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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115화 (115/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15화

12층 - Lv. 355 낙오클랜들(6)

인간 출신 뱀파이어들은 흔히 살아가다 보면 권태에 빠진다.

삶에 목표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게 꼭 모든 것을 이루어서는 아니다. 세상에는 아무리 오래 살고 아무리 강한 힘을 쥐더라도 불가능하구나 싶은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것에 부딪히고 박살 나다 보면 저절로 포기하거나 잃게 되는 것도 있는 것이다.

프로보이의 삶에 목표가 사라진 것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였다.

그저 살아가기 위해 살아갈 뿐인 클랜 마스터.

오크에 준할 정도로 호전적이고 거친 성정을 지닌 이 혈족 내에서, 악을 쓰고 기어올라 왔다.

그리하여 자신의 이름을 클랜의 이름으로 쓸 수 있게 된 지도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는 이미 바르바로이가 뱀파이어로서 다시 태어난 순간에도 클랜 마스터였을 것이다.

그런 긴 세월이 남겨준 경험은 많은 것을 내려놓게 했다.

일개 뱀파이어는 영웅이 될 수 없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역사의 변방에서 가만히 세상을 지켜보고 있을 뿐, 그 사이로 뛰어들지 못한다.

그 자신이 역량이 부족해서?

맞다.

그는 그런 운명을 타고나지 못했다.

그저 이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다가 언제고 태양 빛 아래에 스러질 운명인 것이다.

1000년을 가볍게 넘겨 살아온 그에게 그런 벽을 느끼게 한 것은 유배자의 존재였다.

그는 과거부터 의아함을 품어왔다.

크고 작은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불청객들을 그는 굉장히 많이 보아왔다.

그 경험이 그대로 쌓여온 결과 문득 뭔가를 깨닫고 말아버릴 정도로.

직관이라는 건 원래 그런 거다. 어느 날 갑자기 귓가에 속삭이는 어떤 목소리.

야 나 방금 깨달았는데, 지금 이거 이렇게 된 상황이야.

프로보이는 일찍이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 세계는 어쩌면 유배자의 손에 놀아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처음부터 그렇게 짜 맞추어진 세상이라고.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 발버둥 치며 살아온 삶은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허무해졌다.

그때부터 흘러왔다. 바로 지금까지.

"그 정령왕 아직도 기억하지. 정령왕이란 건 나중에 들어서 알았지만 말이야. 내 평생 본 적이 없는 놀라운 광경이더라고. 하. 거참."

유배자 사내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든다. 그 뒤에는 미심쩍음.

그리고는 마침내 무언가 깨달았다는 느낌이 되었다.

이 모든 변화는 한순간에 일어났다. 표정을 숨기는 데 너무나도 능숙하다.

그 짧은 변화들을 모두 놓치지 않은 자신이 장하다.

참 별의별 사소한 것에 살아갈 이유를 찾고 있군.

그 사실에 만족스러워하며 프로보이는 두 손을 들었다.

무기를 떨어뜨리고 아주 높이.

살려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죽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삶을 포기하는 것에는 삶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법이니.

그것도 누가 대신 결정해 준다면 나쁘진 않다.

클랜 마스터로서 좋은 태도야 아니겠지만. 그러면 또 누군가는 이어가리. 그가 그랬듯이.

* * *

가장 처음 든 생각은 ‘아니, 이 새낀 뭐지?’였다.

그다음으로 든 생각은 생각이라기보다는 빠르게 상대를 파악해 보기.

프로보이 클랜의 프로보이는 딱히 고정된 네임드가 아니다.

이름으로서 프로보이는 같을지언정 그때마다 전혀 다른 NPC다. 성별도 인종도 나이도 그 모든 것이 다르다.

이번 프로보이는…….

빠르게 기억을 되짚어보자.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던 동문 수비대장을.

그때와 같은 얼굴을 한 뱀파이어 로드는 그 시절과 비교해도 한참은 더 권태로워져 있다.

인간인 척을 그 정도로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로드의 격에 도달하고도 한참이 더 지난 고위 뱀파이어라는 뜻.

