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05화
11층 - Lv. ???? 신성 고블레타리아 연방
주변을 둘러보며 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흐른 세월은 500년. 그렇다면 강산이 변해도 50번은 변한다.
하지만 어딘가 낯익다.
낯설지가 않다.
당장 지금 내가 낙하한 지점만 해도 다른 행성이라기에는 조금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생태계라는 것은 서로 다른 행성이 되어버리면 극적으로 달라지는 법이다.
아무리 테라포밍을 하고 ‘대륙’의 동식물들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적응을 할지는 미지수고.
무엇보다 게임적인 시스템의 한계라고 해야 할지. 타 행성의 생태계가 천차만별이라는 것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일 경우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게까지 알 수 없는 무언가로 튀지는 않는다.
본디 게임이라서, 혹은 그저 미궁의 보정으로 대륙의 역사의 큰 줄기만큼은 거의 변하지 않고 흘러간다.
기술의 발달부터 하여 많은 부분이 고정되어 있는 상수다.
특정 행성의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어떤 형태일지는 테이블이 정해져 있고, 그 안에서 랜덤으로 결정되는 정도의 변수밖에 없다.
그 변수들만 통째로 외우고 있다면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았다. 이곳은 테라포밍된 행성이 아니다.
‘대륙’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람."
「요정왕이 아직 살아 있군, 자네를 기억도 하고 있어.」
갑작스럽게 들려온 말에 깜짝 놀랐다. 꽃잎 요정이라면 대부분 그럴 수밖에 없긴 하다.
요정 계통 상위종족이라고 할 수 있는 꽃잎 요정은 보통 요정보다 더 오래 살 확률이 높다.
진짜로 유의미한 수명의 차이가 있냐면 모르겠지만 아무튼 통계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 법이다.
그 통계는 내가 직접 냈다.
"좀 물어보실 수 있습니까?"
「저쪽이 내 상황을 더 잘 알고 있던걸? 저번 층을 기점으로 완전한 연합이 발족하고 그대로 2차 요정 전쟁이 발발한 모양일세. 그러고도 결판은 나지 않았고.」
그걸로 결판이 나지 않았다는 건 그럴 법도 한 일이다.
제국이다. 오크 제국.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팩션은 정말 끔찍하게 강력하다.
변방의 오랑캐나 다름없는 인간과 이미 몰락한 요정들이 힘을 합치더라도 순순히 쓸어내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이거 참, 처음부터 그린스킨의 편을 들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좀 들긴 하는데.
그랬다면 지금처럼 여러 신에게 두루 지지와 호감을 얻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전화위복으로 생각하자. 왕국 이후의 계획을 수행하기에는 이편이 더 낫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결판이 나지 않았다는 것은 당장 크게 밀리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세월이 지나서는 결국 대륙을 버리고 타 행성으로 이주했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그린스킨의 편을 든 다른 팩션이 나타난 모양이군요. 용인입니까?"
「정확한 통찰이군.」
용인들은 그린스킨과 죽이 잘 맞는 편이다. 이 둘이 연합하는 경우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미 그럴 수밖에 없는 형태로 대륙이 구현되어 있기는 했다.
고블레타리아 연방의 존재가 결정적이었으리라.
어찌 되었건 그 한 축을 차지하게 된 뱀파이어들은 바르바로이 클랜이고, 그들에게 용인은 원수나 다름없었을 테니.
그럼 아마 용인에게 원한을 진 동방의 팩션들이 모두 이쪽으로 흘러들어왔으리라.
고블레타리아 연방이 어떻게 성립되었는지 알겠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미약한 세력이었는데. 좀 이상하다고 여기긴 했다. 여신님이 정말 기적의 운영능력을 보여준다 치더라도 기폭제가 될 만한 원한이 많았으리라.
용인과 적대하는 이들을 모두 흡수했을 테니.
역사를 주무르려고 하는 입장에서는 이보다 깔끔할 수가 없다.
지금 이 서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다른 유배자의 간섭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다.
우리 여신님과도 이야기를 해보아야겠군.
* * *
"오, 세상에."
"오, 맙소사."
함장의 세상에와 나의 맙소사다.
내가 들은 소식은 고블레타리아 연방이 현재 이 은하를 삼분하고 있는 거대한 국가이며, 무려 신정국가라는 것이었다.
함장이 들은 소식은 내가 혼돈의 교단의 꼭대기에 앉아 있는 상태라는 것이고.
서로가 기겁을 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주변의 다른 요정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몇몇 인간 승무원들도 사색인 된 채 달려왔다.
"맙소사, 그럼 귀빈. 아니, 이건 국가적으로."
"함장님 어떻게 하죠?"
함장 역시 눈만 빠르게 깜빡이고 있다. 귀가 이리저리 움직이지만 시선도 제 갈 길을 못 찾고 있다.
"으아, 시, 신이시여.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자연의 신이 배를 잡고 쓰러집니다.]
