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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97화 (97/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97화

10층 - Lv. 335 황제 친위대(2)

게임에서는 절대로 클리어할 수 없는 상황이란 것이 있다.

게임 시스템은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기에는 분명 한계가 존재하며, 시스템 내부에서 외통수에 몰리는 경우는 흔하다 못해 넘쳐난다.

현실이 되어버린 미궁은 그런 부분에서는 융통성이 있다.

지금의 10층은 게임이라면 절대 클리어할 수 없다.

많은 창작물들이 고대를 현대보다 더 뛰어난 기술력이 있으며, 강자들이 더 많았던 낭만의 시대처럼 묘사하곤 한다.

미궁의 대륙에서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요정 제국이 융성했던 시기에는 온 사방에 고레벨들이 득실거리던 시기였다.

하다못해 길 가던 야생 고블린들도 좀 더 건장하고 힘이 더 셌다.

장비도 대부분 마법이 부여된 장비다.

요정들은 그런 기술에 능했고, 그들이 아직 제국이던 시절에는 그곳에서 흘러나온 질 좋은 장비들이 너무 많았다.

남부의 밀림에서도 난쟁이가 만들고 요정이 마법을 새긴 장비가 굴러다닐 정도다.

그런 환경에서 전사들은 더 강인해지고, 궁수들은 더욱 억세지며, 마법사들은 더욱 유능해졌다.

길 가던 짐승들만 해도 지금은 보기 힘들 만큼 고레벨이니까 당연하다.

다른 이유도 있다.

1천년 전은 신화시대라고 이야기되며 추억된다.

요정이 장수한다고 하지만 인간의 열 배에 불과하다.

고도로 발달한 의학도 없는 세계에서 요정의 평균 수명이라 한들 500년 남짓, 오래 사는 만큼 사고사의 빈도는 더 커지는 탓이다.

그 시절을 살아본 주민은 거의 없다.

그들은 아마 선조들이 어찌 그리 강했는지 과거의 마법 기술을 보면서도 의아했을 것이다.

[스킬]이 많았다.

[스킬]은 미궁의 주민들에게는 그저 불가사의한 고유 능력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어느 날 문득 얻게 되는 기이하고도 강력한 힘.

마법이나 검술과는 궤를 달리하는 불가사의한 능력으로 말이다.

유배자처럼 통제를 할 수는 없으니 주는 대로 먹는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 행동 양식에 따라 맞춰지는 경향은 있다.

1천 년 전의 세계는 그냥 파워 인플레가 지금의 중세 판타지 월드보다 높았다.

그러니 고레벨이 많다.

그래서 스킬도 많다.

하다못해 스킬을 사용한 싸움의 경험조차 많다.

옛날 NPC들이 더 강한 건 그런 이유다.

하물며 지금 이 10층은 그린스킨과 요정의 존망을 결정할 만한 위치의 격전지였다.

이곳에서 시간 속에 갇혀 있는 모든 인물들은 [히어로 유닛]이다.

역사의 산증인이자, 그 역사를 쥐고 흔들 수 있었던 인물들.

전원 1,000레벨 이상.

별다른 보정 없이 강제로 깨어나 약화된다 쳐도 아마 500레벨 가까이.

게임이었으면 절대 못 깼다.

지원군을 부를 수도 없었을 것이며, 애초에 딜도 안 박혔다.

현실이 되었으니 어디 틈을 찔러 넣기라도 하는 것이다.

이럴 때만큼은 미궁이 현실이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게임이기에 생기는 제약마저 그대로였으면 어휴.

* * *

자연의 신은 신언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여신님께서 갈군 끝에 무전기 역할은 어찌 수행하고 있다.

다른 곳에 수많은 신도를 거느린 입장일 테지만 그럼에도 나에게 집중해 준다.

이 서버의 판도가 걸려 있는 상황이 끊임없이 나와서도 있을 것이며, 개인적인 흥미도 있을 것이다.

신의 주시를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건 나쁜 일은 아니다.

"소녀 쪽은 꽝이로군요."

궁수인 요정들을 찾는 것은 지금의 계획에 있어 아주 중요하다.

활 든 잎사귀 요정이 있어 깨워보았는데 변절자라고 한다.

[자연의 신이 배신자를 불쾌해합니다.]

