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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121화 (121/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21화

12층 - Lv. 1350 데미 리치 샤크마(3)

LFV가 손상된다는 것은 리치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일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데미 리치로 한 단계 격이 상승한 경우라도 마찬가지다.

LFV는 리치의 모든 것이자 그 자체다. 영혼을 담아둔 항아리이며 그 본질이다.

그곳에 신성한 번개가 스쳤음을 샤크마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깨달았다.

LFV는 결코 튼튼하지 않다. 직격은 아니었으되 충분히 몸에 부하가 걸릴 정도의 타격이었다.

뼈다귀 손을 가슴 속으로 집어넣어 LFV를 꺼낸다.

해골 팔이 덜덜 떨린다. 신체를 구성하는 마법에 무리가 왔다. 신성한 불쾌함이 몸 구석구석에 미친다.

신성에도 단계가 있으며 특질이 있다.

유물에서 쏟아져 나온 번개가 가진 신성은 샘물의 것과는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치유에 덤으로 씌워진 정화의 힘과 처음부터 정화하기 위한 힘의 차이다.

LFV의 구석에 금이 갔다.

그곳에 아직도 미약한 스파크가 번쩍인다.

새하얀 번개.

리치는 안간힘을 다하여 그 번개를 집었다.

마력을 두른 손가락이 번개를 어떻게든 붙잡아낸다.

하나하나 뽑아낸다. 지금 상태는 심장에 위험한 독침이 박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있지도 않은 폐가 생각난다. 지금 샤크마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실제로는 아무런 공기의 흐름이 없지만 그리 느낀다.

식은땀도 흐른다.

환상처럼 과거 육신을 가졌을 때의 느낌이 지금의 몸에 포개진다.

LFV의 형태는 리치마다 다양하지만 샤크마의 것은 깔끔한 붉은 유리구슬이었다.

금이 간 틈으로 신성이 파고들기 시작하며 몸의 떨림이 더욱 심해진다. 환각도 더 심해졌다.

지금 샤크마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곧 죽을 만큼의 출혈이.

어찌하여 인간 시절의 모습이 자꾸 되살아나는가.

흩어지려는 집중력을 안간힘을 다해 붙잡아 놓았다.

마침내 신성을 모두 제거해내었다. 조금 더 깊이 직격했다면 오랜 기간 수복해야 했을 치명적인 상처였을지도 모른다.

약간이나마 독처럼 파고든 신성은 제거할 수 없다. 그리하여 어딘가 불편한 감각이 또렷하게 느껴지지만 급한 고비는 넘겼다.

샤크마는 비틀비틀 오랜 세월 쓰지 않았던 자신의 침대에 주저앉았다.

먼지는 없다. 강력한 보존마법이 작용하고 있기에 수백 수천 년이 지나도 이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언데드의 편리한 점은 당장 신변에 위협을 주는 요소가 있다 한들, 그것이 사라지면 금방 회복된다는 것이다.

샤크마는 곧 맑은 정신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

체감상으로는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흘렀지만 실제로는 얼마 지나지 않았다.

샤크마는 그 사실에 안도했다. 요정들은 계약관계일 뿐이다.

미쳐버린 요정들에게 은혜란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저 이득이 되냐 만이 중요할 뿐.

여기서 자신이 한참 동안 행방이 묘연했다면 요정들은 곧 그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항전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더 많은 유배자를 붙잡는 것은 샤크마에게나 수지맞는 일이다.

요정들은 그 소박함만은 저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의 수입만으로도 충분히 먹고살 만하다며 만족하고 있다.

그다지 정이나 충성으로 얽힌 관계는 아닌 셈이다.

샤크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숨을 내뿜을 장기는 없으나 정신적인 한숨에 마력이 감응한다.

희뿌연 꽃가루 같은 마력이 해골의 이빨 사이로 뿜어져 나왔다.

샤크마는 밖으로 나가 무전기를 집어 들고 모든 요정을 집합시키는 명령을 전달했다.

* * *

요정이 미쳤다고 한들 그것은 그들의 성향에서 선함이 사라졌다는 의미일 뿐이다.

순수함이란 면에서는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필요하다면 더없이 무감정하게 잔혹해질 수 있다는 것일 뿐이다.

성실하게 모두 모여든 요정들을 보며 요정 마법사는 씁쓸함을 느꼈다.

그가 요정을 좋아했냐면 그렇지는 않았다. 이제는 조금 흐려진 유배자 시절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더라도 그랬고, 주민이 된 뒤로도 그랬다.