애초에 태양에 면역을 부여하는 [데이 워커] 패시브를 보유하지 못했다면 수비대장입네 하고 노닥거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NPC 뱀파이어의 평균적인 스킬셋으로 보아 추정 연령 1,500세 이상.

아마도 클랜 마스터급에서도 최고령에 해당할 것이다.

요정 전쟁의 시대에 태어나 기어코 우주 개척 시대까지 살아서 두 눈으로 역사를 보고 있는 살아 있는 역사책.

그리고 지금 이 권태로움은 오래 사는 NPC들에게서 간혹 볼 수 있는 태도다.

태생부터 수명이 긴 요정들은 그만큼 느긋하거나 나사 빠진 정신세계를 갖고 있기에 문제가 없다.

본래 인간이었던 뱀파이어들이 특히 자주 도달하는 곳이다.

나는 일단 프로보이를 놔주기로 했다. 이런 놈들은 풀어줘도 별문제가 없다.

뭘 하고자는 의욕이 없으니까.

그저 죽지 못해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 해도 500년 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 전의 연기도 그렇다. 그냥 될 대로 되어라에 가까웠다.

조금 이상하군. 너무 자포자기한 느낌인데. 일단 와본 다음에 연방의 대전사임을 깨달은 것일까?

그 정도 정보력은 있을 수도 있다.

당장 술집에 찾아온 부하 뱀파이어도 전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고 있었으니까.

"어이, 뱀파이어 동무. 동무는 인민의 적인가?"

프로보이가 몸을 툭툭 털며 말했다.

"뭔 미친 소리요. 난 그냥 하루하루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소시민에 불과하지. 그런 싸움엔 끼고 싶지 않구먼."

"좋아, 믿겠다. 그래도 너 알고 왔지? 여기 와 있는 유배자 파티가 누구들인지 알고 말이야."

포기한 상대는 대충 넘겨짚어도 잘 넘어온다. 어차피 잃을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 한 번만 봐줘. 당신 잡아다 뭐 좀 해보려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는데 대단한 걸 할 생각도 능력도 없었어."

"능력은 이제야 없는 게 확인된 거겠지."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는데 진심으로 보이긴 했다.

한 가지만 더 떠볼까?

"유배자가 부러운가?"

"……무슨 소리신지?"

잠깐이지만 프로보이의 눈이 흔들렸다. 그리고 본인도 그게 보였음을 안다.

나는 히죽 웃어 보였다.

"너무 오래 살았군. 자네."

"그러게나 말입니다."

뱀파이어 소드마스터는 그렇게 투덜거렸다.

재수 옴 붙었네 하고 중얼거리며 제 클랜원들을 수습하는 프로보이를 내버려 두고 다른 이들을 보았다.

바깥에서 몰려들고 있던 난쟁이들은 상황 파악이 빨랐다.

개인의 무력이 집단의 무력을 이겨내지 못하는 시대라고 한들 모든 상황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대저택의 지하에 잠들어 있던 대부분의 상품들은 곧이어 올라온 사냥꾼과 영감님 쪽에서 들고 올라왔다.

막내가 대체로 사용법을 아는 것들이었다.

제대로 된 무장을, 그러니까 이 변방의 행성 수준에서는 가장 강력한 화력을 지녔을 장비들이 이미 점거당해 있다.

난쟁이들은 서로를 쳐다본 후, 꼬맹이가 아무렇게나 붙들고 있는 자기네 대장도 보았다.

그들은 투항했다.

총알이나 빔이 먹히기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저택을 무너뜨리는 위업을 단신으로 보였다.

그들의 조상들이 등장하던 오랜 동화 같은 전설들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병기를 동원해 붕괴시킨 것이 아니다. 가벼운 차림의 인간 소녀 하나가 하늘에서 내리꽂히더니 아작을 냈다.

모두가 그 장면을 직접 목격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어떤 무기도 없이, 심지어 마법조차 없이 일어난 일임은 알았다.

여기서 계속 저항해 봐야 죽는 것은 누구인가?