저건 이해할 수 있다. 신의 입장에서도 요정전쟁 시절은 설정된 역사에 불과하다.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니 당시 요정들이 불만을 품고 배신하는 이유도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알기는 힘들다.

안다 하더라도 와닿지 않는다.

1천 년은 너무 긴 시간이다.

신으로 지내는 유배자 입장에서도 말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죽여두는 게 최선이란 점이다.

어차피 한 번 배신한 녀석들을 다시 받아들이는 것도 웃기고, 지금의 대륙에 풀어놓기에는 너무 강자다.

소녀는 잘하고 있겠지?

따지고 보면 꼬마 마법사가 더 위험하겠지만 함께한 시간이 있어선지 소녀부터 걱정된다.

몰래 정 안 되면 버리고 도망치라고 말도 해뒀다.

어쩔 수 없다. 꼬마 마법사도 그 정도는 감수하고 있을 터이고.

걱정이라.

그래, 이 감정도 이젠 약간 이전과 다른 느낌이 든다.

이전에는 좀 더, 음. 사무적인 걱정이었던 것 같은데.

좋아, 이 생각은 나중에 하고. 여동생같이 귀여운 아이한테 무슨 생각이냐.

[자연의 신이 흐뭇하게 미소 짓습니다.]

[자연의 신이 혼돈의 여신에게 지금 생각을 전달했다고 말합니다.]

[자연의 신이 혼돈의 여신이 이 순간을 직접 못 보아서 분해한다고 전합니다.]

뭐야 내 마음 읽지 마요.

그런 와중 꼬맹이가 성공했다.

마력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빛바랜 마법진에 힘이 깃든다.

"속성 변환도 해볼래?"

지친 얼굴의 꼬맹이가 고개를 젓는다. 체력적인 문제는 없어도 정신적 피로는 방법이 없다.

마법을 배운 기간도 그렇고 연습도 아닌 실전이었다는 점에서 아주 훌륭하다.

하지만 더 이상은 무리겠지.

좀 더 실전적인 마법도 연습은 시키고 있다. [파이어 볼]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한다. 불속성 마법사로 키운 이유가 있다.

꼬맹이를 쉬게 내버려 두고 마법진의 속성을 만지기 시작한다. 주변에 원소가 달리 없으니 오히려 원하는 색을 입히는 것은 더욱 쉽다.

마법진에 흐르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의 색이 보인다.

"다른 곳도 더 작업해야 하는데. 이제 그냥 쉬렴."

꼬맹이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별로 먼 곳은 아니라 안고 이동했다.

쿵쿵거리며 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더 가까워진다.

* * *

쾅 하고 벽이 뚫렸다.

영감님은 드물게도 팔이 뻐근하다며 투덜거렸다.

사냥꾼은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묠니르는 분명히 아주 훌륭한 무기지만 그걸로 벽을 부수는 작업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유적의 벽은 마법도 새겨져 있어 그야말로 트롤이라도 와야 할 것 같은 튼튼함을 자랑한다.

적이라는 판정은 아니기에 내구도가 달아나고 있지는 않다는 걸 위안 삼아야 할까.

막내도 옆에서 거든다. 영감님이 축을 잡아 깨뜨려두면 막내가 곡괭이로 파낸다.

이렇게만 말하면 굉장한 시간이 걸릴 것 같은 작업이지만 과연 오크와 인간인지 오크인지 구분하기 힘든 커다란 근육질의 인간이었다.

이게 생물인가 굴착기인가. 엄청난 속도로 마법이 걸린 벽들이 파내어진다.

"차라리 내 싸움박질을 하고 말지."

"그러다 큰일 날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 해도 이건 공사판 아닌가."

그런 소리를 하긴 하지만 영감님도 의외로 이 작업을 그리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벽을 칠 때마다 금이 쩍쩍 가는 것이 신나는 모양이었다.

그린스킨은 과연 투쟁과 파괴의 생물들인가.

"그런 소리 하지 말게. 이게 이래 봬도 엄청나게 단단한 벽이라고. 주술로 뚫으려고 하면 말이야……."

다른 주술사가 있었다면, 아니 그냥 마법사라도 있었다면 기뻐하며 경청했을 강의였으나 사냥꾼은 한숨만 내쉬었다.

