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101화 (101/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01화

10층 - Lv. 1050 고대의 영웅들(1)

스케일이 소소할 때는 설계가 맞아 돌아간다. 어긋나는 일은 거의 없다.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그 정도 경험을 쌓아왔다.

하지만 8층쯤부터는 대충 임기응변의 연속이다.

미래의 정보를 알고 있음에도 그것조차 임기응변의 재료가 될 뿐이다.

애초에 미래의 나는 완벽한 정보를 적어 보내지 않았다.

그럴 수도 없다.

변하지 않을 법한 요소가 무엇인지 추려 그것만 전달했을 뿐.

유적에서 처음으로 그린스킨과 마주친 시점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그 이후는 미래의 내가 알려준 내용도 없다.

내 설계는 이렇게 불지옥을 만들어 시간을 버는 것까지였다.

그러니까 아직까지 별문제 없이 일이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은 운이 따라주고 있는 일이었다.

이미 깨어나 활동 중인 정령사가 둘이 있다는 점까지도 말이다.

[히어로 유닛]씩이나 되는 정령사다.

아무런 사전준비 없이 즉시 마력의 공유가 가능했다.

8층에서 사용했던 거대한 마법진도 순수하게 계약식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다른 정령사들이 제공하는 마력에서 개개인의 색을 지우고 자연 상태로 되돌리는 여과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마력은 지문처럼 사용자에 따라 서로 다른 색을 가진다. 이건 꼭 시각적인 색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두 정령사는 아주 능숙하게 자신들의 색을 지운 마력을 흘려보내 왔다.

속성변환도 완벽하다. 오로지 순수한 바람의 원소로 이루어진 마력만이 바람의 정령왕을 불러낸다.

몸이 찌릿찌릿할 정도로 격렬하다. 적당한 정령사 수십을 모은 것과 비교하면 출력 자체가 다르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장난질을 한다.

나는 강아지 귀 둘에게 인상을 쓰는 대신 실력을 행사했다.

묘하게 색이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흘러들어오는 실 같은 마력 한 줄기.

정령왕이 소환되는 순간 자신의 마력으로 침을 발라두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며, 동시에 이걸 막을 수 있겠냐는 테스트다.

두 요정의 푸르고 붉은 마력의 선이 내 안으로 흘러든다.

정령과의 계약은 몸 안에 마력적인 문장이 새겨지는 형태로 보관된다.

그곳에 닿는다면 어떻게든 정령왕과의 연결을 이어둘 수 있을 것이다.

귀엽지만 그대로 둬서 얕보일 수는 없다.

선이 진행하는 방향을 가로막는다.

크게 휘어지며 우회하려고 하지만 다시 벽을 세워 막아낸다.

마력은 결국 의지로 마나를 움직여서 만들어내는 흐름이다.

이런 싸움에서 마력의 총량이나 레벨 같은 것은 큰 관계가 없다.

내 삶은 대부분 반쯤은 마법사나 다름없었다. 듀얼이나 트리플 클래스를 할 때, 마법직을 섞지 않은 회차가 손에 꼽는다.

이 요정들이 얼마나 마음먹고 공격해 오건 다 겪어본 일이다.

갇힐 위기에 처하자 두 마력의 선은 협력하기 시작했다.

흐름을 거슬러 뒤쪽으로 빠졌다가 다시 우회.

심지어 하나가 미끼가 되어 다른 쪽의 활로를 뚫어주려고 한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움직임을 차단했다.

그리고 벽을 더 크게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마력이 역류할 정도로 거대한 벽.

두 강아지 귀 요정이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으아아앗! 따가워! 가슴이 아파!"

"미안해! 그만할게! 잘못했어요!"

이번엔 꼬리도 축 처진다.

옆에서 보았다면 뭔가 싶을 것이다. 실제로 흐른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니까.

"너 정말 정령 좀 치겠구나!"

"마력 다루는 게 굉장한데!"

"순순히 협조 좀 하십쇼. 나중에 정령왕 소개해 줄게요."

