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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102화 (102/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02화

10층 - Lv. 1050 고대의 영웅들(2)

분명 빈사일 두 정령사 요정은 그 와중에도 눈을 어거지로 뜨며 실피드의 모습을 보려 했다.

의식이 날아갔음에도 정령왕의 소환에 저절로 눈이 떠진 모양이다.

눈을 똑바로 뜨려고 안간힘을 씀에도 기력이 없어 까무러치려는 모습에 어이가 없어 병부터 던졌다.

모두가 숨을 못 쉬면 곤란하니 주변의 요정들이 있는 위치까지는 공기의 돔을 형성한다.

열을 식힐 수는 없었으나 크라이오젠이 손을 떨치자 곧바로 정상 기온으로 돌아온다.

나는 땀을 흘리지 않지만 땀을 흘리는 요정들은 많았다.

다들 안색이 한결 편해진다.

[히어로 유닛]이고 나발이고 환경에 대한 면역 스킬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럼 그걸 버티는 건 체력인데 요정들이 그린스킨보다 체력이 좋을 리가 없다.

장기적으로는 좋지 않았으나 이렇게 시간 안에 해결되었으니 문제는 없다.

처음에 실피드가 쏘아낸 고압의 공기탄은 이미 공기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압축이란 것은 상상 이상으로 고열을 발생시킨다.

바람의 정령왕이 이루어낸 초고압의 공기 구체는 지하 유적의 마법진을 폭주시켰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온도를 만들어내었다.

단순한 대기일지라도 그 온도가 지나치게 높아진다면 기체 상태를 넘어서게 된다.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과도 같은 구체.

플라즈마 상태다.

우스운 것은 이렇게 되면 더 이상 바람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정령왕으로 인한 통제를 벗어나기 전에 얼른 쏘아내야 한다.

후퇴를 지원하는 그린스킨의 전사들이 덤벼든다.

주술사 몇몇은 정령왕의 행사에 간섭하려 했다.

당연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령은 원소 그 자체다. 자신의 몸을 남에게 빼앗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나 자신에게 다시 간섭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정령왕의 통제를 빼앗으려는 수작이다.

그 또한 이루어질 수 없다. 주술사도 기대하는 것이 아니리라.

단지 내 공격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다면, 그 생각만으로 시도하는 결사의 항전이다.

이렇게까지 되면 오히려 내가 악당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사실 그런 게 어디 있겠는가. 미궁에서 악이란 개념만큼 허무한 것도 없다. 모두 각자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움직일 뿐.

그린스킨 전사들은 스스로의 명예를 위하여, 그리고 후배와 동료들을 위하여 움직였다.

최초에 쏘아진 플라즈마에 맞은 전사들은 모두 증발했다. 하지만 그린스킨은 많았다.

밀폐된 지하에선 공기 또한 자원이다. 바람의 정령을 다룬다면 탄환이다.

일격에 날아간 적들을 제외하고도 측면에서 저지하려는 전사들은 많았다.

절반 정도는 남았고 나머지 절반은 입구를 향해 달려간다.

전쟁의 신은 정확하게 계산했다.

공기가 부족하기에 실피드가 나타났다고 한들 이전처럼 휩쓸어버릴 수는 없다.

정령왕이라 한들 없는 원소를 제조할 수는 없다.

정령왕은 자연의 일부지 조물주가 아니니까.

전쟁의 신의 생각대로 절반 이상의 병력은 살아서 밖으로 나갈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바깥에는 대규모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겠지.

그린스킨들은 그 이상으로 세세한 수작은 부리지 않는다. 후퇴조차 후방 돌격이라 말하는 족속들이니까.

하지만 전쟁의 신에게 오산이 있다면, 나만큼 효율에 미친 유배자도 드물다는 사실이다.

* * *

위대한 전사 아라크의 최후를 두 주술사가 목격한 것은 아니다.

진공 상태는 뛰어난 주술사인 그들에게도 편안한 환경은 아니었다.

대기가 사라지며 열전도가 멈추긴 했으나 이젠 숨을 쉴 수가 없다.

그 어떤 마법도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 그게 가능하면 신이라고 하겠지 마법사가 아니다.

전쟁의 신이 광역으로 권능을 내리셨다.

지하 미로에서 후방 돌격을 시행 중인 그린스킨들의 몸은 더욱 강건해졌고, 지구력이 좋아졌다.

몸이 산소를 조금 덜 요구하게도 되었다.

대화를 할 수는 없기에 달리며 손짓을 한다. 마법으로 대화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넉넉한 상황이 아니었다.

후임은 비통스러운 표정이었다.

선임 대주술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인상을 쓰며 열심히 굵은 녹색 손가락을 움직였다.

대충 이걸로 끝이라 생각하지 마라, 그러고도 네놈이 오크냐 하는 듯한 거친 제스쳐.

후임은 표정을 똑바로 했다. 이번에는 군기가 바짝 들어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곧이어 뒤편에서 무시무시한 마력이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는 둘 모두 표정에 위기감이 떠올랐다.

