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18화
12층 - Lv. 1350 데미 리치 샤크마(1)
모든 일에 계획이 존재해야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이번 경우만큼은 시간을 우선하기로 했다.
느긋하게 자리하고 있기엔 대마법사급의 리치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다.
아래에서 느긋하게 생각을 해보기에도 정보가 부족했다. 문을 빠져나와 얼른 움직이기로 했다.
기본적으로는 은신과 투명화 주문을 모두에게 걸었다. 서로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단점은 있으나 언뜻 봐서는 그곳에 누가 있을지 모를 것이다.
파티원이라고 할 만한 인원이 너무 늘어난 탓에 들키는 것은 금방일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는 않았다.
"생각보단 쉬운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조금 더 움직이다 보니 대강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정신 나간 리치는 지금 유배자 연구를 진행 중인 모양이다.
요정 마피아라는 이름대로 요정들이 대부분인 도시는 인구 밀도가 이상하리만치 낮았다.
이미 몇 명인가 지켜보긴 했으나 멀찍이였고 근방은 아니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무엇을 하려는 지 어느 정도 알만도 했다.
"이거 계단을 찾는 모양이군. 그게 아니더라도 모루가 되었건 샘이 되었건 뭐건 찾아내려는 모양이야."
유배자가 나타났음을 알리는 오브젝트들은 발이 달려 도망가지는 않는다.
유배자가 죽거나 계단으로 넘어가지 않은 이상.
그 오브젝트들은 곳곳에 나타나 있는 것이 보였다.
"샘이로군."
딱히 무기를 들고 지키는 병력은 없었다. 주변이 꽤나 현대적으로 꾸며져 있을 뿐.
멀리 관을 이어 운송하는 것은 불가능하긴 할 것이다.
유배자마다 한 병씩 주어지는 아티팩트 병이 아니라면 점차 효력이 증발하여 평범하게 깨끗한 물이 되어버린다.
그 병과 같은 것을 양산하는 데 성공한 미래는 본 적이 없다. 이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도 수도꼭지를 달아 놓은 건 또 처음 보는군."
생각보다 샘물이 많았다. 계단으로 보이는 것들도 발견되었다.
하지만 계단에만큼은 어김없이 요정들이 지키고 있었다.
심지어는 진짜 계단이 아닌 것들도 몇 개가 보였다.
일부러 만들어둔 가짜다.
"저거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해. 진짜는 먼지가 하나도 없고 흠집조차 없을 거야. 계단의 입구부터는 이곳과 엄격하게 구분이 되거든. 급할 때 속지 않도록 주의해."
멀리서는 가짜를 구분할 수 없었다.
지키는 인원이 있다곤 해도 기습으로 처리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투명화가 걸린 상태로 그대로 다가갔다.
생체를 감지하는 센서가 소리를 내었다.
"누구냐!"
망설임 없는 사격, 소녀와 내가 빠르게 달려들어 서 있던 두 명의 요정을 제압했다.
죽이지는 않았다. 사냥꾼의 기분을 신경 쓴 것이기도 하지만 자연의 신의 눈치를 본 것도 있다.
자연의 신은 이제 와서는 배반자 요정들을 용서할 생각이었다.
「좋게 말하면 순수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철이 없는 게 요정이지. 집을 떠나면 고생이라는 점을 깨달은 녀석들이 많을 것이야.」
피치 못한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기술의 발전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타 종족에 비해 요정은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어쨌든 사냥꾼은 그런 상황에 만족했다.
영감님이 물었다.
"거 겁 준거에 비해서는 싱거운데. 이거 맞나? 그냥 우리가 다 털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프로보이가 고개를 저었다.
"천성이 순수한 거야 어쩔 수 없지만 그래서 더 무서운 점도 있습니다. 정말로 싸워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요."
요정을 죽이지 않으려고 하는 행동에는 프로보이의 요청도 있었다.
요정들은 수가 적은 동족들을 아주 아끼는 편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평화롭고 느긋한 종족이다.
"이 시대의 요정을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옛날에도 그랬겠지만 누군가가 죽었다면 우릴 죽이려고 달려들 겁니다."