그는 요정의 장점 덕분에 발 빠르게 요정 카드를 뽑자 정착을 결정했을 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요정이 되었던 적은 없다. 육신은 요정이되 정신은 아직도 인간인 까닭이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에는 자비가 없었다.

귀를 가리고 인간인 척을 하며 인간 세계에 나름대로 열심히 공헌했다. 하지만 규율의 신이 인간을 장악하고 난 후에는 많은 것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유배자로서의 경험이 알려주는 길과 맞아떨어진 것이 거의 없다.

그 원인은 안다. 대부분은 연방에서 말하는 전설적인 유배자 파티 하나 덕분이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비틀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그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들게 살아가는 몰락한 요정들과 그 일원이 된 자신만이 남아 있다.

인간들은 마음만은 인간인 요정을 용납하지 못했다.

질투란 가까울수록 심해지는 것이다. 이야기 속에나 전해 내려오는 신비한 종족이던 요정이다.

하지만 동맹이라는 이름 아래에 한데 묶여 끊임없이 부대끼는 세월 속에서 그 신비감은 모두 흩어져 사라졌다.

남은 것은 질투, 그리고 나아가 증오.

세대가 거듭될수록 쌓여온 기묘한 인식들은 오래 사는 요정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변화하는 사회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요정들이 대부분 도태됨은 당연한 일이리라.

이렇게 몰락한 동족의 삶이, 그리고 그 동족에 섞이지 못하고 이 자리에 있는 자신의 삶이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이러려고 정착한 것이 아닌데.

그래서 요정 마법사는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모여든 요정들을 보며 리치가 말한다. 뻥 뚫린 해골의 눈구멍 속에서 푸르스름한 안광이 불탄다. 아주 시린 빛이다.

마법사로서 그 섬뜩함을 잘 알 수 있다.

저건 상식선 내에서 이길 수 있는 적이 아니다. 왕국 이전 구간의 유배자 입장에서는 저보다 더한 난관도 존재하기 힘들다.

이곳은 이미 그가 지나온 곳과 같은 시간일까?

주민이 된 그는 여러 가지 분화하는 시간 속에서 가련하게 휘둘리는 NPC일 뿐이다.

물론, 그렇기에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리치의 명령을 들으며 요정 마법사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 * *

텅 빈 도시는 그럼에도 길이 어지러웠다. 거주목적보다는 여러 가지 제어를 위한 시설들만이 들어서 있는지라 통행은 최소한도로만 고려되었다.

그래서 인적이라곤 없는 곳임에도 어지간한 슬럼가의 판자촌 이상으로 어지러웠다.

모든 곳이 한결같은 잿빛이란 점과 언제나 밤인 행성의 환경이 그 어려움을 더 증폭시켰다.

누군가가 어디로 집어 삼켜질 듯한 숨 막히는 회색 미로다.

이제는 제 발로 걷고 있는 소녀가 미간을 찌푸린다.

"유령이라도 나올 것 같아요."

"유령은 괜찮니?"

"음, 보기 좀 끔찍한 유령이라면 안 괜찮은데 멀끔한 유령은 괜찮다는 느낌?"

"그게 뭐야."

"멀끔한 유령을 때릴 수 있잖아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지만 아무 대꾸 없이 박쥐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온 사방을 박쥐가 날며 탐색하고 있다. 추격은 없는지, 리치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지.

마력 탐지를 활용하지 않았던 것은 이쪽의 위치가 혹시 노출될까 걱정해서였다.

하지만 주변 어디에서도 마력 탐지의 동심원이 느껴지지 않은 지 제법 시간이 지났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꼬마 마법사가 마력을 터뜨렸다. 사방을 퍼져나가는 원은 금세 되돌아와 정보를 전달한다.

"아무도 없어요. 정말로 아무도."

[천리안]도 동원해 보았다. 꼬마 마법사는 직접 전투보다는 보조에 더 특화된 경향이 있다.

항상 그렇게 지내온 모양이다.

리치를 상대로라면 덜미가 잡힐 수 있으니 도시의 중앙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로.

"요정들이 모여드네요. 아주 많아요. 거의 전부 다 모이는 것 같은데요?"

"샤크마가 우릴 완전히 사로잡고 싶어 환장을 하는 모양이군. 포위망이라도 짤 생각인 모양이야."

달리 말하면 기회다. 지금은 계단을 지키는 경비조차 없어졌음이 확인되었다.

가장 빠르게 식별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리치가 요정들을 저렇게 부린다는 것은.

"계단의 위치가 결코 예쁜 곳에 있진 않나 보군. 중앙에 있다. 리치의 방이나 뭐 실험실 그딴 곳에 처박혀 있나 본데."

