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11화
12층 - Lv. 355 낙오클랜들(2)
현실은 만화나 소설이 아니다.
창작물 속의 악당은 대체로 상종할 여지가 없는 쓰레기로 묘사된다.
실제로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굳이 찾아다니면 어딘가에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악당이니, 마피아니,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니 하더라도 대부분은 그냥 사람이다.
필요에 따라 악할 수도 있으나, 그날의 변덕에 따라 선행을 베풀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은 인물을 찾는 것이 훨씬 더 힘들 것이다.
성선설이나 성악설의 문제는 아니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는 이상 최소한의 선을 연기라도 하는 편이 더 이득을 본다.
아주 멍청하지 않은 이상 대부분은 그 사실을 안다.
그런 의미에서 뱀파이어들 역시 딱히 선도 악도 아닌 자들이다.
뱀파이어로서 가지는 강한 힘이라는 것은 소설 속의 이야기일 때나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뱀파이어가 되어 현실에서 살아간다면 전혀 그런 형편 좋은 이야기가 되지 못한다.
태양 빛 아래에 나서지 못하는 것부터 해서 갖가지 페널티가 더 뼈아프게 와 닿는다.
게임 시절의 뱀파이어는 그냥 단점 커버만 잘하면 문제없는 훌륭한 종족이었다.
미궁에서는 좀 다르다.
로그아웃을 할 수 없으니까.
종족의 장점만 쏙 빼먹으며 즐길 수가 없으니까.
그러니 뱀파이어의 삶도 그 나름대로의 고충이 가득하다.
이런 낮이 없는 행성은 뱀파이어들에게 낙원이라 말해도 좋으리라.
그렇기에 뱀파이어들은 유배자 뱀파이어에게도 관대하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동족이니까 서로 돕자는 느낌이다.
이런 시대가 되면 더 이상 그들은 강자가 아니다.
같은 뱀파이어임을 강조해야 하는 상황에 몰려 있다고 보는 게 옳다.
시대의 변화는 많은 것을 달라지게 한다.
변방으로 몰려난 그들에게 더 이상 사냥터라 할 구역도 없다. 피를 구하기 위해 직접 밤을 틈타 암약할 일도 없다.
이제는 돈이다.
명목상은 동맹의 일부인 이 인공 행성은 법이 없을지언정 자본은 있었다.
쇠락한 뱀파이어 클랜들은 생존을 위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
나름대로의 전통과 질서를 중시하던 뱀파이어 클랜은 더 이상 없다.
기업형 범죄조직이 남아 있을 뿐.
바르바로이가 용인들에게 쫓겨 도망친 것이 이 시기였다면 차라리 자연스레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른다.
동족이라는 이름 아래에 모두를 묶으려고 드는 처지에 어찌 그 정도 규모의 무리를 내칠까.
그러나 이제는 그때의 낙오 클랜이 연방의 주축이 되어 있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미궁의 역사는 매번 이렇게 달라지는 맛이 있다. 게임 시절에도 꽤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였고.
어쨌든 약자의 입장이 된 뱀파이어들은 이제 소문에 관심이 많다.
당장 큰 영향이 없을 것 같은 일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 살아가야 하는 그들에게 언제 재앙이 되어 닥칠지 모른다.
그 촉각을 곤두세워 수집하는 정보는 큰 어려움 없이 내게 전해졌다.
"수도성의 함락이라. 그것참. 황제가 살아남은 것은 유감이군."
"그런 말 아무 데나 하고 다니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닐 거야. 어쨌든 제국 출신들도 많은 행성이라."
유배자들이 소문에 얼마나 목마른지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뱀파이어는 동족인 내게 관대했다. 그 정도는 알아야 살아가지 않겠냐는 태도다.
잡담처럼 몇 번 더 떠들었으나 전쟁의 중심에 유배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전쟁의 신이 통제할 정도로 많은 신도를 거느린 것은 아닐 테고, 제국 차원에서 함구시킨 모양이다.
일개 유배자에게 휘둘리는 제국이라는 모양이 굉장히 나쁘긴 하다.