"시 신탁이다! 신탁이 내려왔다!"
요정들은 수명이 긴 관계로 아직도 신앙생활을 하는 인구가 많다.
그 덕에 자연의 신은 어떤 경우에도 꿀단지를 안고 가는 편이다. 종족 특유의 신앙인 데다가 유지도 오래된다.
아주 좋은 신좌다.
배를 잡고 쓰러지는 신탁이 내려왔지만 요정들은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역사의 중심축이 되는 중세시기를 제외하면 유배자가 나타나는 시대는 생각보다 한정적이다.
가까운 미래, 먼 미래. 이렇게 두 가지 카테고리밖에 없다.
그러니 신좌에 앉아 플레이할 수 있는 시대도 한정적이다.
그 사이 구간은 게임상에서는 스킵된다.
실제로 신좌에 앉아 신 플레이를 즐길 때도 마찬가지다.
텍스트로 정보가 주어지며 그 정보를 바탕으로 계속 RTS 플레이를 이어갈 뿐이다.
스킵된 시기의 플레이? 그건 AI가 한다.
현실이 된 미궁에서도 그것은 같다.
그리고 AI는 직접적인 신탁을 거의 내리지 않으며 신언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미래 시대에 신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은 그런 소통의 부재 탓도 있다.
지금 요정들은 장장 500년 만에 신탁이 내려온 상황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건 생각보다 중요한 부분이다. 오랜만에 내려오는 신탁이나 신언은 그 힘이 남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소녀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소녀가 눈치를 보더니 호다닥 안겨 온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여신님과 대화했다.
"연방의 충성도는 어느 정도입니까?"
「내가 죽으라고 하면 죽을 정도군.」
"아니, 진짜 어떻게 그게 그렇게까지 된 겁니까?"
「낸들 알겠나. 흘러온 기억을 보면 내가 좀 잘하긴 한 거 같은데. 그걸 감안해도 네가 한 짓들의 기억이 너무 강렬한 모양이야.」
잠깐 이마를 짚고 생각해 보았다.
고블린 입장에서는 핍박받던 자신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일깨워준 위대한 혁명가.
심지어 죽음으로서 신격화되기까지 했다.
그 배후에 있는 것은 위대한 혼돈.
뱀파이어 입장에서는 새로운 클랜 마스터가 인도한 땅.
바르바로이가 나에 대한 감정이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마법사인 만큼 현명하고 합리적인 인물이다.
그 어떤 상황과 비교해도 내가 만들어준 상황이 더 낫다.
그래, 어찌 보면 낙오 클랜이 되지 않고 적당히 자리를 잡은 것 이상으로 이득이다.
신도 수가 많지 않은 여신님이 아주 적극적으로 비호할 테니까.
관리할 신도가 여러 서버에 걸쳐 있는 다른 신들과 비교하면 말할 것도 없다.
이 또한 혼돈의 뜻대로.
신앙심이 수직상승 하기 아주 좋은 환경이다.
그리고 아마 주관적인 관점에서는 미래의 우리 파티가 활약하며 그런 경향을 부추겼을 것이고.
신격화가 일어나도 몇 번이 일어났을까?
전설이 되어버린 유배자 파티가 있으며, 그 모든 것이 위대한 혼돈의 의지였다.
"이건 저 같아도 뿅 가버리겠군요."
「음, 그래 그렇게 된 모양이야. 신이 본디 유배자였다는 사실이 알려졌음에도 오히려 신앙이 더 공고해지긴 한 모양이더군. 」
그야, 그 근간 자체가 유배자에 의한 것이었으니까.
잠시만 그 고블린 암살자가 유배자라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나?
「너인 것은 모른다. 유배자 고블린이었다고만 전해지고 있어. 이건 써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도 정확히 같은 생각이다.
연출은 중요하다. 그것이 무대나 소설이 아니어도 말이다.
그리고 연방의 어마어마한 충성도는 지금 당장 써먹을 수도 있다.
* * *
고블라초프 서기장은 회의실에 들어서기 전,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있었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최근의 답답함을 어떻게든 해소할 실마리가 필요하다 생각해서였다.
그는 유능한 고블린이다. 어린 시절부터 엘리트로서 교육받아왔고 당에 충성하며 단 한 번의 탈선 없이 혁명의 기수로서 살아왔다.
더러운 오우거 자본가들 아래에 신음하는 고블린 동지들을 구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해 왔던 세월이다.
모든 인민은 여신 아래에 평등하다.
그 가치 아래에 평생을 헌신해 왔다.
500년 전, 가장 처음으로 혁명을 달성했던 북부의 요새.
그곳에서 깃발을 흔들었던 조상님의 이름 앞에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이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나날이 꼬여만 가는 은하계의 정세를 어찌 해내지는 못했다.
먼 옛날, 든든한 맹우였던 EHD 동맹 또한, 인간들이 주축이 된 만큼 그들의 신앙의 영향을 받아 자본가로 타락해 버렸다.
