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07화
11층 - Lv. 765 폭풍울음 기갑여단(3)
전쟁의 신이 얼마 없는 영향력을 동원해서라도 무언가 노린다면.
그것은 우리 파티, 더 정확히는 나일 것이다.
이곳은 적들의 본성이니만큼 정면 대결에 승산이 있을 리는 없다.
마력 탐지의 파장을 숨기는 장비를 통해 주변을 관측했다.
이미 불시착한 패잔병들을 추격하는 부대들이 있었다.
곳곳에서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진다.
더 이상 함께 있는 것조차 위험했다. 함장과는 무운을 빌며 헤어졌다.
동맹 측은 생각보다 많은 병력들을 지상으로 강하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불시착 같은 강하가 의도였냐 하면 그랬다는 모양이다.
제국 수도성의 지상 방비는 썩 훌륭하지 않다.
애초에 습격받으리라고 가정을 하지 않은 탓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타당하긴 하다. 그런 가정을 하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구름을 뚫고 추락하는 함선이 많아지고 있다. 불시착은커녕 공중에서 산산조각 나 대지를 향해 잔해만 쏟아내는 전함도 보였다.
그 바람에 처음에 두껍던 구름이 완전히 개였다.
하늘 위에서는 여전히 함대전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대공포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동맹의 함대가 명백하게 밀리고 있다.
점차 어떤 식으로건 지상의 동맹군이 늘어날 것이다.
"우리는 제도로 이동한다. 계단이 그곳에 있어. 연방 함대가 도착할 때까지만 도착하면 될 것 같은데."
"고블린들이 그렇게 빨리 와 줄까요?"
그 질문에 내가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소녀는 여신님과 대화하는 듯, 눈동자를 위로 향하더니 납득했다.
연방은 지금 선발대의 초장거리 워프를 준비하고 있다.
연방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가장 빠르게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대였다.
그들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이 행성 상공으로 워프를 감행하리라.
그들의 대신관과 여신을 맞이하러.
이 워프라는 것도 결국은 텔레포트다. 좌표 설정 따위의 정밀한 부분은 과학의 힘을 빌렸겠으나, 결국 주체는 마법이다.
마도공학이란 마법을 메인으로 삼되 과학으로 보조하는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먼저 발전한 것이 마법이니 별수 없다.
기술의 발전은 모든 분야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당장의 필요에 따라 발전한다.
우리는 열심히 움직였다.
소녀와 사냥꾼이 걱정을 해왔다.
주변의 풍경이 너무나도 압도적인 탓이다.
8층에서 보았던 요새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강철로 세워진 절벽과 위압적으로 하늘을 향해 포탄을 발산하는 대공포들.
떨어지는 구명정을 요격하는 레이저포대도 있다.
생체 채프를 자처했을 때, 상당수의 박쥐들이 저것들에게 요격당했다.
다행스러운 점은 지상을 노리는 포대는 없다는 점이다.
제국의 심장부를 지상에서 공격당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장거리 워프는 그 자체로 위험한 행위다, 한 번에 먼 곳으로 갈수록, 혹은 텀을 길게 두지 않고 연달아 이동을 할수록 사고의 확률은 올라간다.
우주 어딘가로 날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심연의 깊은 곳으로 날아가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아예 서버에서 이탈해 버린다면 NPC 입장에서는 정말로 영영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정말로 막무가내인 작전이었다. 실현 가능성이 어떤가는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단지 공격을 위한 공격이다.
하지만 규율의 신은 우리의 존재를 안다. 연방의 정보를 얻자마자 생각했을 것이다.
이 전쟁은 이겼다고.
좀 괘씸하긴 한데 아직은 성녀와 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으니 참자.
* * *
계단의 위치는 안다.
스테이지 자체가 미래의 정보와 달라지지는 않았으니 제도 안에 있을 것이다. 황궁의 안이 아니라는 점이 정말 다행이다.
전쟁을 좋아하는 그린스킨들답게 500년 후의 대륙에는 도시 이상으로 요새 같아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요새에 들릴 리가 없는데 소녀가 속삭이듯 말해왔다.
"그때 생각나네요. 제국의 영토에 들어가서 숨어들던 때요."