그 순간 두 정령사의 얼굴이 세상에 다시없을 만큼 순해진다.

소녀가 가끔 나를 볼 때 짓는 표정과 비슷하다.

사랑에 빠진 걸지도 모를 눈빛. 잎사귀 요정 정령사들은 특히나 좀 순수한 면이 있다.

그루터기 요정의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함과는 좀 다른, 원하는 것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그런 순수함.

그러나 저건 나를 향한 눈빛은 아니다. 나와 계약한 실피드에게 보내는 눈빛이지.

* * *

주술사들은 힘을 모았다.

영웅의 수준에 도달한 고대의 주술사들은 이미 대주술사니 하는 직위에 얽매일 수준조차 넘어섰다.

그들이 세상에 간섭하는 방식은 마치 화가가 도화지에 새로운 색을 덧칠하는 것과도 같다.

자신의 것이 아닌 마력에 간섭하는 능력을 전문분야로 하는 클래스다.

다른 이들과 협력하는 것 역시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다.

전쟁의 신이 디테일을 조정한다. 광분한 트롤인 그들의 신이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분노를 죽이고 소리 없이 으르렁대는 맹수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령왕의 소환을 방해해라. 혹시 소환된다면 통제권에 간섭해라.」

자아가 미약한 새로운 정령이라면 그 존재가 정령왕일지라도 간섭할 여지가 있다.

전쟁의 신은 정령왕이 출현한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갓난아기와도 같다.

주인의 손때가 아직 묻지 않았다. 간섭하여 강탈할 수도 있는 주인 없는 무기다.

그 유배자 놈이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길들였을까?

그럴 리가 없지.

정령은 오랫동안 마음 쓰고 함께 지내야 한다. 갑작스럽게 주인행세를 한다고 정령이 온전히 따라주는 것이 아니다.

계약이란 것은 결국 닿아서 소환할 권리를 얻은 것일 뿐.

이 전장의 기점이다.

요정왕이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전황 자체가 즉시 뒤집히지는 않는다. 분명 다시 없을 강력한 마법사가 요정왕 부부지만 애초에 그린스킨이 승리한 전투다.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그 승리가 유예되고 있었을 뿐.

그 승리를 다시 쟁취할 시간이었다.

「모든 전사들은 들어라! 기나긴 세월 동안 이 저주받을 유적 속에서 가증스러운 요정들을 지켜보느라 고생이 많았다!」

모든 그린스킨들이 침묵했다.

전장에서 조용한 그린스킨이란 아주 낯선 것이다.

요정들 사이에서조차 동요가 살짝 내비칠 정도다.

신언이란 그만큼 드문 것이다.

이렇게 직접 전장에서 신께서 직접 독려하는 모습은 신화의 한 장면이나 다름없다.

그린스킨들의 침묵 속에서 전쟁의 신은 말을 이었다.

「1천 년 전,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끝마칠 때가 왔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며, 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그린스킨들이여! 너희들의 녹색 피부에 자부심을 가져라! 우리야말로 이 땅의 정당한 지배자!」

듣고 있던 오크의 영웅 아라크는 그 목소리에 감격했다.

그들의 신께서는 과거 이 유적에서 전쟁을 벌일 때조차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관조하고 권능을 내려주었을 뿐이다.

이토록 열정적으로 그들에게 신뢰를 내주며 독려하는 신이라니.

1천 년은 긴 세월이다.

신이라 불리는 위대하신 분께도 말이다.

그 감격은 억눌린 함성이 되어 새어 나왔다.

"으아아아아아!"

그것을 시작으로 다른 그린스킨들에게도 물밀 듯이 열정이 번져나간다.

신께서 지켜보신다!

신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전쟁의 신은 입맛을 다셨다.

이런 상황은 원래 주의 깊게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저번에 자연의 신이 직접 권능까지 행사하며 인간이 편을 들어버렸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똑같이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미 신들의 싸움이다.

「가라! 저 허약한 것들을 쓸어버려라!」

"와아아아아!"

* * *

처음 간섭이 들어온 순간 두 정령사가 제일 먼저 인상을 찌푸렸다.