결국은 묠니르가 어떻게 마법을 무력화하고 벽을 분쇄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형님, 여긴 발파해야겠습니다."

그 말에 사냥꾼이 플린트락을 꺼내 들었다. 폭발하는 성질을 가진 탄이다. 그것도 상당히 강력한.

구멍이 뚫린 곳에 박아 넣고 쏜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이 갈라졌다.

영감님이 거기다 대고 크게 휘두르자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건너편에는 요정이 하나 굳어 있었다.

잿빛의 무채색으로.

"활을 들고 있군."

"그루터기 요정입니다."

그루터기 요정은 그 성정 상 자연의 신과 동족들을 배반할 리가 없다.

별걱정 없이 깨우자 어리둥절하고 선량한 표정의 궁수가 눈을 깜빡인다.

여신께서 신명을 걸고 그들이 요정의 편임을 증명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1천 년이나 흘렀는데 저희를 기억해 주시다니. 신이시여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루터기 요정들은 정말 순수하다. 사냥꾼은 그것이 너무 좋았다.

요정이 오크인 영감님에게까지 다가가 포옹을 한다.

영감님은 몹시 불편한 표정으로 그 포옹을 받았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인물들은 전설의 영웅들이다.

영감님이 그 시대를 살았다면 틀림없이 적이었으리라.

게다가 이 요정의 입장에서는 방금 전까지 싸우던 적이 오크였을 텐데.

어떻게 이리도 순수한지.

"신께서 당신들을 최선을 다해 도우라고 합니다. 제가 무엇을 도울 수 있을까요?"

"흠흠, 굴착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런데 궁수가 벽을 부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같은 궁수인 사냥꾼이 약간 걱정스럽게 해야 할 작업들이 늘어서 있는 방향을 보았다.

* * *

속전속결.

소녀가 처음부터 들은 말이다.

[히어로 유닛]이라고 전부 성녀만큼 강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단순 레벨로는 거의 열 배는 차이가 난다.

강제로 약해진 마법을 깨뜨리고 봉인을 푼 것이라 다섯 배 정도다.

어찌 되었던 상대에게 여유를 주고 파악할 시간을 줘서는 안 된다.

잎사귀 요정 궁수인 것은 다행일까? 종족적으로 활이나 마법보다는 근접전에 특화되어 있다고 들었다.

우선 최대한 상대에게 거리를 주지 않았다. 활을 쏠 수 있는 시간을 준다면 급격히 불리해진다.

바짝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추격, 또 추격.

상대는 충분히 빨랐으나 소녀는 더 빨랐다.

번번이 거리 벌리기에 실패하니 아주 짧은 순간을 노려 한두 발씩 화살이 날아갈 뿐이다.

소녀는 그 사실도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눈앞에서 화살촉으로 공격을 받아내며 사격도 짬짬이 해낸다.

그래서 생긴 빈틈을 보고 베어들면 피하거나 튕겨낸다.

튕겨내는 것도 화살촉으로 그걸 해낸다.

화살대를 부러뜨리려고 시도도 해보았는데 절묘하게 힘을 흘린다.

소녀는 아저씨로부터 받은 조언을 떠올렸다.

[그냥 신체 능력으로 찍어 눌러. 스킬이나 기교 같은 걸로 히어로 유닛을 이기긴 힘들 거야. 넌 태생은 거의 상위 종족급이니까 태생으로 찍어 누르란 말이지.]

좋아.

더 빠르게.

좀 더 빠르게.

더더.

상대의 당황이 느껴진다. 뒤를 생각하지 않고 빠르게.

유배자는 상처를 입어도 괜찮다. 죽지만 않으면 소생하니까.

번개에 구워졌던 때를 생각하자. 의식도 나갔었지만 그때는 몸의 절반이 탄화된 상태였다고 한다.

상대가 인상을 쓰며 달라 붙어오는 소녀를 공격하려 한다. 화살을 단검처럼 쓰는 것에도 한계가 온다.

당연하지만 화살은 내구도가 높지 않다.

툭 부러진 틈으로 공격.

그때 상대가 활을 들어 막았다.

그대로 반으로 갈라지는 활, 하지만 그 덕에 요정은 치명상을 피했다.

"허, 사나운 아가씨네? 아직 어리둥절한데 나는."