선임이 뒤돌아서 방어막을 펼친다. 후임은 달려가다 말고 멈칫했다.

선임이 고개를 저었다. 엄지가 뒤편을 가리킨다.

후임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선임은 만족스럽게 방어막을 강화했다.

하지만 곧 누가 옆에 섰다. 그리고 마력을 흘려 벽을 세운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후임에게 화를 내려고 했던 선임은 멈칫해야 했다.

오크로서는 드문 호호백발의 노인이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그가 어깨를 짚는다.

[늙은 척하기는. 애송이.]

아주 짧은 순간 저 한마디를 전달하기 위해 구성된 마력의 흐름에 대주술사는 움찔했다. 격이 다르다.

이분은 천 년 전의 영웅이다.

날아드는 열을 띈 공기가 마력의 장벽에 부딪혔다.

주술사 영웅은 어렵지 않게 그 일격을 받아내었다.

마력 장벽이 통째로 흔들리긴 했지만 그 바람에 천장에서 돌가루가 후두둑 떨어지는 이상의 타격은 없었다.

[요정들은 자신의 왕을 구해야 한다. 이 미로를 무너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얼른 나가거라.]

선임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달렸다. 황제 친위대의 대주술사라는 지위에 오르고 남에게 고개 숙일 일이 적었다.

하지만 이름을 알 것 같은 주술사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주술사라면 기본적인 역사 교육 정도는 받는다.

저분은…….

* * *

가장 깨어나지 않았으면 하던 녀석 하나가 깨어나 있었다.

이런 지하 미로에 늘 이름을 올리고 있는 역대 최강의 주술사, 칼그림.

우리 영감님조차 어린애 다루듯이 할 수 있는 위대한 주술사다.

요정왕 부부의 시간이 아직 굳어 있는 지금으로썬 막아설 방법조차 없을 정도다.

정령왕이랑 계약한 것은 정말 잘한 짓이었다.

칼그림은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정령왕을 경계하고 있을 테고 그럼 나는 원래 하려던 것을 하면 된다.

실피드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약 10초. 그리고 지금까지 5초 정도가 흘렀다. 시간은 아직 절반이 남았다.

바람을 움직이며 이 미로의 구조를 파악하는데 걸린 시간이다.

공격은 시작하지도 않았다.

바람이 불기 시작할 것이다.

* * *

지하 유적은 엄중히 밀봉된 감옥 같은 곳이었다.

눈이 내리는 설원이라기에는 조금 벗어난 장소.

입구는 좁고 기나긴 계단 하나뿐이다.

저 아래 아주 깊숙한 지하에 구전으로조차 전해지지 않는 옛이야기 속의 전사들이 잠들어 있다.

그린스킨이라 해도 감수성은 있다.

입구 근방에서 감시를 하고 있는 오우거 하나가 그랬다.

이 감수성이 풍부한 오우거는 저 아래에 잠든 영웅들이 어떤 존재들일지에 대해 생각했다.

물론 한번 겨뤄보고 싶다는 생각까지도.

그렇게 지하에 관심이 많았기에 갑자기 흘러나오기 시작한 땅 울음을 가장 먼저 감지했다.

오우거는 소리쳤다.

신께서 보고 계시는 전장이다.

그 무엇 하나 소홀할 수 없다.

지휘관이 달려 나왔다. 친위대장이다. 언제나 무뚝뚝하고 근엄한 표정의 오크 전사는 오우거들마저 움찔하게 만들 위엄이 있었다.

주술사들이 모였다. 저 지하에 있을 영웅들에 비할 수야 없겠으나 현존하는 주술사들 중 최강을 다투는 일각이다.

대지의 울음을 들어보던 주술사들의 안색이 곧 흙빛이 되었다.

때맞춰 전쟁의 신이 소리쳤다.

「멀어져라! 그 계단에서 최대한 멀어져라!」

이것은 신으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유적의 지하 미로를 붕괴시켜 생매장당할 생각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공기도 적다.

가동 시간도 적을 것이다.

미리 준비하고 대대적으로 정령왕을 소환한 것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약간의 희생만으로 나머지 병력과 [히어로 유닛]들을 빼돌릴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처음부터 목표하는 대상이 그쪽이 아니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계단이 붕괴했다.

아니, 붕괴라기보다는 확장되었다.

무시무시한 폭풍이 솟구치며 계단을 이루던 석재가 하늘 높이 치솟게 했다.

주변에 있던 오우거나 심지어 트롤마저 몸이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은빛으로 찬란한 드래곤이 나타났다.

크기는 아담했다. 기껏 해봐야 트롤의 손바닥으로 감싸질 정도.

모든 어린 동물들은 귀여움을 간직하고 있다.

일견 무해해 보이기까지 한 작은 드래곤의 모습에 공중에 잠시 떠올랐던 트롤 하나가 멍하니 손을 뻗었다.

잡아먹으려거나 하는 생각은 아니었다. 정말로 만지려고 했을 뿐이다.

슬쩍, 산들바람 같은 것이 불었다.