"고블린으로 변신도 해보고 했던 때 말이지?"
"윽, 그건 썩 좋은 경험은 아니었어요."
소녀는 총을 들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서다.
총기는 아무런 대가 없이 장비만으로 무시무시한 위력을 낼 수 있는 대신 자체적인 보정 스킬이 전무하다.
이것은 대륙의 주민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수틀리면 [유도 화살] 같은 것도 튀어나올 수 있는 궁수와 다르게 전적으로 사수의 역량에 의존해야 한다.
애초에 유도 총기가 아니라면 말이다.
궁수와는 다른 방향에서의 어려움인 셈이다.
소녀 같은 움직임을 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걸 지속할 수 있다면, 총을 드는 것보다 근접전을 하는 것이 더 나은 경우도 있다.
이 시대에 냉병기의 존재는 도구에 불과하다.
근접 무기는 분명 존재하고 유용하게 사용되지만 그 또한 빔 세이버 따위의 화기인지라 재래식 물리 공격에 대한 대응이 부족하다.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어서 하지 않은 것이다.
효율의 문제지.
그 허점을 찌를 수 있는 것이 소녀 같은 타입이다.
SF가 도래한 미래, 검술이나 마법을 과거처럼 진지하게 수련하는 이들은 적다.
방아쇠만 당길 줄 알면 얻는 화력이 수십 년의 고련을 거친 것보다 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군인이니 기본적인 격투술 정도는 익힌다.
하지만 과거와 같은 무기술의 달인들은 없다.
고레벨이라고 한들 이동기에 치중하고 보조와 유틸에 의존한다.
이 시대는 어찌 보면 화력만이 비대하게 발달해 약해진 시대다.
의외일 수도 있지만. 중세 시절의 [히어로 유닛]을 미래에 데리고 올 수 있다면 그들은 백병전에서는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한다.
더 이상 근거리에서 저지력을 발휘할 근접 전사가 없기 때문이다.
미리 포착하고 일제 사격으로 제압한다면 모를까.
온갖 지형지물을 이용하며 유격전을 벌이는 소드 마스터를 상대로 군대가 승리를 장담할 수 있을까?
제대로 된 소드 마스터라면, 혹은 그런 수준의 전사라면 총구의 방향을 보고 막아내거나 회피한다.
총이란 게 무엇인지 아는 소드 마스터라면 말이지.
소녀는…….
"보여요!"
정말로 세 번 연속 플라즈마 라이플을 단검으로 받아냄으로서 자신이 영웅의 격에 근접했음을 증명했다.
시선 처리에 능한 사수가 아니라면, 혹은 면 단위의 화력이 아니라 선 단위의 화력이라면, 이런 신체 능력을 지닌 소녀는 강력한 카드가 된다.
많은 세계들이 그렇듯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 놓고 가게 만든다.
파티원들은 꽤나 신기해하면서도 납득했다.
총을 잘 모르는 영감님 역시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 위력의 무기를 보면 확실히 단련할 보람이 사라지겠군. 하지만 그럼에도 전사의 본분에는 충실해야 하거늘."
막내가 총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총을 들고 다녀도 전사라고 할 수 있습니까?"
"직업적인 의미의 전사가 아니라 긍지를 말하는 걸세. 싸워서 이긴다는 전제하에서는 누구나 전사 아니겠나."
"참으로 옳으신 말씀입니다."
일행들은 체력이 허락하는 한에서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역시 빠르게 따라붙기 시작하는 무리들이 있다.
마력 탐지는 느껴지지 않았으나 아마 마법사가 직접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정밀하고 감지가 힘든 장비를 탑재했으리라.
한 시간 정도 후, 마침내 추적자들이 우리를 거의 따라잡았다.
재래식 마법이라도 기능은 큰 차이가 없다. 나는 마력 탐지를 걸며 모두의 모습을 숨겼다.
마투사로서 화력에 집중되어 다양한 마법 구사에는 페널티가 달려 있으나 꼬맹이를 거쳐 마법을 구현한다.
꼬맹이는 조금 불편한 표정이지만 나름대로 술식을 곱씹어보는 모양이었다.
소리도 기척도 마력도 차단하는 막이 펼쳐진다.