"규율의 신께서는 어찌 전쟁을 지지하셨던가?"
그 말에는 뱀파이어도 어깨만 으쓱했다.
규율의 신은 인간의 유일한 종교로 우뚝 선 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 세월은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를 피도 눈물도 없는 수전노로 만드는데 충분했던 모양이다.
"인간 녀석들…… 날이 갈수록 피 가격을 올리고 있어. 정말 힘든 세상이야."
뱀파이어가 아무리 약자가 되었다고 한들 그것은 큰 관점에서 보았을 때다.
개인 대 개인으로서는 음지에서 초인적인 힘을 휘두르는 뱀파이어들을 인간이 두려워하지 않을 리가 없다.
양지에 아무런 영향력을 가지지 못하게 될 뿐 뱀파이어들은 미래에도 나름대로 잘 먹고 잘산다.
불로불사를 미끼로 장사질을 하는 경우도 흔하다.
애초에 뱀파이어라는 단어 자체가 속어로는 돈을 밝히는 사람을 뜻 아니던가.
그런데 오히려 인간에게 고혈을 빨아 먹히고 있다니.
내가 피식거리고 있으니 상대 뱀파이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뭐, 유배자에게는 생존이 달린 문제는 아니겠군. 인간 동료가 있을 테니. 나도 한때는 유배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었지."
"불가능한 일이란 걸 알게 되었겠군."
"맞아, 따라다닐 수야 있겠지만. 그건 내가 바라는 게 아니었지."
"어릴 적에 생각하던 유배자와 실제 유배자도 달랐을 거고."
"하하, 그땐 어렸어. 내가 스무 살 때 뱀파이어가 되었던가."
"몇 년 살았나?"
"100년? 아직도 어리긴 하지. 뱀파이어 기준으로는 말이야."
어찌 되었건 기본적으로는 친근한 태도였다. 사소한 잡담 위주의 대화를 하다가 나 역시 좀 쉬겠다며 위로 올라갔다.
육체적인 피로는 없다. 하지만 정신에 쌓이는 피로는 무슨 종족이어도 별수 없다.
뱀파이어가 가만히 손을 흔들었다.
둘로 나눠 잡은 객실 중 한 곳에 들어갔다.
이미 붙어 있는 감시가 느껴진다.
내가 올라오자 뒤따라오는 녀석들도 있다.
앞으로는 웃어도 뒤에서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게 정상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미 죽었을 테니까.
* * *
소녀는 최근 들어서는 꾸준하게 날짜를 세고 있었다.
처음부터 센 것은 아니고 아저씨의 철벽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럴듯해서였다.
어차피 고3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스무 살이 코앞이던 참이다.
솔직히 말하면 소녀는 내기에서 자신이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소녀도 알 수 있었다. 아저씨 역시 은근슬쩍 자신을 의식 중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려 한다는 것까지.
꽤나 좋은 객실이었기에 거울이 있다. 그 앞에서 서서 몸을 점검한다.
일단은 신체의 상태를 체크하는 것이다. 바깥에서도 늘 해오는 일.
스트레칭으로 몸을 꾸준히 풀어주는 일도 쉬지 않는다.
정씨 집안은 여러모로 일반적인 유전자를 타고나진 않기에 불가사의할 정도로 근육이 붙지 않는 편이었다.
소녀 역시 그렇다. 뼈대도 가늘고 체구도 아담한 편이다.
언뜻 보면 초인은커녕 스포츠 걸로도 보이지 않는다.
피부도 좀처럼 타지 않으니 그냥 집에서 공부만 하는 아이로 보인다.
물론 아저씨는 그 의견을 단칼에 거절했다. 공부를 잘할 것 같지는 않다며.
"그거 욕이죠?"
"야, 공부 잘할 것 같이 생겼다는 게 욕이야. 어중간하게 생겨서 칭찬할 곳이 없으면 그런 말 한다고."
"그런가아?"
뭐 그런 느낌의 대화였는데 소녀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칭찬할 곳이 많다는 뜻 아니겠나.