트롤이 반으로 갈라졌다.

다른 이들이 모두 달리기 시작했다. 주술사들도 저항을 포기했다.

저것이 무엇인지를 그들의 신께서 알리고 있다.

대정령만 되어도 재해다. 정령왕은 천재지변이다.

하늘에서 폭풍이 내려꽂혔다. 안간힘을 쓰고 방어하던 주술사들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엄청나게 뜨거웠다.

물리적 방어만 상정한 주술사들에게 강렬한 열기, 불의 원소에 의한 타격이 들어온다.

이미 몇 명이 구워져 절명했다. 숨을 잘못 들이쉬다가 쓰러진 오우거도 있다.

트롤 몇몇은 폐가 상했는지 목을 움켜쥐고 쓰러져 재생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 또한 시작에 불과했다.

온 사방의 공기가 작은 드래곤을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이미 달궈질 대로 달궈진 공기가 더욱더 압축된다.

드래곤은 그걸 하나하나 구슬처럼 만들어 퉤퉤 하고 뱉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폭탄처럼 온 사방에 구슬들이 배치된다.

중심이 진공이 되자 주변에서 빨려 들어오는 공기에 의해 일대에는 광풍이 몰아쳤다.

그린스킨 군대는 그야말로 기겁을 했다.

바람이 격렬하게 불어닥치는 것 정도는 괜찮다.

하지만 저 모여들고 있는 공기의 구슬들은 심상치가 않았다.

신이 뭐라 말하지 않았음에도 다들 일제히 후방으로 돌격을 실시했다.

그러나 구슬들은 멈추지 않고 따라왔다. 온 사방으로 흩어지는 전사들을 탓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불처럼 이글거리는 무시무시한 구체로부터 도망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다.

지금 전사들의 임무는 대적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살아야 투쟁도 있는 것이다.

정확히 5초가 더 지나고 나서, 모든 구체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 * *

내 시야에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소소한 크기의 버섯구름들이 일제히 자라나는 것들.

그것을 마지막으로 실피드는 다시 정령계로 돌아갔다.

나는 피를 토했다.

뱀파이어라 죽지 않았다 뿐 무리하기는 많이 무리했다.

[피의 샘]도 엄청나게 소모했다. 죽지 않는 뱀파이어라 너무 다행이다.

힐링 포션 덕에 완전히 멀쩡해진 두 요정들이 귀를 쫑긋 세우며 감탄한다.

"이거, 마력 운용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발상 자체가 너무 남다른데?"

둘 모두 서로를 마주 보고 눈을 빛내고 있다.

그리고 고개를 홱 돌린다.

"어떻게 한 거야! 가르쳐줘!"

"정령왕 소개시켜 준다며! 새끼 드래곤 모양이라 귀여워! 내가 가져도 돼?"

흠, 그럴 시간은 없을 것 같지만 일단은 뻥카다. 다음에 만나게 되면 진지하게 정령에 대한 토론을 해볼 생각은 있다. 배움은 본디 끝이 없나니.

"여길 정리하고 올라가야 시간이 나지 않겠습니까."

정리는 필요하다. 왜냐하면 모두가 내가 지상을 공격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전쟁의 신은 그래서 정령왕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영웅들로 하여금 지하를 지키게 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갔어야 할 화력이 위쪽을 초토화시키는 것에 쓰였으니까.

그리고 정확히 올 것이 왔다.

영감님 이상으로 나이든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 보이는 호호백발의 늙은 오크 주술사 하나.

피부색이 녹색이 아닌 검은 트롤 하나. 이 트롤은 트롤답지 않게 아주 엄숙하고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다. 전사보다는 차라리 기사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려 보일 정도다.

마지막으로 오우거 특유의 두툼한 뱃살 대신 매끈한 식스팩을 가진 대머리 오우거 하나.

게임 시절부터 위험도로 따지자면 최상에 해당하는 그린스킨 종족 탑티어의 네임드들이다.

이젠 얼굴만 봐도 이름과 전투 스타일까지 알 수 있다. 스킬셋은 물론이다.

하지만 나는 저들을 정면으로 상대할 생각이 없다.

영감님이 신음하며 고꾸라졌다.

드디어 요정왕 오베론과 그의 부인 티타니아가 선명하게 색을 되찾았다.

종족 특성으로부터 마법직 전반에 극도로 특화된 상위종족, 천사와 악마와도 동급이라 여겨지는 사기 종족이 꽃잎 요정이다.

그리고 당연히 요정왕 부부는 대륙의 역사에 남을 네임드 꽃잎 요정이다.

이제 저분들이 상대하시겠지. 우리는 다음 층으로 넘어갈 때다.

여긴 떠넘기고 갈 생각이니 지상을 쓸어버린 거다.

요정왕이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을 보고 있는 다른 요정들을 느꼈다.

조각보다도 잘 생긴 남자다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감미로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요정이……."

문득, 시선이 나에게 향한다.

"아니, 우리가 이겼군."

[자연의 신이 오베론의 말을 흡족하게 긍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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