하지만 오래 걸리지 않아 들킬 것이다.
충분히 가까워진 후.
굉음과 함께 기계들이 나타났다.
"저건 차인가요?"
"장갑차 같기도 한데."
"주술사로서 수십 년을 살아온 나로서도 상상하기 힘든 무언가로군. 탈 것이라기보단 토템이라고 불러야겠는데."
그것은 바퀴나 무한궤도가 달렸다는 것을 제외하면 너무나도 조악한 고철 덩어리였다.
하지만 작동에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린스킨에는 오우거라는 녀석들이 있다. 날 때부터 자연스레 마법을 체득하는 괴물들.
거기에 원래 그린스킨의 마법 체계는 주술이다.
주술은 어디선가 힘을 빌려오는 마법이다.
육체의 힘이 의미가 줄어든 시대. 오우거들은 마침내 타고난 마법을 갈고닦기 시작한다.
태생만 놓고 보자면 오우거는 마법사를 하기 좋은 종족이다.
그리고 연방으로 도망치지 못했거나, 제국에 충성하는 고블린 과학자들.
어디선가 힘을 빌어오는 것에 특화된 오크 주술사들.
이 셋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것이 그린스킨들의 기계다.
언뜻 제 기능을 할까 의심스러운 고철 덩어리지만 고블린이 설계하고 주술을 에너지원으로 마법을 구축하여 기동하는 장갑차.
그린스킨 특유의 요란한 도색과 삐죽삐죽 튀어나온 요철이 많은 외형, 크고 시끄러운 것을 미덕으로 여기기에 온통 울려 퍼지는 무의미한 클락션 소리.
저것 전체가 ‘이것이 그린스킨이다!’라는 장대한 웅변과도 같다.
중세의 그린스킨보다 훨씬 충격적으로 각인되는 특징이다.
이놈들은 우주 전함도 저따위다.
그리고 저런 개떡 같은 비주얼임에도 실제로 위협적이다. 애초에 순수한 과학이 아니니까 가능한 폭거다.
"뭔가 펑크해서 굉장히 멋있는데요?"
소녀가 눈을 빛냈다.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다.
대체 왜?
소녀의 취향에 좀 의문이 생긴다.
나도 혹시 저런 느낌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문득 자신을 잃으려는 타이밍에 영감님이 허허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허탈함 웃음.
"저 깃발은 폭풍울음 여단이로군. 500여 년이 지나고도 남아 있었나."
"부대는 시대를 넘어서도 이름을 남기고 이어가는 법이지요."
아무리 미쳐 날뛰는 비주얼을 자랑하더라도 저건 제국의 수도성에 있는 기갑부대다.
부대를 상징하는 깃발 정도는 달려 있다.
번개를 형상화한 듯한 그 문양은 6층에서 보았던 것과 꼭 같았다.
차량이 근접해 온다. 아주 많다. 스무 대 가까이 될까.
탑승한 병력들이 무장도 제각각이다. 그래도 충분한 방어력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웃통을 까는 게 당연시되던 중세에 비하면 나아졌다.
그린스킨도 바보는 아니다.
그들이 과거 그토록 야성적이었던 이유는 그때는 그래도 되었기 때문이다.
강인한 육체로 공격을 견뎌내기 힘든 시대가 되자 갑옷이란 걸 사용하기 시작한다.
화기에 대비한 내열 성능을 지닌 방어구는 우습게도 방검의 성능은 그다지 없다.
냉병기가 멸종한 시대에는 타당한 방심이며, 그것이 바로 유배자의 기회다.
파티원들이 모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정확히 우리를 찾고 있는 것이 맞았다. 주술사 하나가 엄숙한 얼굴로 나타나 기도를 올리더니 뭐라고 지껄였다.
일부 병력들이 하차하여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한다.
조금 더 가까워진다면 들킨다.
녀석들의 무기는 전원 총기다. 백병전을 걸어도 백병전이 아니리라.
내 손짓에 따라 다들 무기를 들었다.
먼저 겨눠야 할 상대는 주술사, 장갑차 위의 기관총 사수.
이젠 도끼가 아니라 총기를 든 오크들이 나름대로의 전술보행마냥 두리번거리며 다가온다.
