녀 또한 혼돈의 신도가 되었으니 연락이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유적 내부의 주요 위치는 약도까지 그려가며 주지시켰다.

미래의 꼬맹이가 가지고 온 쪽지는 아주 효율적으로 미래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주요 함정과 적들의 움직임, 그리고 일부 기호 몇 가지로 미로 전체의 윤곽을 유추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유추에 불과하다. 디테일 역시 없다.

사소한 건 각자 임기응변으로 알아서 해야 한다.

적들의 이동 경로도 시시각각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린스킨이 우리의 존재를 알게 되는 그 순간까지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일단 가장자리에 빠져 있는 요정 영웅들 먼저 구한다. 중앙 광장에 가장 많이 있지만 거긴 그린스킨들도 최우선으로 향할 거야."

파티원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꼬맹이만이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저 작은 흡혈귀에게는 딱히 역할도 주지 않았다.

그저 나를 잘 따라다니라고만 했다. 꼬마지만 흡혈귀는 흡혈귀니 열심히 달리면 못할 것은 없다.

그래도 보름 동안 나름대로 친해졌다고 생각한다.

꼬맹이가 우글우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부담스러웠는지 슬쩍 내 뒤에 숨는다.

살짝 옷이 당겨지는 느낌이 들어보니 한 손으로 패딩을 슬쩍 붙잡고 있다. 귀엽다.

뭐, 일단 같은 혈족의 뱀파이어라면 가족이나 다름없기도 하고 말이지.

"각자 목표를 향해 돌격!"

영감님도 이번에는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대신 해야 할 역할을 되뇌며 계단으로 내려간다.

* * *

[TIP : 고대 요정 제국은 마지막까지 그린스킨들에게 저항했습니다. 지금도 요정왕과 꽃잎 요정들은 대륙 어딘가의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그린스킨의 영웅들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찰나 속에서 말입니다.]

미리 모르고 들어왔다면 통곡이 나왔을 메시지가 떠오른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미래가 언제나 일치하란 법은 없다. 그건 결국 평행세계다. 온전히 나의 미래가 아니다.

혹시 모를 거지 같은 확률을 떠올리며 조마조마하던 심장이 가라앉는다.

이러면 거의 그대로다.

파티원들은 빠르게 흩어졌다.

나는 꼬맹이 하나만 데리고 이동을 시작했다.

다른 이들은 각자 이 시기의 요정 [히어로 유닛]을 깨우러 간다.

깨운다는 건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 앞에서 마력을 흘리면 된다.

유적은 아주 오래되었고 이제는 슬슬 불안정하다.

후기에 지어져 아직 건재했던 카크리쉬의 유적과는 다르다.

이런 봉인유적들은 대륙의 정세에 따라서 발견되지 않고 방치되는 경우도 있다.

그 경우엔 노후화로 인해 저절로 봉인이 풀린다.

당연하지만 설계했던 요정들이 먼저 풀려나며 아직 잠들어 있는 그린스킨의 영웅들을 제거한다.

그렇게 되면 요정의 침공으로 2차 요정 전쟁이 발발한다.

어떤 식으로건 있을 수밖에 없는 이벤트인 셈이다.

꼬맹이는 열심히 달렸으나 다리가 짧아 한계가 있다. 나는 그냥 들쳐업으려고 했으나 꼬맹이가 고개를 저었다.

박쥐 서너 마리로 흩어지더니 날기 시작한다. 체구가 작으니 박쥐도 작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 벽에 부딪히기도 하지만 뛰는 것보다야 훨씬 빠르다.

자연의 신이 실시간으로 요정 [히어로 유닛]들의 위치를 중계해 준다. 시간정지 속에 빠져 있을지언정 신은 그 주변을 볼 수 있다.

오크 주술사 무리 하나가 자연의 신의 시야에 잡혔다.

[자연의 신이 한 명이 전사했다고 말합니다.]

‘요정왕 부부는 중앙 광장에 있다고 하셨지요?’

자연의 신이 긍정한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둘이다.

대륙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들 중 하나로 이름이 남은 그 이름은 오베론이다.

원래 게임설정이란 건 신화 짜깁기다.

다른 파티원들은 유적의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향한다.