사냥꾼이 한숨을 쉰다.

"미궁의 악의가 느껴지는군요."

"그런 부분이 조금은 있기도 할 거야. 지금 미궁의 시스템에서 제대로 활약 중인 건 우리 파티뿐인 것 같거든? 미궁에 의지가 있다면 무엇을 주시할지는 뻔한 일이지."

"미궁에 의지가 있나요?"

"어쩌면 대신격이? 심연의 신은 특히 좀 음험하지."

이건 게임 시절의 설정으로도 풀린 바가 없었다.

나조차도 알지 못한다. 그 인디한 회사에서도 대신격에 관한 설정은 뭔가 나중에 써먹을 곳이 있다며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이러면 강행 돌파를 할 수밖에 없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며 소녀를 보았다.

갑자기 그렇게 빤히 바라보자 소녀가 놀란 고양이마냥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왜 그래요?"

"내 생각엔 미래에서 누군가가 여길 올 수밖에 없단 말이야. 그렇다면 아무래도 너겠지?"

"아저씨는 카크리쉬를 잡으러 갔을 테니 아마 그렇겠죠?"

"그럼 네가 의식이 있으면 미래에서 온 네가 지금 여기 나타날 수가 없단 말이야."

소녀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깨닫는다.

"강제로 돌려 보내진다고 했었죠? 그런데 미래의 제가 그 괴물을 상대로 뭔가 할 수 있을까요?"

"내 생각엔 할 수 있어."

소녀의 뺨이 살짝 발그레해진다.

"아이는 칭찬을 먹고 자란다고 했어요. 빨리 더 칭찬해 봐요."

"예쁘다. 귀엽다. 사랑스럽다."

국어책 읽기로 받아준 건데도 소녀가 확 달아오른다. 허둥지둥 막내의 몸 뒤로 숨는다.

"뭐하냐?"

"아니, 이거 생각보다 파괴력이 있어요. 힘들어."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가가서 소녀의 뒷목을 후려쳤다. 사실 이건 기절시키기에 좋은 동작은 아니다. 하지만 멋있지.

소녀는 순순히 그 타격을 받아들였다. 마력이 파고들며 순간적으로 뇌와 몸의 연결을 끊는다.

픽하고 쓰러지는 소녀를 막내가 받아들었다.

"조금만 기다려보지. 어디서 여길 지켜보고 있다면 이 틈에 나타날 테니까."

이번 층의 돌파를 위한 키워드는 아무래도 미래에서 온 소녀가 될 것이다.

그때 사냥꾼이 다른 이야기를 해왔다.

"리더, 아까 선배님을 뵈었습니다."

"선배님?"

그렇게 부를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

"그 요정 마법사? 여기에 있어?"

"미궁의 인연이란 것이 그렇게 작용 중인 모양입니다. 우리가 갈 곳에는 항상 교류가 있었던 주민들이 있기 마련이니."

옳은 말이다. 서버 하나를 싱글 플레이하듯이 단독 사용하고 있으니 온갖 인과가 우리 파티에 몰리는 모양이다.

"그 노련한 마법사가 그 양반이었군. 죽진 않았을 텐데. 뭔가 속셈이 있으려나?"

어찌 보면 100년이 다했음에도 대륙에 눌러앉은 유배자보다 위험한 것이 없다.

아무리 단단한 각오를 하고 정착했어도 결국 NPC는 NPC다.

사람으로 대한다는 생각을 할 수는 있겠으나, 정말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가까이할 수 있을까?

더스번 경은 인간이니 수명이 다해 죽었을 것이다.

그와의 무슨 연이 있긴 했겠으나 그 이후로 끈 떨어진 연이 되었을 수도 있다.

특히나 그 이후 500년은 우리 파티가 심하게도 헤집어 놓았으니.

도합 600년 묶은 유배자가 무슨 생각을 하게 되었을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좋아, 그건 내가 접선을 해보지. 그럴 기회가 있다면 말이지만."

꼬박 10여 분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다.

결국 미래에서 온 누군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소녀를 깨웠고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치를 이기려고 하면 안 되는 상황이다. 최대한 들키지 않으며 골인 지점에만 도달하면 된다.

만약 이번 층에 미래에서 누군가가 오지 않았다면 그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라는 뜻일지도 모르니까.

요정들이 중앙으로 몰려들어 생긴 공백을 최대한 활용해야겠다.

시가전, 게릴라전 같은 것이라면 또 경험이 제법 있다.

[메인 던전] 중 하나가 아주 거대한 도시의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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