그리 잘 훈련된 움직임 같지는 않았다.
제국의 중심에 있는 병력들이 전투 경험이 풍부할 리가 없다.
누구보다 안전한 곳에서 지내온 오합지졸들이다.
주술사가 눈을 감고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내가 손짓했다.
사격으로 주술사의 머리가 날아갔다. 우리를 숨기던 마법도 날아갔다.
서로 간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소녀와 나는 빠르게 앞으로 달려간다.
막내의 엄호는 나쁘지 않았다. 사냥꾼의 엄호는 더 괜찮았다.
영감님은 사수들을 보호하는 위치를 유지한 채 묠니르를 들고 내리쳤다. 10층에서 빠져나오기 전에 급하게 도로 챙겨온 장비다. 아티팩트를 두고 다닐 수는 없지.
번개신의 망치에서 이제는 보기 드물어졌을 마법적 번개가 솟구친다.
강력한 전자기장이 주변의 무엇을 교란할 수 있다면 좋겠군.
장갑차와의 중간쯤 지점에서 소녀는 나와 반대 방향으로 갈라졌다.
나는 박쥐화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즉시 햇빛 차단 크림의 효과가 사라질 것이다.
대신 종족적 특성이 아닌 마투사로서 싸웠다.
힘껏 모아 내지른 마법적 충격파가 퍼져나간다. 장갑차가 크게 흔들리고 병사들이 비틀거린다. 포탄이라도 떨어진 듯한 충격파다.
이 시대에 마법에 의한 직접 공격은 낯선 것이었다.
하물며 묠니르의 번개를 바라보던 오크들이 방아쇠를 미처 당기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장갑차는 기우뚱하며 대각선으로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오크들은 아무렇게나 방아쇠를 당겼다. 사방으로 플라즈마나 하전 입자들이 튄다.
제대로 맞으면 죽겠지만 지형을 관통할 힘까지는 없다.
꼬마 마법사와 영감님은 인상을 잔뜩 쓰며 방어했다.
소화기 수준에서도 위력은 차고 넘치지만 단 몇 발도 방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이쪽을 본 오크 사수들은 계속해서 연사하지 못했다.
방어막 사이로 나온 사냥꾼과 막내의 총구도 계속해서 플라즈마를 뿜어내었다.
뭐라고 소리치던 주술사가 쓰러졌다. 다른 오크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다시 장갑차로 뛰어들려는 모습이 보였다.
영감님이 혀를 찼다. 도망이라니! 이건 오크답지 못한데!
그 오크들은 장갑차에 닿지 못했다.
자그마한 소녀는 이 혼란한 전장에선 눈에 거의 띄지도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파괴력은 아니었다.
비록 어느 정도 방어와 회피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적 여럿의 사선 사이에 끼어드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소녀는 내 가르침을 올바르게 실행했고 적들의 장갑차 사이를 누비며 적들을 엄폐물로 삼았다.
사실 제대로 소녀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사격할 수 있는 사수도 이 자리에는 없었다.
빛이 번뜩이고 달리던 오크 사수들이 쓰러졌다.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상황을 지켜보던 장갑차가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보통 운전병은 오우거다. 특히나 마법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작동하는 그린스킨의 머신들은 마법을 다루는 이들만 운전할 수 있다.
오우거들은 겁에 질려 엑셀을 밟았다.
그나마 용감한 한 대가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들이박을 생각이다.
나는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장갑차 앞을 가로막은 채, 정확한 각도로 폭발을 일으킨다.
오른손은 정면으로 물리력을 서로 상쇄.
거의 동시에, 하지만 약간 늦게 발해진 충격이 차의 방향을 튼다.
그 후의 짧은 틈에 차량 아래로 낮게 파고들며 폭발.
차체가 살짝 떠오른다. 한 번 더 큰 폭발.
이번에는 직접 손바닥을 대고 전달하는 큰 규모의 폭발.
장갑차가 기우뚱하더니 결국 뒤집혔다.
영감님이 망치를 휘둘렀다. 번개가 타고 흐른다. 신성한 번개는 마법적 방호를 비닐쪼가리처럼 찢어버리고 장갑차의 기능을 마비시켰다.