스스로 생각해도 그랬다.
맨몸 스트레칭도 거울을 보면서 하는 편이 훨씬 좋다.
초인이라곤 하지만 일단은 인간이다. 몸은 인간과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
출력이 조금 다를 뿐이지.
중세 판타지 월드에 거울은 흔한 물건이 아니다. 실제로 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치유의 샘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정도였기에 이렇게 선명하게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은 오랜만이다.
그렇게 거울에 비친 모습의 변화는 기억과는 꽤나 달랐다.
"조금 언니 같아졌네."
다시 볼 수 없게 된 언니는 키가 큰 편이었다. 남자 쪽 평균 키와 비슷했으니까.
그럼에도 몸을 쓰는 쪽으로는 크게 재능이 없었다.
체격은 서로 바뀌는 게 나았다. 아버지가 종종 아쉬워하며 말하곤 했다.
더 어릴 적에는 좀 더 자랄 거란 기대가 있었으나 고3의 막바지까지도 그대로였으니까.
그래도 지금 거울 속의 모습은 한눈에도 과거보다 더 늘씬해진 느낌이었다.
몇 센티미터 차이가 외모에는 이렇게 큰 영향을 주나?
그리고 체형 자체도 꽤 달라진 느낌이다.
정씨 집안의 어른들도 겉보기에 근육질인 사람은 없었다.
어지간한 운동으로는 충분한 부하가 가해지지 않으니 당연히 근성장도 일어나지 않는다.
겉으로만 보면 말라깽이 샌님들이다. 보기 좋은 근육조차 잘 없다.
하지만 지금 소녀는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히 스포티한 인상이었다.
운동을 좀 하는구나 싶은 균형 잡힌 몸.
아주 마음에 들었다. 학교 다닐 때도 겉보기에는 가만히 교실에 앉아만 있는 아이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살이 찔까 조금 걱정을 하면 했지.
실제로 조금만 덜 움직이면 금방금방 찌기도 했다.
그리고 얼굴의 인상도 꽤나 달라졌다. 앳되기만 한 자신의 얼굴이 꼭 싫었던 건 아니지만 바라는 방향은 아니었으니까.
조금은 성숙해진 느낌일까?
여러모로 친언니와 닮아가는 느낌이다. 그리고 언니는 아주 미인이었다. 좋은 현상이다.
"후후후후. 40일 지났어."
"뭐가요 언니?"
길쭉한 여동생이 침대에 뻗어 있다가 부스스하게 눈을 뜨며 물었다. 아직 잠이 덜 깨 멍해 보인다. 더 푹 잘 수 있었을 텐데, 불면증은 유배자에게 흔한 일이다.
자꾸만 깜빡깜빡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아냐 아냐, 자고 있어."
아가는 몰라도 된단다.
소녀가 미궁에 들어온 시점은 주관적인 시간 기준으로는 11월 21일이다. 그렇다면 소녀는 며칠 후에는 세는 나이로 스무 살이 된다.
만 나이로는 생일이 어린이날이라…….
그건 반년쯤 남았지만 뭐 어때.
요즘 좀 근접 격투로는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실제로 히어로 유닛 하나를 족치기도 했고.
쌍검사가 쌍검을 뽑기도 전에 족쳐버린 것이라 순수하게 이겼냐면 약간 다르단 것은 안다.
그래도 신체 능력으로 찍어 누르는 건 어느 정도 가능하다.
아저씨도 말이지.
스스로 생각해도 상당한 미인으로 자라고 있다. 이런 귀여운 아이가 덮치면 홀딱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소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거울에 자신을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 * *
왕국 이전 구간에도 미래 시대에 진입하는 유배자들은 운에 따라 얼마건 존재한다.
하지만 극복해야 하는 난관으로서 배치된 미래의 병력 일부가 아니라 본격적인 사회와 마주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런 것은 또 그것대로 파티원에게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조금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기에 일을 진행하며 조금 살펴볼 생각이었다.
막내는 오히려 크게 걱정이 되지 않는다. 신앙이란 그 무엇보다 효과적인 정신무장이다.