정령왕의 연료로 응축되는 요정들의 마력이 자꾸 흐려진다.

새로운 선들, 서로 다른 열댓 개의 마력선들이 꿈틀거리며 내 안에 나타났다.

훨씬 희미하지만 수가 많다.

"주술사다!"

"정령의 아름다움도 모르는 것들이!"

정령사를 서브로 하기 참 좋은 게 주술사다. 주술사의 마력량으로 정령을 다루긴 힘들지만 어차피 주변에서 끌어다 쓴다.

그럼 환경에 맞는 정령을 불러내기만 하면 된다.

거리가 있지만 [히어로 유닛] 수준에 이른 주술사들이 여럿이다. 그들은 돌격하는 전사들의 뒤편에서 천천히 전진하고 있다.

지팡이에 서린 마력이 넘실거린다.

불의 마력.

현재 이 공간에 가득한 불속성 원소.

하지만 단순한 열기를 머금은 공기의 형태를 띠고 있기에 동시에 바람이기도 하다.

원소란 건 피상적인 인식으로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

과학과는 동떨어진 부분이다.

주술사들의 통제하에 들어온 불과 바람이 혼재된 원소의 마력들이 침투해온다.

순수한 바람의 정령을 소환하는 것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마력이다.

그리고 저들이 노리는 것 또한 그것이다.

차단해 내야 한다.

정령사 두 명이 마력 탐지를 터뜨린다.

순수한 마력의 충격으로 간섭을 떨쳐내기 위해서다.

정령사 수준의 마력을 담아 퍼져나가는 마력의 동심원은 무서울 정도로 짙다. 그 중심에 있는 나는 순간 시야가 일그러질 정도였다.

그러나 주술사들은 그 마력조차 일부 자신들의 통제하에 넣고 반격해 온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쉽다. 단지 정령왕이 소환될 만큼의 마력이 정갈하게 응집되는 것을 막기만 하면 된다.

물론 말이 쉽다. 그러나 영웅의 수준에 도달한 고레벨 주술사들은 여럿이 연대하여 그것을 해내고 있다.

사태를 파악한 크라이오젠이 인상을 쓰며 가세해 온다. 하지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의 마력은 온전히 물의 원소다. 처음부터 한 속성에 올인한 마법사의 마력은 바람으로 변환하는 효율이 나쁘다.

다른 요정들도 입맛을 다시지만 가세할 여유가 없었다.

크라이오젠도 한숨을 내쉬며 가세를 멈추고 다른 쪽을 바라본다.

이곳은 전장의 한가운데다.

"그린스킨을 위하여!"

"우리는 이곳에 묻힐 것이다!"

"죽음! 파괴! 분노!"

온갖 종류의 어휘가 사방에서 폭포처럼 쏟아진다.

그럼에도 그 말에 담긴 감정은 똑같다.

고양, 흥분, 광기.

그린스킨들은 어쨌거나 저쨌거나 제 신들을 아주 잘 따르는 녀석들이다.

궁수들은 각자 뭔가 스킬을 발동하기 시작한 모양인지 다양한 형태의 화력 투사를 선보이고 있었다.

몇 명 추가로 깨어난 다른 마법사들도 각자 기이한 형태의 마법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린스킨들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에 대한 저항을 지니는 갖가지 수단들이 동원된다.

숫제 물리력만으로 마법을 으깨는 트롤도 있었다.

그들은 이미 자신의 생명을 도외시하고 있다.

전쟁의 신이 뭐라고 독려한 것이 분명하다. 더없이 강력한 광신자들이 여기에 있다.

요정들은 그 육탄 돌격에 충분한 살상력을 발휘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저지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

쓰러지는 오크나 오우거들이 보인다.

트롤조차도 뒤를 생각하지 않고 퍼붓는 포화에 쓰러진다. 달려가다 쓰러진다면 그걸로 끝.

다시는 일어날 수 없다. 영웅의 격에 도달한 고레벨 트롤마저 그렇다.

하지만 죽어 쓰러지는 적이 늘어난 만큼 거리도 가까워진다.