그리고 등 뒤로 손이 간다. 소녀는 그제야 쌍검사임을 눈치챘다. 처음부터 궁수도 아니었다.

저걸 못 뽑게 해야 한다.

무기가 없는 동안 어떻게든 결판을.

다시 달려들자 배를 향해 발차기가 날아온다. 검은 뽑히려 하고 있다.

그냥 차이면서 돌격했다.

검이 하나는 뽑혔다.

꼬마 마법사가 공격했다.

전격이다.

소녀가 육탄 돌격으로 붙잡고 있었기에 둘 모두 피할 수 없었다.

천둥이 울려 퍼졌다.

전격이 흐른다. 볼트 정도가 아니다. 그냥 [라이트닝]이다.

머리카락이 타들어 가는 것을 느끼며 소녀는 스탯 빨로, 그러니까 정말로 스탯 빨로 근육의 경련을 찍어 눌렀다.

요정 사제의 로브가 가진 마법 저항력도 도움은 되었으리라.

억지로 했기에 현저히 약한 공격이지만 상대의 무기를 쥔 손을 쳐냈다. 무기가 떨어진다.

요정의 늑대 귀가 바짝 선다. 무언가 발동할듯하다. 전격이 저절로 약해지고 있다.

이제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머리를 힘껏 뒤로 젖힌 후 이마로 때려 박았다.

다음 순간 속박마법 [바인드]가 둘러 처졌다.

소녀는 힘을 풀었다. 팔다리가 덜덜 떨린다.

매캐한 냄새가 감지된다.

꼬마 마법사가 병을 던졌다. 소녀는 몸을 가눌 수가 없었지만 [대시]를 써 그 방향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몸이 회복된다.

"언니, 괜찮아요?"

"응, 입에서 탄 맛 나긴 하는데 나쁘진 않네. 저놈이 처음부터 쌍검 뽑았으면 엄청 힘들었겠지?"

"너무 잘하셨어요. 제가 더 도움이 되면 좋았을 텐데."

미안해하는 얼굴을 보니 자긍심이 차오른다.

내가 지키는 아이가 있어. 내게 의지하는 여동생이야.

히히히.

속박이 효력을 잃기 전에 마무리를 지으려 했다.

무언가 방어막이 생겨나며 통하지 않았다.

방심했구나. 저런 게 있다면 빨리 썼어야지.

통상적인 공격으로 처리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러면 속박 정도는 금세 저항해낼 것이다.

안구 한쪽이 타버렸고 온몸에서 연기가 피어나는 숯덩이인데도 위협적이다.

"처리할게요!"

꼬마 마법사가 얼른 달려갔다. 한 손에는 수류탄. 9층에서 루팅한 무기들 중 하나다.

소녀는 처음부터 제 몸을 던져 제압할 생각이라 저런 폭발물은 지니지 않았다.

늑대 귀의 요정이 묶여 있는 채 피눈물이 흐르는 한쪽 눈으로 노려본다. 경련으로 입이 기괴하게 비틀린 채 벌어져 있다.

하지만 1천 년 전의 [히어로 유닛]은 인간 마법사가 손에 들고 있는 둥그런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꼬마 마법사는 순간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마력을 담아 속박을 강화했다.

단순히 손을 뻗는 것에는 방어막이 반응하지 않았다.

경련으로 벌어진 입속에 핀을 뽑은 수류탄을 우겨 넣는다.

그 동작까지는 [스킬]이 공격이라 판정하고 반응하기에는 미약한 것이었다.

소녀가 얼른 꼬마 마법사를 붙들고 미로의 모퉁이를 돌았다.

쾅!

"음, 확인해 줄래?"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검을 빼 들며 소녀가 말한다.

꼬마 마법사가 슬쩍 고개를 내밀어 보더니.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언니는 보지 마세요."

소녀는 상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 꼬마 마법사의 손을 붙잡고 만세를 불렀다.

"이겼다! 히어로 유닛 별거 아니네!"

"좀 억지긴 했지만요."

"아무튼 우리가 센 거야!"

* * *

사냥꾼의 걱정은 기우였다.

그루터기 요정 궁수는 뚫어야 할 방향을 가리키자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활시위에 화살을 메겼다.

"미로의 방호 마법이 많이 약해져 있네요. 정말 천 년이 지났나 봐요. 신기한걸요. 위험하니까 뒤로 빠지세요."