"옛날에는 음, 솔직히 요정과의 전쟁이 두려운 일은 아니었는데. 저놈들은 제법 강하지만 싸우려는 정신 상태가 안 되어 있지 않나?"
특히 그루터기 요정은 사람을 죽여 놓고도 그 죽음에 안타까워하며 진심으로 마음 아파한다.
옆에서 보기엔 기괴할진 몰라도 그들은 그런다. 그 마음에는 어떤 위선도 없다. 자연의 섭리로서 자위권을 행사했을 뿐, 진정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러니 전투에 필요한 적개심이나 화 같은 것이 희박하기 짝이 없다.
"다른 종족 관점에서는 좀 미친 녀석들 아닙니까. 그런데 그 방향성의 스위치를 반대로 켠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선량함에도 여유가 필요한 것이다.
요정은 선량함을 잃지 않을 선이 한없이 높을 뿐이다. 그것을 넘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극한의 상황, 신마저 져버린 버팀목이 없는 상황에 이른다면 어찌 되는지 알고 있다.
요정적인 관점에서는 미쳐 있는 상태이며 다른 종족이 보기엔 정말로 미치광이인 상태이다.
"상대의 아픔에 공감하고 평화를 사랑하기를 그만둔 요정. 그거 좀 끔찍하지."
사냥꾼이 가장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같이 오래 지낸 모양이니 그 성향을 알고 있을 것이다. 선하긴 하지만 어딘가 이상한 요정들의 성향을.
"어, 그럼 혹시……."
"종족적인 버서커들의 탄생이야. 여전히 화를 내지도, 증오를 가지지도 않지만 지극히 냉정하게 웃으며 상대를 죽여. 위협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한 것만으로도 죽여.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양심에 부담조차 없이 웃으면서 말이야."
요정이 미쳤다는 것은 그 집단의 전투력을 저해하고 있던 기본적인 성향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떼거리로 몰려오는 활과 마법, 쌍검과 정령의 달인들은 그편이 더 이득이라고 생각한다면 기꺼이 목숨을 던진다.
전투 중에도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씨는 동시에 그다지 전투에 흥분도 당황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착하지 않은 요정은 그 자체로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라고 할 만하다. 그런 성격을 타고나니까.
사냥꾼이 시무룩해졌다.
"그런 생각을 해보긴 했습니다. 요정의 성격이 꼭 좋은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요."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긴 하지?"
"하지만 전 요정이 여전히 좋습니다. 이 도시의 요정들도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아무도 그 사실을 뭐라고 하지는 않을 거야 요정은 좋은 녀석들이 맞으니까. 단지, 좋은 녀석이 화를 낸다면 그보다 무서울 수 없다는 이야기일 뿐."
영감님이 오랜 의문이 하나 풀렸다는 듯 말했다.
"어째서 과거의 제국이 요정들을 완전히 멸종시키지 않았나를 조금 의문스러워 했는데. 난 그게 그냥 요정들이 특유의 무해함으로 저항을 포기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네. 그게 아니었군."
제국은 요정을 사냥하려고 들었겠지만 결국 포기했을 것이다.
그린스킨들이 좋아하는 전투는 스포츠의 느낌에 가깝다.
집요하고 질척대는 미쳐버린 요정의 살의는 그린 스킨들에게도 께름칙할 것이다.
"그럼 우린 지금 피라냐 떼 사이에 떨어진 소 같은 상황인가요?"
소녀가 의문스러워하며 묻는다. 사태의 심각성이 전해는 지나, 와 닿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높은 확률로 그냥 계약관계일 거야. 리치가 터전을 제공하고, 요정들은 몸 하나로 할 수 없는 일들을 처리해 주는 거지."
요정들은 보통 단체로 미치지는 않는다. 요정의 선량함을 지워버릴 정도의 상황은 흔히 일어나지 않으니까.
내가 아는 사례에서는 소규모의 해적이나 용병단 같은 식으로나 존재했다.
이 도시에는 척 보기만 해도 대단히 많은 요정들이 살아가고 있다. 규모에 비해서야 적다곤 하지만.
"애초에 저쪽도 우리를 생포하는 게 목적이야. 그러니까 우리도 죽이지만 않을 수는 있어. 사방에 널린 게 샘물이고 상품으로 가공까지 되고 있는 모양이니 어지간한 치명상은 상관없을 거니까."