그곳에 있는 몇몇 강력한 궁수들을 깨워서 합류할 것이다.

나와 꼬맹이는 다른 것을 한다.

소녀를 제외하고는 뱀파이어 둘이 가장 발이 빠를 수밖에 없다.

"배운 대로 해보자. 천천히."

꼬맹이가 대답을 하진 않았다. 그러나 마법을 배우는 것 자체는 나름대로 재밌었던 모양이라 금방 숙련되었다.

솔직히 이미 소녀보다 잘한다.

순수한 원소 마법사로서는 불세출의 재능이다. 그렇다고 설치되는 형태의 마법에 약한 것도 아니다.

마력을 잘 다룬다면 어느 마법 분야에서나 깡패가 될 수 있다.

그린스킨들은 일직선으로 중앙 광장을 향할 것이다.

지금도 멀리서 쾅쾅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린스킨들 입장에서는 이 미로를 온전히 돌파할 이유가 없다.

트롤들을 앞장세워 미로의 벽을 때려 부수고 전진 중이다.

그러면 지나치는 경로도 뻔하다.

그 속도를 늦추도록 하자. 상대는 충격대대도 아니고 정면에서 싸워서 이길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굳이 정면에서 싸워야 할까?

고대 요정들이 설치한 마법진들이 많다. 상당수는 빛을 잃었다.

하지만 마력을 다시 공급할 뿐이라면 어렵지 않고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는다.

* * *

모든 정보가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고 했다.

아저씨가 말하길 미래의 꼬맹이는 어디까지나 다른 세계에서 온 것이고, 그곳의 미래가 온전히 이 세계와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전력을 고려하여 배분되었다.

아저씨를 제외하면 가장 강한 것은 영감님과 소녀다.

아저씨는 이제 소녀를 더 높이 평가했다.

최근에는 주술사로서의 영감님과도 어떻게 상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마법을 베는 법을 배울 수 있을 정도로 마력을 잘 다루게 된 것이 가장 컸다.

꼬맹이에게 마법을 가르칠 때 소녀와 꼬마 마법사도 옆에서 경청했다.

며칠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모든 마법을 회피하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칠 수 있게 되었다.

영감님은 콧김을 뿜으며 전사로서 도끼를 휘둘렀다.

하지만 이제 묠니르와 주술 없이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는다.

소녀는 그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소녀가 맡은 임무는 안 그래도 중요하다.

다른 멤버들은 비교적 안전지대로 향했다. 소녀가 향하는 곳은 돌입한 그린스킨의 병력들 경로 주변이다.

돌발 상황이 발생한다면 언제 건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신이 난 질주에 마법을 총동원해 따라 달리고 있는 꼬마 마법사가 퍼졌다.

"헉헉, 언니 조금만 천천히!"

"[헤이스트] 걸어둔 거 아니야? 왜 그래?"

"너무…… 빨라요."

"어쩔 수 없지."

업으려고 했는데 키 차이가 나서 불편하다.

소녀는 잠깐 고민한 후, 앞으로 안아 들었다.

"어, 어어. 이건 좀 부끄러운데."

짜식이 부럽게 혼자만 쑥쑥 커서 말이야. 어.

소녀가 눈에 힘을 빡 주고 말했다.

본인은 모르지만 상당히 사나웠다.

"죽느냐 사느냐가 걸린 문제니까 조용히 해."

"네, 넵. 언니."

그래도 저 언니라는 호칭은 참 마음에 든다. 집에서도 막내였던 소녀는 늘 동생이 있었으면 했다.

이렇게 큰동생을 원했던 건 아니지만.

동생은 좀 더 작은 게 좋다. 소녀 자신의 체구가 작은 편인 건 콤플렉스다. 가족들은 다 길쭉길쭉한데 저 혼자 아담한 탓이다.

거기에 체구만 작은 것도 아니고 전체적으로도 아담한 인상이다.

손도 작고 발도 작다.

꼬마 마법사의 늘씬한 다리를 보고 있으니 괜히 심통이 난다.

까치발을 하지 않고 아저씨의 뺨에 닿고 싶다.

갑자기 조그마한 꼬맹이가 보고 싶다. 만지고 싶다. 안아주고 싶다. 쓰다듬고 싶다.