요정들은 더 빠른 속도로 돌진해 오는 그린스킨에게 화력을 투사하고, 그러면 그 뒤편에서 그만큼 더 전진하는 자들이 늘어난다.

[히어로 유닛]이 아닌 것들도 많다.

현대의 황제 친위대인 녀석들도 이 전장에 몸을 던지는 것을 꺼려 하지 않는다.

목숨을 도외시한 공격만큼 저지하기 힘든 것도 없다.

물리적 거리는 차근차근 가까워져 간다.

요정왕에게 달라붙은 영감님은 여전히 땀을 줄줄 흘리고 있다. 마력에 한계가 다가오고 있는지 방어막이 흐트러지며 살이 타들어 가고 있다.

아니, 다른 주술사들의 간섭 때문일까?

적진에 돌격할 수 없기에 손가락만 빨고 있던 잎사귀 요정 쌍검사 하나가 영감님의 허리춤에 시선이 미쳤다.

그리곤 중얼거린다.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게 들려온다.

"좋군."

나는 그가 무엇을 결심했는지 알았다.

하지만 말릴 수는 없다.

그는 [묠니르]를 집어 들었다.

둔기에 대해서는 마스터리도 없다. 스택 한 마스터리는 신체 능력에마저 영향을 준다.

사용하지 않는 종류의 무기를 들고 앞으로 나서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그는 그리하였다.

온 마력을 담아. 검사의 보잘것없는 마력일지라도 네 자릿수에 도달한 레벨이다.

[묠니르]에서 터져 나온 번개가 사방을 달린다.

쌍검사는 살아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그가 만든 번개의 장벽은 9층에서 나에게 그랬듯, 사방을 지지며 효과적인 저지선을 만들어냈다.

통과하는 트롤이 통째로 구이가 되는 모습을 보고 돌격의 기세가 순간 주춤했다.

아마 만족스럽게 눈을 감았으리라.

그 와중에도 두 요정의 마력선은 미친 듯이 내 안을 헤집고 다녔다. 주술사들이 이어둔 선을 끊어내고 밀어낸다.

하지만 소용이 없다.

쉽게 밀려나지만 그만큼 쉽게 다시 간섭해온다.

한 명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미안해! 내가 괜한 짓을 해서!"

갈색 귀를 가진 요정이다. 처음에 약간 부린 욕심 때문에 지체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건 오히려 내가 너무 쉽게 막아버려서 별 지장이 없는 수준이다.

"별수 없지."

애초에 이런 거리에서 이 정도로 방해할 수 있는 게 이미 이상한 상황이다.

이건 계약이 나에게 있어 생기는 문제다. 나 자신의 마력량은 두 정령사나 간섭하는 주술사들에 비하면 보잘것없다.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마력 총량에서 밀린다면 한계가 있으며, 남의 마력이 세탁되어 들어온다 한들 컨트롤에 한계는 있다.

원래 이런 남의 마력으로 정령왕을 부르는 것은 팀플레이다.

하지만 그러면 남의 마력을 내 마력이나 다름없게 만들면 된다.

"제 허리에 병 보이시죠?"

요정 둘의 눈이 움직인다.

"저게 기적의 샘물이니 살려드릴 수 있습니다. 잠깐만 죽으십쇼."

앞뒤 다 자르고 하는 말이지만 알아듣는다.

둘 모두 재빨리 방어력을 가진 장비를 풀어헤치고 앞섶을 열었다. 맨살이 드러난다.

"잘할 수 있는 거 맞지?"

"계약을 넘겨받는 게 더 좋을 텐데!"

"그럴 시간 없습니다."

아무렴, 뭔가를 적당히 죽이는 건 나만큼 잘하는 이가 없을 것이다.

정확한 공격으로 둘 모두 죽음의 직전까지 도달한다.

완전히 죽는다면 마력도 사라진다. 자아가 소멸하니까.

가사상태라고 불러야 할까. 체내의 마력을 스스로 불러일으킬 수는 없겠지만.