즉사만 주의하자고 말했다. 우리가 요정을 죽이지 않는다면 요정도 우리를 죽이려고 들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를 잡을 필요가 있는 것도 리치다. 리치만을 주의하면 된다.
"일단 이건 우리 계단이 아니네요?"
"남의 계단도 쓸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미궁의 규칙은 그리 편리하지는 않다.
요정을 최대한 죽이지 않기 위해 주의하며 어두운 잿빛의 도시를 돌아다녔다.
* * *
도시라고는 하나 요정들이 지은 것은 아니다. 인공행성을 활용하고자 빠르게 건설된 주거단지에 불과하다.
제대로 입주민을 받으려고 했던 것도 아니다. 여러 가지 실험장으로 사용될 계획이었다.
그러기 위한 시설은 여럿이 건설되었으나 자동화되어 있는 경우가 흔했고 주거시설은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도시 자체는 도색조차 하지 않은 잿빛의 콘크리트로 남아 있다.
군데군데 철로 된 시설은 비교적 중요 시설이지만 대부분은 가동하지 않고 있다.
동맹은 오랜 악명을 떨친 인간 출신 리치가 나타나자 차라리 이 행성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군대를 보내 리치를 제압하는 것이 더욱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샤크마는 그때도 요정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단신은 아니지만 단일 세력으로서 국가 하나를 밀어낸 강대한 리치는 드디어 침입자들의 위치를 알아내었다.
리치는 마법의 달인이었다. 그것도 오백 년간 마법만을 연구해온 달인.
뼈다귀가 손짓하자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침입자를 사로잡아 감옥에 던져 넣고 새로 확보한 오브젝트가 어디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병도 빼앗아야 한다. 유배자들의 유리병은 귀중한 수입원들이다.
믿을만한 요정 몇몇이 먼 곳까지 출장 나가 샘물의 기적을 보여주고 돌아온다.
수입원은 많을수록 좋다. 없어서 못 쓰는 것이 이 기적의 샘물이니만큼.
새로운 유배자 무리들은 외곽을 돌며 계단들을 하나하나 점검하고 있었다.
그 행동 방식 자체에 리치는 기꺼움을 느꼈다.
똑똑하고 노련하게 움직인다. 적어도 리더는 뭔가 많은 것을 아는 유배자이리라.
그렇다면 그의 연구에도 큰 진척이 있을 것이다.
유배자에 대한 연구는 어느 국가나 열을 올리고 있는 부분이다.
오백 년 전만 해도 하나의 행성에 갇혀 살던 생명체들이 온 우주에 퍼진 것은 그들을 연구함으로써 얻어낸 성과니까.
리치가 나타난 계단은 아직 습격받지 않았다.
요정 보초 둘이 고용주에게 꾸벅하고 인사를 했다.
리치는 까딱하며 그 인사를 받은 뒤 손가락을 튀겼다. 요정은 그 동작만 보고도 방어막을 만들어냈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력하여 일개 마법사라기보단 핵융합 마력로라고 여겨질 정도의 막대한 마력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단순한 마력 탐지임에도 물리적인 충격을 동반할 정도였다.
어마어마하게 퍼져나가는 그 여파에 주변이 깨끗해진다.
반향정위라기에는 이미 하나의 공격과도 같았다.
리치는 곧바로 요정이 아닌, 그러니까 그가 설정한 경로에서 벗어나 있는 생명체 한 무리를 탐지했다.
그리고 리치는 다시 순간이동으로 사라졌다.
* * *
"온다! 준비하시고!"
리치를 상대로 맞설 수 있을 만한 것은 소녀와 나, 그리고 프로보이와 영감님이다.
다른 인원들은 계속해서 이동하며 계단을 점검하기로 했다. 계단의 숫자는 아주 많은 정도는 아니었으나 결코 적지는 않은 빈도였다.
이 행성의 시간으로 백 년간 무시무시한 리치가 도사리고 있는 이 도시에 상당히 많은 불운한 유배자들이 나타났던 모양이다.
강력한 보스가 될 수 있는 존재의 거처에는 그런 희생자들이 많이 발생하게 마련이니까.