그 이후 고블레타리아 연방은 언제나 외로운 싸움을 지속해 왔다.
물론 동맹 측에서도 그린스킨 제국에 대해 호의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그 어느 쪽과도 연대하기 떨떠름할 것이다.
사상이냐, 역사냐. 무엇을 우선하더라도 말이다.
현재 은하를 삼분하는 세력들은 이렇게 서로의 사상과 역사적인 원한을 사이에 두고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이 문제다.
고블라초프 서기장은 이 균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장 그들의 역사가 시작된 성지 ‘붉은 숲’조차도 아직 제국의 수도에 있다. 참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동맹 역시 연방이 그 땅을 차지한다면 불편해할 것이기에.
그래도 그 전환점이 될지도 모르는 사건이 최근 들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서기장은 회의실로 들어서며 더욱 좋은 소식을 기대했다.
"서기장 동무!"
그를 급하게 부르는 이가 있었던 것은 기쁜 일이었다.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동맹과 제국의 분쟁이 전쟁으로 격화되었다는 것이었다.
한심하게도 이윤이 문제였다. 평등이 무엇인지 모르는 녀석들 같으니라고.
"하지만 국지전으로 끝날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그런 일은 수차례 있어 왔다. 그 어느 세력도 전면전을 감당할 자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동맹이 기습적인 초장거리 워프를 통해 제국의 수도를 공격했다고 합니다!"
"뭣이?"
이것은 제국의 자존심을 건드는 행위다. 동맹이 어째서 그런 무모한 짓을 하였는가.
"첩보에 따르면 규율의 신이 결정에 관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규율과 금전의 신. 자본주의의 첨병과도 같은 자이나 그런 만큼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을 벌이지는 않는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하지만 이것이 연방에게 기회가 되리라. 그렇다면 좋다.
"우리가 참전하는 게 좋다고 보는가?"
신중한 표정의 뱀파이어 국방위원장이 난색을 표했다.
이것조차 자본주의자들의 수작일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사실 모두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대체 어째서 규율의 신이 제국과의 전쟁을 지지하는가.
있기 힘든 일이다. 전쟁은 결코 이득을 낳지 못한다.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지 않고서야.
서기장은 다시 답답함을 느껴야 했다. 오랜 세월 그를 괴롭혀온 그 답답함.
목을 옥죄는 듯한 불편함.
혁명의 물결이 몰아칠 곳은 이리도 많은데, 어찌 현실적인 난관 또한 이토록 많은가.
서기장이 한숨을 내쉬자 회의실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서기장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규율의 신이 갑자기 그런 행보를 걸었다면 어머니 혼돈께서도 어떤 말씀을 내리실지도 모르지 않겠나."
분위기가 조금 밝아진다. 모두의 염원이었다.
연방이 언제나 뒷일을 생각하는 것 또한 언젠가 돌아오실 여신님과 그분의 대전사이자 대신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분들이 다시 온 은하를 굽어보기 시작하였을 때, 연방이 조각나 있거나 멸망해 있다면 대체 어떤 낯으로 배알하겠냐는 것이다.
동맹이나 제국은 연방만큼 신과 유배자를 열심히 연구하지 않았다.
유배자들을 붙잡고 연구한 끝에 얻은 결론은 공백기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신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굽어살피시며 권능을 하사하시지만, 언제나 그 신격이 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잠들어 있는 시기도 있다.
다시 깨어나, 혹은 돌아와 이 난관을 타계할 방책을 내려주시지 않을는지.
그렇게 회의실에 가벼운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모든 혼돈의 신도들은 들어라.」
회의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전설로만 전해 내려오던 어머니 혼돈의 목소리였다.
앳되지만 진중한, 서늘하리만치 위엄이 서린 아득한 목소리.
전해 내려오는 그대로다.
위대한 혼돈께서, 어머니 혼돈께서.
지금 이 자리에 임하셨다.
모두가 절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의실에 단 한 명도 기립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서기장은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흐름을 느꼈다.
* * *
그것은 온 연방의 구석구석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환자조차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목발을 짚고 기립했다.
기립하지 못한 자들은 여신의 옥음에 그만 실신한 자들뿐이었다.
그 바람에 사망사고 또한 잇달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안타까워할지언정, 슬퍼하지는 않았다.
오백 년의 세월을 넘어. 드디어 어머니 혼돈께서 다시 임하셨도다.
삼십분 이내에 모든 대사관들이 철수했다.
외교는 모두 중단되었다.
연방은 외부와 이어지는 모든 회선을 스스로 끊어버렸다.
혼돈께서 가로시되. 지금이야말로 전쟁의 때다.
성지를 탈환하고, 제국을 불태울 때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병사들이 휴가마저 반납하고 함대로 복귀했다.
온 연방이 눈물과 감동으로 달아올랐다.
단 두 시간 만에, 총력전이 결의되었다.
연방의 인민 그 누구도 감히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어머니 혼돈 앞에 영광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