숭고한 사명을 위해 싸우는 것도 아닌 이익단체 난쟁이 무기상의 부하들은 그렇게 투항했다.

치유의 샘물이 정원에 자리 차지하고 퐁퐁 솟고 있으니 부상자들이 살아나기 어렵지는 않았다.

물론 사망자도 있었다. 소녀가 손속을 둔다곤 하나 적의 숫자는 충분히 많았다.

"으음, 애들 죽인 거 같아서 기분이 이상한데요."

"저래 봬도 다 성인들이야. 바위 난쟁이들은 평생 초등학생 같은 외모니까."

"좋아, 미궁의 규칙. 미궁의 삶. 미궁의 방식."

샘물로 인해 기절에서 벗어난 난쟁이 무기상은 일단 자기 집이 박살이 났음에 경악했다.

그리고 잠깐 새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듣고는 더욱 어이가 없어 했다.

"클랜 마스터도 한순간에 당했다고?"

용의주도한 계획이었을 것이다. 이 행성 수준에서는.

그 순식간에 항복한 클랜 마스터가 구석진 곳에서 능글능글하며 웃고 있다.

난쟁이 무기상은 화도 나지 않는지 허탈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보았다.

"그, 혼돈의 대신관님?"

"불초 유배자지만 여신님 아래에서 그런 직함을 맡고 있기는 하지."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고블레타리아 연방은 그다지 정의로운 국가는 아니었으며 도리어 악의 제국에 더 가까웠다.

그 소속이 아닌 자들이 보기에는 확실하게 그러했다.

여신님은 어쨌건 악신이며 유배자로서 오랜 세월 단련한 양심은 마냥 선으로 기능하지는 않았다.

그 결과 고블레타리아라는 이름 뒤에는 무시무시한 신뢰를 부여했다.

이런 변방의 무기상조차 당장에라도 연방에서 자신을 잡아 족치려고 함대를 파견하리라는 믿음과 신뢰를.

"귀의하겠나이다. 제발 목숨만은, 아니 그저 고통 없이라도……."

"아니, 잠깐만 있어 봐. 여신님께 여쭈어 볼 테니."

혹시 대신관이자 대전사가 공격받은 것에 불쾌하며 신의 징벌을 내릴 필요라도 느끼시냐 묻자 여신께선 고개를 가로저으셨다.

「내가 왜? 불쌍한 NPC들 너무 괴롭히는 건 아니지. 뭣보다 아직 전쟁통에 바쁘고 혼란하군. 괜히 알려줬다가 정말로 함대라도 파견될까 두려워.」

능히 있을 법한 일이다. 실제로 일어난 적도 있는 일이었다. 그때는 행성 하나가 송두리째 날아갔다.

과격해서 도움이 많이 되는 친구들이다.

"좋아, 계단이 어디 나왔는지나 좀 말해 봐."

제일 먼저 확인해야 할 사실이다.

든든한 아군이 존재한다곤 하나 유배자가 머물게 될 층이 어떤 환경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거기에 이런 시대는 변수가 커도 너무나도 컸다.

국지전에서야 우리 파티의 힘이 강력할지 몰라도 정말로 군대를 마주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음, 그러니까 정확한 위치를 아는 게 또 아니라고?"

앞에 꿇어앉은 두 세력의 수장들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다.

"그리고 모르겠는 거 보니까 요정 마피아들의 구역에 있는 것 같고."

"넵. 그렇죠."

"거긴 또 이 행성 반대편이고?"

"그렇습니다."

"떠날 수단 준비해 둬."

"넵!"

요정 마피아라, 자연의 신께 여쭈어보았다.

「모든 요정들이 신앙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지. 오히려 의식의 개혁이 일어나니 갈아타는 녀석들도 생기고 그런 거 아니겠나.」

뭐, 실제로 그렇긴 하지만 요정 마피아라니.

요정들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저희들끼리 그냥 행복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는 녀석들이다.

비교적 젊은 요정이어도 그런 부모를 통해 배울 것이다 보니 세대교체라는 것도 느지막이 일어나는 종족이다.