마력적 시야에 꽃가루의 폭풍으로 보이는 강력한 탐지가 지나간 후에, 내가 한 방향을 가리켰다.
"거기에 나타난다!"
그다지 암호화되지 않은 순간이동 좌표였고 마력의 움직임을 통해 몇 초 일찍 예측할 수 있었다.
마법적 차력쇼나 다름없는 묘기지만 감탄한 정신은 없다.
병이 깨진다. 치유의 샘물이 퍼져 나오는 순간 리치가 나타났다.
"예상대로 언데드다! 이기려고 들지 마. 버티기만 한다!"
이 경우의 탱커는 소녀와 나다. 마법사가 근접전에 약하다는 것은 흔한 인식이지만 동시에 있는 그대로 사실이기도 하다.
네임드 리치 샤크마의 마법 시전을 어떻게든 방해하면서 우리가 받을 타격을 줄이는 게 목표다.
샘물의 고통이 리치를 더욱 괴롭게 하리라.
"흐음? 잔재주지만 훌륭한 판단이군."
그러나 리치는 전혀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마법 시전은 정신적인 것이되, 아무리 고위의 리치일지라도 고통 덕에 흐트러짐이 있으리라는 내 생각도 빗나갔다.
소녀의 검격과 내 폭발이 아주 쉽게 가로막혔다.
리치가 마법을 구현하려고 했다.
찰나의 순간 나는 그것을 캐치했다. 마투사는 그 어느 마법직보다 발동속도만큼은 빠르다. 내 모든 패시브는 속도를 위해 세팅되어 있다.
아주 지근거리에서 순식간에 일어나는 마법 시전이 붙잡혔다.
그 형태가 이루어지기 전에 간신히 무효화시켰다.
리치가 순간 멍해졌다. 그 틈에 소녀의 공격이 들어갔다.
빛나는 플라즈마와 그 위에 다시 소녀의 마력이 슬쩍 덧씌워졌다.
정말로 오러 블레이드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을 위력의 단검이다.
리치의 방어구인 로브가 힘없이 찢겨져 불탔다. 그리고 그대로 갈비뼈를 갈랐다.
안쪽에 순간적으로 리치의 핵이라 할 수 있는 라이프 포스 베슬이 보였다.
누구도 믿지 않으며 자신의 힘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샤크마는 리치가 되어도 저걸 어디 숨겨두는 행위 따위는 하지 않는다.
소녀가 다시 찔러 들어가려는데 리치가 아무 전조 없이 뒤로 슥 미끄러졌다.
저건…… 스킬인데?
[대시]다. 누가 봐도 그렇다.
어디까지 연구해낸 거지? 이런 경우는 본 적이 없었는데.
소녀가 당황하는 와중에도 침착하게 따라붙는다. 나도 들러붙으며 마법 시전을 계속 방해했다.
리치 마법을 구현하는 것을 포기했다.
막대한 마력이 그 손아귀에 모여든다.
그것이 그대로 터졌다.
아주 순간적으로 거리가 멀리 벌어졌다.
방해는 당연하지만 가까울수록 더 쉽다.
충분한 거리가 확보되자 리치는 다시 손을 움직이려고 했다.
극도로 간소화된 소매틱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샤크마라면 저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한 마법을 구현할 수 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반대편에서 한발 물러서 있던 뱀파이어 소드 마스터가 달려들었다.
더스번 경이 그러했듯 구현되기 직전의 마법이 베어내어진다.
그리고 신성한 번개를 두른 묠니르가 날아들었다.
리치는 그 번개만은 생각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신성한 번개가 사악한 언데드의 몸에 작렬한다. 프로보이가 감전되어 엎어지긴 했지만 리치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중에 떠 있던 몸이 비틀거리며 바닥에 내려앉는다.
정신을 차리기까지 큰 틈이 있었다.
소녀와 내가 달라붙는다.
상황은 다시 리치가 막 나타난 처음으로, 예상보다 샘물이 아무런 효과가 없었기에 가능하면 이 사이클을 유지할 필요가 생겼다.
나도 사람인지라 혹시나 하는 마음은 있었다. 잡을 수 있을지도?
개꿈이다. 버티기도 힘겨운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