그 사이 비교적 용맹했던 오우거 운전병이 뛰쳐나와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영감님이 노호성을 내지르며 달려갔다.
그것은 적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어딘가 안타까움이 당겨 있었다.
결국 적들은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도망친 차량은 추격할 수 없다. 순간 속도라면 모를까 다리가 차보다 빠르긴 힘들다.
확인사살을 위해 움직이는데 가장 먼저 한 발 맞고 넘어가 있던 주술사가 아직 살아 있었다.
머리가 날아간 줄 알았는데 순간적으로 최소한의 방어를 편 모양이었다.
"크으윽. 전쟁의 신께서 너희들을 벌하리라.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나는 혀를 찼다. 전쟁의 신도 필사적이군.
사냥꾼이 방아쇠를 당겼다. 주술사의 머리가 있던 자리에 타고 녹아내린 단백질과 지방의 흔적만이 남았다.
영감님이 침울하게 말했다.
"미래의 오크들은 다들 이런가? 실망스럽군."
"전쟁의 신을 섬기는 것이 가장 오크다운 오크를 만들지요. 모두가 저렇지는 않을 겁니다. 아마 저 주술사를 제외하면 신도도 없었겠죠."
"대체 미래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이젠 척을 진 사이 아니십니까? 그래도 신경 쓰이시나 보군요."
"그러게 말일세. 나도 이제 늙었나 보이."
영감님은 죽은 오크 하나의 팔을 보고 있었다. 태생이 오크이니만큼 두툼하긴 하였으나 영감님은커녕 막내와 비교해도 볼품이 없다.
근육이라기보다는 그저 덩치다.
그린스킨이 신체를 단련하지 않게 된 시대.
먼 과거에서 온 오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세월이 참 무상하군. 전쟁의 신께서도 답답하시겠지."
"답답할 이유를 지워주면 딱이겠군요."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제국이 사라지면 신께서도 편히 잠드시겠지."
전쟁의 신이 들으면 길길이 날뛸지도 모르겠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면 치워버려야지. 그것이 오크의 방식일세."
저런 게 멋있어서 그린스킨 플레이도 가끔 했다.
나는 주술사가 타고 있던 차량의 운전석으로 들어갔다.
다행스럽게도 어떻게 작동시킬 수는 있었다.
차량마다 메커니즘이 다른 경우마저 있는 게 그린스킨이다.
탈것을 손에 넣었다. 더 잘 도망칠 수 있겠군.
하늘에선 여전히 함포가 불을 뿜는다.
출발하기 전에 꼬맹이로 컨버트한 마력 탐지를 강하게 걸어보았다.
멀리 퍼져나가는 마력이 대부분 순식간에 돌아왔다. 주변에 아주 많은 생명체가 있다.
우리 쪽을 향해 빠르게 모여들고 있다.
"밟습니다. 모두 꽉 잡으세요?"
기관총좌에 앉은 사냥꾼이 고개를 끄덕인다. 막내는 방패를 든 채 그 옆에 섰다.
치명적인 타격 한 번은 막을 수 있으리라.
마법직 셋도 영감님을 중심으로 임시나마 방어막을 사용할 준비를 한다.
제도까지 한 번에 가야 한다.
마력을 먹고 움직이는 엔진이 천둥 같은 소리를 내었다.
장갑차의 끄트머리에 번개가 튀고 있는 여단기가 휘날렸다.
* * *
"시스템 올 그린! 레귤레이터 오픈! 부스터 주입 120%! 워프를 시행합니다!"
연방의 기술력은 특별히 뒤처지지는 않으나 요정과 난쟁이가 있는 동맹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300pc에 가까운 초장거리를 단번에 도약하는 일은 엄청난 위험 부담이 따른다.
하지만 연방의 그 누구도 두려움을 품지 않았다.
그들이 도달할 곳에, 그들의 신이 있을 것이기에.
모든 승조원들이 저편에 계신 여신께 경례를 올렸다.
"워프!"
감격에 찬 오퍼레이터의 목소리와 함께 수십에 달하는 함대가 선발로 출진했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거대한 공동이 아가리를 벌린다.
수십억 톤의 질량을 지닌 대함대가 공간의 일그러짐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