그렇게 말하며 시위를 당긴다. 마력에 무딘 사냥꾼조차도 무언가 미친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마법직인 영감님은 오크의 녹색 피부가 드물게 하얗게 질려 보이는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그루터기 요정 궁수가 시위를 놓았다.

반복해서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속사가 이루어진다.

열 발 정도밖에 없던 요정의 화살통이 완전히 비어버렸다.

의외로 그 과정에 큰 소음은 없었다.

화살이 지나간 자리의 벽은 녹아내리듯 부스러졌다.

일직선으로 시원하게 뚫린 구멍이 생겨났다. 거의 미로를 관통하고 있는 거 아닌가 싶다.

크기도 사람 서넛은 충분히 지나다닐만하다.

"여기 걸어둔 마법은 지속력은 생각하지 않고 튼튼하게만 해두었었거든요. 조금 전이라면 이렇게 뚫지는 못했겠네요. 아, 조금 전이 아니라 천 년 전이요."

생글생글 웃으며 궁수가 돌아본다.

저게 화살?

"이 정도면 되는 거겠죠? 더 도울 일이 있나요?"

사냥꾼은 궁수를 그만두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인은 총이 어울린다.

* * *

꼬맹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손바닥으로 귀를 막았다. 저래 봐야 소리가 안 들리진 않을 텐데.

쾅쾅하고 두들겨 부수는 소리가 아주 가까워진다.

"박쥐로 변해 천장에 붙어 있어. 위험해 보이면 날아서 도망치고. 방향은 저쪽으로 가면 된다."

꼬맹이는 그렇게 했다. 그러다 서툴러서 떨어지기에 받아주었다.

손에 들린 조그마한 박쥐는 부끄러운 듯 허둥지둥 다시 천장에 매달렸다.

다른 곳에서 이런저런 일이 일어나고 있겠지만 트롤들이 때려 부수는 소리가 하도 요란해서 모를 것이다.

하지만 멈추게 할 방법은 있다.

마력을 듬뿍 담아 마력탐지를 걸었다.

희미해져 가는 유적의 내부에 짙은 농도의 마력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마투사 계열의 패시브를 많이 찍어 멀리 퍼지진 않는다.

난 이제 탐색을 제대로 하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바로 지근거리라면 마법직 입장에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일 것이다.

아주 짙은 농도였으니까.

곧 트롤이 뭔가를 때려 부수는 소리가 멈추었다.

상황을 파악하려고 하는 모양이다.

안타깝군. 거기가 내가 노린 지점이다.

격발.

마법진이 일제히 작동한다.

제국의 병력들이 있을 위치가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트롤들이 다시 벽을 두드린다. 지시를 받은 느낌은 아니다. 그저 탈출을 위해 온 사방을 두드린다.

살이 익는 냄새가 풍겨온다.

"다들 방어막을 치고 그 안에 좀 들어가 있으라고 전해주시죠."

자연의 신은 그리했다.

사전에 약속된 행동이다.

파티원들 모두가 자신 주변을 밀폐시켰음이 확인되자 나는 마법진을 과부하시켰다.

동시에 꼬맹이와 나를 감쌀 만큼의 마법 장벽을 만들어 세운다.

마법진을 개조하며 이미 알음알음 퍼져 있던 불의 원소들이 일제히 점화된다.

순식간에 공기의 온도가 초고온으로 치솟는다.

지속은 0.1초도 되지 않을 것이다. 미래 꼬맹이가 사용했던 [인페르노]의 마법과 비슷한 원리로 공기를 데운다.

그래서 아마 단순히 온도만이라면 과부하의 폭심지를 제외하고는 살아남는 이들이 꽤 있겠지.

그러나 이 미로는 밀폐된 실내다. 1층처럼 천장이 개방된 형태가 아니다.

순간적으로 팽창하는 공기의 압력이 그대로 충격파가 되어 미로를 휩쓴다.

살아남을 방법은 전사 클래스 [히어로 유닛]급으로 단단하거나, 눈치가 빨라 [실드] 따위의 마법으로 자신 주변을 차단하거나.

그러지 않았다면 모두 죽는다.

마법으로 구현한 기화폭탄.

이런 게 게임 시절엔 못하던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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