얘는 딸내미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새 첫 번째 목적지에 도달했다.

탑승자의 평안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전력질주 운행이었기에 꼬마 마법사는 거의 접혀 있었다.

꼬마 마법사가 허리를 두드리며 내려선다.

흑백 영화처럼 무채색으로 물든 채 굳어 있는 잎사귀 요정 하나가 보인다. 인상을 찡그리고 무언가로부터 달아나고 있는 모습이다.

소녀의 마력은 온존하는 편이 더 좋다. 꼬마 마법사가 나섰다.

"그런데 이거 어쩌면."

"준비하고 계셔야 할 것 같아요. 언니."

강성한 요정 제국이 결국 무너진 것은 반드시 그린스킨이 강해서만은 아니었다.

언제나 거대한 국가가 무너지는 것에는 내부의 적이 있게 마련이다.

꽃잎 요정이 그랬을 리는 없다.

그들은 긍지 높은 요정의 왕족이다.

그루터기 요정도 그러기 힘들다.

그러나 잎사귀 요정은 배신자일 수도 있다.

소녀는 검을 뽑아 들었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쌍검보다는 오른손에만 대거를 든다.

꼬마 마법사가 마력을 잔뜩 방출한 후에 물러났다.

소녀도 이제는 느낄 수 있었다. 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진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마법이, 어떤 종류의 마법이 움직이는지는 대충 안다.

시간 계통 마법은 아주 고등한 마법이다.

이 유적 전체에 깃들어 있는 시간의 마법은 그 복잡함으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한다.

그걸 정말로 체감되게 느낄 수 있었다.

굳어버린 잿빛의 요정에게 색이 돌아온다.

시각적으로는 그저 색이 입혀지는 과정이지만 그 흐름의 섬세함이 무시무시하다.

이 유적은 얼어붙은 시간이 다시 되돌아오는 것까지 상정하고 만들어졌다.

유지하는 힘은 다해가지만 복구하는 마법은 여전히 남아 있다.

색이 돌아온 잎사귀 요정은 갈색의 머리카락이었고, 귀로 보아 늑대나 개인 듯했다.

소녀가 태세를 늦추지 않은 채 신체를 접촉했다.

여신이 확인을 했다.

이제 막 깨어난 요정 궁수는 찡그리던 인상을 1천 년 만에 펴고는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신언을 느끼고는 상황을 파악하고.

"이런. 일천 년이 흘렀다고? 거기에 인간과 요정이 손을 잡았는가?"

난처하게 웃음을 지었다.

소녀는 기다리지 않았다. 즉시 습격한다.

상대도 반응했다.

화살촉으로 소녀의 검을 받아낸다.

믿을 수 없는 장면이지만 이어지는 소녀의 돌려차기.

요정이 팔로 막아낸다. 아니, 흘려낸다.

상대가 운용하는 마력의 흐름에 소녀는 입을 삐죽였다. 너무 노련하다.

다시 한번의 공방. 화살촉으로 대거를 세 합 받아내는 신기를 보여준 후, 요정 궁수가 크게 물러서며 거리를 벌렸다.

그 동작과 동시에 화살이 날아온다.

다섯 발.

소녀는 그 어느 때보다 집중했다.

두 발은 페이크였다. 두 발은 소녀를 노렸다. 다른 한 발은 꼬마 마법사를 노렸다.

세 발을 베어냈다. 페이크인 것들은 벽에 부딪히더니 그대로 반전하여 꼬마 마법사를 노렸다.

반 호흡 정도 느린 공격에 꼬마 마법사도 실드를 만들어 대응했다.

과연 히어로 유닛.

요정 궁수가 비웃는다.

"제법이군, 아니, 내가 약해졌나? 몸의 움직임이 영 이상한걸. 하여간 오베론 녀석 괜히 이상한 걸 하자고 해서."

정상적으로라면 승산이 없다. 하지만 카크리쉬와 같은 봉인이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일시적으로 약화된다.

그렇다면 둘이서 해볼 만했다.

적어도 아저씨는 그렇게 판단했다.

미궁의 음험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소녀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그렇게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아저씨를 믿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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