나 또한 주술사도 해본 몸이다. 그것도 주술에서 정밀함을 손에 넣어보려고 온몸을 비틀어본 적이 있는 몸.

아까부터 관심이 많은 크라이오젠이 쓰러진 요정 둘을 슬쩍 보더니 나를 째려본다. 그런 동시에 냉기로 두 요정의 방어막을 유지한다.

나는 고개를 까딱해 감사를 표하고 두 정령사의 마력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본인들이 거의 죽어 있는 상태기에 몸에 잠든 막대한 마나는 고스란히 내 의지로 움직인다.

아주 잠깐 두 명의 마력선이 사라진 동안 주술사들은 거침없이 전진했다.

거의 내 계약에 닿으려고 할 정도다. 계약 자체를 강탈당할 수는 없지.

벽이 일어난다.

쫓아내는 건 지금까지도 쉬웠다.

하지만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단단하게 막아서는 것은 다른 문제다.

막대한 마력이 휘몰아친다. 체내에서 격렬한 마법적 공방이 지속되자 몸이 슬슬 감당하기 힘들어한다.

하지만 [피의 샘]에는 여유가 넘친다. 실시간으로 수복하며 방어선을 구축한다.

주술사들은 계속해서 문을 두드렸지만 결국은 역부족이었다.

방해가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마력적 요새가 구축되었다.

그 이후는 일사천리다.

정령왕이 소환된다.

오랜만에 보는 자그마한 은빛의 용.

공간이 일그러지며 실피드가 나타났다.

저번보다 훨씬 많은 양의 막대한 마력을 머금고 있다.

활활 타오르는 은빛을 두른 드래곤이 포효한다.

* * *

전쟁의 신은 혀를 찼다.

이건 텄군.

여기선 이제 못 이긴다. 후퇴시켜야 한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미 진군하기 시작한 다른 병력도 있다.

아까운 녀석들을 여기서 살려 꺼내기만 하면 된다. 이미 죽은 [히어로 유닛]들이 아쉽지만, 이 서버의 그린스킨은 더없이 강대하다.

여유는 있다.

좋다. 이 지하 유적에서의 싸움은 네가 이겼다 혼돈의 하수인.

하지만 지상에서는 그럴 수 없으리라.

계단의 위치도 알고 있다. 이미 점거하고 있다.

* * *

벽이 내리꽂혔다. 보이지 않는 공기의 벽이었다.

돌격하던 모든 그린스킨들은 잠깐 멈칫한 후 계속 돌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직감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식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수백 도에 달하는 공기가 지하 미로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것이 바람이 되었다.

어마어마한 속도의 바람이 불었다.

지하 미로를 통째로 들어 내버릴 것 같은 기세로 불어 닥친다.

우습게도 그린스킨들을 향해 부는 것이 아니었다.

갑작스레 등장한 찬란한 은빛의 드래곤에게 모든 공기가 빨려 들어가고 있다.

열을 띈 공기가 빠져나가자 그 뒤는 진공이 된다.

기압이 사라져 미로의 귀퉁이가 또다시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린스킨의 영웅들은 결정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신 또한 명했다.

「후방을 향해 돌격하라! 바깥에서 격멸한다!」

빠르게 누가 남아서 후방을 저지할지가 결정된다.

아라크는 까마득한 후임들이라 할 수 있는 두 주술사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인간이 보면 몹시도 사나워 보였겠으나 오크에게는 더없이 상쾌한 미소였다.

그리곤 돌격했다. 최후의 함성을 내지르지만 공기가 사라진 지하 미로에 더 이상 울려 퍼지지는 못했다.

은빛의 드래곤은 이제 눈부셔 똑바로 보지도 못할 지경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단련된 전사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드래곤이 입을 벌린다.

모여든 공기, 이미 달아올라 있던 바람.

하지만 더욱더 압축되어 타오를 지경으로 변한 공기의 덩어리가 쏘아졌다.

전사 아라크는 온 힘을 다해 그 공격을 쳐내었고, 자신의 대검이 산산히 부서지며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며 스러졌다.

마지막 순간에도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