사냥꾼 역시 목표한 바가 확고하고 그것이 눈앞까지 다가왔으니 크게 개의치 않으리라.
다른 이들도 비슷하다. 영감님도 꼬마 마법사도 각자의 확실한 목적이 있다.
반면 소녀는 목적이 딱히 없다. 막연히 집에 돌아가야겠다 정도에 불과하지 명확한 동기가 부여되기에는 고생을 좀 덜 했다.
초회차니 당연하기도 하고.
그러니 슬쩍 살펴볼 생각이었다.
"음."
일부러 기척을 죽이고 갈 생각은 아니었는데.
왠지 소리 없이 다가갔더니.
거울 앞에서 이상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바보 같아 보여서 귀엽긴 하다만.
어이가 없어서 기척이 새어나갔다.
"우와아앗!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요?"
"아서라, 누가 보면 욕실이라도 훔쳐본 줄 알겠구나."
"아아악!"
쪽팔림은 본디 모두의 몫이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다시 문을 닫았다.
"아니야! 그냥 가지는 마! 뭐라고 말을 더 하라고요! 차라리!"
박쥐로 흩어져서 내 방으로 돌아갔다. 소녀는 한동안 더 비명을 질렀다.
저 녀석의 동기는 혹시 그냥 순수하게 나인가?
위험하군 정말.
자연의 신이 슬그머니 말을 걸어왔다.
「나쁘지 않은데 왜 그러나.」
"아직 꼬맹입니다."
「흠, 다른 일은 그렇게 다각도로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유배자인데 말이지.」
"아, 아무튼 미성년자 아닙니까."
「그건 어차피 국가마다 다른 것 아닌가?」
"글쎄요, 전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지라. 사소한 것도 고향 같았으면 좋겠군요."
「저 아이도 그런 점은 다른 의미로 비슷할 수 있지. 애들은 원래 어른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것 아닌가?」
"기대는 방식이 좀."
「애들은 원래 그래. 하지만 그렇기에 진지하기도 하지.」
이 양반은 또 묘하게 뭔가 잘 알고 있는데.
「내가 애 보기는 좀 해봤지.」
꽃잎 요정 신은 감미로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낮게 웃었다.
시간이 지났다. 당연하지만 파티의 결정권은 그냥 내가 혼자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의견을 내라고 해도 다들 철석같이 나만 믿고 있으니 반대가 있을 수가 없다.
본의 아닌 독재지만 익숙한 일이다.
뱀파이어와 특별히 더 대화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일단 가야 할 곳이 있다며 제안했다.
"어차피 [모루]를 쓸 생각은 있지 않나? 그럼 난쟁이가 필요하겠지. 바위난쟁이 하나가 집을 잃었는데 그 원인이……."
"집에 회복의 샘이 나타났다거나?"
"우린 인지할 수 없는데 들어갈 수는 없으니 그 때문이겠지."
그것 자체는 인구 밀도가 높아진 미래에 유배자가 출현하면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외에도 문제가 하나 있다고 한다.
"그 난쟁이가 좀 거물이라서 말이야. 이곳에 흘러드는 모든 무기는 그 양반의 손을 거친다고 하지."
"오, 대저택에 샘이 나타나기라도 한 모양이군."
"집에 샘이 있는 것 자체는 나쁠 게 하나도 없지. 어때? 일단 그 난쟁이의 집을 되찾아 주는 건? 그리고 얼굴도 좀 알려두고. 싫어하진 않을 거야. 난쟁이들 역시 모루를 쓰고 싶은 마음은 클 테니."
[모루]는 샘처럼 안전지대의 개념으로 보호받는 것은 아니라 출현하면 모두가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유배자를 위해 세팅된 오브젝트인 만큼 유배자 없이 사용할 수는 없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모루]의 불가사의한 제조방식을 마도공학으로 구현하는 데 성공하는 것을 본 적은 없다.
어느 회차에서나 난쟁이들은 [모루]를 동경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모루]와 함께 나타난 것 그 자체로 은혜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