가뜩이나 인구도 적은데 요정들끼리 그런 식으로 집단을 이룰 정도로 많은 수가.

음. 타락이라고 해야 하나 이걸?

「정확히는 인간이 나쁘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군. 요정은 동맹에서 꽤나 도태되어 있어. 요정왕도 사실상의 유배 생활이나 하고 있을 정도니.」

자연의 신께서 말씀하시길 이 작은 행성에는 자신의 신도가 없어 자세히는 알 수 없다고 한다.

하기야 자연의 신을 신앙하는 요정들이 이런 음지에서 살아가고 있을 이유는 없다.

"이것도 나비효과로군."

접미는 신앙의 성격을 나타낸다.

특정 신좌에만 붙는 접미도 있으나 금전이라는 것 자체는 어디에나 붙을 수 있다.

흔히 신에 대한 진실이 알려지게 되는 미래 시대의 배경에서 오히려 힘을 쓰게 되는 접미다.

그 앞에 붙는 단어는 신의 권능과 영역 그 자체를 나타내지만 규율의 경우는 조금 독특하게 작동하는 면이 있다.

접미로 붙는 성향이 그대로 권능이요 신앙의 기반이 된다.

요컨대 있는 그대로 자본주의의 신인 것이다.

그런 신앙이 미래 사회에까지 득세하는 것 자체는 흔한 일이다.

하지만 인간은 모든 세계에서 그러하듯 좀처럼 통일성을 가지지 못한 다양성의 종족이다.

그들의 신앙마저 하나로 통합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통합 신앙, 그것도 인간이 좋아할 만한 자본주의의 신은 놀라울 정도의 번영을 만들어 내었다.

그렇게 앞서나가 주도권을 쥔 인간들은 동시에 놀랄 만한 차별을 낳았다.

동맹의 상태가 상상 이상으로, 아니, 상상만큼 심각한 모양이다.

함장은 살아남았을까?

그것을 트동트의 조언 몇 마디가.

그래 내 편을 순순히 들게 하도록 설득하기 위해서긴 했지.

아무튼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성녀에게 건넨 조언 몇 마디가 이렇게 바꾸어 놓았다.

"이제 [히어로 유닛]의 위험성을 아시겠습니까?"

"끄응."

덩치가 산만 한 오크 노인이 신음을 흘린다.

최근 유배자가 따르는 미궁의 시스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는 영감님은 곧잘 이것저것 물어 호기심을 충족시키곤 했다.

[히어로 유닛]이 어떤 존재인지, 잠시나마 자신의 제자였던 아이가 어떤 운명을 지녔는지는 확실히 알고 있다.

"내 다시 볼 일이 있을까? 그럼 다른 말을 좀 해줘야겠군."

나는 잠깐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는 마시지요. 아마 그런 일까지 고려되어 이렇게 흘러온 것일 겁니다. 미궁이 이렇게 될 것이라 방향을 이미 정한 거라 틀기도 쉽지 않을 것이고……."

[히어로 유닛]을 다룰 때 조심스러워야 하는 이유야 수없이 많다.

같은 히어로 유닛이 행보를 번복하여 미래가 달라지는 일이 드물다는 것 또한 그렇다.

"제가 그때 말려야 했는데."

"말렸으면 큰일 나긴 했지 않겠습니까?"

"흠, 확실히 당시로써는 가장 직빵으로 부여할 수 있는 동기긴 했지."

유배자 동료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나도 무기고로 내려갔다.

정말로, 정말로 훌륭한 장비들이 제법 많다.

이런 시대에 보기 극히 힘들어진 마법이 걸린 총기라거나.

총 자체에 마법이 걸린 것이 아니라 이제는 구할 수 없는, 그 자체로 마법이 걸린 재료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야, 좋은 물건이 아주 많은데? 비장의 컬렉션인가? 우리가 좀 쓰도록 하지. 청구서는 연방 앞으로 달아놓도록 해."

그 말에 난쟁이 무기상이 급격하게 시무룩해졌다.

결코 받을 수 없는 돈이란 걸 알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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